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봄을 팔았다 : 요루시카, 春ひさぎ (3번째 정규앨범 盗作 수록곡)

청춘과 매춘에 공통적으로 봄春이 들어가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작곡가 n-buna와 보컬 suis의 2인조로 이루어진, 여름의 청춘을 노래하던 요루시카는 매춘을 제목으로 한 곡을 발매하였다. 요루시카의 3번째 정규앨범에 실린 <春ひさぎ(이하 봄 팔이)>가 그것이다. 春ひさぎ는 직역하면 ‘봄을 팔다’이다. 여기서의 봄이 재능, 혹은 매년 돌아오는 계절 등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의미만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성매매이다. 제목의 ‘봄’이 성을 이야기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春ひさぎ라는 제목은 Prostitution, 매춘이라고 번역되었다. 요루시카의 곡들이 때로는 청량하고, 때로는 필사적인 청춘을 노래한다고 생각했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럽고도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요루시카의 이전까지의 곡들을 보면 사람들이 신곡 <봄 팔이>에 어째서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きっと人生じんせい最後さいごのひもあいをうたうのだろう

분명, 인생의 마지막 날에도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겠지

/って, 1번째 미니앨범 수록

 

いたまま大人になって いつけない ただ

고개 숙인 채로 어른이 되어서 쫓아갈 수 없어, 그저 네게 맑아라

/ただ, 2번째 미니앨범 수록

 

のいない温度かないような

네가 없는 지금의 온도를 마르지 않을 듯한 추억으로

/パレード, 1번째 정규앨범 수록

 

요루시카는 청춘을 노래했지만 그것이 청춘을 파는 것은 아니었다. 푸른 봄을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홀린 듯이 끌려왔을 뿐이다. 그러나 신곡 <봄 팔이>는 다르다. 작곡가인 n-buna(이하 나부나)에 따르면 이번 곡은 자신의 봄을. 재능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본인은 이에 혐오를 표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요루시카가, 나부나가 재능을 팔았다고 말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표현이다. 요루시카가 판 봄은 온전한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값싼 음악을 끼적이며 봄은 전부 져 버렸다고

 

6월 3일 공개된 요루시카의 <봄 팔이>는 공개 직후부터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본 글에서는 제목을 ‘봄 팔이’로 번역하였지만, 영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春ひさぎ는 ‘매춘’의 은어이기도 하다. SNS를 중심으로 <봄 팔이>에 대한 비판은 확산되어 갔다. 매춘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노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은 생각이 짧은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하여 몇몇 사람들은 노래 제목만 보고 쉽게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나부나가 작성한 곡의 해석에 따르면, 그가 의도한 내용은 사회의 매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소리를 훔치는 도둑이다.’ 나부나의 설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다. 앨범명인 盗作(표절)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소리를 파는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소비하는 우리가 불편함을 가져야 하는 것도 맞다.

 

をひさぐ売春隠語であるそれはここでは商売としての音楽のメタファーとして機能するしいことだとわないか

봄을 팔다, 는 매춘의 은어이다. 그것은 여기서 상업으로서의 음악의 메타포로서 기능한다.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ヨルシカ / n-buna Official 유튜브 채널에 작성된 <봄 팔이> 소개

 

대중의 취향에 맞춰 음악을 작곡하여 판매하는 것을 매춘에 비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곡의 소개에 따르면 <봄 팔이>의 ‘봄’은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봄을 팔다’가 매춘의 은어라고 직접 언급한 것을 보아 성매매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나부나는 ‘봄을 팔다’가 매춘과 음악을 파는 행위의 두 가지로 동시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으며, 자신이 이 둘의 무게를 재 보았던 것처럼 곡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같은 행위를 하고,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기를 바랐을 테다. 남에게 들려줄 음악은 만들지 않는다는, 작곡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나부나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매춘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가져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음악의 가치를 반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업적 음악을 매춘에 비유한 것은 노래의 화자지만, 사실 화자는 나부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音楽というにアウトプットした自分自身こうしてたちに安売りしている

음악이라는 형태로 아웃풋한 나 자신을, 이렇게 너희들에게 싸게 팔고 있다.

ヨルシカ / n-buna Official 유튜브 채널에 작성된 <봄 팔이> 소개

 

그렇다면 가사는 어떨까? 곡의 소개에서는 상업적 음악에 대한 혐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가사에서는 대중의 취향에 맞춰 값싼 음악을 하는 행위에 대한 혐오는커녕 상업적 음악에 대한 이야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가사에서는 더없이 짧은 유통기한의 사랑愛에 대한 이야기가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다뤄지고 있다. 여성 인권이 낮은 편인 일본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가 적힌 것으로 보아 남성 화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 음악의 상업성과 성별은 전혀 관련이 없을 텐데, 왜 하필이면 화자가 여성으로 설정되었을까?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아지랑이(陽炎)와 하루살이(蜻蛉)이며, 공교롭게도 두 단어는 모두 카게로우[かげろう]로 발음된다. 이들은 발음 외에도 덧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상업적 음악은 수익을 위해 대중의 취향에 맞춘 것이기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래에는 아지랑이처럼 덧없는 사랑, 하루살이처럼 금방 죽어버리는 사랑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과 소개에서 비난하였던 음악과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이 매춘을 의미하는 ‘봄 팔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지랑이나 하루살이는 일본의 유곽과 연결된다는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다. 유곽을 노래의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화자가 여성으로 설정된 이유까지도 설득이 가능하다.

 

言勿 などれておくんなまし しいだってでもえておくれ 左様蜻蛉つがいなられた

말하지 말라, 사랑 따위 잊어버리시오 괴로운 일이든 무엇이든 알려 주세요 그러한 하루살이 하나가 좋다면 잊어버리는 편이 낫고

/ひさぎ, 3번째 정규앨범 수록

 

陽炎今日などいつかれてしまうのでしょう?しいの 左様躊躇いのつがなららない

아지랑이나 오늘 따위는 언젠가 잊고 말겠죠 괴로운 걸요 그러한 망설임 중 하나가 사랑이라면 모르는 편이 낫고

/ひさぎ, 3번째 정규앨범 수록

 

하루살이는 유곽에서 하루의 유통기한을 지닌 사랑을 잡고 있는 여성이며, 아지랑이는 그러한 여성과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봄 팔이>의 가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제목의 매춘과 소개의 상업적인 음악 사이의 관계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이 정답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근거를 들어가며 가사를 해석하고, 비판할 뿐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요루시카의 모든 앨범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근거로 드는 경우가 있다. 함께 음악을 하던 에이미를 잃고 엘마는 음악을 그만두었지만, 그럼에도 원하지 않는 음악을 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비관하는 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봄 팔이>의 이야기는 엘마의 시선을 드러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살이와 아지랑이라는 단어가 유곽을 연상시키기도 함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곡 하나만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접근성이 더욱 높은 것은 엘마의 이야기가 아닌 매춘에 대한 비유이다. 나부나가 의도한 해석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봄 팔이>라는 곡은 누군가에게 매춘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작품은 창작자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감상자의 해석이 덧붙여지며 완성된다. 창작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언제나 작품 해석의 일부분은 창작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나부나의 의도가 설령 매춘과 관련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는 매춘과 관련이 지어질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외했어야만 했다.

요루시카의 곡 하나에 너무 많은 봄이 져 버렸다.

 

 

드라마틱하게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잘 팔린¹다고는 하지만

 

<봄 팔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요루시카가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루시카의 이전까지의 노래를 보면 그들이 반쯤 기울어진 채 돌아가는 사회를 인식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잘 담긴 곡은 2번째 미니앨범에 실린 <ヒッチコック(이하 히치콕)>이다. <히치콕>의 화자는 그저 푸른 하늘만 보며 살아가고 싶다고 토로하며 청춘에 가격표가 붙고, 나쁜 사람만이 이득을 보는 사회에 반감을 표한다. 이를 보면 요루시카가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하기에는 사실 이상한 점이 많다.

제목을 <봄 팔이>로 지은 것에 대해서는 노이즈 마케팅을 의심해볼 수 있다. 자극적인, 더 나아가서는 다소 부적절했다고까지 느껴지는 제목은 요루시카에 대한 시선을 모을 수 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봄 팔이>의 조회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은 그룹에게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을 모두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곡을 작업해야 하는 요루시카의 입장에서 이러한 노이즈 마케팅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심어줄 뿐이다. 무엇보다, 요루시카는 노이즈 마케팅을 시행해야 할 정도로 인지도가 없는 그룹이 아니다.

그렇다면 매춘에 대한 시각의 차이, 더 나아가 성性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요루시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비판이 매춘을 의미하는 제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나부나가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가사와 MV를 참고하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분노를 표출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매춘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노래에 사용한 것도 문제가 되는 점은 맞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나부나가 매춘을 ‘누군가의 불행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쳤다는 것이다.

 

現実売春よりもっと馬鹿らしい

현실의 매춘보다 더 어리석다.

ヨルシカ / n-buna Official 유튜브 채널에 작성된 <봄 팔이> 소개

 

위와 같은 표현은 불행의 경중을 따지는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너도 불행하지만, 내가 더 불행해. 매춘부의 이야기는 납작하게 평면화되어 음악을 하는 사람의 불행을 돋보이게 해 주는 배경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요루시카의 노래’로만 소비되고 끝나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매춘으로 비유한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비유는 매춘이 갖는 무게를 경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봄 팔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신의 문제를 매춘에 비유함으로써 나부나가 작곡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와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려하던 상황이다. 매춘은 <봄 팔이>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했으며 소재의 가벼운 활용 정도로 그쳤다.

<봄 팔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대게 이러한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곡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무논리 페미니스트’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동에 의문이 든다. 매춘이라는 단어의 용도에 주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매춘이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알고, 꺾여 나가는 봄에 안타까움을 여긴다면 단어의 선택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결론까지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남성인 나부나가 여성의 문제인 매춘을 사용하여 자신의 비극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특히 불편함이 느껴진다. 나부나에게 매춘의 무게는 어느 정도인 것일까? 그의 모습은 그가 사회에 만연한 비극들이 전시된 것 마냥 감상하고, 그 중 하나를 고민 없이 선택하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물론 아직까지 페미니스트가 욕처럼 사용되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강자’의 위치에서 항상 생활해 왔을 나부나에게 약자의 문제에 대해 당장 예민하게 반응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의견만큼이나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사회에는 널리 퍼져 있으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한다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은 다수가 후자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매춘은 ‘불행한 나라의 다른 사람들’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목을 매춘을 은유하는 <봄 팔이>로 지은 것은 경솔한 행동임이 틀림없다. 사회에서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종종 소비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틱하게 사람이 죽는 이야기는 잘 팔린’다는 히치콕의 가사가 요루시카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제목 <봄 팔이>는 나부나의 곡 설명과도 모순된다. 그가 정말로 값싼 음악을 생산하는 것을 혐오한다면 이러한 자극적인 제목으로 소득을 얻는 행동 또한 혐오함이 옳다.

요루시카의 <봄 팔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한다. 조금만 더 관대해지자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관대해짐이 옳은가? 누군가는 ‘여태껏 매춘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나올 때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요루시카의 곡에는 이토록 많은 비난이 나오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사람들은 <봄 팔이>가 일본 밴드의, 요루시카의 곡이라서 비판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요루시카’라는 그룹을 좋아했다는 점에서는 지지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 단지 그들은 요루시카에 대한 애정보다 사회의 변화를 선택했을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대의 탈브라, 탈코르셋 운동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예민한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사회를 바꾸는 불씨를 일으키는 것에 성공했다.

시들어가는 꽃에 가격표가 붙여지고, 행복幸에 돈¥이 들어간다는 히치콕의 가사에 고개를 끄덕였다면, 만일 우리가 이 사회가 정말 괜찮지 않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요루시카의 <봄 팔이>에 마냥 고개를 끄덕여줘서만은 안 된다. 어딘가에서 계속 꺾여 나갈 봄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매춘을 은유하는 표현은 가벼운 창작에서의 사용만이라도 지양되어야 한다. 나부나의 설명처럼 정말로 그가 값싼 곡을 씀으로써 봄이 전부 가 버렸다면, 남의 봄이 허무하게 팔리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후 6시부터 밤까지²의 추억과 함께 멋대로 사라진 우리의 봄

 

작곡가인 나부나는 이전부터 종종 남에게 들려줄 음악은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가 작곡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 나부나의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일부 본받아야 할 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항상 개인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만 한다.

개인이 지향하는 음악을 꺾고 대중에게 맞춰 곡을 작곡하는 행동들에 대한 비난은 요루시카의 곡을 소비하였던 사람들을 향한 것과도 같다. 요루시카와 그들의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별개가 아니다. 하지만 나부나의 행동을 보면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떼어놓고, 언제까지나 자신이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상업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매춘과도 같은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노래가 노이즈 마케팅이 아님에도 <봄 팔이>와 같은 제목이 붙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綺麗言語化されたわかりやすい作品

아름답게 언어화된 알기 쉬운 작품을 만든다.

ヨルシカ / n-buna Official 유튜브 채널에 작성된 <봄 팔이> 소개

 

‘아름답게 언어화된’이라는 표현은 요루시카의 노래와도 맞닿아 있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소비자들이 알기 쉽게, 그러면서도 소비자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적혀 있다. 하지만 요루시카의 노래에서는 특히 그렇다. 앞서 소개하였던 노래 중 <ただ君に晴れ>에서는 ‘마치 해파리 같은 달이 터져버렸어(海月のような月が爆ぜた)’나 ‘네 주머니에 밤이 피어나(君のポケットに夜が咲く)’와 같이 ‘아름답게 언어화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나부나를 화자에 투영시켰다는 앞부분의 해석과 함께 연결 짓는다면 ‘너희들에게 싸게 판다’는 표현에서의 ‘너희’는 요루시카의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의 작곡가와 그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은 결국 연결되어 있다.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을 ‘상업적’이라고 비하한다면 그 작곡가의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봄 팔이>라는 제목에 대한 나부나의 해석이 과연 제목을 성매매로만 받아들이게끔 하지 않기 위한 목적에 국한될 수 있을까? 작곡가와 소비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창작자와 동떨어진 창작물은 없다. 모든 창작물은 그 정도가 다를 뿐 창작자의 신념을 담고 있다. 창작은 사회에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것이 화자에 나부나를 투영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부나는 <봄 팔이>라는 곡을 통하여 대중들의 취향에 맞춘 상업적인 곡이 아니라면 팔리지 않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상업적인 곡을 쓰는 것뿐이라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작곡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수익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꼭 행복이 아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금이 필요하며, 이 정도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발버둥 친다. 나부나는 자신의 행위를 비관하듯이 말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비단 나부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부나에게 봄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노래를 쓰는 것이었지만 작곡을 생업으로 하며 그 봄은 팔려나갔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봄이 있으며, 나부나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에서는 각자 다른 형태의 봄이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시 누군가의 봄이 되어주기도 한다. ‘봄을 팔며’ 살아가는 생존방식을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은 모두의 암묵적 약속이다. 이러한 방식이 정상적이고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잃어버린 봄을 되찾아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대신으로 선택한 것이 있다면 그들이 잃어버린 봄의 소중함을 존중해 주고 다른 봄을 찾게 도와 서로가 살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헤매어 찾아낸 다른 봄은 처음의 봄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차선의 봄으로 생존해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시 누군가의 봄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봄이라는 맥락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과 엮여 있다.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연예인의 극단적인 선택에 애도를 표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이다.

요루시카는, 나부나는 <봄 팔이>를 통하여 자신의 봄이 팔렸음을 이야기했지만 없어진 것은 비단 나부나의 봄만이 아니었다. 요루시카의 곡을 소비하고, 요루시카를 사랑하고 아꼈던 모든 사람들의 봄이 없어졌다. 자신의 음악은 상업적이며 이는 매춘보다 더하다는 나부나의 표현은 다른 사람의 봄의 가치를 멋대로 떨어트린 것이다. 여름의 청춘을 노래하던 요루시카는 곡을 소비하던 사람들에게 청춘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지 않게끔 해 주고는 했다. 하지만 청춘은 봄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요루시카에 의해 팔려 나갔다.

그러니 없어진 것은 요루시카만의 봄이 아니다. 6시부터 12시까지의, 요루시카를 좋아하던 사람들의 6시간이 추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하루의 ¼을 지우고 일 년의 ¼을 지운다. 우리의 사라진 봄에, 안녕.

 

 

¹ドラマチックに人が死ぬストーリーって売れるじゃないですか 드라마틱하게 사람이 죽는 이야기는 잘 팔리잖아요 /요루시카, ヒッチコック

²밴드명은 <雲と幽霊>의 가사 일부에서 따 온 것으로, ‘밤밖에(夜しか, 요루시카)’로 해석된다. 또한 로고는 6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형상화하여 ‘6시부터 밤까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말 좋아했던 밴드였는데 괜히 속상한 마음에 적어 가져오게 되었어요. 사회 현상이 아닌 창작물에 대한 비평글을 써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이마저도 일부 사회적인 문제를 적고 있기는 하지만… 글을 끝마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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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은실

율오 님 안녕하세요. 요루시카의 음악을 즐겨 들으시나요? 저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뮤지션으로 몇몇 곡들을 찾아 듣고 있는데요, 이렇게 글틴에서 요루시카를 만나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이 드네요. 안 그래도 이번 앨범이 '매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것에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서 그 의견이 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해당 엘범을 찾아 들어보거나, 그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보지는 못했는데, 율오 님의 글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글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먼저 글에서 몇 가지 성질이 다른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물론 반드시 가사만을 인용해야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용한 구절이 율오 님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에 적당한가 하는 점을 짚어보아야…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