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카야자

태풍 '하이선'이 온대. 바다 한가운데에 컴퍼스의 바늘을 움푹 찌르고 동그라미를 그린 것처럼. 4B 짜리 진한 바람의 곡선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또 목덜미를 물기도 하겠지. 네가 시퍼렇게 뜬 얼굴로 비틀거리며 육지로 걸어들어올 때, 난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블루 라이트를 맞으며 모든 소식을 들었단다.

햇볕 대신 따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빗물 대신 수돗물로 가득 채운 분무기를 뿌려주고
풀잎의 향 대신 꿉꿉한 천장에 스며드는 곰팡이
실내의 아레카야자, 태풍을 맞아본 적 없는!

확장된 베란다에 기어들어온 빗방울은 점묘화 찍듯이 타닥타닥 튕기는데. 창틀에 울컥이는 빗물을 닦는 주인은 혀를 쯧쯧 차며 구시렁거려. 머리채가 사방으로 뜯겨나가는 가로수 아래, 꽃잎을 모두 잃어 방황하는 무궁화 아래, 땅을 부여잡고 흩날리지 않도록 누운 잔디. 긴급 뉴스로만 볼 수 있는 야생의 흔적.

베란다 옆에 자리한 고무나무는 우쭐이는데,
하이선이 자신을 봤다는 거지. 거 태풍의 눈이라던가.

태풍에 끔벅이는 눈 따위는 없어. 티브이에서 봤거든.
하지만 태풍의 무서운 잔상이 저 화면 속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나를 큰 입으로 먹어치울까 봐. 선풍기 바람에도 움찔이는 야자 잎을 붙들지 못해. 주인보다 키가 곱절이나 큰 나무의 기둥을 꺾던 너는 어설픈 날갯짓으로 나비 흉내를 내겠지.

몇 날이 지나고 지나가면 죽어. 바비도 마이삭도 너도.
오늘은 나의 여덟 잎이 말라비틀어졌어. 주인은 날이 선 가위로 누런 야자 잎들을 싹둑 잘라내. 이렇게 살아도 결국 죽는 거야? 하이선, 너보다 미미하게 너보다 얇게. 나는 한 점 흔들림 없는 고요한 화초가 아니라

돌풍이 덮친 자리에 살아남은 푸른빛이 되고 싶다.

하얀 벽지만 남은 네모난 고향을 벗어나
아레카야자란 이름으로 둥근 바람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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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경

사랑하마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납니다. 시 잘 보았어요. 참 재미있네요. 다만 아쉬운 점은 아레카야자가 볼 수 없는 것들까지 보고 있다는 점, 의인화가 효과적일까 하는 부분입니다. 차라리 의인화하지 말고, 이 말투의 (사람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거예요. 주인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너무 인간적인 표현이죠. 시를 크게 바꾸라는 말이 아니라 의인화된 부분만 바꾸거나 줄이면 시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초고 땐 자유롭게 쓰다가 퇴고 때 더 어울리는 방법으로 바꾸거나 하기도 하니, 한번 시도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