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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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둘투둘한 섬들 위를 지나다가 매끈한 자갈밭을 헤집습니다. 온전한 자갈들만 살아남은 이곳. 나는 발을 둘 수 있을까요. 내겐 문고리가 있지만 문은 없습니다. 창이 있지만 창틀은 없습니다. 벽지가 있지만 벽은 없고요. 천장이 있지만 지붕은 없습니다. 나는 과연 집입니까.

 

연필이 있지만 종이는 없습니다. 시계는 있지만 배터리는 없습니다. 글루건 심이 있지만 글루건은 없습니다. 붙일 것이 있지만 붙일 곳은 없습니다. 손이 없어서 발을 꿈지럭거립니다. 나는 과연 쓸모가 있습니까.

 

꼬리를 문 소문을 들을 수 있지만 귀는 없습니다. 소문의 근원을 볼 수 있지만 눈은 없습니다. 소문의 출발은 있지만 입은 없고요.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코는 없습니다. 뺨을 찰싹이던 촉감을 기억하지만 손은 없습니다. 매정하게 돌아가던 길을 기억하지만 발은 없습니다. 나는 살아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호흡하고 있나봅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집도 사물도 하물며 당신도 나도 본체만체, 들은 체 만 체, 말한 듯 만 듯.

 

나는 이렇게 있다가 없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건가요. 나는 숨을 쉬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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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

이 시 역시 ‘아귀의 입속으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존재의 내적 불안이 엿보이는 시군요. 00은 있지만 그것을 받쳐줄 혹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것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존재하는 것인지 묻고 있는 모습에서 어쩐지 처연함이 묻어나고 있기까지 하네요. 그 처연함을 조금 더 밀고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00에 해당하는 것끼리의 연쇄가 은유가 되지 못하는 것도 그 뒤에 오는 부재한 것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되는 것으로 그 효과를 상실하게 한 원인처럼 보입니다. 단어들의 교체가 ‘나’를 넘어 ‘존재’의 “반쪽 부재” 맞물려 흐르게끔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기대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