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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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의사

반듯하지만 잔머리로 헝클어진 올림머리, 하얀 의사 가운과 대조되는 빨간 렌즈, 190이 넘는 장신……

“와, ‘죽음의 천사’ 님, 정말…… 뭐랄까…… 겉은 냉혈한이지만 속은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상처투성이 의사 같아요! 뭘 해도 어울리시니, 역시 코스프레의 완성은 얼굴이군요.”

나는 진달래처럼 어여쁜 사진사 아가씨의 손등에 키스한다. 나는 코스프레계의 남신으로 불리는 ‘죽음의 천사’. 첫 창작 코스프레를 촬영하기 위해 동네 병원에 왔다.

 

좋은 인물 사진이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아우라를 느끼게 해야 한다.

나는 의대 출신의 유능한 의사에 빙의한다.

나는 아픈 과거가 있다. 초짜 시절, 자살기도를 한 환자가 죽었다. 뭐가 뭔지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환자가 죽은 것이다! 그는 죄책감의 형상을 한 유령으로 밤마다 나의 침대를 찾아온다……. 그 뒤로 나는 패쇄적이고 차가워졌다. 그리고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갑자기 큰 앰뷸런스 소리가 났다. 한 여자가 들것에 실린 채 응급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자살기도를 한 걸까? 손에 피가 흥건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웬 여자가 다른 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말한다. 나는 이상한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의사예요. 제 천명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나는 응급실로 뛰어갔다. 역시나 자살기도를 한 환자이다. 일단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니 신속하게 뭐라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심장재세동기를 환자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아, 전원이 꺼져있다. 지혈을 해야 하니 상처에 붕대를 감는다. 환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내 가슴도 고통에 울부짖는다. 최후의 수단……MSY를 투여할 수밖에!

“간호사! MSY(M뭐든지 S살리는 Y약)를 가져와요! 지금 당장!”

간호사와 실습생들은 술렁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나는 선반에 있던 주사기를 꽂는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MSY일 것이다. 일단 찌르자. 용액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투여한다. 간호사가 끼어들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위대한 의사니까! 나만이 해낼 수 있다!

 

자살이라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불행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의 민낯을, 여린 당신은 부정하고 싶었겠지.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죽지는 말아줘.

환자가 점점 의식을 잃어간다! 안 돼! MSY로도 역부족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우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매가 최고의 약이라고. 나는 환자의 뺨을 때린다.

“눈을 떠요!(철썩) 이렇게!(철썩) 죽으면!(철썩) 흐흐흐흑……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라고요!(철썩) 당신은 세상에 유일한,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잖아요!(철썩) 아닐 것 같지만 의외로 세상은 아름다운 면이 아주 조금은 있기도 해요!(철썩)”

감동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아연실색한 간호사가 어딘가로 뛰어간다.

 

“당신 뭐야! 우리 병원 의사가 아닌 것 같은데? 끌어내!”

의사들이 나를 억지로 일으킨다. 이제야 환자를 보러온 주제에! 안 돼!……

그때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상체를 일으켰다. 응급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볼에 핏방울이 맺힌 그녀가 나를 안는다.

“흐흑! 고마워요, 선생님. 나 사실 죽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의 영혼이 다시 세상에 발을 디뎠으니. 나는 경이로운 존재의 손등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천사의 날갯짓처럼 유유히 빠져나간다.

집에 가자. 이런 날에는 잠만큼 좋은 게 없지. 나는 집에 도착해 편안한 잠이 든다. 오늘의 꿈자리는 부디 평안하길.

 

잠에서 깼다. 밤 열한 시, 기분이 이상하다. 낮에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 거 아니겠지. ……착잡한 마음에 TV를 킨다.

“속보입니다. 오늘 낮 수원의 병원에서 의사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남성이 환자에게 소독용 포르말린을 치사량 투여하고 폭행, 도주했습니다. 환자는 충격으로 깨어났지만, 15분 뒤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남성의 행방을 뒤쫓고 있습니다.”

포르말린이라니! 세상에 미친놈들이 많군.

……그 순간 TV에 나오는 병원 CCTV의 남자의 빨간 눈과 마주친다. 거울에 비친 의사 가운에 묻은 빨간 피가 눈에 들어온다. 핏자국이 묻은 내 얼굴도. 오늘 낮에 나는 뭘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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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월 18 일 전
* 안녕하세요. 최이수안님, 반갑습니다.^^ 작품 잘 읽었습니다. 제가 오래된(ㅠㅠ) 사람이라 코스프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본 애니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꾸미고 사진을 찍거나 작은 파티를 하는 분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의 천사' 코스프레를 한 남성의 이야기 같네요. 겉 뿐 아니라 내면까지 캐릭터화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이 작품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간략하게 말씀드릴게요. 우선 개연성에 관한 이야기에요. 작품 초반에 분명 동네 병원에서 촬영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동네 병원에서 '죽음의 천사' 복장을 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요? 또한 동네 병원에 응급실이 있다는 것도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게다가 앰뷸런스로 자살을 시도한 환자가 실려왔는데 응급실에 '죽음의 천사'로 빙의한…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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