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X (수정)

1

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오래전부터 관심 밖의 일 대신

7살 아이가 가장 빠르게 집을 나가는 방법 하나 예체능 학원 등록하기 집이 잠만을 자는 공간으로 전락하기까지는 순식간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 발명가 동생까지 세 명이에요 그리고 불청객 하나 추가요 상상 속의 자기소개는 오늘도 완벽 사랑에 한계가 있다면 한쪽에 몰아주는 게 원칙이라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어린 기억들 장래가 촉망 받는 아들 하나랑일찍 철 들어 조용한 딸 하나 오늘도 칙칙한 무관심이 나를 올려다본다 익숙해져서 미안해 중얼거리며 집을 나서고

어머니 피아노 콩쿠르 준비로 인해 10시에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답장 없음)

 

2

학원을 다니는 모두가 피아노를 잘 친다는 생각은 기만이다 우리는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 채 스러져가고 각 손가락에 번호를 대응하여 1부터 5까지 음표 위 숫자가 적혀 있는 교재 4는 금방 죽을 것처럼 불길하다고 X 표시로 지웠다 약지를 쓰지 않는 것은 재능 잃은 사람들의 약속 유일하게 혼자 펴지지 않는 손가락은 언젠가 도태되기 마련이야 네 번째 손가락에 들이는 시간은 초보자가 아니고서야 하지 않는 실수임을 알아요 손으로 계란을 쥔 듯 건반 위에 올려놓기 이론은 이론일 뿐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

손가락 하나가 투명해졌지만 여전히 조용한 세상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하는 선생님 네 번째는 아픈 손가락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하자 …우리는 틈만 나면 깨물고는 했다

 

3

가망 없는 것에는 노력하지 말자 사랑도 피아노도 손가락도 포기하는 법만을 배웠음을 고백했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미지수의 대표는 알파벳 X 놓아버린 것들의 이름으로 부르자 몇 년 만에 동생과 약속을 했다 아픈 손가락 사용 중지된 약지는 손가락 X로 개명 너와 나는 그날부터 X들을 위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누나만큼은 버리면 안 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나갔다 사랑 X에게는 독립을 피아노 X에게는 연습을 손가락 X에게는 은파¹를 네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칠 수 없다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히죽거리던 동생

가장 많이 내뱉던 말은 거 봐 할 수 있잖아 스물 독립하면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유성펜으로 X 표시를 그려 넣은 약지와 나는 성공적으로 살려낼 것이라는 믿음과 (누나 이거 나야) ……

 

()

(그 애, 물에 빠져 죽었대)

(유서*는 길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X뿐이었다)

 

5

너는 언제까지나 예쁨 받을 테니까 알고 싶지 않았었고 사랑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X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외치던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나 사인이 흔한 추락사가 아닌 익사인 이유는 알아요 동생이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장례식장에서의 엄마의 고백 손가락 X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토록 은파를 좋아했던 이유 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우리 묻어둘까 (엄마 그거 알아요 열 손가락 깨물면 아픈 건 다 똑같다는데) 강에 떨어진 동생은 헤엄쳐 낙원으로 갔다 은빛 물결이 아름다운 곳에 도착했다 X도 아픈 손가락도 없는 장소 마침내 숨을 내려놓고

나는 오늘 은파 연습을 그만두었습니다 손가락 X와 동생이 동치였음을 깨달은 후 어떤 X도 살릴 자격이 내게는 없어 피아노까지 그만두자 손가락 X는 다시 약지로 돌아왔다 내가 너를 깨물어 새 이름을 붙인 걸까 이제는 늦어버린 생각이지만

 

*갈망하다가 절망하고 포기하는 방법만을 배운 어른들은 X를 낳는다 우리 엄마도 우리 아빠도 관심과 사랑을 덧씌우고 속박하고 누나의 가장 가까운 X는 아픈 손가락 누나만 모르는 사실이다

¹에디슨 와이먼이 작곡한 「은파(Silvery Waves)」는 은빛 물결이 흔들리는 정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교내 문학상을 준비하다가 퇴고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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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

안녕하세요 율오님! 손가락 X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이번 버전 읽고 정말 감탄 많이 했어요!!! 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엄청엄청 좋았구… 제가 이런 평가를 해도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짝 말해 보자면, 율오님의 시가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각주 2가 없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메이데이가 구조요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 테고, 세 번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더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동생의 삶과 죽음의 이유가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어요. 자꾸 왜라는 의문이 들어요. 그렇지만 굳이 그 과정을 설명하기보단 누나에게는 "동생이 어떻게 살고…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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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오님 다시 만납니다. 늘 반가워요. 시 잘 보았어요. 그런데 수정 이전의 장점을 다시 끌어 와야 할 것 같아요. 수정 전은 가독성은 좋았으나 조금 단조로웠고, 지금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났고 X도 다양하게 변주되었으나 너무 길고 가독성이 떨어지네요. 자꾸 정확히 끝내지 않고 넘어가버리는 문장이 연속되는 것 같아요. 문장을 전 버전과 비교하며 고쳐보세요. 글이 불친절할까 고민되시는 모양인데 반대로 너무 많이 말해줘서 산문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어요. 스토리가 너무 드러났어요. 접점을 찾는 게 참 힘든 일이긴 하지요. 지난번도 장점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수정하실 땐 좋은 점은 남기고 별로인 것만 고쳐나가면 되는 거지요. 물론 율오님이 하시는 것처럼, 여러 버전을 만드는 시인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최종 버전에서는 장점만 활용하면 더…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