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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섭은 또 날아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힘겹게 올린 눈꺼풀 아래로 선풍기 바람이 들고, 뜨뜻한 바람은 곧 눈을 미적지근하게 말려 놓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창섭은 매운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는 불을 켜 찬찬히 방 안을 뜯어보고, 자신을 깨운 소리의 근원을 찾아 잡아냈다.
“웬 모기가 이렇게 많아. 아까도 잡은 것 같은데.”
해가 떨어져도 일렁이는 더위에 창섭은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었다.
“섭아, 아직 안 자냐.”
“자고 있었어. 모기 때문에 그래.”
“…그래.”
어느새 새벽녘이 되어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의 잠긴 목소리에 창섭은 시계 없이 시간을 알았다. 다시 일어난 창섭은 책상을 더듬었다. 스탠드의 스위치를 닫고 안경을 걸친 후, 손바닥만한 수첩을 펴 들었다. 모서리는 닳아 둥그래지고, 손에서 밴 땀에 젖어 종이가 오그라든 수첩 안에는 큼지막하지만 가지런한 글씨로 쓴 그의 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빈 페이지를 열어 늘 쓰던 연필을 골라 잡고, 잠을 방해하는 잡념들을 재떨이 털듯 종이에 털어놓았다.
‘20xx. xx. xx. 또 더워서 잠을 설쳤다. 날갯짓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에서 깼다. 날벌레를 잡았다. 다시 자려고 누웠지만, 날갯짓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선풍기를 끄고 책상 앞에 앉았다.’
창섭은 거의 매일같이 일기-일기라 하기도 뭐하지만-를 써 오고 있었다. 최소 자신이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하기 위한 기록이었다. 어느 새 다시 감기기 시작하는 눈을 멈추고 창섭은 더 쓸지 말지 고민하다 일기의 마지막 문구를 써 넣었다.
‘오늘로 정확히 1년째다.’
창섭은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그러니까 해가 하늘 중턱에 제법 가까워졌을 때-가 돼서야 창섭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켜서 아르바이트 구직용 어플을 실행했다.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창섭에게 일을 하고 싶은 욕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꾸준히 창섭은 이런 식으로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집에서 나오는 일이 통 없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없고, 사람을 안 만나니 오히려 사람이 두려워져서, 볼 필요도 없거니와 보이지도 않는 눈치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이유로 구직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었지만, 생계가 꽤 궁핍해졌기 때문이다. 어제가 바로 그렇게 된 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다. 흡연을 즐기시던 창섭의 아버지는 작년 이맘때 폐암 판정을 받았다. 맞벌이 부부였던 창섭의 부모님은 수입의 절반을 잃게 되었고, 생활이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매일 아침 밥상에 오르던 달걀 프라이가 없어진 것만 해도 알 만 했다. 예전처럼은 어렵겠지만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창섭이 어머니를 돕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일할 마음 없이 둘러보는 행동은 즉 자신이 나태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변명-노력하는 척이라도 하는 척-이었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와주시지 않을까, 그래서 사실 나는 아직 일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창섭의 바람이 담긴 행동이기도 했다. 풀린 눈으로 화면을 넘기던 창섭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풀린 눈이 바로잡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그것도 모르는 번호로, 창섭이 보던 화면을 가리고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창섭은 자신에게 전화 올 모르는 번호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우선 반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의 찝찝한 기분에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세요?”
“…씨의 가족 분 되시죠? 지금 병원으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누구요?”
발음이 안 좋아 잘 듣지는 못했지만, 창섭은 앞의 웅얼거림이 어쩐지 귀에 익었다. 답답해하는 듯 짧은 볼멘소리가 수화기 너머 멀리서 들리더니 누군가가 다가와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아니신가요? 정수임 씨 휴대전화 아닌가요?”
방금 전보다 훨씬 또렷해진 목소리는 창섭의 이름을 발음하진 않았으나, 창섭이 일어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수임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지금’ 사용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네? 누구요?”
“아… 잘못 건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그 병원 어딥니까?”
창섭은 뭔가에 얻어맞은 듯 재빠르게 일어나 급히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며칠 씻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도 그 순간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이라 걸어서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
창섭의 어머니는 이미 벌겋게 젖은 눈으로 창섭을 보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너 찾으시더라. 수임이 데려오라고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원. 애 이름 바꾼지가 언젠데… 이 양반도 참…"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창섭은 잠시 주저하고는 결연하게 바닥을 힘주어 밟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커튼 뒤 놓인 침대 위를 보았을 때 창섭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몸 위에 놓인 하얀 이불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불 위에 드러나 있어야 할 어깨, 그 위 얼굴까지 같은 재질로 또 다른 이불이 덮혀 있었다. 그럼 이 하얀 천의 이름은 이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뀐다. 수세포.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는 사람, 빛이 들지 않는 사람, 더 이상 빛으로 인한 사람의 온기가 없어 굳어버린 사람(故人)을 덮는 천 말이다. 몸을 떨던 창섭은 눈물을 훔치고 흐느낌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뒷걸음질로 걸어 나가 아까 보던 화면 속에서 잡히는 대로 냅다 전화를 걸었다. 며칠 뒤, 창섭은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취직한 날 창섭의 일기장은 마지막 페이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창섭은 요 며칠 쓰지 않던 일기를 마지막으로 쓰게 되었다.
‘20xx. x. xx. 일자리를 구했다. 이제 나머지 비어 있는 절반 중 반 정도는 내 힘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잘 버티다 떠나가신 건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이제서야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폐암 말기 판정 후 정말로 딱 1년, 끝끝내 숨이 막혀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겠지만, 힘겨워도 살아가려 한다.’
창섭은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밤에 날벌레 소리 정도로 깨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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