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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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저기, 혹시, 하은이 바꿔주실 수 있어요?

하은이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전화 잘못 거셨어요. 끊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이거 분명 하은이 전화번호 맞거든요?

글쎄 하은이라는 사람 모른다니까. 다른 번호로 걸어보세요.

하은이 전화번호 맞다니까요, 모른 척 마시고 한번만 바꿔주세요, 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진짜 딱 한번만, 더도 말고 딱 한번만 바꿔주세요. 하은이 목소리 듣는 게 소원이에요. 제발요.

휴… 알았어요. 대신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오늘로 이 번호도 바꿀 거고,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겁니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어서 바꿔주세요.

(정적)

얘, 하은아, 전화 왔다. 받아라.

여보세요?

하, 하은아. 내 말 들려? 언니야.

언니? 언니라고?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이렇게 전화하면 안 돼.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죽기 전에 꼭 네 목소리 듣고 싶었거든. 있잖아, 거기서 빠져나와야해. 거긴 위험해. 그놈들도 위험하고. 널 보살피는 척 하면서 노예로 팔아넘길 생각이야. 새벽에 몰래 도망쳐. 도망쳐야해.

언니, 그만해. 이제 괜찮아. 다 해결됐어. 여기 계신 분들 다 성품 좋으시고, 난 부족한 거 없이 잘 살고 있어. 노예니 뭐니 그런 소리 그만해. 나까지 속상하잖아.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할 필요 없다니,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한가한 소리만 할 거야? 제발 정신 차려. 난 네가 걱정돼서 잠도 못 자고 약만 먹으면서 사는데,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은아, 언니 말 좀 들어.

언니, 정신 차려야할 사람은 언니야. 언니가 나를 돌봐준 건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전화까지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나도 언니랑 같이 살던 때가 떠오르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어. 그리고 이곳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 아늑하고 따뜻한 아파트인걸. 약 그만 먹어. 자꾸 약 먹으니까 없던 피해망상도 생기는 거잖아. 언니는 날 걱정한다고 하지만 나는 언니가 배로 걱정된다고.

아니야, 아니야. 하은아. 언니 말 잘 들어봐. 내가 틀렸을 수 있어. 그냥 그날 널 내버려두고 갈 길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렇잖아. 피를 나눈 친언니가 아니라 해도 나는 너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왔어. 그러니 제발, 우리 다시 함께 살면 안 될까?

나도 언니랑 같이 살던 때가 그립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있는 문제가 아냐. 고모랑 고모부, 친척들이 하나같이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로 살아가는 거잖아. 애도 아니고 그만 보채.

그럼 왜 날 만나러 오지 않는 거야? 연락처도, 주소도, 아무 정보도 알려주지 않은 채 숨어사는 이유가 뭐냐고? 내가 싫어? 언니가 아니라 이거야?

누가 언니가 아니래? 난 한 번도 언니를 언니가 아니라 생각한 적 없어. 언니 마음대로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마. 그냥 난 이제 편하게, 조용히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회사도 다니고 집도 마련하고 애인도 만나 재미있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언니도 그렇잖아? 자꾸 내게 병적으로 집착하면 언니한테도 전혀 이로울 게 없어. 그만 포기해. 언젠가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난 모른 척 할 거야. 언니도 날 알아보지 않는 게 마음 편할걸.

너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 그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살면 되잖아. 왜 나는 안 만나는 거냐고? 알았어. 같이 사는 건 도저히 무리니까 딱 한번만 만나면 안 될까?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그냥, 다 필요 없고 한 번만 만나자, 응?

언니… 난… 언니가 그런 짓을 한 이후로 언니를 만나기 싫어졌어. 솔직히 말할게. 내게 언니는 언니라기보다 날 키워준 보모에 가까운 사람이야. 난 이제 스무 살이고 성인이야.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자립할 수 있는 나이란 말이야. 지금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 쭉 나 혼자 꿋꿋이 살아갈 거라고. 그런데 언니가 그 먹여주고 재워줬다는 그 쓸데없는 정 때문에 자꾸 내 발목을 잡으면 나도 힘들고 언니도 힘들어. 다시 말하지만 난 나를 지금까지 안전하게 키워준 언니가 고마워. 하지만 언니는 내게 그 짓을 했잖아. 그런 행동만 안 했다면, 난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지 모르지.

그 짓이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넌 왜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고 그러니? 그래, 난 언니가 아니다 이 말이구나? 난 한낱 보모라고. 보모라서 넌 그냥 내 모유만 처먹고 건강하게 컸다 이거야? 넌, 넌……

언니, 진정해. 나는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언니도 기억하잖아. 단지 잊어버리고 싶은 속셈이겠지. 난 아직까지 언니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 왜 그런 거야?

왜 그랬냐니…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맹세코 네가 말하는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 왜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느냐 말이야!

그건 핑계고 구실이야. 왜 자꾸 거짓말을 해? 내가 어려서, 그때 일어난 일을 깨끗이 잊어버릴 줄 알았어? 솔직하게 말해. 거짓말 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언니도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털어버릴 일도 아니야. 언니는 내가 언니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하은아… 제발… 우리 이러지 말자… 그래, 내가 잘못했어. 거짓말한 것도 미안해.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난 그저, 돈이 필요했을 뿐이야…… 앞으로 우리가 쭉 함께 살아가려면 필수적인 게 돈이잖아. 난 돈을 많이 벌어서 하은이 너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따뜻하게 재워주고 싶었어. 나도 알아, 그 방법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난 벼락을 맞아 죽어도 부족한 년이지. 돈을 벌려면 내 몸만 팔면 되는데, 너까지 더럽혔으니까 말이야… 정말 미안해. 전부 내 탓이고 내 잘못이야.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 그날 왜 내가 수염 텁수룩하게 기른 지저분한 아저씨에게 너를 돈 받고 내주었는지… 넌 냄새 나는 신문지에 덮인 채 늙은 거지를 받아들여야했지. 일이 끝났을 때 네 하얀 알몸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구린내를 풍기고 있었어. 작고 여린 몸에 늙은이가 손톱으로 긁은 상처가 나 있었고 네 눈은 넋이 나가 멍한 상태였어.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생각이 들더라고. 난 개새끼도 안 하는 짓을 하고 만 거야. 너도 나처럼 자연스레 거지들에게 몸을 대줄 거라 완전히 착각한 거지.

그래, 맞아. 언니는 내게 몹쓸 짓을 했고 죽을죄를 진 거야. 그걸 언니가 내게 갚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언니가 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건지 알기나 해? 내가 받을 고통과 상처의 무게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봤어? 이제 다 끝났어. 다 필요 없고, 날 키운 정이 있어서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일 뿐 언니에 대한 증오는 가슴 깊숙이 꽂혀 있으니까. 더 이상 전화할 생각 말고 찾아오려는 시도도 하지 마. 번호도 바꿀 거야. 그럼 이만.

하은아, 하은아! 잠깐만 기다려! 이대로 끊을 순 없어!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고 넌 하나도 잘못 없어 제발 끊지 마 이렇게 끊어버리고 다시는 안 볼 거야?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건 너무하잖아 제발 하은아 제발 제발 이렇게 빌게 응? 제발 끊지 마…

언니 시끄러워. 그만해. 그러니까 정만 더 떨어지잖아. 그만하라고. 어차피 계속 통화하고 있을 수도 없어.

알았어, 그러니까 제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널 사랑한다는 거야… 난 네가 한 살 아기였을 때 처음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나이 차이는 열네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난 네게 엄마나 다름없었어. 엄마처럼 키웠고 보살피고 매일매일 굶어가면서 널 먹였어. 그냥, 다른 건 하나도 바라지 않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만 알아줬으면 해.

그래, 좋아. 끊기 전에 이것만 말해둘게. 친척들이 나를 찾아 집으로 데려간 뒤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진짜 재미있고 재미있는 일이었지. 언니는 아마 짐작도 못했을 거야. 신기하게 두 달 정도 지나니까 눈에 띄게 배가 나와 있더라고. 열 두 살짜리 어린애가 임신을 한 거야. 친척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어. 애가 아무리 거지 소굴에 살았다지만 이 지경까지 온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숙모와 숙부는 나를 산부인과에 끌고 가 강제로 낙태를 시켰어. 의사가 말하길 자기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네. 나이가 너무 적어서 이대로 낙태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 숙모와 숙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반드시 애를 꺼내야 한다고 부들부들 떨며 신신당부했지. 곧바로 나는 수술실에 눕혀졌고 복부와 질이 마취됐어. 의사가 시큼털털한 약을 먹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배에 주사했지. 잠시 뒤 새빨간 고깃덩어리가 눈앞에 등장했어. 피를 뚝뚝 흘리는 고기가 내 아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어. 게다가 내가 평생 동안 같이 살아왔던 언니 혹은 엄마가 날 이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어. 나도 이 고깃덩이처럼 손목 긋고 콱 죽어버릴까 생각했어. 하지만 곧이어 이보다 더 좋은 발상을 떠올렸지. 뭔지 알아?

……

언니는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거야. 날 이 상태로 만든 바로 그곳에서. 노숙자들이 우글우글 송충이처럼 모여 사는 지하철역에서. 쓰레기통에서 나 같은 아기를 또다시 발견할 생각은 하지도 마.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니까. 의사가 피 줄줄 흐르는 흡사 돼지고기와 같은 고깃덩어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이렇게 말하더라. 난 용케 살긴 살았는데 앞으로 아이는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미안하게 됐다고 말이야. 아니지. 의사는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지. 미안해할 건 바로 언니야. 빌어먹을 쌍년, 언니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뭣도 아닌 너 말이야. 네가 엄마라고? 웃기지 마. 내 엄마는 오래전 죽은, 날 낳은 엄마야. 넌 가짜 엄마고. 키워줬다 해서 다 엄마가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엄마도 아닌 엄마가 차고 넘쳐날까? 정말 고마워. 언니 덕분에 다시는 아기를 못 낳게 되었어. 뭐 애당초 낳을 생각도 크게 없었지만, 그게 그거랄까. 가끔씩 난 생각해. 내가 그날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일단 친척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고 더러운 늙은이의 정자에서 태어난 사생아는 무척 우울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했겠지. 그런데도 난 왜 자꾸 한때 내 뱃속에 들어있던 고깃덩이를 상기하게 되는 걸까… 참 이상하지 언니?

……

왜, 막상 내 소식 들으니까 황당해? 터무니없지? 아무 말도 못하겠지, 그렇지? 임신이라니, 낙태라니. 상상조차 못했겠지. 잘 되었다고 생각해. 언니도 나도 다 잘된 거야.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려버린 거야. 젠장, 언니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건데… 언니만, 언니만 아니었더라면… 아니지, 날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린 엄마가 나쁜 거지. 언니는 잘못 없어, 그렇지? 그래 안 그래? 대답해봐! 대답하라고! 당장!!

하ㅇ…

(전화가 끊긴다)

 

전화기 내팽개쳐지는 소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조명이 꺼지고 막이 닫힌다. 공연이 끝났음에도 무대 안쪽에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곧이어 공연장은 침묵으로 메워진다. 밤하늘만 쓸쓸하게 빛난다. 아름다운 밤이다.

 

 

 

 

*희곡 형식을 차용한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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