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게
목록

여자를 만난 가을의 끝자락을 기억한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시끄러운 술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일찍 자리를 떴을 것이다. 늦은 저녁에 시작된 동창 모임이었기에. 한창 분위기가 오르던 자리 중간에 나왔음에도 주위가 어두웠다. 얄팍한 의문들과 걸었다. 동창회란 결국 같은 학교를 나왔다 뿐이지 모종의 교류도 애정도 없는 사이의 만남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기어이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집으로 가는 골목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번쩍이는 전광판이나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요한 길이었다. 의지할 만한 것은 오직 가로등뿐이었단 얘기다. 노란 빛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낙엽들이 가로등 불빛에 한 번 더 색을 입은 채 발 아래서 밟혀왔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었다. 옅은 갈색에서 태운 설탕 냄새가 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샀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람에 스민 냄새들 중에 홀로 타던 것이 있었다.

이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인가 노랗게 타오르는 가로등 불빛의 냄새인가 혹은 짙게 노을 타는 색을 한 단풍의 냄새인가.

_

드물게 붉은 벽돌로 벽을 쌓은 모양이 눈에 들었다. 녹이고자 한 것이 찬 몸이었는지 혹은 지친 마음이었는지. 시곗바늘이 막 열 시를 넘어가고 있으니 웬만한 가게는 거의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머리 위엣가에서 죽목 여러 마디가 단조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넓은 나무 탁자 위가 온통 흙인지 점토일지 모를 흰 것 투성이였다. 끊어다 말려놓은 것 마냥 생생하다. 여자는 허리께에 거친 천으로 된 검은 앞치마를 둘렀다. 대충 틀어 묶은 갈색 머리가 아마 어깨에 채 닿지 않았던 것 같다. 마디가 툭툭 돋아 유독 곧고 긴 여자의 손가락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만지는 흙이 남기는 자욱만큼 손이 희다. 아, 마주친 눈동자가 가을보다 더 갈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생애 첫 가을이었다.

_

여자의 이름이 제희라는 것을 얼마 안 가 알게 되었다. 재가 아니라 제인 게 좋았다. 어쩐지 더 신경 써서 발음하게 되었다. 이름이 혀끝에서 더 오래 머문다는 게 좋았다.

_

제희와 계절을 함께 보냈다. 도예를 전공했다고 했다. 가게는 친언니가 여행을 가서 그 동안 맡아주는 거였다. 빵이나 그릇이나 만들어 굽는 건 똑같잖아. 농담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의 그 건조하고 무표정한 얼굴이길래 받아치려다 말았다. 제희는 잘 웃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랬다는 거다.

명색이 빵집인데 종류라고는 달랑 세 개 뿐이었다.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장사는 되나 싶었으나 나름 입소문이 났는지 남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많이 구워내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하루는 물었다. 이렇게 해서 남는 게 있어?

언니가 돈 벌자고 가게를 맡겼으면 내가 아니라 도운이었겠지.
걔는 사람 잘 따라. 재주도 좋아.
강아지 키워?
아니, 동생.

제희는 도운 얘기를 할 때마다 묘하게 즐거운 얼굴을 했다. 입가에 희미하게 걸쳐진 웃음이 좋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부엌 안쪽에서 빵을 굽는 시간을 제외하고 제희는 종일 흙을 만졌다. 주말엔 거의 내가 카운터를 보다시피 했다. 들어섰다 보이는 것에 길을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당황해서 핸드폰을 꺼내드는 손님도 더러 있었다. 그 행동들에 익숙하게 대응하게 될 무렵 다음 계절이었다.

_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 끝에서 만났으니 겨울이 빨리 오는 건 당연한 거였는데 괜히 어색해했다. 겨울의 제희는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본디 겨울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제희는 싫지 않다고 했다. 적어도 땀 흘리는 일은 덜 있지 않겠냐며. 생각해보니 마냥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겨울을 덜 싫어하게 되었다.

제희가 도예실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희 대신 도운이 가게를 맡게 되었다. 잘 할 거야. 제희가 말했다. 제게 하는 말 같아서 조금 웃었다. 내내 흙반죽을 만지던 손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상해 있었다. 접때 만난 도운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났다. 제희와 비슷한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빨갛던 귀나 대화가 끊기면 목덜미를 만지는 습관이나 희고 거칠던 손이. 아, 거친 손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제희를 사랑함을 알았다.

두 번째 계절엔 제희의 집에서 만났다. 날이 점점 추워지자 주말에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 애에게선 여전히 흙냄새가 났다.

주말에 하는 일이라곤 별 게 없었다. 침대로 쏟아지는 햇빛을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정오 쯤 일어나 차를 마셨다. 제희는 카페인이 몸에 받지 않는다고 했다. 야작하던 때는 잘만 받았는데 요즘은 손을 떨어. 그랬다. 차는 커피보다 덜 하다고 했다. 제희는 꼭 찻잎을 두 세 번씩 우려 마셨다. 끝엔 색이 거의 없다시피 연한 차를 마셨는데 그러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_

러시아에선 홍차에 잼을 타서 먹는대. 제희가 그런 말을 한 날이 있었다. 그 다음 주말에 검은 비닐봉투 가득 귤을 사갔다. 웬 귤이야. 현관문에 들어서며 봉투를 넘겨주자 안을 확인해본 제희가 물었다. 제희는 가끔 질문을 물음표 없이 했다.

귤청을 만들거야.
갑자기?

눈썹 한 쪽을 찡그리고 묻길래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백설탕 봉투를 흔들었더니 제희가 잠시 어이없어 하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하얀 민들레 꽃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재희가 말했다. 언니는 가끔 진짜 이상해.

청을 담그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귤 껍질을 까느라 제희나 나나 손톱 밑에 주황빛으로 물이 들었다. 유리병을 깨끗이 소독해서 담고 뚜껑을 꽉 닫은 걸 넣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잼이 아니잖아. 귤피차를 해주겠다며 건조기에 껍질을 하나씩 놓아두던 제희가 문득 덤덤한 말투로 그랬다. 멍청하니 말뜻을 깨닫고 있는데 또 그랬다.

그럼 러시아에 가자.

그게 고백처럼 들렸다. 문이 가린 옆모습에서 귀가 붉었다. 가보지도 않은 러시아가 제일 아름다운 곳일 것만 같았다. 응. 하고 대답했다. 정말 가게 될 날이 있을까.

그런 날들이 켜켜이 쌓여갈 즈음엔 밤에 소파에 앉아 영화를 한 편씩 봤다. 거의 같은 거였다. 문득 함께 본 영화는 많은데 기억할 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나중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갑자기.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제희는 늘 같은 대목에서 같은 대사를 따라 읊었다. 영화가 끝나갈 지점이었으니 몇 시간은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지는 목소리가 겨우 내뱉은 말처럼 들렸었다. 그 애가 일본어를 발음하는 건 유독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제희는 말끝을 흐릿하게 늘이곤 했는데 그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좋아요. 라는 말을 하는 건 제희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_

제희는 노래를 들었다. 퀸과 빌리 에이리시와 이소라를 듣는 제희를 나는 가끔 종잡을 수 없었다. 제희의 거실 벽 한 면에 벽에 걸게 되어 있는 씨디 플레이어가 있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씨디를 어지러울 때까지 하염없이 보고 있곤 했다. 나는 건조한 말투와 다르게 축축한 제희의 목소리가 좋았다. 불을 끄고 어깨를 붙이고 가만히 앉아있을 때면 제희는 가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를 하는 제희는 노래를 듣는 제희보다 더 좋아서 나는 노래를 꺼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제희는 나를 사랑하는가?

_

집 앞 골목 가로등 불빛이 유독 노랗게 따뜻하던 것을 생각한다. 갈색으로 그을린 빵들을 생각한다. 햇빛 아래서 본 여자의 눈동자가 가득 연갈색이던 것을. 생각한다. 회색에 가깝게 물든 검은 앞치마와 마른 흙의 냄새를.

*

요즘 소주 반 병을 못 마셔. 목까지 붉어진 제희가 중얼거렸다. 평소보다 눈 감았다 뜨는 게 늦다. 원래는 화가가 하고 싶었어. 별로 잘 하진 못 했지만. 유화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 기름에 개어 쓴다는 게… 특이하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이 좋았어. 그래서 도공이 된 걸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하루에 깨진 그릇을 몇 개씩이나 보는 줄 아니. 그 그릇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흙을 말리고, 반죽하고 그걸 끊임없이 만져서, 다듬고 깎고, 빚고, 그림을 새기고 또 말리고 유약을 바르고.  그거 알아? 가마에서 구워내는 데만 사십 시간이 넘어. 그 곳에 있으면 숨이 막혀. 이런 여름엔 특히 지옥 같아. 내가 선택한 길인 걸 알아. 누굴 탓하자는 게 아니야. 하지만 언니 그러니까 나는 그 갈라지고 터진 그릇들을 보면서 매일.
제희가 말을 쏟아내며 숨을 토했다. 말해야 했다.

네 몸에서 흙냄새가 나는 게 좋아.

제희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말들은 많다. 네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이라서 좋아. 네가 잘 웃지 않아서 좋아. 네 손의 자잘한 상처들이 좋아.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보는 네가 좋아. 네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 물기 있는 네 목소리가 좋아. 낭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네가 책들 사이에 끼워 놓은 마른 가을 이파리들이 좋아. 그릇을 만드는 네가 좋아. 네가 모든 순간을 쏟아낸 흙을 불 속에 집어넣는 장면을 상상해. 네가 그 일을 증오하면서 사랑하는 것을. 갈라진 탓에 바닥에 깨어진 너의 파편들을 내가 대신 사랑해.

하지만 사랑은 너무 낡고 진부하다. 나는 제희에게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제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다. 시선이 곧다.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들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을 주어 부르게 되는 이름이다. 제희야.

언니.
그래, 제희야.
여름이 너무 빨리 왔어.
그러니.
러시아는 여기보다 덜 더울까.

여름궁전에 가보고 싶었어. 언니는 여름이 잘 어울리거든. 문득 제희의 머리가 어느새 어깨까지 닿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희의 붉은 귀. 목. 손가락 끝. 갈색 눈동자. 마침내 가을이 까마득하다. 제희에게선 여전히 흙냄새가 났다.

아, 우리는 세 번째 계절에 있다.

목록

첫번째 댓글을 올려주세요!


4 일 22 시 전
안녕하세요. 겨울의 질감, 제희와 나 사이에 나눠지는 감정의 교환이 시적이고도 서정적인 필치로 어우러지는 소설이에요. 귤청을 만드는 장면, 또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잔잔하게 마음을 흔들어요. 흙 냄새가 나는 제희, 그리고 제희를 사랑하는 나의 감정을 신파적이지 않게 형상화했다는 생각, 독립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단위의 심상적 이미지들 또한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희라는 인물은 잘 그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뚜렷한 사건이 없어 이야기를 진행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운이라는 인물도 불필요해 보여요. 이미지나 제희와의 에피소드가 아닌, 생각이나 관념을 표현하는 부분들(예컨대 소설의 도입)의 문체가 장식적이고 지나치게 옛스러운 듯해서 이러한 부분도 아쉬웠습니다. 좋은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명확하니 장점과 단점을 인지한 이후 장점들을 최대한… Read more »
wpDiscu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