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보지 못한 사람

 

만나보지 못한 사람

나는 오래 살지 못했다. 아직 살아가는 중이고, 흔히들 이제 성인이라고 말하는 나이인 스무 살도 안 된다. 만으로 치자면 아직 16년을 산 것인지라 나를 스친 사람이 적다면 참 적다. 어릴 적에는 이사를 꽤 많이 다녔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그 애들의 이름을 다 외우기도 전에 헤어졌다. 언덕을 힘 빠지게 올라야만 했던 집이 있었다. 기울어진 언덕길에 자리한 자그마한 토스트 집이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엄마가 종종 사주셨던 기억이 있다. 아주머니는 친절했었는데 다섯 살 때 일이라 얼굴은 흐릿하다. 그 시절 기억들은 전부 필름이 부분적으로 날아간 사진 같다. 한 동네에 오래 정착하기 시작하고서부터는 기억 남는 사람이 대폭 줄어들었다. 집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해바라기 슈퍼 아저씨. 자주 갔었는데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을 본 이후로는 안 갔다. 당시 여섯 일곱 살이었던 나는 비눗방울을 사기도 했고, 만화가 그려진 풍선껌을 사기도. 운이 좋으면 몸에 안 좋아서 먹지 말라던 젤리도 샀다. 그러다 정말 특별한 날이면 늘 같은 아저씨가 모는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동네를 빙빙 돌며 방지 턱을 지날 때마다 덜컹대는 게 재밌어서 행복해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진짜 바보 같았다. 이웃집 오빠들과는 물총놀이를 하다 친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 이유인즉슨 내가 그 오빠들을 초면부터 놀리 듯 흘겨봐서다. 아마 당시에는 수줍어서 그랬던 거 같은데 작고 찢어진 내 눈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사실 나와 친해졌다기보다 우리 오빠랑 친해졌다는 말이 맞겠다.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오빠가 친구들이랑 놀 때면 나도 따라 나가 동네를 지나는 소독차 뒤꽁무니를 졸졸 쫓았다. 뿌연 수증기가 펼쳐지면서 병원 냄새가 났는데, 난 그게 참 좋았다.

더 적자면 너무 길어질 거 같으니 여기서 컷.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난 경험해 본 사람도 적고, 인간이 자리한 추억보다 어쩌면 상황이 자리한 기억이 더 많다. 내가 겪어보지 못 한 사람은 아직 많은데, 그중에서도 난 남자를 겪어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란 이성적인 교제가 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누군가 나를 좋아했다거나 하는 일은 있어도 교제를 한 경험은 전무하다. 당시의 나는 누가 날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게 화두가 되어 남자애들이 떠들썩해지는 게 무척 싫고 창피했다. 한창 달아오를 나이의 남자애들은 늘 그랬다. 저들끼리 누굴 좋아한다고 얘기를 하고 그걸 퍼뜨리며 놀렸다. 소극적이라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나는 누군가를 사귄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당시에는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가 훨씬 고됐고, 남자를 이성으로써 바라보며 만난다는 거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사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성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인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건 이름도 모를 한 남자애였다. 소위 말하는 일진이나 날라리 그런 부류의 아이도 아니었다.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는 그 애의 인상이 좋았다. 맙소사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한테 빠진다니. 마의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약간의 사춘기와 함께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학교가 너무 싫었고, 참 많이 울었다. 화장실에서도 울고, 집에 와서도 울고. 그러던 나를 학교에 보내 준 사람은 그 애였다. 그러니까 그 애가 아니었으면 학교까지 기어서 갔을 정도로 정말! 학교에 환멸을 느끼며 등교 거부를 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좋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 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실제 하지만, 분명 내 눈앞에 존재해서 움직이지만 그 애는 시뮬레이션 같은 거였다.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바보처럼 인사를 건네고 도망간다든지 할 수도 없었다. 그 애는 만났지만 ‘만나보지 못 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만났다고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데에는 온전한 조건이 따라붙는다. 그건 상대와 형식적인 대화라도 몇 번 섞어보고, 어느 정도 상대의 성향을 파악할 때 해당된다는 철칙이다. 아, 그런데 바보 같은 열다섯 살의 나는 그 애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러니까 그 애는 그저 온라인 게임 속 반복적으로만 움직이거나, 지극히 설정에 의해 짜인 npc 캐릭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뭔지 모를 두근대는 감정이 식어갈 때 즈음, 그 애와 나는 기적적으로 같은 반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주어진 1년 동안 그 애를 만나지 못했다. 연분홍색 벚꽃이 후드득 떨어져 창가에 앉는 봄이 지날 때도, 뙤약볕이 내리쫴서 체육이 죽도록 미운 여름이 지날 때도. 내 생일이 걸친 가을이 지나도록. 운동장에 함박눈이 쌓여 친구들과 총총대며 걷던 겨울이 지나도. 난 그 애를 만나지 못했다. 뭐, 그래도 이름은 알았다. 그 애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이가 빠진 레몬 맛 사탕처럼 달달하면서도 시고, 입안 구석을 베게 만들어 찝찔한 피맛이 돌게 하는 존재지만. 그래도 전처럼 좋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어쩌다 한번. 하루를 흘려보내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듯이. 내가 그 애를 진정으로 만나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쉬움이 남긴 한다.

요즘은 정말 만나보지 못 한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 그건 그 애를 제외하고 말이다. 근처 인문계 여고에 재학 중이고, 남자라곤 집에 계신 아빠와, 방에 콕 박혀있는 오빠가 전부다. 간혹 버스에서 마주치는 중학교 때 남자 무리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난 정말로 0인 상태에서 무한대로 늘어지는 만남을 가져보고 싶다. 길고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그런 만남. 여전히 만나본 적 없는 그런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학생 때 무슨 연애냐, 공부나 해라 하지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심보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외모도 못났다면 못났고, 성격도 소심하고. 잘 하는 거라곤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게 전부인 나는 온통 여자 친구들 밖에 만나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남자인 친구와 진정으로 만나보고 싶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나는 책을 많이 읽고, 글쓰기를 즐겨 하는 문학 소년과 소녀를 동경해 왔다. 내게 전례가 없는, 방문이 없었던 만남을 할 상대가 문학 소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혼자서 그런 사색에 잠기는 게 참으로 어이없고 웃기지만, 뇌가 딸린 이상 상상의 깊이는 자유다. 그런 적도 있다. 스마트 도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출을 했었다. 얇은 인덱스 두 개가 책 사이에 가시처럼 콕콕 박혀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언짢았다. 책갈피를 해 뒀으면 좀 떼던가,라고 구시렁 대던 찰나 벅차오름이 느껴졌다. 투명한 인덱스가 마음 한편을 좀 쑤시는 문장 위에 부착되어 있었다. 내 생각이 맞노라면 전 대출자는 좋은 문장을 공유하고자 인덱스를 부착해 놓은 것이었다! 위와 같은 경험처럼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을 먼저 읽고 일종의 선구자처럼, 책 속에 꽃 같은 문장을 찾아다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에 대해 쭉 적어내리다 보면 정말 이 세상 어딘가에 실존할 거란 착각이 들 것 같아 두렵긴 하지만, 뭐 어떤가. 손가락이 딸렸고, 타자기도 있는데. 상상은 자유고, 착각도 자유이며 누군가에 대해 적는 것도 자유로운 일이다. 등단하지 않은 작가, 또는 그저 글쓰기를 즐기는 입시생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지금 내 위치에서 글쓰기에 크나큰 속박이 없다는 건 꽤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읽힐 일도 드물고, 그저 나 홀로 간직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읽어보며 허공에 발차기를 하는 게 전부다. 블로그 또는 일기장에 자유롭게 내 생각을 써 내린다. 나는 속박되어 있지 않다. 글 속에서는 만남도 자유롭다. 수영이라곤 사회복지관에서 방과 후 개념으로 몇 개월 배워 개헤엄 치는 게 전부인 나도. 나만의 글 속에선 국가 대표 급으로 자유롭게 헤엄친다. 만나본 적 없는 남자에 대해 적어보고 싶다. 인어처럼 꼬리가 달려서 텍스트와 텍스트 간격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상상해 보고.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의견을 섞은 글을 탄생시키고 싶다. 그리고 만나 본 적 없는 남자애는 ‘그 애’도 포함되지만 그 애에게는 미안하니까 조금 더 시뮬레이션스러운. 실존치 않는 인물 같은. 어쩌면 꿈속에서 살 법한 문학 소년에 대해 적어보고 싶다. 누가 볼 땐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무한대의 숫자를 꿈꾸는 내게 그 정도 글이야 겨우 몇 단위 자릿수를 차지하는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남녀 공학으로 전학을 왔지만 여전히 만나고 싶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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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일

우주디 님, '만나보지 못한 사람'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글이었어요. 재미있네요. 첫부분부터 확 시선을 끌어요. 토스트집 이야기부터, 해바라기 슈퍼의 배신, 버스를 타서 동네를 도는 이야기 등, 구체적인 에피소드 덕분에 어린시절로 잠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겁니다. 다들 어린 시절이 있으니까요. 문장력도 좋아서 술술 읽히고 깔끔하네요. 그 아이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네요. '그 애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이가 빠진 레몬 맛 사탕처럼 달달하면서도 시고, 입안 구석을 베게 만들어 찝찔한 피맛이 돌게 하는 존재지만!' 어떤 아이인지 이 묘사를 보니 알 것 같아요. 글쓰기의 자유로움에 대한 묘사도 좋네요. '지금 내 위치에서 글쓰기에 크나큰 속박이 없다는 건 꽤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읽힐 일도 드물고,… 더보기 »

연희동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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