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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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했다.

⠀물론 이 말은 사랑이란 단어의 경계를 한참 낮춘 뒤에야 성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대상에 대한 숭고한 사랑도,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만한 사랑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래 사이에서 흔히, 관심 분야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함으로써 일종의 팬 문화를 양산하는 일을 '덕질'이라 말하곤 한다. 나는 항상 누군가의 팬이었고, 무언가의 '덕후'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를 딱히 문화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으로 볼 순 없을 것 같은데, 부정할 수도 없다. 나 스스로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사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내가 몇 년째 장르를 넘나들며 지속하고 있는 이 일에 고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내게 어떤 형태로 자리 잡았는지를 가볍게 풀어 보고 싶었다.

⠀처음 좋아한 사람은 배우 이현우였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영화를 보고 난 바로 그날부터 영화 속의 꼬마 조장 리해진에게서 시작한 관심은 점차 이현우라는 배우에게까지 미쳤다. 이현우가 출연한 드라마를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다이어리를 쓰는 일에 한참 몰두해 있었는데, 6학년 때의 다이어리를 보면 이현우 이야기로 한가득하다. '우리 반 최대의 관심사, 로이킴vs이현우. 당연히 이현우지!' 텍스트를 보니 잊고 지냈던 시간도 떠오른다. 2013년 6월 15일, 햇수로 칠 년째를 맞은 내 인생 덕질의 시발점이었다.

⠀중학교 일 학년이 되고 나서는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거의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B1A4나 빅뱅 같은 그룹에 관심을 두어 본 적이 없어서 그룹명이나 소속사 같은 것에 완전히 무지했었다. 소녀시대 아홉 명의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이돌 그룹의 노래도 몰랐다. 항상 드라마나 영화 OST만 듣던 내게 친구가 f(x)의<첫 사랑니>와 엑소의<으르렁>을 보내주었고, 그때까지 듣던 장르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곡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두 곡을 한참 반복재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엑소라는 그룹에 관심이 생겼다. 좀 특이한 점이라면, 나는 노래를 찾아 들으면서도 멤버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엑소의 얼굴보다 노래를 듣고 좋아하게 된 셈이다. 언제부터 노래에서 그룹 그 자체로 관심이 커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즈음은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치료가 일 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어서 매일매일 무너지던 날들이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을 찾아보면 너무 많은 시간이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들으면 정말 꿈 같은 노래들이 있다. <피터 팬>이라는 곡이 있는데, 그게 아마 두 번째로 들었던 엑소 노래였을 거다. 피터 팬을 들으면 내가 처음 엑소를 좋아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정말 불완전했다. 너무 어렸고 감당해야 할 건 너무 많았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걱정해 줘도 사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걸 안고 가야 했다. 그래서 기댈 데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를 내려놓고, 나를 줌으로써 사랑받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 퍼센트 일방적인 사랑은 돌아오리라는 기대나 착각이 없으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서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주는 사랑의 평온함을 실현할 수 있었던 대상이 엑소였는지도 모른다. 에스엠이라는 회사조차도 모르던 아이가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룹의 구성원을 외우고 그 과정에서 희열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가장 좋아했던 멤버가 탈퇴 선언을 하는 일이 있었어도 내가 엑소를 놓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내 인생에 가장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던 시간에 엑소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난 엑소가 없었으면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장난처럼 얘기하곤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절반은 진짜다. 누군가 들으면 우스운 얘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일을 약속하게 해 준 거다, 엑소가.

⠀엑소가 내 가장 힘든 시기에 녹아들어 있어서 약간은 무거운, 내 존재의 일부처럼 남았다면 엔시티라는 그룹은 정말 가벼운 계기로 좋아하게 되었다. 단순히 엑소가 소속된 SM엔터테인먼트의 차기 그룹이라는 이유로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심지어 데뷔 전이었다. 당시 루키즈라는 공개연습생 시스템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던 프리-데뷔멤버 중 한 사람의 프로필 사진만을 보고 한순간에 좋아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멤버가 내가 당시에 좋아했던 같은 반 친구와 분위기가 닮았던 것 같다. 엔시티에 대한 기억을 꼽으라면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시기를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삼 년이 닥친다는 불안감에 하루걸러 하루는 울다 잠들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체력을 기른다는 명목하에 잠깐 헬스를 다녔었는데, 집 가는 길에 항상 엔시티의<무한적아>라는 곡을 들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언제 오나 싶던 먼 미래가 지금 눈앞에’라는 가사가 너무 현실 같았는데, 솔직히는 그 당시에 엔시티를 가장 열정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온통 그 노래로 점철된 것 같다. 아직도 이 앨범의 수록곡을 들으면 약간 덜 마른 머리를 하고 빨간색 야상을 입은 채로 붕어빵을 사 들고 집에 돌아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배우 박보검도 비슷한 시기에 좋아하기 시작했다. 2015년에 방영된 <너를 기억해>라는 드라마가 그 시작이었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가 동해 말에 방영된 <응답하라1988>이후로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든다. 쓸데없는 소유욕임이 분명하다.

⠀작년부터는 장르도 넘나들어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 작년 이맘때는 영화 <메이즈러너>의 세계관과 등장인물에 빠져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귀 기울여 가며 배우들의 인터뷰를 찾아보기도 했고, 소설 본까지 전권 소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 와서 메이즈러너 시리즈 첫 편인 <킬오더>부터 한 권씩 읽었던 그때가 그저 행복했던 거 같다. 고등학교 일 학년을 마치고 이 학년을 준비하던 그 시간은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과목도 갖추어야 할 부분도 많아서 지쳤지만, 그 기억들이 있어서 나름 견딜 만한 시간으로 회상할 수 있다.

⠀작년 여름에는 <하이큐>라는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그때까지 애니메이션이란 걸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일종의 신세계였던 것 같다. 남들 다 보고 자랐다는 꿈빛 파티시엘이나 코난 따위의 애니메이션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이 주는 느낌은 실제 사람이 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 하이큐를 접하고 나서는 조금 고민도 했다. 내가 이걸 좋아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못 믿을 수도 있겠지만, 메이즈러너를 제외하고는 위에 적어 놓은 모든 대상을 좋아하는 게 아직 진행형이다. 그래서 한둘도 아닌, 일이 년도 아닌 이 ‘덕질’의 객체를 더 추가해서 좋아한다는 게 마치 이미 좋아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한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나중에 이 시간을 돌아봤을 때 그걸 좋아했던 나를 사랑할 수 있겠구나. 내가 이렇게 많은 이들을 이토록 오랜 시간 좋아하고 있는 이유가, 물론 이 배우들과 그룹들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크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을 좋아했던 그 시간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그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보냈던 시간이, 그 시간 주변에 있는 내 기억의 일부를 고스란히 담아 놓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더 놓지 못하는 기억들이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는 언제나 그 당시만의 고단함과 지친 기억들이 함께 했지만, 그 시간을 돌아보면 내가 어떤 것에 마음을 다해 열정을 쏟았다는 증거가 있어서 불완전했던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덕질’이 십 대들의 전유물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의 팬으로서 사는 걸 크게 반대하지 않으시는 엄마도 대학 가서도 그럴 거냐는 질문을 농담처럼 하신다. 그 답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시점으로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미성년의 끝자락을 보내지 않았고,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자그마치 육칠 년을 한마음으로 좋아하고 있는 지금 상황을 보면 이십 대가 아니라 삼십 때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입시라는 문턱을 앞두고 의식적으로 팬 활동을 하는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기에 어느 순간 멀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의 철없는 결론은 이렇다. 내 시간을, 내 기억을 담을 내 열정의 객체를 애써 부정하지는 말아야겠다. 나중에 내 십 대를 돌이켜 볼 때, 미래의 내가 지금의 불같은 나를 꼭 사랑해 줬으면 좋겠는데.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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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안녕하세요. 송예님.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주셨네요. 사랑했던 대상과 그 대상을 왜 사랑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까지 자세히 풀어주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의 세계관과 등장인물, 애니메이션 등 관심 있는 분야까지 확장되었네요. 관심을 가진 시간까지 포함하여 열정의 증거로 삼는 묘사들은 작자의 사고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했다‘로 시작하여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은 이야기의 주제를 강조하고 효과적인 결말을 맺는데 중요했다고 봅니다. 자존감 높은 작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마음의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일 거예요. 사랑할 수…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