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癡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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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때 은사님을 뵈러 전철을 타고 은사님이 계신 학교로 향하던 날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서 그런지 전철안의 좌석은 군데군데 비어있었고, 무료함에 펼쳐든 책장 사이로 투명한 번루색이 스며드는, 학교에서는 몇 번 겪지 못한 한가로운 오후였다. 갑자기 주어진 여유 탓인지, 나는 단정히 고쳐 매던 교복 넥타이도 풀어헤친 채, 덜컹거리는 전철 진동음에 맞춰 평소엔 잘 부리지도 않던 가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열차를 이어주는 연결통로의 문이 열리더니, 내 여유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어떤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퍽 상해버린 것 같은 쉰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입가엔 흐르다 말라붙은 침 한 가닥이 허옇게 눌어붙어 있었고, 빈 좌석처럼 군데군데 빠져 있는 이 사이로 어떤 단어를 말하고자 하는 듯, 백태 낀 혀를 굴려대고 있었다. 아마 노인은 ‘껌’ 을 발음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의 손에 한가득 들려있는 자일리톨 껌과 동전 몇 닢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얼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그 껌을 내가 사주기 원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하철 환승통로마다 붙어있는 ‘잡상인, 팔지도 말고 사지도 맙시다.’ 하는 문구라든가, 아버지의 ‘저런 잡상인들이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고 민폐만 끼친다.’ 는 말들을 으레 들어왔기에, 나도 다른 승객들처럼 그 노인을 무시하고 읽고 있었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읽고 있던 소설 속에는 치매를 바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어리석을 치(癡)와 어리석을 매(呆). 말 그대로 어리석은 바보나 멍청이가 되는 병. 딱 저 노인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 나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려, 소음을 막을 이어폰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왜 그랬던 걸까. 내 손은 가방에 있는 지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노인을 다른 곳으로 쫓아낼 심보로 지갑을 찾았던 걸지도 몰랐다. 흉한 노인의 몰골이 어쩐지 불편했기에, 몇 푼 손에 쥐어주면 다음 칸으로 옮겨 가겠지란 생각으로 나는 지갑 속을 뒤적거렸다. 노인도 내 의도를 알았는지, 불편한 몸을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지갑 속에는 그 흔했던 천 원 한 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한참동안 오천 원권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을 꺼내 노인이 들고 있던 바구니 안에 넣어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노인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때, 별안간 노인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전철 안에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노인과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 지갑 속에 있는 지폐를 본 것일까. 잡상인들이 뻔뻔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강매까지 할 줄이야. 책을 보고 있던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나는 노인에게 따질 의향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발가락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니 아까 꺼냈던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노인은 그 지갑을 향해 계속 소리치고 있었고, 내가 지갑을 줍자 지르던 괴성을 멈췄다. 그리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나는 사라져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들고 있는 지갑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노인은 말하는 법은 잊어버렸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가슴 속에서 밀려왔다. 내가 치매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아까 그 노인이 치매에 걸린 것일까. 정말 어리석었던 사람은 누구였던 걸까. 나는 보던 책을 덮고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에 어리석은 바보의 몰골이 비춰 보이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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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안녕하세요. 성 현님. 몸이 불편하고 나이든 잡상인 노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졌던 자신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기고 반성하게 된 경험을 글로 올려주었네요.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 무척 공감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노인의 추레한 모습과 노인의 행동에 반응하는 작자의 심리묘사가 성실하게 그려졌다는 생각입니다. 어리석다는 의미의 한자 치(癡)와 매(呆)를 응용해 노인과 나의 어리석음을 비유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의 비유로 활용한 점은 재치있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승객에게 물건을 파는 잡상인 노인에게 어리석다고 비유한 점은 다소 무리라고 느껴졌습니다. 잡상인 노인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물건을 팔았을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글 전체가 따뜻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져 좋았습니다. 지난번 올린 글에 비해 좀 더 깊이…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