제1회 노랑배 우수거짓말상 [시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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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1. 이거레알 시 – 백색소음

문학에 앞서 우리는 늘 우리가 하는 것이 정말 문학일까,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그런 고민 속에서 시작되는 문학만을 봐온 우리는 불확신과 자기불신, 그에 기인하는 체념적인 무기력에 익숙해져 있죠. 그러나 여기 그런 문학세계에서의 초월을 꿈꾸는 '시발 점'이 있습니다. '시발'과 '점'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거칠고 이따금 '균형을 잃고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자의 '생얼마냥 가식없는' 모습이죠. 이전의 문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응 아니야' 하고 단언할 수 있는 확신이 글에 서려 있습니다. 독자들은 도무지 '정신이 멍해'지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시인은 그저 언젠가는 찾아올 그들의 인정을 기다릴 뿐입니다. 인정? ㅇㅇㅈ

 

2.  불알 – 백색소음

언젠가 닭이 먼저인가 아니면 달걀이 먼저인가에 대한 질문의 누군가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돌연변이를 통한 진화를 하였을테니, 달걀이 먼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죠.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부모가 먼저일까요, 자식이 먼저일까요. 사람들은 아무래도 부모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부모중에서도 어머니 쪽에 중심이 가 있지요. 많은 작품들에서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시는 그런 그들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려고 듭니다. 사람은 정자가 먼저라고. 자궁이 아닌 고환, 즉 '불알'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많은 정자들은 '완성되지 못한' 채 사라져가죠. 마찰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만 그곳에 정자가 갈 곳은 없습니다. 즉 시는 우리가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이유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나의 형제들이 가야했던 곳을 대신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죠. 마찰이라는 수화에 속아 잠시 하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던 형제들이 절로 그리워는 시였습니다.

 

3. 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 서윤호

패러디 시로군요. 과거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며 자신의 모습을 찍어 올렸던 거장의 작품을 패러디한 시입니다. 그러나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는 법이라는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 나약한 하나의 개인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는 바로 그의 그런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음악을 문학으로 바꿈으로써 제한된 '음악'은 무엇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과연 타당한 의견이라 생각됩니다. 시인의 다음 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무언가가 아닐까요. 그의 미래가 기대되는 시였습니다.

 

4.  난 ㄱ ㅏ 끔…. – 윤별

직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패러디 시입니다. 그러나 앞선 작품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인 것 같군요. 시인은 '시를 사랑해서 가끔 소리를' 치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하고 술을 마시며 마감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고통이 같은 말처럼 느껴지는 건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과정이 고통 뿐이지만 시인은 계속해서 사랑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슬픔'은 아니니까요. 시인은 시로 인해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슬프지 않음을 강조하며 'ㅁ ㅓ 리가 ㅇ ㅏ닌…. 맘으로…..우는 ㄴ ㅐ ㄱ ㅏ 좋 ㄷ ㅏ'고 말합니다. 사랑에 한해 머리를 거쳐 계산적으로 굴면 그곳에 있는 것은 고통뿐이라는 시인의 충고가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5. 강박 – 김줄

시를 펼치면 가장 먼저 무수히 많은 쉼표들이 보입니다.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충분히 일하고 충분히 쉬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인질로 강요에 가까운 충고를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말 뿐입니다. 쉴 시간이 거의 없는 가운데, 쉼을 강요받는 우리들은 억지로 휴식을 하지만 휴식 뒤에 찾아올 밀린 업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죠. 시는 그 지점을 무수히 많은 심표들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밀크티를 먹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영화표를 집으면서도 우리는 이 짧은 휴식 뒤에 찾아올 업무에 대해 생각하죠. 결국 '휴식'마저 일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학대와 무수히 많은 쉼표들의 연속, 현대인의 모습을 적확하게 집어낸 시였습니다.

 

6. 새벽 2시에 나는 자주 죽었는가 – 별환

과거 극단주의적 선전처럼 유행했던 글귀가 생각납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시는 그 글귀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7살이 넘어 학생이 되는 순간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잃은 채 한 명의 '학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네게 닿을 수 없는 운명' 즉 '나'를 잃어버린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질 때, 우리는 거기에 부당함을 느끼죠. 그런 학교에서 멀어지는 찰나 같은 하교 이후에 담배를 피우며 '너'를 그리워하는 일탈을 하지만 실존하는 어른들이라는 '신'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의 신앙은 뿌옇게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시인은 그 때를 회상하며 시를 쓴 것처럼 보입니다.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편지보다 유언'에 가까운 시를 쓰며 아직 '나'를 그리워하는 학생들을 보기 위해 '자주 이곳을 맴돌 것이다'라는 선언합니다. 동시에 그런 시를 성인이 글틴에 올리는 것으로 행동함을 보여주는 시인의 자세가 단연 돋보였습니다.

 

7. 글스타그램적 감성 – 청울

다른 반려동물에 비해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덜 받는 이유는 현재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람은 술을 마실 때 고양이의 뇌와 비슷하게 미래와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비활성화 됩니다. 시는 그 지점에서 영감을 얻어 쓰여진 것처럼 보이는군요. '품빠이는 다음에 하지 뭐'라는 부분과 '그러니까 오늘은 / 적셔' 라는 부분에서 시인은 현재만 생각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기에 그것은 지속성이 떨어지는 찰나의 감성일 뿐이죠. 우리가 마셨던 것이 사실 물이었다는 부분에서 시인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와인을 마시자며, 지금의 행복조차 내일로 미루는 모습이 절로 안타까워지는 시였군요. 시가 SNS의 형식을 빌렸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행복한 장면만을 편집한 인생이 곧 SNS에서 개인의 모습일테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고양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냐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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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월 17 일 전

다음번엔 저도 꼭 참가하고싶네요. 진짜임.

4 개월 15 일 전

'제1회 노랑배 우수거짓말상 [시부문] ' 기획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2회도 어떤 형태로든 진행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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