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가

세인이에게

   안녕그동안 잘 지냈어이렇게 연락하는 건 1년 만이네그때 네가 주고 갔던 주소가 바뀌지 않았기를 바라너무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그렇지만 연락 없이 마음대로 가버린 건 너도 마찬가지니까 용서해줄 거라 믿어사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는데 조금 무섭기도 했고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어갑자기 바뀌어 버린 세상에 적응하기 벅찼던 것도 있고그러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잘 지내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보다 더 자랐고더 행복해졌고더 나은 삶을 살고 있어사는 곳도 옮겨서 이채와 유랑이를 빼면 나를 아는 사람도 없지전부 다 네 덕분이야이제야 말하지만 정말로 고마워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하나하나씩 이야기를 해보자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펜을 들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있잖아너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아마 나는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겠지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걸햇빛 하나 들지 않던 어두운 숲과 귀를 가득 메우던 매미 소리손을 뻗으면 네가 잡힐 것 같아 눈을 뜨면텅 빈 허공이 손안에 자리 잡고 있더라.

   눈을 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그날은 학교도 쉬는 날이었고아침부터 이채와 유랑이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어단번에 술래가 정해지지 않아 몇 번이고 가위바위보를 한 끝에 술래가 된 건 이채였지숨을 곳을 찾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문득 금지된 숲이 눈에 들어왔어너도 알고 있겠지만그 숲은 흑마법을 써서 추방된 마법사들이 사는 숲이란 소문이 돌아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물론 장난기 많은 아이들은 몰래 숲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즐기곤 했지만어쨌거나 그 숲을 본 순간저곳에 숨으면 이채가 나를 찾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때마침 주변에 어른들도 보이지 않아 혼날 걱정도 없겠다싶었던 나는 숲을 향해 발을 내디뎠지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을 때그래그 숲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디서 본 것 같다였어기시감이라고 하나이런걸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네 옷자락을 붙들며 나는 물었지.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어?’하고마을에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너는 분명 내가 아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는데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어기억나당황할 법한데도 너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말했잖아. ‘나는 세인이야네 이름은 뭐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그 대답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어세인그 낯설고도 익숙한 이름을 한참 동안 굴리다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피오란 내 이름에너는 반갑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약 그때 그 손을 잡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확실한 건 나는 그때 네 손을 잡은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두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푸른색으로 반짝이는 호수햇빛이 잘 드는 그루터기속이 텅 빈 죽은 나무 등이곳에서 또래 아이를 본 건 처음이라며 너는 해맑게 웃었어그 반짝이던 미소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더라숨바꼭질 중이라는 걸 까맣게 잊을 정도로 한참을 돌아다니다가하늘이 노을색으로 물들어졌을 때야 나는 숨바꼭질 중이었다는 걸 기억해냈지오늘은 이만 가야겠다고 말하자 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을 내밀었어정확히 말하면 손보다는 새끼손가락이었지만. ‘내일도 여기서 만나서 놀자!’라는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우리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쳤어야무지게 손바닥을 스치며 복사까지 하던그날의 노을을 네가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네.

   공터로 돌아왔을 때는 이채와 유랑이가 기다리고 있었어대체 어디에 숨었길래 못 찾겠다 꾀꼬리 소리도 못 들었냐며 일갈하는 둘에게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지네가 말했잖아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숲에서 너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그래서 나는 그냥 나무 위에 숨었는데깜빡하고 잠들어 버렸어.’하고 한번 크게 웃었어이채와 유랑이가 바보 같다며 놀려댔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더라어쨌거나 나는 내일도 너와 놀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숲으로 달려가는 일상을 반복했어집에 일찍 가야 한다며 이채와 유랑에게는 둘러댔지만아마 그 둘도 내가 숲에 들어가는 걸 알았을 거야그저 내가 숨기고 싶어 하니 모르는 척해준 거겠지솔직히 말하면지금도 그 숲의 풀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느낌이 들어아직도 그 숲 한가운데에서 너를 기다리는 기분이야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 서 있으면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곤 했어.

   그 숲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나는 학교에서 배운 마법들을 네게 보여주었고너는 금방 눈으로 그 마법을 보고 따라 했지그 마법은 우등생인 유랑이의 마법보다도 뛰어났고때로는 선생님들의 마법과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지기도 했어고작 눈으로 몇 번 보고 따라 한 게 전부였는데 말야. ‘너도 우리와 같이 학교에 다니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니너는 한번 느리게 웃고는 답했어. ‘내가 이 숲을 나가는 걸 어른들은 절대 허락해주지 않을 거야’. 그 말을 하는 네 표정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여서나는 더 이상 네게 같이 학교에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어대신 쓰지 않는 마법교과서를 가져와 네게 건네주었지비록 세인이란 이름이 아닌 피오가 써진 교과서였지만그걸 받아 들던 네 표정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너는 알고 있을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우리가 십 대의 후반에 접어들고키와 비슷하던 나무가 어느새 명치 부근에 올 정도로 커졌다는 게 익숙해질 무렵낑낑대며 그동안 사들였던 마법책을 껴안은 채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숲을 찾았어원래는 학교에 다녀와 늦은 오후에 숲을 찾곤 했지만그날은 졸업식이라 오전에 학교에서 나올 수 있었거든네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다행히 너는 그루터기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야.

   서로의 눈을 마주 본 채우리는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했지아마 너도 기억할 거야그날 내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걸너와 내가 보는 것이 같다면네 눈에 비친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사실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조금 가물가물하네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 앞으로는 여기 오기 힘들 거 같아라고 말을 시작했지? ‘먼 곳에 있는 학교로 가게 됐어그 학교에 다니면 기숙사에서만 지내야 하고방학에나 겨우 집에 올 수 있거든.’ 그 말을 내뱉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 있지나는 아직 상대방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법도 모르고순간이동을 하는 마법도 익히지 못했으니까이채와 유랑이는 같은 학교로 가게 되었으니 매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지만너는 방학에나 겨우 며칠 볼 수 있는 거잖아몇 년을 함께한 친구에게 어떻게 작별 인사를 웃으면서 건넬 수 있겠어너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그럼 나도 그 학교에 갈래.’라고 말했지그건 네 표정과 달리 꽤 덤덤한 말투였어마치 내일 아침에는 뭘 먹을까하고 묻는 것처럼.

   처음에는 네 말이 그냥 던져 본 말인 줄 알았어네 입으로 직접 이 숲을 나가는 걸 어른들은 절대 허락해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고그 학교는 전학생을 잘 받지 않기로 유명한 학교였거든그래서 나는 그냥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너는 지킬 수 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는데 말야.

   아마 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날이었을 거야이채와 유랑 말고도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고슬슬 기숙사 생활도 익숙해졌을 무렵조회가 시작되기 몇 분 전뒷문이 쾅 열리며 이채가 들어왔어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바로 옆 반이라쉬는 시간에 찾아오는 게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소란스럽게 오냐고 묻자이채는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말을 내뱉었어. ‘너희 반에 전학생 온다는데알고 있어?’ 그 말 한마디에 교실 전체가 술렁였는데그 이유 첫 번째는 우리 학교가 전학생을 잘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고두 번째는 그럼에도 전학생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 아이가 엄청나게 뛰어난 마법사일 거란 추측 때문이었어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전학생이 너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냥 어느 높으신 분 자제가 들어오는구나 싶을 뿐이었지선생님이 전학생과 함께 들어오는데도 나는 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어그 아이가 선생님의 말에 따라 내 옆에 앉을 때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어나지막하게 피오라며 내 이름을 속삭이는익숙하고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네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언제나 그렇듯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야.

   그날 이후로는 너도 알다시피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학창 시절을 지냈어이채와 유랑이와 몰래 기숙사를 나가 가게에 다녀오기도 했고학교 뒤에 모여 그날 배운 마법을 연습해보기도 하며다시는 겪지 못할 학창 시절을 눈부시게 보냈지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흐릿한 장면들 속 우리는 언제나 웃고 있었어.

   아맞다깜빡할 뻔했네이 이야기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잖아있잖아세인아사실 나는 어찌어찌 이 학교에 들어오기는 했지만나 스스로 마법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성장해가고금방 새로운 마법을 익히거나 더 어려운 마법을 배우는데 나 혼자 제자리에 멈춰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아마 1학년이 끝날 무렵이었지자세한 것들은 흐릿하지만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다는 것만은 똑똑히 기억 나분명 입학할 때만 해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는데그날 받은 성적표에는 낮은 점수들이 한가득 쓰여 있었어. ‘노력 요함’ 그 글자가 왜 그리 서럽게 느껴졌는지 몰라주변 친구들이 자신의 성적을 자랑할 때나는 친구들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다들 기뻐하는데 나 혼자만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그래서 네가 괜찮다고 얘기해주고토닥이면서 물을 다루는 마법은 네가 우리 중 제일 잘하잖아!’라고 웃어줬을 때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만약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마법을 포기했을지도 몰라.

   조금 더 뒤의 이야기로 넘어 가보자유난히 더웠던 2학년 여름 방학사정이 있다며 너는 방학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집으로 돌아갔지아침에 봤던 네 표정이 어두워서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며 나는 교실로 발을 내디뎠어이따가 집에 돌아가면 숲에 들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채로.

   늘 그렇듯 숲은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어왠지 모르게 스산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옷소매를 잡아당겼지아마 여기부터는 너도 모르는 이야기일 거야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니까숲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밝은 햇살이 시야 끝에 아른거렸어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나는 네가 그루터기에 있다는 걸 짐작했지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며 네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무의식적으로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어풀숲 사이로 비치는 네 표정이 평소와 달리 굳어 있던 탓도 있었지만네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

   내가 아까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우리가 만나던 숲은 추방된 흑마법사들이 사는 숲이란 소문이 돌아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는 거그 소문을 알면서도 나는 네가 흑마법사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학교에서 흑마법사들은 나쁘고좋지 않은 기운을 풍기며흑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들에게 불친절하다고 말해줬거든너는 지금까지 배웠던 흑마법사들의 특징과 너무나도 달랐어너무 맑고 깨끗해서 의심은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는그런 사람이야너는.

   나무 뒤에 숨은 채 나는 그 사람과 네 이야기를 엿들었어간간이 흑마법과 파괴라는 단어가 들려왔지만멀어서 그런지 분명하게 들리는 말은 별로 없었지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어두운 네 표정이야물론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몇몇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었어흑마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너는 추방당한 흑마법사들에게서 자란 마법사라는 사실나라의 상황을 어른들에게 알려준다는 조건으로 학교에 다니는 게 허락되었다는 사실마지막으로언젠가 흑마법사들이…….

   순간 그 사람은 휙 뒤를 돌아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어그 시점에서 나는 도망치듯 숲을 빠져나와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지만숨이 턱 끝까지 찼는데도 뛰는 걸 멈출 수 없었어겨우 집에 다다라 방에 들어가는데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보다왜 하필 너였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숨을 고르고 차분히 생각을 한 결과나는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어어른들뿐만 아니라 이채와 유랑이에게조차 말야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고아직까지는 흑마법을 배운 적 없으니 너는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어그래서 그냥 이 사실은 나 혼자만 알고 있기로 마음먹었지지금 생각해보면 이채와 유랑이에게는 말해도 별문제 없었을 텐데그렇지?

   어쨌거나 그렇게 우리의 2학년 여름방학은 흘러갔어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계속 숲을 찾았고너는 연제나 그렇듯 맑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지그때쯤에는 너도 숲에서 산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마을을 돌아다녔으니까이채와 유랑이와도 만나서 함께 노는 일도 잦았고그 덕분에 나는 그날 숲에서 들었던 사실들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어마지막에 듣지 못한 말이 뭔지 궁금했지만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 한 구석에 처박아놓았지괜히 궁금증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어그때의 나는.

   그거 알아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를 앞으로 데려다 놓더라정신 차려보니 나는 십 대의 끝자락에 서 있었어. 3학년 명찰을 달고 교실 문을 열었는데이번에도 같은 반인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네가 시야에 들어왔지조심스레 네 웃음을 따라 하며 나는 작게 손을 흔들었어그렇게 우리의 3학년이 평화롭게 흘러갔다면이대로 아무 일 없이 행복만 우리의 앞에 가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네 잘못이 아냐설령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그건 네가 아닌 어른들의 잘못이니까.

   그날은 아침부터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어주말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대부분 외출증을 끊어 기숙사는 텅 비어 있었고공부를 하는 몇몇 모범생들만 남아 있었지평소라면 이채와 유랑이의 요청도 무시하고 기숙사에 남아 있을 너였는데그날은 밖에 나가고 싶다며 먼저 외출증을 끊어 왔었어나가지 않겠다는 나를 반강제로 끌고 나간 것도 이채와 유랑이가 아니라 너였지아마?

   마을은 물건들을 파는 상인과 아이들의 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어구경하자는 이채와 유랑을 무시한 채 너는 마을 밖을 향해 발을 내디뎠지이상하게 그날따라 하늘이 참 맑았던 게 기억이 나네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손을 뻗으면 하늘이 잡힐 것만 같았어꼭 그런 기분이 들던 날이었어.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걷기만 하니무언가 이상했는지 유랑이가 먼저 입을 열었지. ‘무슨 일 있어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말해봐.’ 너는 여전히 머뭇거렸고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보라며 이채도 거들었어마침내 너는 꾹 다문 입을 열고 천천히 말을 내뱉었지. ‘마법을 쓰지 말고 마을에서 벗어나최대한 멀리최대한 빨리.’ 그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어어쩌면 우리들을 지키겠다는 간절한 기도였을지도 몰라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너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어. 1초라도 빨리 이 마을에서 벗어나 달라고그렇게 말하는 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어서우리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우리가 발을 내딛기 무섭게 굉음과 함께 거대한 빛이 시야를 잡아먹어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피부에 와닿는 기분 나쁜 공기는 누가 봐도 흑마법사들의 것이었으니까너는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이내 따라오라며 마을 외곽을 향해 뛰기 시작했어네가 그렇게 빠른지 나는 처음 알았지 뭐야흑마법사들의 마법이 여기저기서 날뛰었고그에 맞서 다른 마법사들이 싸우는 소리가 귓가에 마구 달라붙었어마침내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길에 들어서자 우리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지어떻게 된 거냐며 묻는 유랑이의 물음에너는 애써 무너진 표정을 감추며 말했어. ‘다 내 잘못이야.’

   너는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지금까지 네가 감추어왔던 모든 사실들을 이야기했어자신이 흑마법사들에게 자란 것그렇기에 흑마법은 배우지 않아도 흑마법사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어른들에게 조건을 거는 대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흑마법사들이 마을을 습격할 계획을 짰다는 것왜 하필 이 마을이었냐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뛰어난 마법사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고수도와 가까우며거쳐 가는 사람들 또한 다른 마을에 비해 많았으니까이제는 감추지 못한 표정을 드러낸 너는 천천히 덧붙였어그래서 자신이 이 학교에 올 수 있었다고다른 마을에 있는 학교였다면 조건을 붙여도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고.

   어쨌거나 여기서 빨리 도망쳐야 한다며 너는 말했어마법을 써 도망치면 흑마법사들이 찾아낼 수 있다며곧 있으면 자신을 찾으러 다른 흑마법사들이 올 거고그러면 우리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게 네 이야기였지왜 눈치채지 못했을까네가 그 말을 내뱉었을 때우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도망치기를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공중으로 몸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마법이 몸을 휘감았어무의식적으로 그것이 흑마법이라는 걸 깨달았고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문득 예전에 학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어. ‘흑마법은 상대를 죽이는 마법보다상대의 마력을 빼앗는 마법이 더 크다.’ 마력이 없으면 마법사들은 마법사로 살 수 없으니까특히 우리처럼 처음부터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마법이기도 했지네가 어느 사람에게 그만두라며 소리치는 것이 보였지만마력이 절반도 넘게 빠져나간 상태라 그 모습마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지다행인 점이 있다면 흐려진 시야 속에서는 이채와 유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도 그 둘이 무사히 도망쳤다는 사실은 금방 추리해낼 수 있었지그때는 이채와 유랑이 흑마법에 당하기 전에네가 억지로 마법을 써 학교 안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나는 그 둘이 흑마법사들에게 잡히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어.

   시야가 완전히 흐려지기 직전몸을 감싸던 마법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뺨을 스치던 차가운 바람다른 마법사들의 웅성거림그 모든 것이 메아리치는 것과 동시에 불이 꺼지는 것처럼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어그래도 마지막으로 들리는 게그 모든 소리를 무시하고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던 네 목소리라는 점이 다행으로 느껴지더라.

   정신을 차렸을 때 너는 없었어이채와 유랑이가 옆에 있었고꼬박 하루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이야기해줬지내가 쓰러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에게 다 들었어네가 흑마법을 써 강제로 마력을 되빼앗아 나에게 불어넣어 줬고이채와 유랑과 함께 병원까지 나를 데려다줬다는 거흑마법사들은 결국 패배해서 다들 재판으로 넘어갔다는 것도 둘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처음 들었을 때는 너도 재판에 넘어가지 않았나 걱정했는데가담한 것도 거의 없고 무엇보다 바로 도망친 덕분에잡히지조차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알아그러면 나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지바보같이 왜 먼저 가버린 거야그것도 주소만 남기고작별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가버렸잖아.

   네가 가고 난 후, 1년 동안 우리가 지냈던 시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어그 시간들은 언제 꺼내 보아도 눈부시게 반짝였고 아름다웠지설령 그날 내가 마력을 모두 잃었다고 해도지금 내가 흑마법 덕분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그것은 우리가 지내왔던 시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해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그 일은 우리의 우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거야지나고 보면 모두 반짝이는 추억들에 녹아 흐릿해질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

   있잖아세인아나는 너를 만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네가 있었기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이곳에 존재할 수 있었어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겠지아마 마법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했을 거야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나는 절대로 너를 원망하고 있지 않으니까아마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기차를 타고 네가 사는 마을로 가고 있을 거야마법을 쓰면 몇 초 만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일부로 기차를 타는 걸 선택했어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거든물론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정리해도어쩌면 너를 만나자마자 그 이야기들을 다 까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내가 말을 조금 더듬어도 이해해줄 수 있지?

   아조금 있으면 우체통에서 편지를 수거할 시간이라 이만 말 줄일게다시 한번 말하지만나는 너를 만난 걸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여겨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니까. ‘우리는 영원히 친구야!’라고 말하며 맑은 미소를 짓던 네 얼굴을.

피오가.

추신이채랑 유랑이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해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으니까앞으로는 꼭 연락 자주 해줘알았지?


4월이 너무 바빠서 더 긴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짧은 글로 마무리합니다. 저번 글에서 질문하는 걸 깜박했는데 혹시 글에서 대화가 많이 길어도 상관 없나요? 중간에 다른 문장 없이 대화가 4번 이상 나올 때가 종종 있는데, 중간에 문장이 없어도 괜찮을지 궁금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

kakao
....

1
댓글남기기

로그인 후 사용해주세요.
1 Comment threads
0 Thread replies
0 Followers
 
Most reacted comment
Hottest comment thread
1 Comment authors
선형

안녕하세요, 멜론소다 님. 반갑습니다. 이번 소설은 "마법 학교"에 대한 이야기네요. 흑마법사와 마법사가 대결하는 세계, 결국 마법사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흑마법사와 우정을 맺는 내용이에요. 서간체로 쓰여진 소설인데 문체가 자연스럽고 문장력이나 묘사 등등에서 흠잡을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장면 또한 구체적이고 유기적이며, 판타지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산뜻한 환상을 느낄 수 있었던 듯해요. "마법을 쓰면 몇 초 만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일부로 기차를 타는 걸 선택했어."라는 문장이 좋습니다. 이 편지가 너에게 향하는 기차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어떤 현장감,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럼에도 금단의 숲에서 세인을 만나고 세인이 마법 학교에 입학한 후 흑마법사라는 게 밝혀지는 이 스토리는 다소 코드화되어 있습니다. 코드화되어 있다는…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