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순간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까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싶어 시작했던 글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종말행 열차에 탑승해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필멸자이다. 멸(滅)을 앞두고 사람들은 대게 의미 있는 시간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죽어 없어지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이지? 마음 한편에는 그것을 알고 있는 탓에 모든 것은 점차 의미를 잃어간다. 행복이 지워져간다. 내 글이 멸망행 열차에 탑승한 상태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딱 그 두 가지이다.

글을 ‘썼다’라고 말하기 뭣한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십 년째 펜을 잡아오고 있다. 짧은 시간이 아님을 증명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글을 씀을 알고, 또 잊어갔다. 그리고 십 년째, 아마도 이제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열차는 오래 달렸다. 이제 그만 종착지에 멈추어 서도 원망하지 않을 긴 시간이었다. 끝의 바로 앞에서 사람은 모든 미련을 벗어던진 가장 가벼운 상태. 열차의 유일한 승객은 거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 허공에 붕 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상태.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상태. 탑승객은 종종 그러한 평을 받았다.

승객은 무(無)에서 시작해서 유(有)로 나아가는 듯 하더니 뒷걸음질 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이 뒤로 물러난 것인지, 한 바퀴 원을 그려 처음으로 돌아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과 닮은 끝인지도 모른다. 분명 시작할 때에는 의미 없는 것을 가리키며 무성의한 낱말들을 내뱉었다. 이제는 허공을 가리키며 뜻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순수한 직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처음이 아닌 끝이 맞다.

아무 것이나 손짓해도 행복하던 나날이 있었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던 시간이었음 역시 말할 수 있다. 분명 나는 행복해지려고 했던 것만 같다. 가끔씩 맞이할 수밖에 없는 시퍼런 멍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괜찮은 척 하던 시절도 기억한다. 즐거웠다고 말하는 시절은 괜찮은 척 하던 세뇌가 제대로 먹힌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것들에 사전적 의미의 ‘괜찮았다’를 붙일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상대평가로 등급을 매겼을 뿐이다.

글에 대하여 가장 많이 받아왔던 평가는 추상적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다들 다양한 표현으로 그 말을 내게 건네었다. 껍질을 까기 전에는 분명 속이 꽉 차 있을 것 같았는데 깨고 나니 눈앞에는 말라비틀어진 작은 알맹이 하나만이 있었어. 그것은 무표정한 문장에 대한 평가였다.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너라서 보이는 거야, 였던가. 깊게 흉 진 상처에 대해 제일 먼저 한 대처는 창작의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는 것이었다. 흔하게 받았던 조언인 “구체화시켜 보세요.”, 그것을 시행할 용기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살아 숨 쉬는 것들에게 털어놓는 법을 배웠지만 은신하는 방법을 배운 상처는 보호색을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부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엄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슬픈 글이 많더라.”라고 말하였고 친구는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하였다. 창작으로 흉을 드러내기에는 나는 여전히 한 자리 숫자의 나이를 가진 채 오들오들 겁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항상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것은 남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앞과 옆, 뒷모습을 모두 한 캔버스에 그린 피카소의 그림처럼 나는 문장을 차분히 꼬아 나갔다. 딱 한 사람이 은신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그러하듯, 문장 역시 조금씩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실체화가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날 지경이다. 이전에는 구체화된 현실을 묘사한 문장을 엮고 꼬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몽상을 그려내었다면 이제는 눈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타자화하는 작업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 잘못이다. 이미 나는 허공에서, 살아가는 인간 아닌 다른 무엇으로 그들을 관찰하듯 살아가고 있다. 내가 글을 닮은 건지, 글이 나를 닮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상해,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진다고 하는데,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래. 보통 사람은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든 남은 삶을 손에 잡아놓고 싶어서 난리를 치지 않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성은 전부 체념했거나, 애초에 기대한 것도 없어 실망할 것도 없는 사람들의 것이지. 내가 그렇다고 하지는 말아.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했던 것인데, 아무도 답을 모르잖아. 네가 그러면, 꼭 나도 종말행 열차에 타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자화상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였지만, 능숙하지 못하게도 다양한 나이대의 자화상은 그리지 못하였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초상화라 불러야 맞는 것일까? 상황은 늘 같았다. 자주 폭풍을 맞이하는 언덕 위에 딱 하나 놓인 작은 집, 시끄러운 소음은 안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며 꼭 며칠에 한 번씩은 고장 난 무언가가 집 밖으로 나와 있는.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지. 나는 매번 같은 풍경을 그렸고 바뀌는 것이라고는 그림 속 아이의 표정뿐이었다.

구 년이 넘는 시간을 버리며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주인공인 아이의 표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방법뿐이었다. 큰 감정은 늘 동일했지만, 아이가 거기까지 닿게 되는 과정,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정도, 아이의 삶의 이유. 나는 자랐지만 감정의 색은 변하지 않았고 그림 속 아이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복수하자, 다만 먹히지는 말고 성공하자, 끊임없이 되내이던 시간들.

지금 당신은 살아있나요? 갑자기 웬 질문인가요. 그래 보이는 걸.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한때 지독하게 갈았던 복수의 칼이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나는 그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과거의 나에게 몹쓸 짓을 하는 중이다. 멈춰지지 않는 망각.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을 뿐이다, 이제 내게 남은 미련은 아무것도 없음을.

글이 무거워지지 않는다. 울며불며 감정을 쏟아 부었던 시간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 한껏 달아오른 열기 위에 찬물을 쏟아 부운 듯 푸쉬시 흐릿한 연기만이 나고 있었다. 냄새 없음, 색 모르겠음, 그리고 끝. 감정을 잘 느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강렬한 감정 하나가 매일같이 집안을 부수던 당신을 향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희미해졌다. 요즘 무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매일같이 죽는 악몽을 꾸는 것처럼 무섭다.

제일 무서운 것은 내가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현재 고등학교 재학 중, 나이 열아홉, 대입 준비 중. 그러나 고등학교를 제외한다면 그 외의 것들은 꼭 학교에 있지 않아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정말 재학 중인 것이 맞는가? 학교에는 제일 ‘물질적인’ 내 자리만이 보인다. 내 몫으로 놓인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그곳에 자리 잡고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관찰한다.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기계가 분석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학교의 소문, 아이들의 사이를 분석할 때에는 정말로 순수한 정보의 나열만이 문장화되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내 자리는 없다. 나의 모든 문장은 마치 외부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법 했다. 그곳에는 정보의 주인공들에 대한 어떤 평가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는 저들과 관련이 없으니까. 애초에 우리는 서로가 사는 세계에 절대 발을 디디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분명 예전에는 저 소속감이 부러웠기도 했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아이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다시 보니 훌쩍 자라 성인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대신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절대 읽히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서인지. 아마 두 번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화상을 전문으로 하는 화가였으니까. 아이는 멸망행 열차에 탑승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이와 함께 그 열차에 몸을 담갔나 보다. 그 대가로 나는 내 나이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열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종착역 이전에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그리 어렵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그 질문에 지금 대답해주러 간다. 내려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겠거든.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보여서. 내 글은 분명 훅 불면 그대로 으스러져 버릴 만큼 얄팍한 존재일 것이다. 시비를 걸며 어깨를 툭 치기만 해도 그대로 뼈가 부러져 버리는 연약한 승객. 내가 지금 이러한데 무엇을 어떻게 구체화시켜야 하는 것이지?

우습지만 물어본다. 죽는 그 순간의 자화상을 그려 그것이 허공을 떠돌아다닌다면, 내가 현실을 살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해줄 수 있는지.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기는 했었다. 단지 지금이 아닐 뿐이다. 내가 글을 따랐는지 글이 나를 따랐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은 것이 되었다. 나와 내 자화상을 태운 열차는 오늘도 달려간다. 수없이 많은 자화상을 그리고 없앤다. 죽는 순간이 아니기에 그저 좋은 글이 되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계속 현실을 살아가다가 마침표만을 허공에 찍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안하게도 오늘 역시 괜찮지 않은 하루였다. 별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만큼이나 무의미한 글에 오늘도 허무를 느낄 뿐이다. 죽는 순간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 이 역시 무의미함을 방금 깨달았지. 순간순간이 멸을 향해 치닫는다. 어떤 질문을 하든 부정적인 것만을 토해낼 것만 같다. 열아홉이었고 흔히 느낄 수 있는 허무를 너무 늦게, 너무 짙게 느낀다. 죽는 순간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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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안녕하세요, 율오님. 첫 만남 반갑습니다. 십 년째 글을 쓰면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자신의 현실과 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군요. 집을 부수는 당신을 향한 강렬한 감정외에는 무뎌지는 감각, 희미해진 존재감, 실재하지 않는 느낌 등으로 구체화할 것조차 찾지 못하게 된 작자에게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죽는 순간이 되어야 좋은 글이 되는 이유가 있는지요? 글의 제목은 ‘죽는 순간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까’인데, 결말은 ‘죽는 순간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말하고 있네요. 글의 초점을 맞추면 좋을 듯합니다. 작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더 분명해지거든요. ‘구체화 시켜 보세요.’라는 조언을 많이 들으시는군요. 저도 글틴님들께 많이 드리는 말씀입니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면 독자와 공감할…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