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씁쓸한 이별 노래 –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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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까.

1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가족의 사랑만 듬뿍 받아온, 타인에게 사랑을 많이 줘본 적 없는 나에게 박소란 시인의 사랑은 어렵고 난해하기만 하다.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9p)고 원망 담긴 시선을 보내면서 때로는 “경아, 너 혹시 듣고 있니? 나 지금 촉촉이 젖었는데 와서 좀 빨아줄래?”(55p) 하며 답장을 보내고 “거기,/거기 잘 있습니까”(77p)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 물론 저마다의 시가 가진 속뜻은 매우 다르면서 똑같고 멀지만 가깝다. 이 시인이 말하려는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 절대적으로 불가해한 타자의 마음? 이미 떠났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그리운 사람? 사랑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고, 경우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었다가 전체적이고 포용적인 것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박소란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 실린 시들은 모두 한 주제로 연결되어있다. 쉰다섯 편의 시를 주조하는 표징은 칼/슬픔/아픔/흉터/병/피/젖/어머니(엄마)/살/음식/절망/체념/고독/이별/연인/자책 등인데, 이 표징들은 전부 ‘사랑’이라는 종착점에서 비롯된다. 화자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그리워하거나 찾아 헤매고, 화자의 반대편으로 누군가 떠나고 사라지고 흩어진다. 이별은 오해로 빚어지기도 한다. <너무 깊은 오해>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를 대범하고도 처절하게 그려낸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 오해의 젖을 빨고 간신히 버티는 지진한 아들과 딸.

 

우리는

자주 오해의 술잔을 기울인다 오해의 값싼 장신구를 두른 채

여관을 들락거린다 플라스틱 같은 서로의 살갗을 정신없이 핥다보면

어느 순간 슬며시 드러나는 오해의 맨얼굴

서늘한 눈빛 아아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오해했나봐 당신을

소스라친다 소스라친다고 굳게 믿는다

 

오해의 술잔은 더 아득히 기울어진다 이따금

당신은 내 빈 숟가락에

오해의 살점을 발라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봐 맛있어

 

그걸 먹고 나는 산다 살고 있다고 다만

오해할 뿐

 

오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해로써 서로를 견뎌낸다 여관의 차디찬 공기 속

불어난 오해의 젖은 심장 가운데 엉긴 피처럼 달콤해

 

아아 이런 게 아닌데

 

신음하는 새벽의 어깨 너머로

오해가 단단히 솟아오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가 한덩이 오해를 물고

골목 끝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10~11쪽

 

 

시는 첫머리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고 선언한다. 전적으로 공감 가는 대목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것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오해하며 살아간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 오해하는 형편인데 하물며 연인관계는 오죽할까.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아 이런 게 아닌데” 하고 실망한다. 어떻게 보면 불가피하고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이해, 공감은 부재해도 어느 정도의 이해와 공감은 가능하다. 화자도 말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오해로써 서로를 견뎌낸다”고. 오해하지만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는 상당히 비관적이고 비뚜름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가 한덩이 오해를 물고/골목 끝으로 유유히 사라진다’는 연으로 끝을 맺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이 단문은 적잖이 진부하고 고루한 것 같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는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화자 자신? 일부 현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시어들이 정확한 의미를 띠고 있지 않으면 독자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신음하는~ 사라진다’ 보다 적절하고 핵심적인 문장은 없었을까.

 

3부에 편재된 <푸른 밤>이라는 시는 또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이제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같은 책, 106~107쪽

 

 

변덕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언제는 오해한다면서 이제는 이해한다니, 앞뒤 맥락이 맞지 않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1부에서 3부까지 지나오는 시간 동안 변심한 것일까?

이 시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후회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에 방점이 찍혀있다. 겉으로는 그만 다 이해한다지만 화자의 심정은 회한과 죄책감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문장에서 더욱 확연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기를 포기한 화자는,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는 이해한다”고 애써 스스로를 부정한다. <푸른 밤>은 시집의 전체적인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꾸미는데 큰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인의 답답함과 비정함은 2부 <수상한 인사>에도 직설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나 자신과 타자에 대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을까. 나와 타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의 간극을 무슨 수로 메울 수 있을까. 시인은 허례허식과 위선으로 포장된 사람들을 과감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필력으로 표현한다.

 

 

안녕

반갑게 인사합니다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악수 대신 결투를 청한 걸까

보자기 대신 주먹을 내밀고 만 걸까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만 긁적이다 돌아섭니다

바보처럼

 

도처에 흘러넘치는 안녕 안녕

눈부신 인사들

평화의 감탄사들, 가까이할 수 없는

저 수많은 인사는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성찬입니까 그대

 

나는 인사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줄 안녕이 없습니다

 

  • 같은 책, 78쪽

 

 

 

무척이나 단순명료해 보이는 시다. 문제는 그 명료함에서 그치는 데에 있다. 이 시는 그저 가식적인 사람들의 속내를 비꼬는 풍자에 불과할까? 몇 번을 읽어봐도 그 이상의 깊이나 의의는 눈에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더 묵직한 주제를 다뤄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이 시집에서 가장 깔끔하고 단정하면서 얕고 단순한 시일지 모르겠다.

오해와 후회는 다른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단추 하나 잃어버렸을 뿐인데//거울 밖으로 흉측한 손들이 튀어나와/빈 몸뚱이를 사정없이 낚아챈다’ ‘생일이 언제야? 물으면/망설이곤 해요 축하한다는 말은 때로/미안하다는 말과 같아’ 등 <심장에 가까운 말>은 그만큼 양심과 의심, 진심과 거짓에 근접한 단어들을 “까닭도 없이 드리워진 죽음의 행렬”(82p)처럼 늘어놓는다.

 

박소란의 시는 이 시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유독 과일, 음식이 반복되며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시는 먹을 것, 음식에 많은 연관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음식들은 공통적으로 ‘어머니’와 전면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음식은 단순히 상징과 은유로 사용될 뿐 아니라, 화자의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다의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맡는다. 박소란 시인에게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시의 화자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어머니’가 지닌 고통과 비애의 상징을 엿볼 수 있다.

 

 

시멘트 바닥에 깨어진 감을 보았어요

어느 새벽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감나무가 기어코 떨어뜨린 감이었어요

머리를 말끔히 빗어넘긴 나무는 언제 벌써 저만치 멀어져갔고요

감은 제 텅 빈 속을 다 드러내고 부끄러운 표정마저 잃고

뜨겁게 일렁이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잠시 살길을 궁리하듯이

다리를 절며 다가온 부랑견 한 마리 힐긋거리다 힘없이 킁킁거리다

이내 진저리치며 달아났어요

같이 가, 애원하고 싶어 더 붉어진 감이었어요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가슴속 씨가 따끔거려 조금 슬픈 것도 같았어요

간밤 꿈에는 죽은 엄마가 찾아왔어요 반쯤 물러진 얼굴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어요 긴긴 잠을, 아 달다

나는 달다

원 없이 잠꼬대를 피워본 감이었어요

슬픔 같은 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이는 감 우연히 발견된 해골처럼

모두들 흠칫 손을 감추어도

단 한번 울지 않는 그런 감을 나는 보았어요

 

같은 책, 14~15쪽

 

 

‘감’의 어머니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감나무가 기어코 떨어뜨린” 감은 같이 가자고 감나무에게 애원하지만 이미 감을 떨어뜨린 감나무는 다시 감을 매달 수 없다. 화자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꿈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제야 감은 “원 없이 잠꼬대를 피워”볼 수 있다. “슬픔 같은 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슬프지만 울지 않으려는 감의 아프고 외로운 시다. 다른 시에서도 어머니는 죽은 몸으로 등장한다. <배가 고파요>는 삼계탕이라는 음식을 사용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영혼처럼 불러낸다.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 같은 책, 20~21쪽

 

 

<감>에서는 감의 이미지를 가져와 어머니를 감나무로 화자를 감으로 비유했지만 이 시는 다르다. 직접적으로 삼계탕과 어머니를 연관지어 죽음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화자는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하고 생각하면서 고기를 삼키고 또 삼키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병과 상처로 몰아넣는다. 앞서 소개한 <너무 깊은 오해>에서도 화자는 고기를 먹고 배를 채운다. 그러나 결코 배부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당신은 내 빈 숟가락에/오해의 살점을 발라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봐 맛있어/그걸 먹고 나는 산다 살고 있다고 다만/오해할 뿐’ 우리는 타인의 살을 먹고 뜯고 착취하고 오해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시인의 세계관은 부정적이며 기이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와 비슷해 그럴 듯한 현실감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참외 만두 설탕 김밥 등 음식들이 어머니와 어딘가 결여되고 결핍된 사회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그려낸다. <체념을 위하여>는 더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사망을 기록한다. “고백한다 밤낮 부레끓는 숨과 다투던 폐암 말기의 어머니/악착같이 달아 펄떡이던 몸뚱이를”

이 시에 따르면 어머니는 폐암으로 죽었다. 그리고 화자는 체념하고 또 체념한다. “희망과 야합한 적 없었다”며 “오로지 체념, 체념만을 택하였다”고. 어머니의 필연적인 타계를 앞두고 딸이 무슨 수를 쓸 수 있었을까. 마지막 단에서 화자의 결심은 더 굳건하고 처절하게 나타난다. ‘행여 우연히 한번쯤 더듬거리듯 옛날을 불러세운다 한들/절망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절망할 것이고/나는 기어이 침묵으로 순교할 것이다 다시 체념을 위하여/도망치듯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굳센 체념을’

시인은 울지 못해 <울음의 방>까지 만들지만 이곳에서도 울지 못한다.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고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거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거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몹시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 같은 책, 46~47쪽

 

 

화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다. 싸구려 자취방에 있었던 것이다. 이 방향으로 신중히 생각하면 시인의 죄와 한은 <울음의 방>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심장에 가까운 말>은 후회막심하고 비참한 속마음 모음집에 불과한 책일까. 이 시집만의 특색일 수 있지만 <우연의 완성>이라는 시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아니면 혹 너무 부정적으로 비쳐질까봐 약간의 긍정을 첨가한 것일까. ‘안녕, 난생처음/깡통을 뚫고 나온 골뱅이처럼 영원히 엔딩에 닿지 않는/한편의 영화처럼/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 이 문장은 여태 읽어온 문구 가운데 가장 섬세하게 와 닿는다. 어쩌면 사랑이란 한편의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일이지 않을까.

여전히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답은 닫혀있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열려있다. 사랑은 사람일 수도 자연일 수도 물건일 수도 사유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체도 모르고 찾아 헤매거나 끌어안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은 사랑으로 순환된다.

박소란 시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 시인조차 자신의 사랑이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들은 심장에 가까워 보이지만 때로 멀어 보이기도 하다. 병과 슬픔이 정말로 화자의 심장에, 우리의 심장에 가까운 낱말일까?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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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은실

모로 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따로 코멘트 달아두신 부분 감안하여 글을 읽어보았어요. 먼저 서두가 매우 매력적입니다. 시집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고 적절한 구절을 가져온 것이 무척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랑’이라고 이해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또 모로 님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박소란과 어떻게 다를까요. 박소란의 사랑을 정말 불가해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가령 사랑에도 매우 다양한 결이 있고 그 총체적인 합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는 것이라면 그건 일종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한 주제로 연결”된다는 것은 사실은 사랑이란 세계 곳곳에 놓인 다양한 양상으로써 여러 주제로 풀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에요. 따라서 “사랑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고~변모하기도 한다.”는…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