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도달하는 방법 – [고요한 밤의 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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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도서관에 갔을 때, 깔끔한 표지에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광고문구가 적힌 책을 발견했다. 다른 한국소설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유독 그 책에는 호감이 갔다. 제목은 <고요한 밤의 눈>이었고 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박주영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번 찜해둔 책은 목록에 올려놨다 나중에라도 꼭 읽는 편인데, 그때도 다른 책 읽느라 바빠 잠시 미뤄뒀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일념은 없었다.

 

그러다 몇 달 뒤, 혼불문학상 수상작 독후감 대회가 열려 나는 주저 없이 <고요한 밤의 눈>을 골랐다. 내가 이 소설을 고른 건 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밤의 눈이라,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고요한 밤'의 눈이라는 건지, 중의적인 제목이지만 재미있었다. 게다가 스파이 소설이라니. 나는 SF 환상소설이나 첩보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집어든 건 마피아가 등장하고 총을 쏴대는 진부한 첩보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읽지 않던 장르라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아서 신선했다.

 

책은 금방 읽혔다. 상당히 짧은 소설이라 꾸준히 읽어 두 시간 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의 기억을 잃고 갈 곳 없이 방황하는 X, 쌍둥이 언니가 실종되고 혼자 상담실을 운영하는 D, X를 감시하며 승진을 바라는 Y, 부하들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B, 요원들을 총괄하는 헌책방 노인,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는 Z. 주요 등장인물은 이렇게 여섯 명이다. 특이한 것은 이 등장인물들이 일반적인 1, 3인칭 시점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가는 매번 한 명씩 돌아가면서 화자가 바뀌는 소설 기법을 차용했는데, 이 기법은 오래전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써온 실험 기법이다. 대부분의 한국소설은 이 형식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박주영 작가는 1인칭 화자를 번갈아 서술하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은 사실상 모두 주인공이다. 크고 작은 비중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행복이다. 매 장에 ‘Happy’가 붙는 것도 인물들의 목표이자 종착지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아 헤맬까.

 

소설은 가장 비중이 큰 X와 Y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X는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깨어난 스파이다. 그는 15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려, 첩보요원도 회사원 직책도, 모든 것이 낯설고 답답하기만 하다. 소설 초반의 X는 현실과 꿈을 혼동하는,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또 다른 스파이 Y를 만나고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Y는 X를 감시하라고 보내진 요원이다. 둘은 요원으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애써 거짓된 행동을 하지만, 서로 사랑에 빠진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지 갈등하다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몇몇 평론가는 이런 점을 짚어 실존의 문제, 실존문학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행복이 있는 세상이다.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이자 기회는 ‘패자의 서’라는 책을 통해 발현된다.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작가는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열린 상태로 끝낸다. 이야기는 열려있어 행복을 향한 길을 보여주고, 효과적으로 핵심 주제를 전달하며, 가능성과 희망을 폭넓게 제시한다. 첫 장이 에필로그, 마지막 장이 프롤로그인 것도 소설이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구하는 방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시간도 기억도 아닌 사랑만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장마다 New Memory, New World, New Year는 적혀있어도 love는 없다. 진정한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가 직접 알아낼 수 있도록 은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법으로 작가는 더욱 효율적으로 서사를 구체화한다. D는 상담실을 찾아온 X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이 나라, 이 지구, 그리고 결국은 나의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가벼운 첩보물이 아니다. 현대 사회 체제를 진지하게 비판하고,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행복이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천명하는 잔잔한 드라마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권력도 계급도 아닌, 사랑과 행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갈까.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은 돈의 행복, 권력의 행복 등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는 행복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단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자연과 더불어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고요한 밤의 눈>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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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월 7 일 전
모로 님 안녕하세요. 1년 만에 모습을 보인 글이라고 하여 더욱 즐겁게 글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내용을 잘 요약했다고 생각했어요. '줄거리'요약에서부터 모로 님의 관점이 적용되기 때문에 줄거리를 어떻게 요약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은 사실 글쓴이가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글쓰기에도 참고점이 되었으면 해요. 몇 가지 의견을 드리려고 해요. 먼저 “진부한 첩보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는 구절-구체적으로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해졌어요. 두 어 문장을 더하여 상술해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신선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에 대한 모로 님의 의견이 들어가게 되겠지요. 또 하나, '시점'에 관해서입니다. 매번 화자가 바뀐다는 것은 1인칭 화자가 각각 달라진다는 의미일까요? 이러한 기법을…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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