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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원히 살 거야”
“왜?”
“사는 게 즐겁거든”

여전히 차가운 연초의 바람소리가 잠을 깨웠다. 살짝 열려있는 문 사이로 어머니가 켜놓고 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조금 흥얼거린다. 잠은 더 오지 않는다. 대학에 떨어진, 한국의 스무 살이 연초에 할 수 있는 일이란 학교 동창들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대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오늘은 간밤에 꾼 꿈이 계속 생각난다. 대화는 세 마디에서 끊겼고 그 뒤로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학창 시절에 친구와 나눴을 대화일 것이라.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이름도 성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식빵에 크림치즈를 발라서 목으로 넘긴 후 갓 데운 우유를 마신다. 머릿속으론 여전히 꿈속의 상대를 더듬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기장판을 올린 소파 위에 누워 티브이를 본다. 창밖에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인가 생각나 앨범을 뒤지기 시작하다 중학교 졸업 앨범에서 멈췄다. B 그의 이름이었다. 중학교 3학년의 급우로 생각해보면 당시 퍽 친해서 항상 붙어 다녔었다. 꿈속에서의 대화 상대도 아마 B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를 마치고 B와 늘 농구를 하곤 했었다. 한껏 땀을 빼고 나면 오후 네시가 좀 넘어 있었다. 여름의 오후 네시 반쯤, 태양은 잘 익은 오렌지 색깔의 빛을 내며 반투명한, 조금은 짖어지는 구름을 넘어 두 개의 산등성이와 그 사이 아파트들 뒤로 잔상을 남기고 사라져 간다.
그때쯤 우리 둘은 오렌지빛이 약간 남은 초록색의 학교 농구 코트 위에 누워서 그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날도 좋고 싫은 선생님들을 이야기하고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거나 누구랑 누가 헤어졌다든지 따위의 이야기를 하다가 진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꿈, 나는 그때의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B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꿈의 대화의 일부이다.

“난 영원히 살 거야”
“왜?”
“사는 게 즐겁거든, 우리 집이 많이 힘든 거는 너도 잘 알지?”
“응”
“아침에 내리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거 같은 빗속에서 슬퍼해본 적 있어? 너무 싫어서 집을 뛰쳐나가 본 적은?”
“아니, 근데 그렇게 힘들면서 영원히 살고 싶어?”
“그렇게 힘들어도 난 하루 하루가 즐겁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면 즐겁고 학교 와서도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는것도 즐거워 또 이렇게 너랑 농구도 하면 다시금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거든.”
“참 낙관적이구나..?”
“내 정원이 얼마나 자랐는지, 내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지금은 가정환경 때문에, 내 상황 때문에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야. 나는 그냥 숨을 쉬고 싶어 그리고 살고 싶어 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디부터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볼 거야.”

당시 B가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이 아이는 성공할 것이라고 꿈을 꼭 이룰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작은 동경을 하며 살며시 보랏빛을 내는 하늘을 지나왔었다.

B는 지금 무얼 하며 지낼까 궁금하여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애석하게 내게는 B의 연락처가 없었다.
싸락눈은 함박눈이 되어 세상을 하얗게 페인트칠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들은 B의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 년 전에 죽었다. 고등학교에 와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가정에서도 간간히 폭력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당시 살던 13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이다.
나는 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그들은 내가 그의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내 기억에서 그는 완전히 사라졌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올 만큼 술을 몸에 채우고 나는 이제는 어둠이 깔린 하늘 아래 흰색 눈을 밟아가며 그들과 헤어졌다.

홀딱 벗은 채 눈을 맞은 나무도 조금 있으면 봄을 맞이한다. 우리가 취해 있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언젠간 나도 녹색의 산사태 아래에 너를 찾겠지, 언젠가는 그렇겠지. 나는 밀려오는 술기운에 버티지 못하고 푸른빛 가로등 아래 눈을 이부자리 삼아 누웠다. 너는 꿈을 이뤘다.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너를 아파트에서 밀어버린 사회가 무엇인가 아니꼬워 꽉 찬 보름달 위에 침을 뱉었다. 돌을 던지고 욕을 했다.
너는 그때 말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에 봄날이 올 거라고 믿잖아’ 라고.

하늘 위엔 샴페인색의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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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 18 시 전
안녕하세요, 동경주 님. 한편의 완성도 있는 꽁트를 읽은 느낌이네요. 초반부의 경우 인물의 산뜻함이 명확하게 그려지고, 전달하려는 바도 분명하며 문장 또한 안정감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거야, 라고 말하던 B가 투신자살을 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나와 B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거리감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마지막 부분이 다소 희망과 그 희망의 좌절에 대한 상투적인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미 죽은 B라는 인물의 사연을 마지막 부분에 피상적으로 축약한 것도 좋지 않은 접근법이에요. 술에 취한 '나'의 감상적으로 읇조리는 듯한 문장들도요. 소설은 감상성과 피상성을 배제한 채 "영원히 살 거야"라고 말했던 인물이 왜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끈질기게 질문하고 탐문하며 생각해보는 방식에 가깝다고 할…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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