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봄
목록

이제야 용기가 생겨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니, 이제야 미련이 떠나서, 진드기처럼 끈질기고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어있던 그 미련이 드디어 떠나가서, 한 자락의 추억과 한 조각의 기억을 연필로 삼아 이제야 글을 씁니다.

정말 길고 긴 세월이 흘러갔지요. 봄바람에 아련히 흩날리던 벚꽃 잎. 그 벚꽃 잎에게 빼앗겼던 내 마음을 도로 찾아오기까지 두 번의 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지막 청춘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이라는 것의 존재에 어색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에 나는 오랜만에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손을 곱게 펴고 심장 옆자리 어딘가에 있는 적당한 무게감을 지닌 그것을 조심히 꺼내듭니다. 내 작은 두 손안에 소중히 쥐어봅니다. 손 안을 꽉 채우며 폭 들어오는 것이,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서부터 찌릿찌릿 퍼져오는 것이, 이리저리 흉한 상처로 뒤덮인 것이, 마치 험한 바람 모르고 제멋대로 날개를 펼치다 툭, 떨어져버린. 첫 비행에 자그마한 두 날개가 처참히 꺾여버린, 가엾고 가엾은 어린 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옵니다. 이상하게 눈가가 시려옵니다. 아직 눈물을 덜 흘렸다는 뜻일까요.

또 다시 미련이 나를 붙들기 전에, 이 얇디얇은 용기가 툭, 끊어져버리기 전에, 그렇게 이 작고 불쌍한 것에 또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겨나기 전에. 애써 고개를 흔들며 가이없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봅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아니 사랑했을 겁니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사랑했었으니, 찬란하게 쏟아지던 4월의 햇살을, 적막이 맴돌던 점심시간의 빈 복도를, 이따금씩 들려오던 노랫소리를, 따스한 햇살과 함께 팔랑이며 날아 들어오던 작은 꽃잎을, 그 꽃잎이 앉았던 자리를,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었으니 아마도 나는 그대를 꽤나 열렬히 사랑했었을 겁니다.

언젠가 그대 내게 물어보시려나요? 그 사랑 어찌하여 사라졌느냐고. 어째서 밤하늘의 달빛처럼 아스라이 스러졌느냐고, 그때 그 감정, 그 설렘, 그 소중했던 모든 것들은 어디로 흩어졌느냐고. 만약 그대 그렇게 내게 물어보신다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손을 열어 내가 쥐고 있던 그것을, 아직 미약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잿덩이를 보여드리리다. 그걸 보신다면 아마 그대도 나를 이해해주실 테지요.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던 것이 제 열기를 이기지 못해 처참히 스러져버린 것을 보신다면 날 불쌍히 여겨주실 테지요.

아픔만 남았냐고 물어보신다면 그건 아니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잃은 것이 많지만 얻은 것도 있으니. 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죠. 그저 혼자 하는 외사랑 이었습니다. 처음이었기에 서툴렀고, 세상엔 비밀이 있노라고 믿고 있었지만 어느새 모두가 아는 사랑을 하며 나는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이리도 쉽게 하나의 유흥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쓴 편지가, 부들부들 떨리던 나의 목소리가, 온 학교를 떠돌아다니던 나의 발자국이, 그렇게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알아낸 게 많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은 없을 테지요.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듯, 흐르는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내 그대를 사랑하며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일평생을 나와 함께해온 버릇들이 한순간에 바뀌어가는 순간들에, 말 한마디로, 눈짓 한 번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기하고도 애처로운 감각들에. 나는 이 감정이 영원할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보시듯,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붉은 고동으로 온 몸을 울리던 그 마음은, 이제 그저 하나의 잿덩이가 되었을 뿐입니다.

아직 완벽히 스러지지 않았지만, 뭉개지지 않았지만, 흩날리지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갔기에 이리 펜을 듭니다. 마지막 남은 흔적마저 훌훌 털어버리려 글을 씁니다. 미련이 떠난 자리에 새로움을 채우고자, 아니 내가 잃어버렸던 나를 찾고자. 나는 서툴렀던 과거를 괜스레 꺼내봅니다. 가슴 아픈 순간들에 손위에 있던 마음이 순간 두근, 두근. 서러움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쓰라렸던 상처의 아픔을 꺼내듭니다.

무릎을 적시던 슬픔의 눈물, 바보같이 웃던 미소 속으로 썩어 들어가던 고통,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때의 봄, 텅 빈 복도에 홀로 외로이 늘어져있던 그림자 한 자락을 꺼내듭니다. 주섬주섬 하나하나 정성들여 접고선 철을 모르고 내리는 하이얀 봄눈에 곱게 쌉니다. 그리곤 그것을 조심히 들어 올려 내 공허 속 어딘가에 있을 금고에 슬며시 집어넣습니다. 내 팔이 뻗을 수 있을 만큼 길게 뻗어 깊숙이 밀어 넣습니다. 그리곤 문을 쾅 닫고, 다이얼을 돌리고, 비밀번호를 삑삑 요란하게도 누릅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어딘가에서 본 듯한 굵직한 쇠사슬을 한 아름 가져다가 칭칭 두릅니다. 주먹만 한 자물쇠를 철커덕 잠급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쇠사슬이 한 줌의 먼지가 되고, 각진 쇠금고가 닳고 달아 둥그레질 즈음이면 내 마음은 다시 어린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그것으로 두근두근 뛰어오르겠지요. 그 때까지 나는 아직 남아있는 그대의 파편들을 치우며 이 내 손안에 담긴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려 합니다. 깎아내고 깎아내다가 흉만 남은 이 돌멩이가 다시 태산 같은 바위가 될 때쯤이면 맑게 웃으며 그대에게 슬쩍 말해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시절도 있었노라고, 나 그대를 사랑하며 홀로 울고 웃고, 가슴아파하던 시절도 있었노라고. 그리 담담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 전까지 나는 이 내 초라한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려 합니다. 익숙지 못한 외지에 가서 고생하고 돌아온 이 내 마음을, 처음 맞이한 쓰라린 경험에 검댕을 묻히고 깊숙이 숨어버린 이 내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려 합니다. 시커먼 잿덩이가 다시 한 번 붉은 고동소리를 울릴 때까지, 다시 한 번 한 송이의 흩날리는 벚꽃이 나의 마음을 앗아갈 그 때까지, 어린 새가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오를 때까지. 그대를 잊어내려 합니다. 아뇨, 난 그대를 잊었다 말하렵니다. 함께하던 설렘이 스러졌듯, 그대 향한 내 마음도 과거의 추억으로 흘러갔으니.

 

목록

첫번째 댓글을 올려주세요!


7 개월 9 일 전
안녕하세요, 29251314님. 반갑습니다. 오랫동안 가슴 아팠던 소중한 사랑 이야기를 용기 내어 꺼내놓으셨네요. 아름다운 말과 글귀에서 상대에 대해 아직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쓰는 동안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봄과 벚꽃 그리고 사랑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준 점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전체가 바람에 날아오른 벚꽃잎처럼 계속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벚꽃잎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시절의 평안함부터 시들어 혹은 바람에 날려 멀리 떠올랐다가 가끔은 보이기 힘든 속살을 드러내고 어딘가에 내려앉는 과정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랑살랑한 바람을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비유와 수식이 다소 많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Read more »
wpDiscu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