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볼 일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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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서 발버둥 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을까. 태어나면서 들고 왔던 이를 죽을 때까지 쓰는 이로 바꾸는 과정만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싫어했던 일들이 대개 그러했듯 언제나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구강 검진만 하러 가지만 어렸을 때는 이를 뽑으러 두세 달에 한 번은 치과에 가야 했다. 혼자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형과 함께였다. 나와 달리 형은 충치가 잘 생기는 편이었다. 내 이가 흔들리면 형 이도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이를 뽑는 겸 형의 충치 치료도 했다. 이를 뽑으러 가는 치과는 걸어서 5분이면 가는 상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약국 빼고는 꼭대기까지 병원만 있는 건물이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했는데,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실내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발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신었다. 이름이 불리면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 통유리 너머로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삼 층 건물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은 평온하게 삶을 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걷고 뛰었다. 간호사는 몇 번 입을 살핀 뒤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수 초 안에 이를 뽑았다. 어금니가 아니면 피가 많이 나거나 아픈 기억은 없다. 거즈를 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치과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이를 뽑은 뒤에 있었다. 나는 만화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집에 만화책이 꽂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집에 만화라고는 학습만화뿐이었다. 그런데 치과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화책이 서가 한 쪽에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형의 충치 치료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그동안 나는 입을 앙다물고 빠르게 만화책 책장을 넘겼다. 한 권이 끝날 때쯤이면 얄밉게도 형이 걸어 나왔다. 집에서는 만화책을 볼 수 없었기에 어머니가 계산하는 동안에도 나는 만화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가 흔들리면 이를 빼러 가는 괴로움보다도 만화책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는 영구치가 자리 잡으면서 이를 뺄 일이 없어졌다. 치과에 발길을 들이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검진도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했고, 지정된 치과에서만 진찰을 받았다. 언젠가부터는 만화책이 집 서가에 꽂혀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만화보다 다른 일이 더 재밌어졌다. 이렇게 되니 나는 그 치과 앞 건물은 자주 지나쳤지만, 치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층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가고 1층의 약국에서 약을 샀지만 3층 계단을 오른 적은 없었다. 계절이 몇 번 돌고 돌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검진하러 그 치과에 들렀다. 어릴 때 신던 실내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벽지나 가구는 바뀐 것이 없었다. 손님은 나뿐이어서 곧바로 검진에 들어갔다. 지난날에는 침대 커버에 신발이 닿아서 더러워질까 봐 신발을 벗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의사가 옆에 앉았다. 침대가 뒤로 젖혀지고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의사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이를 들추어 보았다. 치아와 금속이 맞부딪히며 똑딱거렸다. 기구를 치우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똑같은 만화책들이 낡고 바랜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간호사가 내 진료기록이 적힌 주황색 파일을 보여주었다. 여기 어렸을 때 기록도 있네, 하고 어머니가 종이를 들춰보다가 말했다. 의사가 서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렸을 때가 기억난다면서 웃어 보였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치과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같은 건물 2층 안과에서 검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상가 벽에 임대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고 그 밑에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 안쪽 엘리베이터 층 안내를 보니 그 치과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평거동이나 충무공동 혁신도시로 이사를 하였겠거니 했다. 그곳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비례해 이곳 근처의 인구는 줄어들었다. 가게들도 건물을 비우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임대 종이만 나붙었으니 나는 옮긴 것도 아니고 폐업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다른 지역으로 갔다고 했다. 영업을 그만둔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이제는 찾아가기가 힘들어졌다는 생각에 낡고 바랜 만화책들도 버리고 떠났음이 틀림없었기에 씁쓸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황색 파일들을 생각해보았다. 10년 전 한 번 오고 말았던 사람도, 이사 하루 전 처음 와서 검진했던 사람도 저마다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이사하며 주황색 파일까지도 버렸을지 궁금하다. 더는 찾아오지 않을 사람들의 기록이라 파쇄기에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도 카운터 서랍에 쌓여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주소를 찾아가는 일이 있어도 내게 익숙하던 모습은 볼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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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안녕하세요, 서윤호님. 첫 만남 반갑습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문을 닫고 이전한 치과에 대한 추억을 글로 남겨주셨네요. 충치 치료와 발치를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형과 함께했던 추억 그리고 즐거움을 주었던 만화책에 대한 기억들로 치과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분한 서술로 읽는 동안 작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만화책과 진료기록이 담긴 주황색 파일 그리고 치과 안 시설 등의 소재도 잘 활용한 것 같습니다. 공간과 사물의 상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실과 동일시 되는 지점의 감정들을 잘 표현했네요. 다만 글을 쓸 때 불확실한 명칭은 찾아보고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침대 대신 환자용 진료 의자나 진료 의자 등으로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