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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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흉한 얼굴을 가진 익살꾼, 그리고 그의 슬픈 익살이 담긴 세 장의 사진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요조와, 요조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읽었다(그 결과 이 책의 핵심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익살’조차 일본어 원어로는 조금 더 세밀하게 표현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번역의 한계.). 그러고 나서도 이 깊은 우울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두 번째 차례에, ‘첫 번째 수기’의 첫 장에서 요조의 가장 솔직한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너무 일찍 죽어야했던 이유, 어쩌면 그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변명이 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더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너무 일찍 죽어버린 천사를 기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 책의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요조 뿐이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몰입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깊게 몰입시켰고, 어느새 우울해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만드는 세 부분에 대해 세 단어로 정의하려 한다.

 

소설의 순서와는 다르게, 나를 가장 우울하게 했던 순서대로 나열하면 질문, 놀이, 그림이 된다. 첫 번째, ‘질문’은 ‘세 번째 수기’에 나온다. ‘신뢰는 죄인가요?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누구의 입에서 나와 누구를 향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요조의 경우에는 질문의 답이 이미 정해져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부터 신뢰는 죄, 무구한 신뢰심은 곧 무지함이며, 그래서 죄의 원천이 되는 것이라고 정해져 있었다(다자이 오사무가 살던 시대는 더욱이 현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요조가 약간의 원망도 섞인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정답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야 사실은 그러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더욱이 슬픈 것은 그 정답을 직면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랑했던 요시코의 추락이라는 것이다. ‘무구한 신뢰심’에서 비롯된 ‘무저항’이 요시코를 추락하게 한, 더러운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던 것이다. 그는 더더욱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왜 이게 답이냐’고 울부짖는다. 요조의 경우 이 질문의 착신자는 신이겠지만 결국 읽는 것은 독자인 우리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렇게도 적나라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두 번째 단어 ‘놀이’로 이어진다.

 

놀이는 요조와 그의 친구 호리키가 자주 하곤 했던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와 ‘반의어 맞추기 놀이’를 말한다. 이 놀이는 무척 고차원적이다. ‘죽음’은 희극, ‘삶’은 비극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가 된다.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이 대응은 요조의 음침한 성격으로 보아야지만 이해가 된다. 물론 공감은 되지 않는다(언제나 그렇듯 공감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주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죄’와 ‘벌’이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 관계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죄는 곧 벌로 이어진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건 현실의 당연한 논리이다. 하지만 못을 박듯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요조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죄라는 것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삶’, 즉 세상이 세운 잣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죄’가 되어 ‘벌’을 받아야 하는 살인이, 저 어느 나라에서는 명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죄’가 되지 않고, 당연히 ‘벌’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죄는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벌’은 모두에게서 거의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구속을 가하는 것. 이건 벌이 아니야, 라고 일컬어지는 벌은 세상에 절대 없다. 결국 벌은 절대적이고 죄는 상대적이다. 이것이 요조가 두 단어를 반의어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이 말은 죄를 짓지 않아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무서운 허용을 내포한다. 더 나아가 작가는 세상이 규정하는 ‘죄’라는 것에 대해 요조를 통해 용기 내어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둡고 우울한 일본의 암흑기를 걷다 간 작가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인간 실격자’라고 칭해야 했던 슬픈 삶에 대한 일말의 변명이었던 것이다. 작가답게 그것을 요조에 투영해 말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아준 이는 없었다.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쓸모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첫 번째 단어인 ‘질문’ 중 ‘무구한 신뢰심’과 ‘무저항’에도 대입해봤다. 위에서 말했듯 사실 요조는 무구한 신뢰심이 죄와는 반의어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죄는 자신이 인간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고, 신뢰는 순수한 것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이 곧 유의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요조는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 깨끗하고 순수한 신뢰, 요시코를 사랑했다. 그러나 결국 요시코의 추락을 목격하면서 순수한 것은 더럽혀지기 마련임을 깨달은 것이다. 즉 신뢰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임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무저항’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요조가 바라본 그 단어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기방어를 하기 위한 긴장을 하나도 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요조가 여태껏 해 온 익살꾼이라는 노릇과 솔직한 스스로를 희미하게 연결시켜, 자신이 가진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것을 말한다. 단 한번은 그러했던 것이다. 그토록 두려운 존재에게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요조 수준의, 그의 삶만큼이나 고차원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다. 알아줬다면 달라졌을까. 쓸모없는 생각을 해 본다.

 

드디어 요조는 세상이 정의하는 ‘죄’는 곧 자신의 삶임을 알게 된다. 실없고 어려운 놀이 따위가 그의 존재성인 ‘인간 실격자’, ‘폐인’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요조는 수기의 마지막에 ‘아무래도 폐인이란 단어는 희극 명사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고 웃어버린다. 세상 가장 자조적인 웃음이다. 이 정의의 이유는 더없이 간단하다. 너무나도 허무한 비극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쓸쓸한 웃음을 유발하는 인간 실격, 즉 폐인이라는 단어는 희극 명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되었던 요조의 삶은 희극이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웃었으니까. 이유가 무엇이든. 누가 웃었든.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책을 두 번째까지 읽을 때만 해도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요조의 삶을 비극 그 자체로 바라본다. 순수한 영혼이 너무나도 강직해서 결국 꺾여버린 비극적 인생. 하나의 삶을 두고 요조는 희극, 우리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그저 바라보는 거리가 다를 뿐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은 희극이 된다. 희극은 비극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큰 모순이 생긴다. 놀이를 하던 중 죽음이 ‘비’이고 삶이 ‘희’라고 말하는 호리키에게 그렇게 되면 완전히 잘못되어버린다고, 삶은 ‘비’라고 고쳐 말하며 단단히 못을 박던 모습도 어그러진다. 하지만 이 또한 의도된 것이다. 어디선가 잘못되었다, 모순이 생겨났다, 이것을 인식하게 하려던 것이다. 끝내 모순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관철하기에 이른 요조의 허탈함을 통해,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을 놀이라는 사소한 것에서 세상과 삶 전체로 확대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모순투성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 모순이 아닌 것은 이 결론밖에 없다. 얼마나 허탈한 세계의 엔딩인가.

 

마지막 단어인 ‘그림’은 일찍이 요조가 그린 도깨비 그림을 말한다. 요조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그렸다. 인간은 사실 도깨비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목격해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며 스스로도 더없이 음산하다고 말한다. 음산한 존재가 보기에도 음산한 그림이라니, 얼마나 음산한 그림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서문에 소개된 세 장의 사진으로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속으면서도 그걸 모른 채 살아가는 인간. 요조는 그러한 인간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이유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두 번째 사진에서의 웃는 모습으로 설명된다. 스스로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웃게 만들기 위해 익살꾼이 되어 갖은 노력을 했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부여잡은 마지막 지푸라기인 순수조차 무참히 꺾인 이후로, 세상에 대한 일말의 믿음마저 꺾이게 된다. 이윽고 자신이 인간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잃었다’가 아니라 ‘잃은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더 파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천사, 그래서 불행할 수밖에 없던 이를 욕보이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인 죄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진의 ‘계속 봐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어두운 표정’은 인간 실격자가 된 그의 최후를 담는다.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최후를 담는다. 그리하여 ‘인간 실격’이란, 천사가 끝까지 쫓았던 온갖 새하얀 것들이 불러온 새카만 결과를 단언하는, 요조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호칭이 되는 것이다.

 

다자이는 죽었으나 요조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이 수기의결말에 서서, 내가 나를 위로할 명분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이 요조가 되던 순간부터 그를 참 많이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끈질긴 삶이 드디어 끊어지는 그 순간에 요조의 아픈 삶까지 다 그러안았을 것이다. 이밖에는 내가 나를 위로할 방법이 없다. 이밖에는 끝내 여기에서 죽은 요조의 장례를 치룰 수 없다.

 

책의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나는 요조의 진짜 정체,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 요조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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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저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이토 준지라는 만화가가 그린 공포만화 [인간 실격]도 이번에 발간되었는데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강력 추천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선우은실

안녕하세요. foryourinsomnia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대한 감상문을 올려주셨네요. 저도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다시금 소설을 떠올려볼 수 있었어요. 이번 코멘트에서는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먼저 하게 될 것 같아요. 그것은 글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이 조금 있었고 함께 생각해본다면 좋을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는 코멘트의 끝에 붙이도록 할게요. -먼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이라는 점이 왜 몰입점이 될 수 있었을까요? 3인칭의 경우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1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삼는 경우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인 경우가 많은데 이와 다른 종류의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뜻일지요? -이 글의 키워드와 관련한 질문이라고 할 수…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