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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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여자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상상력이 메마른 것일까, 감성이 결여된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가다 도입부에서 멈추고,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 몰라 답답해하며 길 잃은 망아지처럼 헤맨다. 소설 쓰기의 처음은 주제 정하기인데 몇 달이 지나도 이렇다 할 착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언가 나타나도 머릿속에만 머물 뿐 종이 위에 구현되지는 않는다. 억지로 한 자 한 자 써 봐도 속도가 느려 어느새 공모전 기한은 지나가 버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써지지 않는 것일까. 소재 선택의 잘못인가. 책을 더 읽어야하는 것일까. 내 나이에 적합한 주제를 골라 내 나이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창작해내야 하는 것일까. ‘내 나이에 적합한 주제‘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작년 겨울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을 다룬 단편소설을 썼는데, 완성하고 보니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과거와 미래가 교차되는 실험기법도 어색했고 문장은 비문과 오문으로 가득했다. 삶의 1/5도 겪어보지 않은 고등학생이 모자의 가슴 시린 인생사를 표현하려 하다니, 소설이라는 매체를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그 소설은 공모전에서 떨어졌고 나는 머리만 쥐어뜯은 처지가 되었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첫 공모전에서 이탈로 칼비노 작품을 읽고 감명 받아 무식하게 휘갈겨 쓴 환상소설로 낙방했고, 두 번째 공모전에서 되도 않는 우화소설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다짐하지만 확신과는 다르게 글이 나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 한 달 남았는데 반쪽도 쓰지 못했다. 주제는 정하고 시작한 것인지, 결말은 염두에 두기라도 한 것인지 모르겠다. 파일에 저장된 글들은 대부분 쓰다 관둔 것이다. 미완성작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 다시 시작하자니 부끄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고 집필 중인 문서를 갈아치우고 새 작품을 구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문학의 기본도 모르는 천치라는 사실이다. 아직 구운몽을 읽지 않은데다, 화려해 보이는 외국소설 몇 편 읽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상태니 대책 없다고 할 만하다. 교과서라도 다독해 지식을 쌓아두면 좋은데, 나는 기껏해야 비평집 작법서 몇 권 읽고 소설을 시도할 뿐이다. 식구들이 너무 소설만 본다고, 공부도 좀 하라고 나무라는 이유가 있다.

‘자퇴하고 검정고시 볼 작정을 했으면 열심히 시험 준비해야지 하루 종일 소설 나부랭이만 들여다봐? 그것도 벨벳 애무하기, O 이야기 같은 더러운 야설이나 보는 이유가 뭐니?’

단순한 야설이 아니라고 재차 반박해도 소용없다. 요즘 내 관심사가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시즘 등 성도착증에 쏠려있다 보니 식구들의 비난도 이해되긴 한다. 열세 살 때 스티븐 킹에 빠져 마이클 코넬리, 존 그리샴, 시드니 셀던 등 미국 베스트셀러만 읽다가, 고전에 심취해 톨스토이, 괴테, 피츠제럴드, 찰스 디킨스, 헤밍웨이를 독파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쭉 훑어보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래봬도 세계고전을 사랑하는 수준 높은 청소년이다. 이 시대에 <신곡> <캔터베리 이야기> <데카메론> 같은 정전을 읽고 교양을 쌓는 10대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다.

문제는 읽기만 해서 될 게 아니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독후감도 응모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미루고 있을 것인가. 차라리 누가 대신 써주면 좋으련만.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명령하지 말라지만 이럴 때만큼은 공자의 훈계 따위 무시하고 싶다. 물론 공모전 규정에 대필은 금지되어있다. 자칫 발각되면 수시 문학특기자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내 뇌를 버리고 다른 뇌를 끼워 넣고 싶을 정도다.

 

 

1

 

꿈을 꿨다. 분명 악몽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용은 상기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불편한 꿈을 꾸면 생생하게 기억했는데 요새는 꿈마저 또렷하지 않다. 수증기로 뿌옇게 변색된 유리창처럼 내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손가락이 미세한 진동수로 조금씩 떨린다. 며칠 새에 맥박 수가 급격히 오른 것 같다. 구취도 심하다. 위염이라도 걸린 것일까.

세수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았다. 화면을 켠다. 어제 쓰다 말던 소설의 첫머리가 휴지통에 그대로 박혀있다. 복구해서 다시 써볼까. 머리를 긁적이니 비듬이 툭툭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머리 감은지 한 달이 넘었다. 창문 밖을 내다본다. 산비둘기 한 마리가 꾹꾹대며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있다. 먹이를 삼키는 모습이 새삼 태평해 보인다. 아, 나도 저 비둘기처럼 먹고 자고 싸는 것만 하면 얼마나 편할까. 대학 걱정 직업 걱정 할 필요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욕구에 몸을 맡기면 얼마나 행복할까. 혹자는 게으르다고 비난하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나태를 사랑한다. 일상 속 소소한 기쁨, 이를테면 화장실에서 용변을 배출하는 쾌감이라든가 졸린 눈을 닫으면 찾아오는 달콤새콤한 낮잠이라든가, 제때 반납하지 않아 연체된 만화책을 읽으며 따끈한 커피 한잔 마시는 나른함이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든다.

쓸쓸하다. 이런 걸 적막이라 하는 것일까. 아침이 되면 비쳐오는 창밖 햇빛과 이쪽저쪽 날아다니는 까치, 참새, 지빠귀들과 도로 한복판을 후다닥 달려가는 들고양이,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의자들과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가 일말의 예고 없이 공허한 소리를 낸다. 오전과 오후, 스물네 시간 온종일 내 살갗과 근육을 뚫고 이상한 냄새가 스며든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고 더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안이 따뜻해지자 나는 설핏 잠이 들었다.

 

 

 

2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누구지? 택배는 시킨 적이 없는데, 이웃집인가.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털고 일어나 현관문 유리에 코를 박고 초인종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유리가 더러워서 잘 볼 수 없었지만 체격을 보아 남자인 것 같았다.

 

–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내 추측이 틀렸다. 여자목소리다.

– 잘 지내긴 합니다만 누구세요?

– 혹시 필요한 거 없으세요?

– 필요한 거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이 필요한 거 없냐는 말에 나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아닐까 추측한다.

– 필요한 거 없는데요. 잘못 찾아오셨나 봐요.

– 분명 필요한 게 있을 텐데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말이에요. 방금 전까지 책상에서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나요?

소설? 그래, 소설 하나 때문에 죽어라 고민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 어떻게 아셨죠? 혹시 저를 미행하셨나요?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물러가는 게 좋을 겁니다.

– 아뇨, 전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에요. 지금 당신의 가장 큰 고민이 소설 쓰기라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게 해드릴게요.

– 당신 누구죠? 제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저를 도와주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경찰 부르기 전에 가세요.

– 저는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족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요. 저는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당신 자신보다 더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겁니다. 내가 누구이고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이 여자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내가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일단 진정하자고 마음먹는다. 단순히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 있다. 살짝 문을 열면 바로 침입해서 날 죽일지 모른다. 수상한 사람에게 절대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는 것은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이다. 이 사람이 스스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이상 나도 상대방 물음에 답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자기가 누구인지 내가 잘 알 거라니, 단단히 미친 사람인 게 틀림없다. 이럴 때는 112가 최고다.

–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경찰 부르기 전에 물러가세요. 집에 또 찾아오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저리 가세요.

그러자 여자는 씩 웃는 것 같았다.

– 뭐, 정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어떤 이야기든 제가 다 써줄 수 있으니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가 필요할 날이 꼭 올 겁니다. 필요하면 결국 사용하게 되어있거든요.

 

그러고는 현관문 뒤로 사라졌다. 나는 얼룩진 유리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도둑, 강도, 살인마, 사기꾼?

일단 경찰을 부르기로 했다. 방심하고 문 열었다가 숨어있던 여자에게 기습당할지 모른다. 무슨 흉측한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가장 찜찜한 것은 그 사람이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해 골을 싸맨 사실을, 지극히 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블로그나 카페, 어느 SNS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혼잣말로 지껄이는 걸 집밖에서 들었다는 것인데… 단순히 사기꾼으로 결론 내리기엔 불가해한 점이 너무 많다.

 

 

 

3

 

경찰이 오자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의 말은 엉뚱했다. CCTV를 확인했는데 오늘 체격 좋은 여자가 아파트로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초인종이 울리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그 시간대에 드나든 사람은 청소부 아주머니와 10층에 거주하는 열 살 꼬마아이가 전부였다. 잠에 취해 헛것을 보거나 몽상에 잠긴 것일까, 아니면 이런 것을 초자연현상이라 일컫는 것일까? 무당 불러서 귀신이라도 쫓아야하나. 아니면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과학수사대 같은 사람들을 불러 조사해 봐야하나? 어쩌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닌데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관두자. 지금 당장 할 일도 많은데 지나간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경찰도 불렀으니 더 이상 진행할 필요도 없고, 얼른 마감일 넘기기 전에 글을 써야한다.

그래… 소설을 써야한다는 간절한 강박관념에 어른어른 허상이 나타난 것이겠지. 눈앞에 놓인 종이 한 장에 집중하자.

 

 

 

 

 

 

 

그리고 나는 한 시간째 엎어져 이런 괴상망측한 그림만 그리고 있다. 내게 찾아온 그 사내 같은 여자다.

글 쓰라니까 그림 그리고 있다고? 아니다. 글이 나오지 않을 때 잠깐 쉬면서 그림을 그려 상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아니다. 방금 꺼낸 말은 핑계였다. 글을 못 쓰니까 멍청하게 낙서만 끄적거리는 것이다. 아니다. 둘 다 거짓말이다. 나는 글을 잘 쓴다. 적어도 내 또래 청소년들보다 훨씬 잘 쓰는 편이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표출된 당당함이다.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모르겠다혼란스럽다. 이제 내 속마음이 무엇인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조차 없다. , 이럴 때 나 말고 다른 누군가 내 육체에 빙의해서 집필 퇴고해주면 참 좋을 텐데. 가만 생각해보니 낮에 찾아왔던 그 수수께끼의 여인이 떠오른다. 여자인 내가 들어도 목소리는 무척 곱고 부드러웠는데 덩치는 또 남자 같았다. 정말이지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수상한 사람이었지. 환상이려니 넘어가고 싶은데 그 여자의 형상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눕는 바람에 나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천장만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 이 글은 버리자.

 

 

4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초인종이 두 번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유리 너머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제 방문했던 그 여자가 서있었다. 여자는 섬세하고 청아한, 명징하고 깔끔하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안녕하세요. 어제 뵈었죠? 고민은 해보셨나요? 어때요, 소설 쓰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나 막 덤벼들 수 있는 학문이 아니지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지만 고수처럼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등단한 작가도 힘든 일이랍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허락만 하시면 이 세상 어느 소설보다도 훌륭하고 화려하고 묵직하면서 결코 가볍지 않고 재치 있으면서 개성 넘치는 소설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존경하는 수많은 작가도 내 연필과 원고지를 마주하고는 무릎 꿇고 눈물 흘릴 테지요. 제가 누구냐고요? 바로 그토록 당신이 원하던, 당신에게 소설을 써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번에도 둘러대 봤자 소용없을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 당신이 내게 글을 써주는 사람이라 하죠. 나는 당신 이름도 나이도 아무런 신상정보도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을 신뢰하고 원고를 부탁할 수 있겠어요?

– 이름과 나이,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했지요. 당장 중요한 것은 당신 컴퓨터 속 텅 빈 문서라고요. 그 빈 문서를 빠짐없이 채워드릴 수 있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갑자기 찾아와서 뜬금없는 제안을 하는 것도 웃긴데… 아니, 솔직히 뜬금없지는 않다. 내가 항상 염두에 두던 일이 대필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무료로 글을 써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원고를 청탁하면 원고료를 주는 게 이치 아닌가? 마냥 두서없는 제안이 아니라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조건은 필수다.

– 그래, 어떤 조건인데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 간단합니다.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를 내놓으면 됩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생물 무생물 따지지 않고 받겠습니다. 단 반드시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진정 소중한 것을 주시지 않으면 저도 소설을 써줄 수 없다는 것을요. 만약 그리 소중하지 않은, 변변치 못한 물건을 내놓으신다면 그때는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지요?

도대체 어떤 의도의 권유일까. 권유인지 협박인지 협상인지 종용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가 수상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래도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 원고료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부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라니. 어차피 내겐 소중한 것이 없다. 가진 거라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컴퓨터 한 대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컴퓨터를 건네주면 글 쓸 수 없게 되니 그것까지 강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진정 소중한 것’이라는 요건이다. 나에게 컴퓨터가 진정 소중한 것이었나. 글쓰기가 소중한 것이었던가. 막상 생각에 몰두해보니 글쓰기가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부재하면 큰일 나는 것이었는지 의구심이 들고 자문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한번 이 여자 말을 믿고 대필을 부탁해보자. 내 글을 맡겨보자.

– 좋습니다. 한번 그렇게 해보죠. 당신이 내게 한 장 써주면 나도 ‘소중한 것’을 내놓는 조건으로 거래합시다. 원고는 언제쯤 가져올 수 있어요?

여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하고 기이한 미소로 웃음 짓더니 대답했다.

– 이미 준비해왔답니다. 여기 받으세요. 안전 문제로 걱정하실까봐 밑으로 밀어 넣겠습니다. 약속한 A4 용지 한 장입니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의하셔도 좋지만 반환은 불가합니다. 받으시는 순간 당신의 소유가 되니까요. 그럼 내일 같은 시간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소중한 것을 현관 밖에 놓아두세요. 저는 또 원고를 준비해올 테니까요. 그럼 이만.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그리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밑을 보니 정말로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게 바로, 스스로 위대하다고 자부하던 소설인가? 대체 얼마나 역량이 대단하기에 그렇게 떳떳이 자랑할 수 있었을까. 나는 원고지를 집어 들어 책상으로 가져갔다.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상상력이 메마른 것일까, 감성이 부족한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가다가 도입부에서 멈추고, 이야기를 어떻게 풀지 몰라 답답해하며 길 잃은 양처럼 헤맨다. 소설 쓰기의 첫걸음은 주제 정하기인데 몇 달이 지나도 이렇다 할 착상을 떠올리지 못한다. 무언가 생각해도 머릿속에 머물게 할 뿐 종이 위에 구현하지는 못한다. 억지로 한 자 한 자 써도 속도가 느려 어느새 공모전 기한을 보내버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쓰지 못하는 것일까. 소재 선택을 잘못하는 것일까. 책을 더 읽어야하는 것일까.

 

 

소설은 빳빳한 종이 위에 굵고 짙은 글씨체로 작성되어있었다. 아직까지는 큰 감흥이 없다. 훌륭하다더니 거짓말이었나? 그런데 읽을수록 온몸에 돋아나는 위화감은 무엇일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문체다. 그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첫마디를 읽었을 때 마치 오래전 읽은 만화의 그림과 내용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 설마 표절한 작품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와 비슷한 소설을 떠올릴 수 없다. 나는 일단 더 읽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몹시 이기적이고 교만하다. 스스로 또래 청소년과 비교했을 때 훨씬 글 잘 쓴다면서,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낙서만 하고 있다. 글쓰기의 목적이 즐거움과 행복이 아니라 공모전 상금에 있다. 이런 놈이야말로 문학의 본질과 의의를 훼손하고 폄하하는 죄인이다. 자기가 문학의 기본도 모르는 천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공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한마디로 게으름뱅이다. 오로지 상금을 타기 위해서 억지로 글을 쓰려고 발버둥 치니 써질 리 없다. 나 같으면 진즉에 때려 쳤다. 시간낭비를 하느니 바깥에 나가 산책하는 게 훨씬 낫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봤자 깨닫지 못하겠지. 한심하다.

 

 

여기서부터 낯설다. 방금 전까지 어디서 읽어본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대목부터 글의 흐름이 바뀐다. 아마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화자가 비난하는 ‘그’인데 어쩐지 ‘그’는 전혀 생경하지 않고 외려 내게 친근하고 익숙한 인물이다. 기시감이 들면서 불쾌해진다.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화가 치솟는다. 글의 목적이 공모전 상금이라니. 돈밖에 모르는 인간 아닌가. A4 용지의 짧은 글은 이렇게 끝맺었다.

 

 

심지어 그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감히 대필을 상상한 것이다. 대필은 작가들에게 중범죄다. 한번 걸리면 작가로서 명예가 더럽혀지고 작가가 아니어도 장기간 출품 금지, 수상 무효 처리 등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 물정 모르는 10대 청소년은 아, 누가 내 대신 써주면 좋겠다며 대필을 호소한다. 나는 묻고 싶다.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 그는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진심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쓰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을 것 아닌가. 그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짐작컨대 이 소설은 게으른 어느 청소년의 무지함을 비판하는 내용인 것 같다. 사실 소설이라기보다 타자를 욕하고 비꼬는 일기를 읽는 기분이다. 상당히 불편하다. 비속어와 성적 묘사가 과한 성인소설보다 곱절로 불쾌하다. 그 어떤 글보다 뛰어난 작품을 써주겠다더니 이런 싸구려 90년대 통속소설 같은 종이 쪼가리를 내놓다니. 다시 찾아오면 없었던 일로 마무리하고 대필 따위 집어치워야겠다. 차라리 내가 쓴 글이 낫다. 나는 화가 잔뜩 난 채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어떤 땐 문학보다 영화가 훨씬 재미있다.

 

 

 

5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니 새벽 한 시였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한참 넘어있었다. 이 나이 때 늦게 자면 정말 좋지 않은데 생각하면서 나는 항상 늦게 잔다. 이 컴퓨터, 책상, 침대, 방은 온전히 내 것이다. 이곳은 나만의 세계이고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나만의 경계이자 우주다. 한 달 뒤면 식구들이 쳐들어오겠지만 그때까지는 내 소유다. 방안의 모든 물품이 내 손에 있다고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찾아온다. 방안을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은 한 포대나 되고 먼지는 쌓이고 뭉쳐 회색 눈 덩이처럼 엉겨 붙고 천장의 거미줄은 밧줄처럼 굵어도 나는 행복하다. 다만 소설이 써지지 않아 분할 뿐이다.

나는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을 덮는다. 화면을 오래 봐서 그런지 눈만 감으면 영화 장면과 배우 얼굴이 어른거린다. 권총을 든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가늠쇠로 상대방의 머리를 겨눈다. 커다란 소리가 난다. 액정이 붉은색으로 젖는다. 성인 남성의 비명소리가 화면을 뚫고 터져 나온다. 초인종 소리가 귓전을 따갑게 후려친다. 그 여자다.

 

이번엔 종이 쪼가리를 돌려주고 확실하게 따져야겠다. 내가 라이트노벨 작가도 아니고, 이 따위 소설로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다.

 

– 안녕하세요. 한밤중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소중한 것은 준비해놓으셨나요? 제가 드린 소설이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 마음에 들었다고? 웃기지 마세요. 무슨 이런 쓰레기를 소설이라고 주시는 겁니까. 당장 가져가세요. 그놈의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죠. 이런 글로 내가 혹할 줄 알았어요? 대필 그만두겠습니다. 가세요. 새벽에 오다니 예의도 없네요.

-그렇단 말이죠… 알겠습니다. 제가 드린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니 아쉽네요. 하지만 환불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중한 것을 주셔야 저도 갈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을 제게 주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안 돼요. 애초에 준비해놓지도 않았고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경찰 부를 겁니다. 경찰 오면 당신은 협박죄로 잡히는 거예요. 당장 꺼지세요. 꺼지라고.

-이렇게 나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강제로라도 소중한 것을 가져갈 수밖에. 죄송합니다만 당신 스스로 자초하신 일이니 저를 탓하진 말아주세요. 어차피 당신 물건은 제 물건이기도 하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무슨 소리야? 어떻게 강제로 가져간다는 거야? 내 집에 쳐들어오겠다는 거야? 무단침입 죄로 고소할 거다.

-지금 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그냥 가져가면 되니까요. 그럼 이만. 글 열심히 쓰시길.

-뭘 그냥 가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상과는 다르게 여자는 정말로 가버렸다. 현관문 너머로 걸어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중한 것’을 가져간다더니 허세였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내 환상이거나 둘 중 하나다.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더 이상 볼 일 없다.

나는 방안으로 돌아왔다. 아니, 나는 현관에서 몸을 돌리자마자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방안에 가만 있어야할 무언가가 사라져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가구나 물건 가운데 하나가 이유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눈에 띌 정도로 큰 물건이라면 잃어버릴 수가 없을 텐데 해괴하다. 한동안 집에 혼자 있어서 어느 공포만화의 주인공처럼 환각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내가 미쳐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미친 게 아닐까.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내가 피폐한 삶을 살긴 했어도 정신은 똑바로 박혀있다면 이 기현상은 현실이다.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 내 눈앞에 발생한 것이다.

 

컴퓨터가 없다. 컴퓨터가 없어졌다. 소멸했다. 증발했다. 있어야할 곳에 컴퓨터가 없다. 컴퓨터가 놓인 자리에 먼지만 사각 모양으로 쌓여있다. 큰일 났다. 그 여자가 내 소중한 것을 가져간다더니, 정말로 가져가버린 것일까? 아니 애당초 그 여자는 집밖에 있었고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는 제자리에 꼿꼿이 서있었는데 대체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공간이동이라도 했나?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것. 그게 바로 컴퓨터였나. 하지만 컴퓨터는 21세기 세상에 차고 넘친다. 내게 하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일 리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왜 내 소중한 것가운데에서 하필 컴퓨터를 강탈해간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범주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벗어난 비상식적이고 기묘한 일이다. 난 미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유령의 존재를 인정해야할까아니면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빌어볼까. 경찰에 신고해봤자 똑같은 답만 돌아오겠지. 젠장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빌어먹을, 욕이란 욕은 다 하고 싶네. 층간소음만 아니었다면 시원하게 소리 지르는 건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글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이고 나는 글을 정말 쓰고 싶은 것인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아 세상은 의문투성이고 나조차 나를 모르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위선과 가식과 허례허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 졸리다 졸려 자야겠다 난 잠밖에 모르는 인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잠꾸러기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은 밤을 새보자. 지금까지 온종일 잠만 자왔기 때문에, 수면에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고 생각한 나는 밀린 책을 속독하기로 했다. 책꽂이에 꽂힌 사놓고 안 읽은 책만 해도 백 권이 된다. [롤리타] [시계태엽 오렌지] [그리스인 조르바] [싯다르타] 등 수두룩하다. [무당개구리 울음]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귄터 그라스라는, 우리에게 [양철북]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 겸 조각가의 소설이다. 혹 누가 알겠는가. 그 여자는 내가 잠자고 일어났을 때와 잠잤을 때만 방문했다. 잠을 자지 않으면 더 이상 오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책의 첫 장을 넘겼다. 재미없는 작품은 아닌데 졸음이 쏟아진다.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고 눈이 감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잠들면 안 되는데… 수면장애가 일어난 것일까… 손톱으로 손등을 긁었다. 잠들면 안 된다. 활자가 흐려지려고 하면 한 번씩 손을 찔러준다.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아무래도 책은 안 되겠다. 수면제나 다름없다. 책을 집어던지고 TV를 켠다. 영화 채널에서 공포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나이트메어>라는, 80년대 옛날 고전 공포영화다. 잠이 든 청소년들을 살인마 ‘프레디’가 나타나 면도칼 손으로 죽인다는 이야기인데, 옛날임에도 촌스러운 장면이 없고 특수효과가 뛰어나다. 나도 잠이 들면 프레디가 찾아올까. 아니, 살인마보다 무서운, 내 컴퓨터까지 빼앗아간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방문할까.

 

다시 컴퓨터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봤다. 컴퓨터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이 떠나가 버렸다. 이제는 텅 빈 책상과 한구석을 가득 채운 A4 용지만 남아있다. 소설을 쓰려면 연필이나 펜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연필을 집어 든다. 여자가 보내준 소설의 끝부분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정말 대필을 원하는 것일까? 열심히 공부하고 다독해서 스스로 소설을 쓰는 것만큼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없는데, 굳이 타인을 동원해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고 싶을까. 그까짓 돈이 뭐라고… 응모한다 해서 무조건 상을 받는다는 전제도 없다. 누군가 마음속에서 소리치고 있다. 이제 그만 관두라고. 소설 따위 안 쓰면 그만인 것을.

 

 

너무나 쉽게 써진다. 어째서일까. 이 이야기는 소설 같지 않다.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쓴 논픽션 같다. 수필 아니면 일기, 어쩌면 자서전일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소설이 아니라 수필을 갖다 준 것이 아닐까?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 1대 1로 대면해 이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묻고 싶다. 제발, 다시 찾아오기를.

 

 

 

6

 

나는 아예 현관문 밖에 앉아 대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찾아오기까지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마중 나와 있는 것이 훨씬 속 편하다. 어차피 여자는, 내게 원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여자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내 앞에 나타났다. 비를 맞았는지 온몸이 축축하다. 검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 안녕하세요. 절 기다려주신 건가요? 반가워요.

– 글쎄요. 반갑다기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요.

– 당신이 문밖에 나오길 꺼려하는 것 같아서 저도 문을 열어 달라 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저번에 제가 컴퓨터를 가져갔었지요. 아쉽지만 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약속한 대로 ‘소중한 것’을 가져간 거니까요. 이번에도 원고를 써왔는데 저번보다 괜찮을 거예요.

– 나한테 소설이 필요한 것을 알고 찾아온 거죠? 뭐 딱히 상관은 없어요. 컴퓨터가 정말 ‘소중한 것’은 아니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대체 이 소설의 정체는 뭔가요? 수필, 일기, 자서전, 아니면 그냥 장난?

– 흥미롭네요. 저한테는 관심도 안 주고 원고는 궁금해 하다니. 무슨 이야기든 상관없지 않나요? 재미있기만 하면 되지요. 제가 알기로 당신은 재미주의자일 텐데요. 어떤 이야기든, 소설이나 희곡,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나 서사시 등 이야기가 있는 매체라면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면서요. 아무리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해도 ‘재미’를 놓치면 그 작품은 가치를 잃은 거라면서요? 제 말이 틀렸나요?

– 그건 어떻게 알았죠? 하긴, 어차피 대답도 안 해주겠지. 알았어요. 됐고 원고나 주세요. 뭘 드리면 되나요? 키보드, 마우스? 냉장고나 텔레비전 같은 거?

– 제가 정할 겁니다. 그보다 제 정체는 궁금해 하지 않으시네요. 한두 번 의문 품다 이제는 지쳤나요?

– 마치 관심 받고 싶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래, 당신 누구예요? 이름이라도 알고 싶네.

–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당신이 잊고 있었던 연인이에요.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난 연인 같은 거 없는데. 한 번도 애인 사귄 적 없어요. 사람 작작 약 올리세요. 게다가 당신은 여자잖아.

– 안 믿으시나 보네요. 좋아요, 제 얼굴을 보여드릴게요. 그러면 떠오를 거예요. 제가 누구인지.

 

여자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7

 

나는 도시 한복판에 쓰러져있었다. 차들이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어디선가 자전거 두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비둘기들이 헝클어진 머리를 쪼았다. 손을 휘저어 쫓았다. 언제 정신을 놓았을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거리다. 여자가 후드를 벗었을 때 나도 모르게 기절한 모양이었다. 무슨 얼굴을 보여줬기에 보고 기절했을까. 흉측하고 끔찍한 괴물이었나, 내가 절대 알아보면 안 되는 사람이었나. 그녀는 나의 연인이라고 했다. 나는 살면서 남자도 여자도 사귄 적이 없다. 동성애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연인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끈적거리는 기름때가 들러붙어있는 비둘기들이 구구 소리 내며 전봇대 위에 올라선다. 언젠가 창문 밖으로 응시한 새와 닮은 것 같다. 나는 파출소를 향해 걸었다. 여자가 기절한 나를 바깥 한복판에 눕혀놓았다고, 컴퓨터 한 대도 훔쳐갔다고 신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의 대답은 엉뚱했다.

“증거 있으세요? 저희가 심증만 가지고는 막 수사할 수 없어요. 경비원 분이 말하셨다면서요. 선생님 집에 체격 좋은 여자가 들어간 적이 없다고. 그냥 병원 가서 진찰 받아보시는 게 어때요? 상태가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파출소를 찾아간 내 잘못이다. 이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나는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터벅터벅 걸었다. 다리에 힘이란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이게 뭐람. 컴퓨터는 컴퓨터대로 빼앗기고 원고는 받지도 못했고… 잠깐, 원고를 내가 받았었나?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니 무엇인가 손에 잡힌다. A4 용지 한 장이다. 굵은 글씨로 글이 적혀있다.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소설은 당장 쓴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싶다 해서 바로 구매할 수 없고, 내 정체를 알고 싶다 해서 쓰고 있던 후드를 벗겨내고 정면으로 마주볼 수도 없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안다. 나는 그를,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의 오래된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었다. 이 글은 그 여자가 내게 하는 말인 것이다. 대체,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설마 가족일 리는 없다. 가족들은 나만 제외하고 해외여행을 떠났으니까. 벤쿠버라는 캐나다의 수도로 우수에 빠져있는 나만 남겨두고 훨훨 떠나갔다. 비행기에 탑승해 날아가는 것까지 지켜봤으니 가족은 아니다. 또 가족이 이런 짓을 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누구냔 말이다. 나는 원고를 집어던지고 집에 도착했다. 아니, 도착할 집이 없었다. 마치 이 세상 일이 아닌 듯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파트 한 채가 송두리째 뽑혀있었다. 사방에 흙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철근과 돌덩어리 몇 개, 자갈 섞인 흙만 있었다. 놀란 아파트 주민들이 112와 119를 부르고 어떤 주민은 이웃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나는 환하고 공허한 하늘만 응시했다.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8

 

경찰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이름 모를 여성이 아파트를 통째로 가져갔다 그 말인가요?”

“네. 정말이에요. 소중한 것을 가져간다더니, 정말 둘도 없는 소중한 것을 가져간 거라니까요. 못 믿으시겠지만 믿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기현상을 누가 설명해줄 수 있겠어요?”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쏠려있었다. 마치 웬 미친년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나를 제외한 내 이웃들, 그러니까 나와 한 아파트에 살던 주민들이 아파트 한 채와 함께 증발해 버린 것이다. 자그마치 쉰다섯 명이 사라지고 말았다. 살아남아 다행이라 해야 하나.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는 사람, 괴수처럼 소리치고 어떻게 배상할 거냐고 고함치는 사람들이 지옥도처럼 그려졌다.

나는 이웃들 걱정보다 당장 숙박할 곳을 걱정했다. 이웃들이야 아파트와 함께 하늘로 치솟든 땅으로 꺼졌든 알 바 아니고 당장 하루를 보낼 장소가 필요하다. 지하철 밑에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텔은 너무 비싸고, 그냥 부모님에게 통화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말 연락하기 싫었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진 지금 하지 않을 수 없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를 기다렸다. 달칵,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안녕하세요. 어제 뵈었는데, 통화는 처음이네요. 집에 무사히 들어가셨나요?

– 뭐야? 당신이 왜 전화를 받아. 부모님은 어디 갔어? 내 가족들을 어떻게 한 거야?

– 아, 흥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납치한 것도 아니고 죽인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가져간 것일 뿐입니다. 가족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던가요? 그렇지요?

–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내 집도 없애놓고 내 부모님, 형제들도 죽여 버린 거야?

– 죽인 게 아니라니까요.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어요. 납치했다는 말이 아니고 제 품속에 넣은 거라고요. 일전에 원고 하나당 소중한 것 하나씩 가져가기로 정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집이 없어져도 살아갈 수는 있잖아요? 모텔 같은 곳에서 자면 되니까요. 돈만 있으면 문제가 없죠. 그래서 계좌의 돈도 빼냈고 돈을 대줄 가족도 가져갔습니다. 억울해하지 마세요. 제가 드린 종이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 헛소리 집어치워! 이 망할 자식 내가 죽인다, 죽일 줄 알아! 이 개 같은 년아!

– 욕하지 마세요. 연인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면 안 되죠. 벌써 잊으셨나요?

– 연인은 무슨 천하에 썩어빠질 쌍년 같으니라고. 당장 돌려놔! 컴퓨터도 집도 가족들도, 원고 돌려줄 테니까 다시 내놔.

– 환불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나는 당신에게 계속 원고를 써주고, 당신은 또 소중한 것을 내놓는 겁니다. 오늘은 눈알, 내일은 팔다리, 모레는 얼굴, 글피는 심장… 이런 식으로요.

– 장난 하냐?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 미쳤냐?

– 말이 되지요. 아파트 못 보셨나요. 사실 아파트 단지를 통째로 가져가버릴까 하다가 한 채만 가져간 거예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 그래, 결국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 알았어, 돈 줄게! 그러니 제발 식구들은 풀어줘. 제발…… 소설도 공모전도 다 포기하고, 집도 포기하고 전부 포기할 테니까. 그까짓 글이, 문학이 뭐 대단한 거라고.

– 말했을 텐데요. 돈은 필요 없다고. 정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가족들이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제가 누군지 기억하셔야 해요. 후드를 벗었을 때 얼굴을 봤잖아요? 누구였죠?

– 그건… 나도 몰라. 그때 네가 기절시켜서 못 봤잖아. 정신 차리고 나니 거리에 쓰러져있었어.

– 아니에요. 당신은 봤어요. 똑똑히 마주봤습니다. 보고 차마 깨닫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기절한 거잖아요. 당신은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어요. 생각해보세요. ‘나’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게 누굽니까?

– …… 죽음? 아니면 신?

– 아니죠, 아니죠. 바로 ‘나’예요. 나 자신이란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에요. 당신의 연인이자 분신이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 그럼 이 모든 짓을 다 내가 했다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어떤 소설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사용하지 않아. 이중인격은 너무 진부하고 식상한 소재야.

– 이중인격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같으면서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합니다. 당신이지만 당신이 아니죠.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니까요.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당신은 몇 주 동안 혼자 있으면서 글만 쓰다 미쳐버린 거예요. 본능대로만 살고 부모님께 연락 한번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라면만 먹고 바깥에 나가지 않다가, 결국 돌아버린 겁니다. 그런 것을 자아파괴라 하던가, 정체성에 혼란이 온 거라고 하던가. 당신이 우뇌면 저는 좌뇌입니다. 당신이 한쪽 몸을 가졌다면 저는 다른 한쪽 몸을 가진 거고요. 저는 당신의 욕망입니다. 당신이 가진 채워지지 않는 갈증, 끝없이 갈구하는 손아귀이자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구입니다. 이 전화가 지금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세요? 선을 통해서? 방금 동전도 안 넣었잖아요. 전화기를 귀에서 떼보세요.

 

나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어때요. 나는 당신 속에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당신에게서 파생된 까닭이 무엇인지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나는…… 제정신이야. 그까짓 거짓말에 속을 것 같아? 집안에 혼자 있다고 정신이 나가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 아니, 그런 사람도 있답니다. 당신은 온종일 글 쓰고 먹고 자고 글 쓰고 먹고 자고만 반복했잖아요. 사람이 혼자서 아무런 사회도 문화도 접하지 않고 살다 보면 십중팔구 미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요. 당신은 몇 주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가족들이 캐나다로 갔을 때 함께 가지 그러셨어요. 즐겁고 신나게 재미있게 시원하게 상쾌하게 발랄하게 놀다 왔을 텐데.

– 그건, 그건… 가족들과 내가 싸워서 그런 거야. 소설가가 될 거라고 아버지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고, 화가 난 부모님은 언니와 동생을 데리고 가버린 거야. 내 잘못이야… 가라는 대학은 안 가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해서… 그래, 내가 오만했던 것 인정할게.

– 정말, 계속 거짓말하실 생각인가요? 애당초 가족들은 캐나다로 가지 않았잖아요. 당신에게 화낸 건 맞지만 비행기 타고 떠나지는 않았어요.

– … 무슨 소리야. 말하고 싶은 게 뭐야?

– 가족들은 죽었잖습니까. 부엌칼이 어머니 뱃속 깊숙이 들어가서, 피를 한바가지 쏟아내고 죽었어요. 언니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다 당신에게 붙잡혀서 난도질당했죠. 머리칼이 뜯기고 피와 창자는 사방에 휘날리고… 당신은 처음부터 미쳐있었고 단지 그 사건이 발단이 되었을 뿐이에요. 방아쇠를 당길 좋은 기회였던 거죠. 제 기억이 맞는가 모르겠네요. 아마 정확할 거예요.

– 그래, 네 말 들으니 기억나네. 화가 나서 식칼을 빼들고 어머니한테 겨눴는데, 뒤에서 아버지가 막으려다 나를 넘어뜨렸고 어머니는 그대로 즉사했지. 놀란 아버지는 충격 때문에 몸이 뻣뻣이 굳어 말도 못했고, 나는 평생 구치소에 갇혀 살기 싫어서, 아버지 가슴을 찔렀어. 아무도 소녀 한 명이 일가족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 분명했거든. 언니는 파랗게 질려서 도망가다 내 손에 잡혀 죽었지. 언니는 울컥 피를 토했고, 난 진하고 끈적끈적한 피를 뒤집어 쓴 채 동생의 머리를 여러 차례 베었어. 잠시 쉬었다가 청소 도구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치웠어. 냄새가 안 나게 청결제로 박박 닦았지. 시체는 어떻게 했냐고? 너도 알다시피, 조금씩 갈아서 변기로 흘려보냈어. 다 버리는데 이틀은 걸린 것 같아. 용케 아직까지 안 잡힌 걸 보면 나도 운이 좋나 봐. 그렇지 않아?

– 드디어 솔직해지셨네요. 소설에 재능이 없었다는 것 알잖아요. 후회하지 않으세요? 고작 소설 하나 때문에 가족을 죽인 것. 그래서 그만큼 소설에, 공모전에 집착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아 참, 이제 제 얼굴을 봐도 될 것 같네요. 후드를 벗을게요.

 

여자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긴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 혈색 좋은 피부와 촉촉한 입술을 가진 그 여자는, 살인자가 되기 전의 나였다. 거울을 쳐다봤다. 흉측한 몰골이다. 광대뼈는 처참하게 들어간 데다 입술은 말라 비틀어 터져 사막의 땅처럼 갈라졌고 눈알은 생기를 잃어 칙칙한 회색만 내고 있다. 피부는 도마뱀 비늘처럼 뻑뻑하고 거칠다. 이제야 마주본다. 현재의 나를. 그리고 과거의 나를.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여자는 연필을 들어 잽싸게 자신의 목을 찔렀다. 피가 솟구친다. 찌르면 큰일 나는 중요한 부위를 건드린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그녀에게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는지 모른다. 공모전은 포기하자. 어차피 오늘이 마감일이다.

눈이 감긴다. 천천히, 조금씩, 사람들이 멀어져간다. 아니, 점차 가까워진다. 내가 죽인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앞에서 원고지가 날아간다. 소설은 미완성으로 남아야한다. 카뮈 <최초의 인간>처럼, 사드 <플로르벨의 나날들 혹은 폭로된 자연>처럼.

모든 것이 흐려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갈 수 없는 집으로 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로 귀향하고 싶다. 손에 힘이 풀린다. 이제 소설을 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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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

안녕하세요. 항상 실험적인 형식의 소설을 보여주시는데요. 이번 소설은 블랙 유머라고 해야 할지…… 그러한 작가 특유의 화법이 코믹하게 전달되었던 것 같아요. 이번 소설은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다시 말해 메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처럼 읽힙니다. 인물의 삶과 쓰기에 대한 욕망이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 '소설'로 쓰이고, 그 대가로 인물은 컴퓨터나 가족 등등을 지불해야 했네요. 그 과정에서 인물의 죄의식이나 자신의 한심함에 대한 자기모멸적인 문장들이 등장합니다. 연인은 인물의 분신이나 분열적 내면이라는 것이 말미에 드러나고, 혼란스럽고 선정적인 광기의 결과가 펼쳐지고 있어요.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은 작가가 문학을 대하는 본질적인 태도가 드러나 있기도 하고, 작가가 생각한 문학의 역할, 혹은 그 자의식적인 면모 등등을 읽으며 따라가게…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