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이름을 썼고, 나는 네 이름을 그렸다.

너는 나를 처음부터 사랑했기에
텅 빈 도화지 한편에는 내 이름부터 새겼다.
양팔을 펼친 종이의 여백을 어둠이라
잉크가 스며 두터워진 이름을 빛이라 호명하되
날 위해 한 줌의 사금 같은 문장도 쓰지 않았다.

단지 넌 쉼표만 하나 찍고
글도 모르는 내게 만년필을 넘겨줄 뿐.

쉼표,
곧 산산조각 날 무거운 고개를 숙이며
뒤틀린 꼬리는 갈고리처럼 제 머리를 할퀸다.
구멍 난 쉼표에서 훅 피어오르는 화염의 먼지,
펜촉보다 얇은 입자들은 종이에 다소곳이 앉아.
목격자 없던 폭죽놀이는 38만 년 동안 타오르며
그을린 자국으로 자신의 삶을 알리는가, 하고.
대폭발은 홀로 보내는 탄생…….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기 싫었다.

우주의 미끄러운 공기는 자유롭지만
이 도화지는 떠돌이별의 착륙지였고

불꽃이 사그라드는 침묵은
삶의 등불이 띄엄띄엄 켜진 뒤에 들렸다.
너라면 만년필로 수 천억 개의 점을 찍고도,
그들에게 숫자 섞인 이름을 짓지 않겠다며
드넓은 가슴을 두드리고 쓸어내리지 않겠는가?
분명 너는 내 이름을 가장 먼저 짓지 않았던가?

그런 나만이 유일한 방랑자였다.

두 눈에서 유리구슬이 굴러내리고
도저히 셀 수 없는 날들이 지나서야.
쌍둥이별의 궤도를 눕히고 기다란 선을 긋다가
선분의 끝이 가리키는 곳에 푸른 점을 보았다.
혼자 태어나지 않은, 내 이름 언저리에 묻은 점
나는 그 행성의 인간이 되었다.

우리의 종이에는 은하수의 향이 깊게 베었고,
내가 그린 너의 이름은 바다의 향이 난다.
파도와 함께 네가 슬며시 밀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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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경

사랑하마님 다시 댓글을 답니다. 이 시는 이전 시와 반대로 너무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추상적으로 느껴졌어요. 주제가 주제다 보니 사용하는 단어들도 자연스럽게 크고 추상적인 단어들이고요. 배경과 공간, 그리고 화자에 따라 시 내용이 아주 달라지지요. 큰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구체적인 단어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이 시는 조금 묵혀두고 나중에 다시 꺼내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