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약속(수정)

중간에 욕설이 나오니, 불쾌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그리고 여기 나오는 이름 모두 가명입니다!

 

모든 게 새로웠다.

새로운 풍경이 속속 지나갔다.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소녀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참 아파트가 많은 곳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 나 너무 떨려! 인천에 있던 학교에서처럼 친구들 많이 사귈 수 있을까? 서울에 있던 학교에 있을 때처럼 나 좋아해주는 남자애도 있을까? 여기엔 진짜 아는 애도 없는데…… 그래도 잘 할 수 있겠지?”

 

이제 막 10살이 된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기 바빴다.

여태껏 이사를 다닌 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버지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아는 친구 한 명씩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선 아는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긴장 되는 마음과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렇게 걸어가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저 표지판, 아까도 봤던 표지판이었다.

 

“엄마, 혹시 길 몰라?”

“아니, 학교 건물은 저건데. 정문을 못 찾겠네. 후문도 안 보이고…….”

“우와, 그럼 우리 길 잃어버린 거야? 탐험 같다!”

“탐험?”

 

대뜸 나온 ‘탐험’이란 소리에 어머니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응, 새로운 환경에 길까지 잃어버린 거지!”

 

마치 고대 유적지를 탐사하는 기분.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다가, 드디어 보이는 정문에 앗 소리를 냈다.

 

“저기가 정문 같은데?”

“응, 그러네. 그럼 갈까?”

“응!”

 

학교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소녀는 전학 수속을 하기 위해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의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고, 어머니와 선생님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소녀는 어느새 3학년 7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엄마, 학교 끝나면 나 데리러 와야 돼?”

“응, 알았어. 데리러 올게.”

“웅, 나 그럼 친구들 많이 사귀어서 엄마한테도 소개해줄게.”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친구들 많이 사귀어서 엄마한테도 소개해줘?”

“응! 엄마 잘 가!”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엄마를 뒤로 한 채 교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 내 이름은 백소희라고 해!”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덧붙여서 ‘잘 지내자’라는 말도 하면서.

하지만 소녀가 그 후로 몇 년 간 그 해맑은 미소를 잃어버릴 것이란 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2015년 12월 21일.

그게 내가 처음 이사 온 날짜였다. 날짜를 보면 알다시피, 이미 연말이었고 3학년은 거의 다 진행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처음 반 아이들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날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너 인천에서 이사 왔다고?”

“대박, 나 경기도 애 처음 봐!”

“말하는 것 좀 봐! 대박이야! 표준어다, 표준어! 야, 말 멈추지 말고 계속 해봐!”

“‘안녕하세요.’ 한 마디만 해보면 안 돼?”

 

그들은 들뜬 채 내게 계속 말하라며 재촉했다.

그날 3학년 7반엔 쉬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사람이 몰렸다. ‘쉬는 시간에 바깥으로 나가지 말 것’이라는 3학년 7반의 규칙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친하게 지내자고 말했다.

난 밝게 웃으며 화답했다.

‘이곳에서도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겠다.’하는, 그런 희망이 담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어렸던 난 몰랐다. 그들의 ‘관심’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관심이란 걸.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 그들과 내가 주고받은 연락처는 그저 핸드폰에 저장된 채였고, 사실은 연락이 온 것도 없었다.

하지만 12월이라고, 곧 4학년에 올라갈 것이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은, 어차피 또 이사 갈 것이니까 억지로 친구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태껏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1, 2년도 채 지나기 전에 전학을 갔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다시 아버지의 직업을 물었을 때, 아버지의 직업은 ‘회사원’이었다.

4학년이 되었을 때엔 상황이 반전된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사투리를 안 쓴다.”는 이유로 날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이어서, 윗잇몸이 좁은 탓에 위에 이가 좀 삐뚤빼뚤하게 자란 것을 보고 날 ‘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도서관에 다녀온 내게, “괴물은 책 읽는 게 아니야!”라며 책을 빼앗아갔다. 뛰지도 않았는데 뛰었다며 선생님께 날 일러 난 반성문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나와 친하게 지낼 것 같은 아이들은, 다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흘려 이간질 했다.

학예회 때는 <빨간 망토> 연극을 한다며 내게 준비물을 모두 맡겼다. 그 값은 2만원이나 되었으나,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값이었다. 당시 2000원의 용돈을 받던 내게는 2만원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그러나 월요일, 다시 학교를 갔을 때 아이들은 “우리 노래 부르는 걸로 바꿨어.”라고 말했다.

내가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모두 “네 핸드폰 번호가 없었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분명 내 핸드폰 번호를 가지고 있는 애가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 건을 그저 넘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5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아주 조금의 희망을 가지고 교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희망마저 짓밟아버리겠다는 듯, 내가 예측한 것처럼 역시나 날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소외였고, 날이 갈수록 난 왕따가 되었다.

반에서 나와 짝이 되는 걸 지독히도 혐오하고, 급식을 먹으려 줄을 서면 새치기는 일쑤였다. 1인1역 중 남의 것을 담당하기도 했다.

4학년 때 뒷담화였다면, 5학년에 올라가서는 대놓고 욕을 했다. 시XX, 병X, 멍멍이 같은 X 등등. 그때도 나의 별명은 여전히 ‘괴물’이었다.

그러다보니, 나의 희망은 완전히 짓밟혔다. 나의 자존심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갔고, 세상이 원망스러운 마음은 가득해져갔다.

나의 세상은 그렇게 캄캄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 친구들에게 말대답 아닌 말대답이란 것을 해보았다. 1인1역을 내게 떠맡기려는 아이에게 “싫어.”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욕설일 뿐, 나는 1인1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바로 가야 하는 학원도 가지 않은 채 집에 있는 엄마에게 갔다. 그리고 엄마에게 “날 왜 낳았어?”라고 물으며,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란 말을 내뱉었다. 엄마에겐 결코 하면 안 될 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6학년이 되었을 때.

깜깜했던 세상에, 빛과 같은 존재가 등장했다. 바로 지금도 소중한 친구인 유빈이와,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서도현이었다.

유빈이와 도현의 따뜻한 위로. 그것은 내게 큰 힘이 됐고,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어서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차피 너희들도 날 떠날 거잖아?’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날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내가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좋은 친구가 되어줄 뿐이었다.

깜깜하기만 했던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이 쏟아지며 점점 색깔은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렇게만 지났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리고 1년 쯤 흘렀을 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공부’냐, ‘친구’냐.

난 둘 다 잡을 힘이 없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가 놓치는 것도 일쑤였고.

그랬기에 난 정말 당당하게 ‘공부’를 버렸다. 그리고 ‘친구 관계’에 더더욱 힘을 썼다.

입학식 때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당당히 반장 선거에 나갔다. 반장 선거에 나가, 나조차도 뽑지 않아 나의 투표수가 ‘0’이었던 기억은 버려버리려고 애쓰며 말이다.

그 결과 나는 반장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그건 내 인생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감 때문에 일주일 학교를 빠지고 다시 학교에 갔더니, 나를 포함했던 4인조 그룹은 3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친구 한 명을 빼버리고, 나도 빼버린 채 그들과 잘 어울리게 아이돌이란 취향이 같은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심지어 후에, 갑자기 서도현은 잠수라는 것을 탔다. 한 달, 두 달……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서히 미련을 버리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렸다. 그러나 서도현은 그 기다림조차 끊어버렸다. 고작 카톡으로 “우리 헤어지자.”라는 말로.

친구들 앞에선 “걘 쓰레기야!”라고 했지만, 뒤에선 미련이 남고 너무나도 서러워서 몇 번이고 홀로 울었다.

시간은 늘 그랬듯, 내가 우울해진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인 흘러가기만 할 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2학년이 된 해였다.

2학년이 되자 할머니의 공부 잔소리는 늘어났다. 차로 3시간 거리에 계신 할머니는, 전화만 하면 꼭 빠지지 않고 “공부는 잘 하니? 공부는 안 하니?” 등의 소리를 늘어놓으셨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와 전화를 하고 싶은데, “성적이 오른 건 아니에요.”라고 하면 “어머, 이 시간에 뭐하니? 공부하렴!”이라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리시기 때문이었다. 늘 내 ‘성적’에 관한 일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90점은 넘었어요.”라면서.

하지만 속으로는 ‘공부를 도대체 왜 하란 거야?’, ‘난 할머니의 아들처럼 그렇게 공부를 잘 할 수는 없어요.’라고 하고 싶었다. 괜히 반항심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과서와 문제집을 피면, 다른 건 괜찮은데 과학과 수학은 점수가 점점 낮아졌다.

아무리 해도 수학은 기본적인 것 외에 심화로 들어가면 못 하겠고, 과학은 응용을 잘 못하다 보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공부 스트레스는 받고 있는 대로 받고 있는데, 자꾸 수학 선생님과는 트러블이 생겼다.

그런 와중에 지난 3년 동안 생성 된 ‘다른 사람들 시선 의식’이란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저 날 바라보기만 해도 “날 싫어하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려고 해도 잘 잡히지 않는 성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자꾸만 보는 내게 돌아오는 짜증은 스트레스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확 번져나갔다.

 

도대체 란 존재는 뭐야?”

 

나는 더 이상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친구들은 슬퍼할까? 가족들은…… 슬퍼하겠지. 동생은 슬퍼는 할까.’

 

난 유언장을 적어나갔다.

통장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은 부모님이 가지세요, 제 책은 기부하거나 버려주세요, 서랍에 있는 보물 상자는 소각해주세요. 그냥 편지 들어있는 상자일뿐이에요, 나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마요, 등등…….

그렇게 준비를 하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SNS계정은 탈퇴를 해야 할 것 같단 생각.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맡길 순 없었으니까.

난 그 길로 유튜브 계정부터 하나 하나 지워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세상에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일까? 구독을 취소하고 계정을 탈퇴하려고 들어갔는데, 들어갔을 때 알고리즘을 타고 온 영상인 <생존약속>이란 노래가 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잘 듣던 심규선 님의 노래였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클릭했다. 마치 죽으려고 했던 것은 잊은 듯이 말이다.

그런데 듣다가, 그렇게 죽고 싶을 만큼 아팠던 것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증거란 말이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잠시 멈칫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특히 ‘그만큼 살고 싶다는 증거’에서.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마치 가뭄이 왔던 곳에 소나기가 떨어지듯이.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한바탕 울기 시작한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울다보니, 아까의 생각도 잠잠해진 듯 했다.

‘이렇게 죽기는 아깝다, 웹소설 독자님들과도 약속한 게 있다, 난 이렇게 죽긴 아까운 존재다, 발악은 한 번 더 해보고 죽어야지 않겠느냐.’란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리고 최근 들어 친구, 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 생각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었다.

정말로 살겠노라고.

그리고 나 스스로, 내가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던 ‘유서’를 없애고 ‘제목 없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그리고 난 그날, 두 문장의 글을 써내려가며 약속했다. “살아야겠다. 열심히 살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난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나와 굳게 맺은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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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일

작야 님 안녕하세요. 수정 원고 잘 읽었습니다. 심규선 님의 생존약속 노래를 들어보았습니다. 가사에 삶의 의미가 담겨 있네요. 음악이 정적이면서도 힘이 있어서 도전할 힘을 주네요. 좋은 노래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처음 올린 원고를 다시 훑어보니 할머니 이야기가 추가된 것 같아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힘들었겠군요. 여러가지 상황이 더해져서 존재의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위축이 되겠죠. 그 시간을 잘 견뎌온 작야 님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지를 다지는 모습도 좋네요. 작야 님을 구원한 것은 글쓰기였군요. 계속해서 글을 쓰실 테니, 앞으로 글을 쓰실 때 그 소재를 좀 확장시켜주세요. 우리 사회 청소년들이 왜 우울증에 많이 걸리는지 등등 그러다보면…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