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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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공원 한가운데에 서있습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한 공원 한가운데에 아무 말 없이 서있을 뿐입니다. 사위는 잠잠합니다. 주변의 소리라곤 간헐적으로 짹짹거리는 참새와 찌익거리는 직박구리 소리뿐입니다.

남자에게 소리란 없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그저 공원 한가운데에, 목표도 방향도 없이 가만히 서있을 뿐입니다. 여자는 궁금합니다. 그녀는 호기심을 느끼고 서있는 남자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긴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이십대 후반쯤 되는 젊은 사람인 건 알 수 있습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진기로 찍힌 듯, 공원 한가운데 정지해있습니다. 여자는 가까이 다가갑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남자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여자가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잔디가 사그락 소리를 냅니다. 다가가보니 남자는 키가 큽니다. 여자가 코앞까지 갔는데도 남자는 꼼짝도 않고 서있습니다. 여자 쪽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 앞에 서서 그를 응시합니다. 남자는 너무나 이상하게도 죽은 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한 치의 미동도 없습니다. 여자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자는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밀랍인형 앞에 서있습니다. 여자는, 이번에도 속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기분이 안 좋습니다.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린 걸까요? 누가 스마트폰을 빼앗기라도 한 걸까요?

아이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습니다. 화난 얼굴로, 우울한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아이는 울지 않습니다. 한결 같은 우울한 표정 그대로입니다. 벤치는 차갑고 딱딱합니다. 아이는 엉덩이가 아프지도 않은지 오랜 시간 앉아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들어 코를 파기도 하고 머리를 긁거나 눈을 비비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보입니다. 아이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때문일까요. 아이는 먼 곳을 바라봅니다. 공원 나무와 나무 사이, 지평선 너머 해가 빛나는 곳을 아이는 묵묵히 바라봅니다. 공원에는 기린과 사자가 돌아다닙니다. 코끼리도 있고 코뿔소도 있습니다. 수리부엉이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나무늘보가 나무를 타고 느릿느릿 이동합니다. 돌고래들이 물을 뿜으며 공원 분수에서 시원하게 수영을 합니다. 오리들이 꽥꽥거리며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있군요. 저기 반달가슴곰이 괴로운 얼굴로 쑥과 마늘을 씹어 먹고, 펭귄들이 물고기를 입에 물고 구름 위를 날아다녀요. 카르카르돈토사우르스가 쿵쿵대며 초식공룡을 잡아먹고 벨로키랍토르가 인디언들을 부려먹고 있네요. 그때, 하늘에서 UFO가 내려오고 척척 조립된 변신합체로봇이 나타나요! 그리고는 노아와 함께 제사를 드리고, 다니엘을 뒤따라 사자 굴에 들어가네요. 어느덧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해 에덴의 불칼을 들고 홍수를 가릅니다! 요셉과 형제들은 서로 껴안고 우느라 정신이 없어요! 베드로는 닭의 목을 꺾어 삼계탕을 해먹는군요! 언젠가 다같이 삼계탕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참 맛있었지요…… A, B, C, D 알파벳을 외워야 해요!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가야죠! 이런이런, 장난감을 사 달라 조르면 안 되잖아요. 조심해요, 저기 커다란 회초리가 날아와요!

 

개는 공을 굴립니다. 작은 소나무 그늘에서 솔방울만한 공을 굴립니다. 한참을 굴리다 싫증이 났는지 코를 흥흥대며 자리에 앉습니다. 햇볕에 살이 탈 정도로 날은 따뜻합니다. 개는 벤치에 앉아있는 아이를 슬쩍 쳐다보고는,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에게 친근감을 표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오랫동안 앉아있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무언의 신호를 보낸 것일까요. 몸도 따뜻하고 나른해진 개는 아이 옆에 드러눕습니다. 까만 눈을 깜박이고는 이내 잠이 듭니다. 아이는 누워있는 개를 가만히 응시하며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맞습니다.

 

여자는 오래전부터 기다렸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모자를, 억겁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여자는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는 천천히 밀랍인형을 살펴봅니다. 이 밀랍인형이 정말 밀랍인형인지, 한때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여자는 땀을 흘려가며 밀랍인형의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훑어봅니다. 여자 앞에 서있는 인형은 인형이라 하기에 애매하고 남자라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여자는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이 밀랍인형은 여자가 생각하는 남자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오똑한 코, 동그란 눈, 넓은 이마…… 여자는 이 인형이 남자와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여자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밀랍인형이 남자와 닮았다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자는 착각이어도 상관없다는 듯 인형 앞에 서서 몇 분이고 인형을 바라봅니다. 여자는 이 인형이 자기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너무 기다리고 기다리다 뼈가 으스러져 가루가 될 때까지 기다리던 그 남자가 아닐까 상상합니다. 인형은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체처럼 가만히 서있습니다.

 

아이는 개를 천천히 쓰다듬습니다. 햇볕에 노릇노릇 익은 털이 손끝 사이로 물결 탑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들은 듯, 개가 깜짝 놀라 일어섭니다. 저 멀리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립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입니다. 낡은 방문을 열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개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갑니다. 아이도 개를 따라 달려갑니다. 여자의 신음소리도 점점 커져갑니다. 가까이 보니 낯설지 않은 사람 둘이 서있습니다. 한 명은 울고 있는 여자고 한 명은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쳐다보는 남자입니다. 아이는 그 둘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하늘만 응시한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있습니다.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손을 잡고 흐느낍니다. 아이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는 뒤따라온 아이 옆에 얌전히 앉아,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처럼 눈을 끔벅이고 있습니다.

 

여자는 소리칩니다. 남자에게 소리칩니다. 어서 일어나라고, 눈을 뜨라고 외치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남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남자가 어떤 세계에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몸을 부여잡고 흔들어댑니다. 남자는 힘없는 꼭두각시처럼 덜거덕거릴 뿐입니다.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는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이 여자와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안고 있느라 아이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아이는 여자가 자신을 돌아보든 보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손을 더 꽉 잡습니다. 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멀리서 남자와 여자와 아이를 바라봅니다. 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는 허공에 대고 무의미한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를 누가 들을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마침내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나 이미 여자와 아이는 떠나고 없습니다. 남자가 있는 세상에는 남자가 떠난 후 몇 년이 지나 늙어 죽은 개 한 마리만 있을 뿐입니다. 남자가 떠나온 이곳에는 여자도 아이도 없습니다.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말없이 개를 쓰다듬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는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수도 더 먼 곳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여자와 아이는 아직도 남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기다리다 못해 남자도 갈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떠난 것일지 모릅니다. 남자는 말없이 앉아있다, 해가 지고 사위가 조용해지자 슬그머니 일어섭니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울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남자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갈지, 여자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걸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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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월 25 일 전
* "언젠가 다같이 삼계탕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참 맛있었지요…… " – "언젠가 다 같이 삼계탕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그날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아주 맛있는 삼계탕을 먹던 저녁이었습니다." : 쓰신대로라면 '쓰는 나'의 개입으로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 "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는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수도 더 먼 곳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 이 두 개의 문장은 없는 것이 작품의 분위기가 더 어울릴 것 같아요. 남자가 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 작품 자체가 그런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문체와 내용이 잘 어울려서 더할…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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