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꿈

글에 앞서…!

 

이 글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 직•간접적으로 겪어봤을 정도의 깊이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성폭력•가스라이팅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혹시 관련 주제가 읽기 불편한 글틴 친구들이 있다면 피해주세요.

그리고 묘사가 조금 노골적인 부분이 있는데 게시판 수위에 걸맞지 않다면 삭제조치 해주셔도 좋습니다…

 

함께 들으면 좋은 곡 https://youtu.be/mzgHlarY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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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중인격자인 꿈이었다.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호쾌하고, 다정하고, 유머러스하며,

분위기 띄우는 것을 잘 했고, 쉽게 욱했지만 그만큼 뒤끝도 없었다.

누군가를 쉽게 미워했지만 쉽게 좋아할 줄도 알았으며

본능에 솔직해 나태하고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아주 의지가 없지는 않았다.

데리고 다니면 즐겁게 해 줄 줄 아는

자타공인, ‘그런대로 봐줄만한’ 남자였다.

그런데 너는 그 남자의 다른 인격을 알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 정신줄을 놓고 요동치는 말처럼

야성적이고 정제되지 못한 녀석이었다.

경솔했으며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움직였고

기본적인 예의와 도덕성의 결여로

항상 경솔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번은 제 욕구대로 행동하다, 감방에 갇힐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너와 사랑에 빠진 인격은

이렇게 속삭였다.

그 놈은 너를 알지 못하니까

너랑 사귈 동안은 영영 잠재울 것이라고

그 애는 귀신이지만 나는 진실이라서

진실된 마음으로 너를 좋아해 줄 거라고.

늘 장난기만 넘치던 가벼운 시선에는

은근한 떨림이 베어 있어서

예쁘고 사랑스럽고 맵시나는 너는 승낙했다.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네가 잠을 자는데

녀석이 너를 깨웠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미소였다.

왜?

아무런 이질감 없이 대답하고 나서야 묘한 기류를 느낀다.

꼬롬한 시선 하며 흘기는 듯 너를 언뜻 언뜻 바라보는 야비한 시선. 속눈썹의 들큰한 농도며 목적지를 정해 둔 야욕있는 손.

별아?

그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을 않는다. 꼭 제 이름이 아닌 것처럼 무반응이다. 미소의 길이만 연장될 뿐이다. 시간과, 입술의 크기까지.

불길해진 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하지만 남성은 너보다 강하다. 손목을 붙잡고 쉬쉬, 입소리를 내자 너는 앉을 수 밖에 없다. 뿌리치고 가기엔 추한 꼴일 것만 같다.

너, 별 맞아? 아니면 별의 귀신이야?

응답이 없다. 어느새 네 어깨동무를 한 손이 틀어올라 네 목을 타고, 손가락이 춤을 춘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솜털을 자극시켜서가 아니다. 등줄기에는 땀이 나려고 한다. 차갑게 식은 땀이.

이러지 마. 나는 별과 사랑에 빠진 거야••• 우리는 초면이라고, 네가 무슨 짓을 하던간에 초면의 범절을 지켜주지 않으면 나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어.

하지만 그 말은 꺼낼 수가 없다. 그의 손가락이 계속 춤 박자를 타고 있기 때문에. 점점 내려와 이제는 네 가슴팍에 닿았기 때문에. 너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콧구멍이, 목울대가, 가슴이 콱 틀어 막힌 것만 같다. 스펀지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처럼. 손가락은 점점 빨라진다. 왈츠, 탱고, 이제는 디스코 댄스… 그리곤 너의 심장을 감싼 살결의 두 봉긋한 봉우리 주변을 서성거린다.

별아, 별아, 별아.

너는 겨우 이런 음성이나 내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귀신은 너를 삼킨다. 온 몸을 두 손가락으로 기어다닌다. 너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증발되고만 싶다. 모두 믿기지 않는다.

다음 날 눈을 뜨면, 사랑하는 남성이 인사를 한다.

잘 잤냐고, 오늘따라 눈이 더 부은 것 같다고 농담을 한다. 흘린 눈물의 값이겠지만, 너는 설명하지 못한다. 남성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남성이 물어 온다. 무슨 일 있었냐고. 음성이 자붓하고 흠결 없다. 그제야 남성을 똑바로 본다.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초리다. 너는 품에 안겨 울고만 싶다. 그러나 너를 토닥일 손은 너를 강제로 탐했던 손이고, 저 앙다문 입술은 너를 마구 건드렸던 침샘이 있던 것이다. 너는 이도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별에게 따질 수가 있나?

그는 그가 아닌데.

그의 몸에 상주하고 있던 귀신의 짓인데.

그의 진심은 그렇지가 않은데.

진실의 그는 나를 이렇게나 아껴주는데,

왜 허상의 그는 나를 이렇게 만지고 아프게 하려는 건가?

별아,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하니?

딜레마에 빠지고 싶지 않아 그를 외면한다. 밖으로 나간다.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온다. 한참을 운다. 머리가 울린다. 헛구역질이 난다. 사람들이 흘끔거린다. 시선이 따끔하고, 온 피부를 기어오르는 것만 같다. 왈츠, 탱고, 디스코 댄스… 그만, 그만. 무너져 내린다. 일어난다. 가여운 스스로를 지지대 삼아 걸음을 옮긴다. 갈 곳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럴 겨를이 없다.

시간을 어떻겐가 흘러 보내고 어영부영 집으로 오면 하늘이 어둑하다.

너는 이제 너를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충고와 조언 그리고 따뜻한 애정 어린 말들이 필요하다. 뻔한 동정 그리고 자존심을 추켜세워줄, 모든 악몽들을 무마시켜줄 멘트들이 필요하다. 아주 간절하다.

휴대폰을 켠다. 남성에게 많은 부재중이 와 있다. 네가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은 남성의 음성이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었어?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떠 볼 심산으로 너는 묻는다.

일? 무슨 일…

그냥, 내가 걱정할 만한 일.

너는 한숨을 내쉰다. 저 철 없는 목소리는 퍽 진중한 척 하고 있지만, 실은 어리광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을 한다. 종일 연락이 안 되었던 너가 불안했던 거다. 철부지 같은 저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척척 맞는다. 너는 한숨을 쉬고 망설이다가 문득 복받쳐 입을 열곤 웅얼거린다

별아 그 애를 봤어

누구?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 못된 너 말야

남성은 말이 없다. 이십초 쯤 지났을까 그제야 되묻는다.

그래서?

걔가 나를 만졌어.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응. 그리고 나는 네 얼굴 보기가 힘들어

목소리는 점차 또렷해진다. 점차 힘이 들어간다. 말할 권리를 되찾은 사람처럼. 수화기 너머에선 또 한참 말이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던 것을 알잖아. 그것은 내가 아니야. 나와 같은 신체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식도 생각도 다른 녀석이야. 우리는 분리된 사람이야.

남성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하지만 달리 무슨 말을 기대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가? 어떠한 그의 말도 너의 기분을 낫게 만들어줄 순 없을 것이다. 너는 허탈하게 고개만 도리질한다.

알아. 하지만… 나를 함부로하던 그 손길이랑, 야욕스런 표정을 나는 지우기가 어려워. 별아 나는 그래

남성은 또 말이 없다. 그리곤 겨우 네게 되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숨소리가 고르다. 의식해서 쉬는 것만 같다. 어떻게 해. 영영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얼굴 보지도 않고?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너를 아주 좋아하는걸. 사랑하고 있어. 겨우 내 몸에 사는 귀신 때문에 너와 헤어져야 한다면 아주 서러울 거야. 내가 아닌 놈의 과실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데에 제동이 걸리는 건… 싫어.

너는 납득한다. 기분이 아주 속상하고 좋지 못하고 쓰리지만, 그것도 네가 사랑하는 그 남성의 진심인 것이다. 이제는 아주 혼란스럽다. 머리 안에 이해만 가능한 이론들이 둥둥 떠 다닌다. 쏘세지를 넣었다 뺀 생수처럼 아주 불쾌하게, 기름만 둥둥 떠 다니는 것같은 기분이다. 감이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그래 별아. 너를 좋아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말이 맞아?

응. …너는 그 애가 아니니까. 그 애는 귀신일 뿐이니까. 우연히 마주친 것 뿐이니까.

나는 행인에게 강간당한 것이니까. 너는 그걸 품어줄 수 있는 내 사랑이잖아. 나 대신 나만큼 울어줄 수 있는 유일한…

그럼 됐어.

안도한 걸까. 퍽 담담한 남성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아픈 것은 나뿐일지도 모르겠다는 무의식이 뇌를 지배하는 것만 같다. 우엑.

나를 보기 힘들다고 했지.

남성의 음성이 다시금 너를 건드린다.

응.

하지만 너도 알잖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거리감은 메꾸지 않으면 영영 벌어지는 법이야.

봉합해야지. 튿어진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걸 알잖아.

별아, 그렇지만…

… 뭐. 내가 성형이라도 해? 손을 잘라? 내가 아니라고.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내 멋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날 사랑한다며. 나도 널 사랑하고. 그럼 뭐가 문제지? 지금 너를 보러 갈게.

별아, … 오늘 당장은 좀 그래. 며칠만이라도…

아니, 며칠이 지나면 너는 몇주를, 그 다음에는 몇 달을 연기하려고 할 거야. 무릇 사랑은 그렇게 희미해지는 법이니까.

형체도 없는 사랑을 남성은 어떻게 그리 잘 알까. 참으로 신기해지는 것이다. 너는 너와 그가 이제껏 강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유대감. 그런데 이제 보니 너만 불안하고 지치는 것 같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남성은 틀림없는 시간에 너를 보러 왔다. 너는 침을 몇 번이나 삼키면서 목이 쉬지 아니하게 만들었다. 어색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너를 맞이하기는 싫었다. 실제로 느끼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엔 네 음성이 목울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뭉큰하게. “봉합해야지.” 그렇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는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옳은 것을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실패자.

남성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꼭 아까 들었던 음성들처럼 말이다.

보고 싶었어.

…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고작 하루뿐이지만. 역시 너 없이는 안돼.

이 말이 평소처럼 애절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속이 시큰거리는 까닭은 죄의식 때문일까.

그리고 그 날 너는 그 남성과 잠자리를 가진다. 그가 네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염된 귀신의 손길로 너를 탐했다면 그것을 상쇄하고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진실의 손이 필요하다고. 진정한 사랑으로 너를 만지겠다고. 너는 이 순간을 꽤 여러번 상상해 왔었는데, 그 이상으로 부드럽고 너를 아껴주는 손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일까, 너는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에 토악질을 할 뻔 했다. 애써 참았다. 녀석이 옆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너는 귀신을 불러내 흠씬 두드리고라도 싶다. 하지만 저 몸은 사랑하는 남자의 몸이거늘. 역겹기만 하다.

그 날 너는 귀신의 꿈을 꾼다. 너는 누워 있고, 그 옆에는 귀신이 사랑하는 얼굴을 하곤 또 너를 히죽히죽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그 웃음은 어쩐지 너를 잘 아는 것만 같다. 그럴 리가. 저 녀석은 행인에 지나지 않고, 그래야만 하는 것을. 왜 너를 그렇게 바라보는가. 너는 그가 바라는 것을 알 수 없고 충족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너는 피해자다. 눈치를 봐야 할 것은 저 쪽이다. 선명하게 노려보는 대신 싹싹 빌어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 제발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길. 어쩌면 귀신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남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를 구속시키지 않으리란 걸. 물리적인 피해를 – 사실 입힐 수 있는지도 미지수지만-입히지 않을거란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근거 없는 당당함으로 너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일 테다. 무력감이 든다. 팔랑거린다.

그만해. 나는 네 몸의 주인을 사랑한단 말이야. 목이 멘다.

주인? 누가 주인인데. 귀신이 대답한다. 목소리조차 사랑하는 그와 같다. 나직하고, 장난기가 베어 있다.

그야 별이지. 너는 귀신일 뿐이야. 그렇다고 별이 말했어. 네가 그렇게 나를 대하면, 나는 별을 사랑하기 힘들어져. 좋아하는 마음을 배신해야 한단 말이야.

내가 귀신이라고? 그럴 리가. 우리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는데, 왜 저 녀석은 진실이 되고 나는 귀신이 되는 거지?

그야… 그야 별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건 무슨 근거지? 나도 생각을 할 줄 알고, 의식이 있고, 내가 진짜라고 믿는데. 그럼 나 또한 진실이 아닌가? 별이, 귀신일 수도 있지 않나?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애초에 너는 다인격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 현상인지, 장애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는 소리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배신감만이 치솟는다. 사랑하는 별의 몸에서 저 귀신이 나가 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귀신은 자신이 진실이고, 별이 귀신이라 말한다.

한 번도 누가 저 육체의 주인인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내가 사랑했던 것이 형체도 없는 인격이라면? 그것은 흡사 빙의와도 같지 않나. 그럴 경우 나는 이 사랑을 지속할 수가 있나.

저 귀신의 등장 이후로 모든 것이 꼬여 버린 것 같다. 귀신이 또 다시 몸을 기운다. 그리고 네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기묘하게도 이번에도 아무런 비명도 지를 수가 없다. 애초에 이것은 꿈이 맞나. 사실 내가 새벽녘 일어나 또 귀신과 소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탄력을 잃은 물풍선처럼, 눈에서 액체가 푸르르 빠져나와 힘 없이 떨구어진다. 동이 튼다. 귀신은 네 몸을 또 거칠게 다루다가, 지쳐 쓰러졌다. 귀신이 맞나. 귀신은 무력을 쓸 수 없다 했거늘. 실은 괴물이 아닌가.

이후로도 남성과의 동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새벽이나, 밤에, 이따금 너를 찾아오는 귀신을 너는 계속 만나야만 했다. 그의 몸에 사니까. 기생이 아닌 공존이었으니까. 쫓을 방도가 없었으니까. 귀신은 점점 너에게 접하는 일이 늘었다. 기억해보면, 첫 번의 만남에는 너를 애무하기만 했으나, 이후에는 말을 했었다. 이후에는 점점 긴 대화를 걸기도 하고, 마치 너를 세뇌시키려는 듯 윽박지르기도 했다. 자신의 몸이라고, 네게 사랑을 말한 녀석은 위선자일 뿐이라고, 너를 진정 사랑한다면 몸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으면서도 무리해서 너를 만나는 것이 기이하지 않는냐고. 앞 뒤가 맞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헐거워진 네 정신줄은 녀석의 고함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너는 슬슬 미쳐갔다. 숨구멍이 필요했나 보다. 그 때쯤 네가 나에게 연락했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이러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 이 모든 일은 내 꿈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네가 말한 일들마저 꿈이라면 그것은 몽중몽인가? 꿈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여튼 나는 네 고민을 들었다. 그러나 나도 너와 같이 아주 어리고 여린 소녀에 지나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 대한 여러 매뉴얼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할 방도를 몰랐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제 3자가 있다면 좋을련만. 당사자나, 매우 가까운 지인이 되어 상황을 지켜보면 이상하게도 합리화될 만한 유약한 사항들이 지나치게 드러난다. 모순적인 면이 지나치게 많아서, 어딘가에 토로하기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수 많은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무마되거나, 감형되는 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네 얘기를 들어주고, 나였더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말해주고,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그게 네게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잘 몰랐다. 어쩌면 나 역시도 내 마음이 조금 더 괜찮아졌으면 하는 선민의식 때문에 너를 감싸려 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네가 더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너는 내 품안에서도 울었다. 꺽꺽 소리를 냈다.

내 충고대로 너는 남성과 너를 둘 다 잘 아는 지인들에게 찾아갔다. 지인들 역시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그들이 만난 남성은 너를 사랑하던, 그, 재치 있고, 개구진, 함부로 사랑하는 여인의 몸을 더듬지 않는 인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남성이 다인격이라는 것마저 믿지 못했고, 나중에는 네가 편집증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너를 들쑤시기도 했다. 너는 화를 내기에는 너무 체력이 달렸다. 체념하는 밤은 밤새 앓았다.

하루씩 여위어 갔다. 네가 잠잠해지자 사람들은 역시, 뜬 소문이 맞나 보네. 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남성을 만나고, 다시 관계하고, 즐겁게 지냈다. 남성은 그들 옆에서 한없이 상냥하고 비굴했다.귀신의 그늘은 온데간데없었다. 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되어 귀신이 그를 지배하기 전까진. 너는 남성을 미워하는 법을 몰랐다. 그를 끌어안을수록 더 약해지고, 아파지고, 갸날퍼지는데. 그런데도 그를 놓을 줄 몰랐다. 그는 죄가 없으니까. 그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도 없으니까. 사랑했으니까.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니까. 감동의 온기를 나누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과 남성은 너무 즐거워 보였다. 남성은 네 눈치를 봤지만, 사실 그렇게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뻔뻔하게 네게 말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너는 잠시라도 그가 눈 앞에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인격이라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준 지인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 평생 안 볼 거니?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봉합. 봉합해야지. 봉합. 봉합. 귓가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어. 봉합.

지금도 너는 한 없이 여위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너와 그 남성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다른 색을 지닌, 다른 재질의, 전혀 다른 천 아닌가?

그는 너의 일부도 아닌데, 왜 그와 너를 봉합하는 것이 불가결해진 것인가?

억지로 봉합하기 위해서, 너는 너의 지분을 잃고 있지 않은가. 희생하기 위해 그를 승낙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이 개념은 같은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왜 사랑한다는 말로 당신을 묶어두면서, '귀신'이라 주장하는 거짓 인격을 내 쫓지도 못하는 것인가?

그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지분을 잃기 싫었던 것이다. 너는 아주 본질적으로 그를 의심했어야 했다.

사실 다인격 환자들은 인격별로 목소리도 다르고, 차림새도 다르다.

네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너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다. 그렇게 애쓰고 있다.

 

너는 분리시키고 싶지 않다.

 

 

 

너는 알고 있다.

네가 그를 떠나지 않아 그는 너를 해롭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건 꿈 이야기가 아니다.

꿈이었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이다.

 

별, 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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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

안녕하세요, 녹두 님. 소설 한달음에 읽었습니다. 별이와 귀신으로 다중인격인 듯한 인물이 등장하고, 별의 폭력으로 인해 뒤척이고 괴로워하면서도 별의 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의 심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행사한 폭력을 무책임하다거나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취기 때문이었다, 등등으로 진술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적인 남성들의 모습이 저절로 겹쳐져 읽으며 암담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인물 또한 후반부에 별이 귀신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듯해요. 스스로의 책임과 윤리적 문제들을 피해가기 위해, 처벌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아를 분리시켜 인식하고 진술하며, 사랑이나 인간적인 감정들로 모든 문제를 봉합하거나 누락하는 폭력의 끔찍한 속성을 파헤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능숙하고 유려하게 소설이 전개되지만 다소 인물이나 공간이 추상적이었던 것…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