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이상을 알지 못한다-이상 「날개」(1936),그리고 박제가 되어버린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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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이상을 알지 못한다

-이상「날개」(1936),그리고 박제가 되어버린 언어

 

1. 박제가 되어 버린 ☐☐를 아시오? 나는 ☐☐하오.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유머저장소’ 와 ‘카광’ 이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수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인터넷 유명인이자, 사회정치적인 이야기로 인기를 끌었다는 점. 그리고 충격적인 과거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대한민국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 에서 그들이 올린 글들이, 그대로 그들의 과거를 폭로하는 글들이 되면서 논란은 시작되었다. 문제가 되는 두 사람의 과거는 그대로 인터넷에 ‘박제’ 가 되어 부메랑처럼 그들에게 돌아왔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어느 날을 살아가는 ‘나’ 가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문구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2017년 수능특강에도 수록되며 수험생들을 괴롭혔던 문제작, 이상의「날개」(1936)이야기다. 매춘부의 기둥서방으로, 시대처럼 의욕을 잃어버린 나는. 말 그대로 음폐 되어 있는 방안에‘박제’되어 있다. 나는 아내에게 빌붙어 살며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 자아를 억누른다. 아내가 외출할 때만 아내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욕망을 해소 하는 유희를 즐긴다.
 자, 이제 시대가 바뀌어 광복(光復)이 되었다. 눈부신 경제 성장도 이루어냈다. 정보화 사회에 걸맞게 유희거리도 넘쳐난다. 현재의 ‘나’ 는 이제 밝은 사회를 향해 갇힌 방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지 못하다. 분명 나는 말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폐쇄되고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 의지를 다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말했듯, 나는 방안에 ‘박제’ 되어 있다. 사장되어 버린 인간성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논란의 두 인물이 떠오른다. 두 인물 역시 자신의 과거에 ‘박제’ 당했다. 여기서 내가 있는 어두운 방에서 인터넷이 연상된다. 나는 박제를 지워낼 수는 없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종로3가의 어두운 사창가 뒷골목은 정부의 단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추악한 인간의 욕망도 마찬가지로 사라졌을까? 정말로 좋은 시대가 되었고, 안전한 사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 본연은 지워낼 수 없는 법이다. 현대사회의 뒷골목의 추악한 욕망은 스마트폰의 검은 액정 속으로, 검은 모니터 속으로 그대로 옮겨갔다. 악성댓글, 리벤지 포르노, 찌라시와 유언비어. 이 모든 것들이 인터넷 속 익명성이라는 이름아래 소리 없이 자유롭게 유통되고 소비된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천안함 / 세월호 사건 비하, 음란물 유포, 인격모독. 모든 것이 꺼져있는 어두운 모니터와 스마트폰 속에서 시작되었다.

 

 

2.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1)

 이상의 날개는 자의식의 흐름으로 작성된 소설이다. 소설 속 나는 인물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의 흐름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글을 작성하고는 한다. 즐거운 대로, 분노하는 대로. 우리의 이성을 되찾고 감정을 사그라들어도 작성한 글은 그대로 인터넷에 남아 있다. 소설 속 나는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생활한다.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을 이렇게 표현한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턱살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버린다. 침침한 방 안에서 낮잠들을 잔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은 알 길이 없다.2)
 
 빛이 들지 않는 곳은 익명이 보장된다. 적어도 내가 사는 곳은 그렇다. 서로가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을 원하지 않는다. 갇힌 방안에서 나는 자유롭다. 무슨 짓을 해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가 생활하는, 빛이 드는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아내는 생활력도 있고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 사회라는 시선에 제약을 받고 제지 받는다.
 “타인은 지옥이다.”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남긴 말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시선 속에서 역할을 만들고, 사회성을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방에서 유희를 즐기는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인터넷에는 얼굴이 없다. 타인의 시선이 없으니,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있을 때 할 수 없었던 돋보기, 거울, 화장품을 가지고 나는 유희를 즐긴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햇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생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이다.3)
 
 나는 어두운 방에서 잠시 햇볕이 드는 방으로 나온다. 발광하는 모니터로 인터넷 속 사회를 엿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용한 것에는 흔적이 남는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니 모를 뿐, 물건에는 모든 과거의 상흔이 남는다. 현실(아날로그)에서는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히고 변질된다. 물건이 오래되어 버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에는 휘발성이 있다. 하지만 인터넷(디지털)은 그렇지 못하다. 인터넷에서 행동한 흔적들은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다. 다른 인물들은 소설속의 나의 행동을 알지 못하지만, 현재는 모두가 나의 방안에서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록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언어가 '박제'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볍게 내뱉는 말처럼 우리의 행동을 금방 잊어버리곤 한다.
 
어느덧 손수건 만해졌던 볕이 나갔는데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중략)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 없고, 한참 자고 깨인 나는 속이 무명형겊이나 메밀껍질로 띵띵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중략)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4)
 
 작은 볕이 나갔다. 유희거리를 다 즐긴 우리가 핸드폰과 모니터의 빛을 꺼버린 것과 같다. 하지만 소설 속 나처럼, 우리는 인터넷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인터넷에서 흘러보낸 시간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감춰둔 본성을 드러내곤 한다. 가벼운 뒷담화 부터 심한 욕설까지. 사회가 정해놓은 올바른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바뀐다. 신념과 사상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소설의 나처럼 좌절과 절망감에 빠지더라도 언제든 일어설 수 있는 존재이다. 말실수도 마찬가지이다. 미처 잘못 내뱉은 어린 시절의 우리의 작은 실수와 잘못도. 모두 묻어두고 잊혀질 수 있기에 어른으로서 교화 될 수 있고 재사회화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과거를 묻어주지 않는다. 인터넷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나는 날개를 달고 다시 비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날개는 현대에서는 언제든지 꺾일 수 있는 존재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비밀, 과거, 심지어 관련 없는 아내의 일까지. 언제든지 파헤쳐지고, 공개적으로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마주하기보다는, 눈앞의 현상에 주목하고 싶어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사회는 과거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시 비상하고 싶어 날개를 펼친 나는, 현대 사회에선 그대로 그 날개를 박제 당한다. 날 수 없다. 움직일 수도 없다. 용서라는 소망은 그대로 못 박혀 상징이 된다.
 소설 속 나는 한 번만 더 날아 보자 독백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일어섰을까, 아니면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을 했을까. 적어도 인터넷 세계 속에서는 불행한 말로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3. 유명인이 되려는 자, 자신의 과거를 견뎌라5)

 이상의 「날개」 마지막 장은 일제강점기에서 멈춰있다. 소설로 박제된 과거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메세지를 던져주고 사회를 환기시켜준다. 소설 속 나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자 일 일지라도, 우리는 「날개」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인터넷의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와 인터넷 실명제도 우리의 알 권리와 상충된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우리가 실명으로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우리의 욕망까지 사라질 수 있을까 싶다.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고, 보복등으로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인터넷 실명제가 흐지부지 되었듯.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의 음지화를 더욱 가속시킬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잊힐 권리는 어떨까. 누구나 지우고 싶은 자신의 과거가 있다. 논란의 두 인물과 소설 속 '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묻어두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현재의 모습만 평가해 주길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가 있다 주장한다. 어떤 과거를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어떨까.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2(정보의 삭제요청 등) ①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이하 "삭제등"이라 한다)를 요청할 수 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명예훼손) ①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죄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밝힌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약칭 정보통신망법에서는 과거에 대한 잊힐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활동한 과거로 인해 자신의 사생활이나 명예가 침해될 수 있으면 활동한 내역을 삭제할 수도 있고, 누군가 내 과거를 들춘 것을 처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상충하는 알 권리도 만만치 않다.
 
헌법 제21조는 언론·출판의 자유, 즉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자유는 전통적으로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로운 표명(발표의 자유)과 그것을 전파할 자유(전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로운 표명은 자유로운 의사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자유로운 의사의 형성은 정보에의 접근이 충분히 보장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정보에의 접근·수집·처리의 자유, 즉 알 권리는 표현의 자유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으며 자유권적 성질과 청구권적 성질을 공유하는 것이다.6)
 
 대한민국의 최고법인 헌법에서는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헌법문에 써 있는 것처럼 알 권리는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 권리가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주고 받은 메신저? 사사로운 개별적인 만남? 사생활의 어느 단면까지가 우리의 알 권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유명인의 학창시절 학교폭력 사실, 성형 전 사진, 이성과의 연애. 이 중에 묻어둬도 괜찮은 과거와 드러내야 하는 과거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까? 당신이 공인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과거를 파헤쳐도 되는 것일까?
 카광과 유머저장소. 논란의 두 인물은 결국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들을 정지 시켰다. 네티즌들은 말한다. 저런 인간 쓰레기들의 본연을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지만 이 두 인물의 과거 외에도 구설수에 오른 유명인들은 많다. 당장 검색창에 'A 연예인 누드' 따위를 검색하면, 이미 사그라든 과거의 사건들이 주루룩 나열된다. 그런 과거 역시 알 권리에 포함되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사생활은 중요하다 말하는 대중들은, 우리들의 잣대는 과연 옳은가.
 박제된 과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다시 폭력으로 되 변한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옳든, 옳지 않든 말이다. 유명인에 향한 우리의 칼날은 언제나 우리를 향할 수 있다. '국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유통되는 포르노나 놀림거리가 되는 일반인의 방송 출현 같은 것들. 빛과 어둠처럼, 지우고 싶은자와 발굴해내려 내는 자들의 끊임없는 대립항. 언젠가 우리가 사회로 나가고 공인이 되어된다면, 우리는 박제된 과거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까. 인터넷은 마치 이카로스 같지 않을까. 높이 날고 싶어도 녹아내리는 날개를 가진 이카로스.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과연 떳떳할까? 필자는 두렵다. 필자가 나쁜짓을 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필자가 깨닫지 못하는 인터넷에 묻혀있는 과거가, 가면을 쓰지 않은 글들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가 모르는 본연의 자신이 정말로 존재할까봐 두렵다.
 
 

4. 인터넷은 이상을 알지 못한다

 빛과 어둠. 모니터 속의 작은 사회. 분명 인터넷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발전된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왜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인터넷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상향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소설 속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로 올라간다. 나는 그곳에서 회탁한 거리를 바라본다. 거기서 나는 깨닫는다. 아내와 나,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었다는 것을. 인터넷과 우리의 이상도 어쩌면 서로 맞춰 걸을 수 없는 절름발이는 아닐까. 필자는 물음표만 가득 늘어놓고 정작 해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최대한 인터넷에서는 우리를 감추고 살아가야한다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터넷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저 방관만 하라고 조언해야 할지. 불편한 문제를 감추기 바쁜, 부끄러운 필자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헬로우, 디스토피아.
 이상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냐며 자조적인 언어로 자신은 유쾌하다 말한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전혀 유쾌하지 못하다. 알맹이가 비고, 껍데기만 남은 박제. 어쩌면 이상은 허울뿐인 자신과, 죽어버린 사회에 대해 박제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마음은 생명으로 가득한가? 우리는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는가? 대중들이 쉽게 내뱉는 줏대와 모순된 언어. 끊임없는 사람들의 자가당착의 굴레. 양 진영에서 존중을 외쳐도 결국 안으로만 굽는 팔.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의 수많은 과거가 쌓여가고 발굴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살아가는 곳. 이상이 말한 박제는, 결국 우리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회고되고 논의 될 것이다.
 이상의 「날개」가 인터넷 속 사회 문제와 연결 짓기엔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이상의 「날개」는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당대의 지식인의 의지를 보여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필자는, 날개가 지금의 우리의 세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분열되고 혼란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하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 적어도 인터넷은 이상의 생각을, 이상을 모르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들도 언젠간 활짝 날개를 펼친 세상을 보는 날이 올까? 우리 사회가 한 번 더 비상할 수 있기를, 박제를 벗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날자. 날자. 날자. 다들 한번만 더 날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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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산 정약용「유배지에서 보낸 편지」中, 창작과비평 2001,
원문-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 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2) 한국현대문학전집 17 이상 「날개」,현대문학 2011, 84면
3) 「날개」, 86면
4) 「날개」, 87-88면
5)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4세(Henry IV Part)희곡」,1596
원문-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one who wants to wear the crown bear the crown)
6) 헌법재판소 1991. 5. 13. 90헌마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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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은실

안녕하세요. 성현 님! 이 글은 이상의 ‘날개’와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빗대고 교차시킨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름대로의 분석과 문제적인 지점들을 잘 나열해주었는데요, 글을 쓸 때 어려움이 좀 있지는 않았는가 여쭈어보고 싶어요.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과 현대 사회의 안건에 대한 분석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고, 특히 소설의 어느 한 부분을 잘 짚어내어어야 하는 종류의 글이라 어쩌면 조금 까다로웠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끝까지 글을 잘 마무리하여 준 점이 좋았습니다^^ 그럼 글에 대해 느꼈던 저의 어떤 의문들을 좀 이야기해볼게요. 먼저 이상의 ‘날개’ 속 주인공과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이 사실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데, 이것은 ‘날개’의 주인공을 어떤 모습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이 글에서 현대인의 어떤 모습을 문제적으로 보고 있는지가…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