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그 일은 아주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일어났다. 아주 우연히 일어났고 아무도 의도치 않은 일이니 어쩌면 실수에 더 가까울 일이었다.

(거짓?)

 

우린 너무 어렸다. 열여섯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해야 할 공부가 있었고 꾸려가야 할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에 출산은 단 한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사항이었다. 

(확실한 진실)

 

 

열여섯 생일날 서로의 몸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졌던 것은 결코 서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현지유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으려 애썼다. 초콜릿 케이크 때문에 약간은 달착지근했던 세 번째 키스와 조금은 야릇했던 좁은 방의 분위기도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어쩌면 의도된 것일지도 몰랐다. 지유는 '남자친구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준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구절절 더 많은 얘기를 덧붙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둘은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려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지유는 남자친구와 조금 더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원했다. 우린 발에 채이는 보통의 중학생 커플과는 다르다고. 단지 그런 생각 때문에, 그리고 달아오른 이 분위기를 깼다가는 어색한 그 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심결에 저지른 일이었다. 지유네 반 담당 도덕 선생은 청소년 관계가 문란한 학생만 하는 것이며, 그, 조그만 쾌감 하나 느끼려다 미성년 부모라는 딱지가 붙는다고 했다. 현지유는 조그만을 아주 힘주어 말하던 도덕 선생의 눈동자를 좇으며 자신이 저저번주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했더랬다. 그녀는 청소년 낙태가 무책임한 행동에서 비롯된 무책임한 결과라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무책임했던가? 인터넷에서 피임법을 보고 실천했고 (그 피임법이 실패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건 현지유와 김준성 둘 다 몰랐다. 관련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계 후 한 달째 되던 날, 임신 테스트기까지 사용했다. 이정도면 적어도 무책임하게 행동한 건 아니라고 믿었는데.

 

이 길다란 흰색 막대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두 줄짜리 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책임한 행동의 무책임한 결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지유는 그 날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할 터였다. 퀴퀴했던 화장실의 공기와 온갖 오물과 뭉쳐져 버려져 있던 휴지뭉치들, 쉬는시간이라 웅성이는 말소리가 복도를 타고 화장실까지 닿았던 것과 낙서로 뒤덮인 학원 화장실에서 하얀 막대를 응시하던 자신의 손 따위를. 

그때 지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고스란히 기억할 것이었다.

 

 

"나 임신 했어. 네 아이야."

지유는 준성에게 희미한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 사진을 내밀어 보였다. 핸드폰을 받아들고 준성은 할 말을 잃었다.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언제? 왜? 의식의 흐름은 현지유의 생일날로 김준성을 이끌었다. 준성은 곧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우리 이제 어떡해?"

현지유가 묻자 김준성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리 부모님들은 스물 두 살 누나의 통금시간을 정하고, 놀러 갈 때마다 누구랑, 언제, 어디서, 언제까지, 무엇을 하는지 보고를 시키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고 말한다면?

"…그러게."

"부모님한테 말 해야해. 계산해 보니까 삼 주하고도 오 일이야. 검사는 사흘 전 했는데 주말이 끼어 있었잖아. 이런건 얼굴 보고 말해야 할 것 같았어.."

"근데 어쩌면,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디서 봤는데,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이 높아서 유산이 잘 된다니까,"

"나보고 지금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하란 말이야?"

지유는 준성의 말 끝을 잘라먹고 말했다. 화가 난 투였기에 준성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좀 기다려 보자고. 한 이 주쯤 기다리다 그래도 자연 유산이 안되면 그때 말씀 드리자는 거지. 지유야, 우리 부모님 진짜 엄격한 거 알잖아.."

준성이 말렸지만 지유는 그 날부터 조깅을 시작했다. 이불을 팽개치고 배를 드러낸 채 자기도 했고, 일부러 계단에서 발을 헛딛은 척 넘어지기도 했지만 이 주가 다 지나도록 하혈을 하지 않았다. 생명이란 건 잡초처럼 질긴 존재구나. 지유는 생각했다.

 

 

단지 조금 일찍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를 죽이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지유는 아이를 낳고 싶었다. 되도록 직접 키우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입양을 보냈으면 싶었다. 보수적이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준성네 집은 낙태는 안된다며, 지유의 의견을 반겼지만 지유네 집안에선 애 앞길 막을 일 있냐며 화를 냈다. 여섯 살 많은 지유의 오빠 현지승은 동생을 설득했다.

 

"지유야, 오빠는 낙태도 해본 적 없고, 아이도 낳아본 적 없고 월경조차 해본적 없지만, 오빠는 네가 너를 조금 더 생각해줬으면 해."

고요하고 야심한 밤이었다. 그 밤에 지승은 살그머니 문을 밀고 동생의 방에 들어갔다. 지유의 눈치를 보며 책상 옆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지승은 자신의 옆에서 공부를 하는, 아니 자신이 열여섯 임산부라는 사실을 잊어보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답을 채점하던 지유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발딱 들었다.

"아이라 해도 아직은 두 달 된 세포일 뿐이야. 물론 네가 낳고 싶다면, 부모님이랑 오빠도 네 의견을 따라 주겠지만 오빠는 네가 너를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낳아야 할 것 같아. 일단 양육비는 저쪽에서 준다니 돈 걱정은 없잖아."

지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 얘기가 아니라, 열일곱에 아기 낳으면 학업은 고사하고 친구들이랑 제대로 놀지도 못할거고, 몸은 몸대로 상할거고. 열일곱에 아기 낳고 몸 다 상하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데. 저쪽 집안이야 종교도 있고 자기 자식이 애 낳는거 아니라고 막말하는거지만.."

지승은 지유의 문제집을 흘끗 보았다. 지유답지 않게 붉은 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 

"뱃속 태아를 위해서도 그게 더 좋은 선택이야. 아무리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저쪽도 제 자식 미혼부 만들기는 원치 않는 눈치고, 결국 쥐꼬리만한 돈 주고 너한테 아이까지 떠맡길거야. 열일곱 미혼모와 열일곱 미혼모의 자식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기는, 지유야. 네 생각보다 훨씬 힘들거야."

지승은 지유의 어깨를 토닥이곤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밤 늦었으니까 공부 좀 하다 얼른 자."

방음 안되는 벽을 타고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하고 야심한 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그저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지유는 그게 단순한 세포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태동을 느낄만큼 세포를 품고 있진 않았기에 세포의 움직임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따르면 착상 된지 세 달째에 접어드는 세포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단다. 단지 산모가 그걸 못느낄 뿐이다. 지유가 도서관에서 남들 눈치 보느라 정독하지는 못했던 산모백서에 따르면, 착상된지 세 달 된 생명체는 세포보단 아기에 조금 더 가까웠다. 그래서 지유는 '세포' 대신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붙여주리라 마음 먹었던 소리란 이름을. 그러곤 작게 소리내어 이름을 불러주었다. 소리야. 소리야. 

 

어영부영, 낙태를 한다 만다 온갖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지유는 임신 3개월차에 접어들었다. 3개월에 접어들자 지유는 공포에 질렸다. 몸은 무섭도록 빠르게 변해갔다.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고 거무죽죽한 임신선이 생겼다. 얼굴에는 몇 년만에 여드름이 났다. 심란한 지유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입덧이었다. 지유가 아는 입덧이라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밥을 먹다 욱, 소리를 내며 입을 막고 곧장 화장실로 직행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게 흰 옷을 입고 보송보송한 곰인형을 끌어안으며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요"하고 말하는 생리대 광고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소리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식을 거부했다. 지유는 열여섯 인생 처음 물비린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마치 마구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신 음식이 당겨 소면 국수에 식초만 뿌려 먹는 지유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과 지승은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삼켰다.

낙태를 한다 만다 온갖 논쟁이 이어진 끝에 낙태를 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 빠르게 합의를 본 것은 소리가 점점 자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쪽이든 빨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현지유가 갑작스런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지금 자신에겐 너무 벅찬 일이라고 말한 이유가 컸다. 양가의 의견이 일치하는데 꼬박 칠 주가 걸렸고 칠 주의 시간은 앞서 말했듯, 소리가 세포덩어리가 아닌 아기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리의 얼굴 윤곽이 뚜렷해지고 뇌세포가 완성되었다. 소리는 둘 중 누굴 더 닮았을까. 지유는 산부인과로 가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아기 이름은 소리로 하려했어. 소리, 소리.."

팔 월 중순의 토요일, 이른 아침 공원은 고요했다. 매미마저 울지 않았다. 등산복을 입은 운동하는 할머니들을 제외하곤 공원에 그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름 방학을 맞았지만 보통 아이들처럼 영어 특강을 듣거나 수학 과외를 받거나 하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들은 둘에게 마음 추스를 시간-다 정리하고 너희는 다시 보통 청소년이 되는거야 올 사월에 너희는 사고를 치지 않았고 보통 아이들처럼 공부했어 라고 기억을 조작할-을 주었고, 그게 바로 여름방학 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정했었구나."

준성은 지유가 세포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기겁을 했다. 이미 낙태하기로 서로 협의를 본 상태에서, 곧 죽을 아이, 아니 세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정을 주어 무엇할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름을 붙인건지. 마음만 더 아플뿐인데. 준성에겐 담담하게 세포의 이름을 말하는 지유가 곧 죽을걸 아는 비실비실한 금붕어를 사와 현실을 잊으려는 듯, 알면서도 굳이 이름을 붙여주는 어린 아이를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던 자신과 달리, 세포에게 이름마저 붙여주는 지유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유 자신도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소리가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미묘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길게 보면 소리와 자신, 그리고 준성의 미래를 위해 그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은 당당해 지다가도, 소리는 세상에서 첫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자신이 죽여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메스꺼웠다. 왜 그러는지, 지유도 몰랐다. 준성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다. 지유는 예민하게 굴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닫아버렸다. 준성은 그런 지유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더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소리가 죽은 직후부터 준성의 부모님은 당장 그 애와 헤어지라고 준성을 들들 볶았다. 그렇지만 준성은 지유가 좋았기에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 사랑으로 아픈 지유를 보듬어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유가 두 달째 이상하게 굴었다. 언젠가는 연락이 되지 않아 집 앞으로 찾아갔다 하수구에 핸드폰을 떠내려 보내는 지유를 만났다. 준성은 미칠 것 같았다. 더는 아픈 사람을 보듬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양가 부모님은 준성에게 그가 이 상황을 어른스럽게 잘 대처했다고 했지만, 결국 준성도 청소년이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주말에 잠깐 만나.

시 월의 어느 목요일, 준성은 지유에게 그렇게 카톡을 보냈다. 문자 옆 노란색 1이 거센 바람을 만난 낙엽 무더기처럼 금방 사라졌다.

-뭔데 그래. 지금 말해.

-지금 말하기엔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래. 토요일 3시에 공원에서 만나.

거짓말. 지금 당장 말해도 일 분이면 끝날 대화란 걸, 준성은 알았다. 지유 쪽에서도 내심 둘의 이별을 바라는 눈치였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자존심 때문에라도 구질하게 안 잡고 순순히 보내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준성이 굳이 시간까지 내어가며 이별통보를 얼굴보고 하는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준성은 카톡으로 이별 통보하고 잠수타는 그런 미친놈으로 기억되기는 싫었다. 얼굴 보고, 정중하게 헤어지자 하는 게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해서였다.

 

언젠가 빠른 시일 내에 이별 통보를 해야지 하고 마음 먹고있던 찰나였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사 월 전에 그러니까 그 일이 있기 전에, 지유는 다른 보통의 연인들처럼 준성과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깨 볶으며 살아가는 먼 미래를 상상해 봤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에 나랑 걔 반씩 닮았으면 좋겠다. 입 밖으론 낸 적 없었으나 적당히 달착지근한 몽상이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부터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게 두려워졌다. 나는 일찍 착상됐다는 이유로 이미 아이를 한 번 지웠는데. 준성과 자신 사이에서 또 아이를 낳는다는 건 소리한테 죄 짓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준성을 반 씩 닮았을, 여자일지 남자일지 모를 소리를 죽여 놓고 새롭게 둘을 빼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건 못할 짓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기 전까지, 아니 그 전에 헤어지더라도 최소한 이 일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너는 이미 결정을 내렸구나, 준성아. 네 결정이 그렇다면, 나는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내가. 지유는 씁쓸하게 웃으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중3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지유는 남들 다 가는 학원대신 상담센터로 향했다. 부모님이 혀를 차며 알아봐 주신 상담센터는 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나라 지원으로 운영되는 조그만 센터였다. 

상담센터에서의 마지막 상담 날, 지유는 상담사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사람들은 아직 그걸 붙잡고 슬퍼하냐며 이젠 잊을때도 되지 않았니, 하고 묻는데 저는 아직 그럴 때가 안 됐어요. 아직 소리를 생각하면-어떤 사람들은 삼 개월 된 세포에게 그렇게 의미 부여하냐 묻겠지만- 죄책감이 드는걸요. 피지도 못한 꽃을 꺾어버렸다는 느낌."

지유는 검지와 엄지로 톡, 줄기를 꺾는 시늉을 했다. 전체적으로 뾰족한 인상을 지닌 상담사는 지유의 말을 가만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유 학생, 지유 학생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제가 강조하던 말이 있죠."

회전 의자를 빙글 돌리며, 지유는 그 말은 아마 골백번은 더 들었을 거라는 투로 말했다.

"어떻게 하든 지유 학생은 분명 후회했을 거라고."

"맞아요. 지유 학생이 소리를 낳았어도 분명 후회했을거에요. 세상이 지유 학생에게 붙인 딱지 때문이든, 말 안듣고 속을 썩이는 아이 때문이든,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이든 학교에 퍼져버린 소문 때문이든."

지유가 얼굴을 찌푸리자 상담사는 덧붙여 말했다.

"물론 소리와 함께 해 좋은 일도 있었을 거에요.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을 보거나, 입양을 가 양부모와 함께 롯데월드에 가 솜사탕을 먹는 모습을 본다던가, 일이 고되어도 집에 돌아와 반겨주는 소리를 안으면 피로가 풀린다던가 하는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지유 학생, 이건 조금 더 살아 온 사람으로서 말하는 거에요. 미성년자 때 아이를 낳은 미혼모는 결코 우리 사회가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할 수 있는 일에 제약도 많고. 족쇄가 하나 채워지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설령 최선의 선택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읍시다."

"생명과 좀 더 자유로운 삶, 두 가치를 저울질하는 것 같아서 썩 내키지 않겠지만요."

지유는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상담사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봤다. 

"그리고 자꾸 예전 선택이 후회가 된다면, 후회를 할 때마다 이걸 꺼내 글을 써보세요."

상담사는 책상 서랍을 열어 공책을 꺼냈다. 반들반들한 코코아색 가죽 표지에 '현지유'라 각인 된, 꽤 고급스러운 공책이었다. 현지유는 두 손을 뻗어 공책을 받고 속지를 넘겨보았다. 하얀 속지에 검은 줄이 가지런히 그어져 있었다.

"저 글 잘 못쓰는데."

"잘 못써도 괜찮아요. 그냥 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의의를 둬요. 나는 지금 무슨 감정을 겪고 있는지, 왜 그런지. 그런 것들을 찬찬히 기록하다 보면 물고기 낚듯 감정을 끌어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거에요. 더 시간이 흐르면 물고기를 손질하는 지유 학생의 모습도 더불어서."

그 말을 하고 상담사는 손 끝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만약 지유 학생이 지금 일을 떠올려도 상처 받지 않을만큼 단단해지면 그 글을 공유해줘요.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또다른 현지유들을 위해 너만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아냐 하고 손을 내밀어 준다면, 선생님은 참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다면 그냥 듣고 잊어요. 지유학생."

공책 한 권 받고 상담이 종료되었다. 지유는 상담사의 말을 따랐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는 거리를 걷던 12월 25일에도, 친구 민지와 보신각에 가서 제야의 종 울리는 것을 지켜보던 1월 1일에도, 새학기가 시작되던 3월 2일에도 쓰고, 쓰고, 또 썼다. 4월 19일, 산으로 쓰레기 줍기 봉사를 가서, 친구들이 야호 소리를 지르고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었던 날 저녁에도 공책에 글을 썼다. 다음날 저녁에 울면서 공책을 펴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하다 지유는 깨달았다. 자신은 꼬박 넉 달 동안 공책 일곱 장을 썼을 뿐이며 그 일곱 장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다는 것을. 

지유는 그 사실을 깨닫고 왠지 모르게 허탈해 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그 감정들은 다양하고도 큰 것 같았는데, 껍질을 벗겨보니 생각보다 작았다는 일종의 허무함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나머지는 전부 겪어보지도 않은 남들이 씌운 가짜 껍질, 가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감정의 실체를 직접 보고 지유는 결심했다. 나도 글이란 걸 한번 써봐야겠다고.

지유는 실제로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숙성된 감정 중에서는 시간이 흐르자 빛이 바래 별 것 아닌 것들도 있었던 반면, 상처를 아주 날카롭게 찌르는 감정들도 있었다. 힘들기도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결국 전부 지워버렸지만) 산부인과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쓰던 때는 너무 힘들어 악몽을 자주 꾸었고 그만 둘까 수십번도 고민했었다. 그런 지유를 항상 일으켜 책상에 앉히던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또다른 현지유들' 때문이었다. 별로 이타적인 성격이 아닌 지유는 자신 스스로도 그걸 신기해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또다른 현지유들 때문이라니.

 

 

한 청소년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 

부모님들과 주위 사람들이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 지유는 무사히 스물 여섯번째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지유는 여섯 시면 흐느적 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회사로 향하는 그런 '보통의' 사람으로 자라났다. 한 달 전부터 대학 동기 휘연과 밸리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둘 다 정말 끔찍한 몸치라는 사실만 깨닫고 어제 그만뒀다. 삼 일 후면 부모님을 모시고 이탈리아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스물 여섯 현지유는 퇴근길에 떡볶이를 사서 슈츠를 보며 먹길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다. 

지유가 썼던 글? 아, 열여섯 현지유가 쓰기 시작해 열일곱 현지유가 끝맺은 그 글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보통 주인공이 힘들었던 시간을 갈아 넣어 만든 작품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기 마련이지만 그러진 않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낙태한 여중생이 쓴 글' 따위의 제목이 붙어 잠시 돌아다녔고, 잘 알려지지 않은 케이블 방송사에서 지유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 연락이 한번 왔을 뿐이다. 예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출간 제의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고 여지껏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이야기는 끝없이 생산되는 온갖 밈과 짤방, 소름돋는 뉴스들과 십 년의 세월에 묻혀 조용히 사라졌다. 인터넷에 글을 써 올린 일로 지유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 글을 보고 생각을 달리 하거나 위로받은 사람들은 몇 있을지 모르지만, 단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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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현

오랜만에 확실한 서사가 존재하고 잘 마무리까지 되어있는 글을 만나 반가웠습니다. 지유라는 인물이 많이 좌절하지 않도록 작가가 사랑해주어서 좋았어요. 특히나 마지막에 밸리댄스를 배우다가 포기하고, 퇴근길엔 떡볶이를 사먹는 사소한 일상을 누리는 모습을 그려주어서 적잖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작게 보면 흰 바탕에 적힌 까만(혹은 다른 색도 있겠지만요)어떤 것, 글자라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요. 어떤 글들은 누군가 봐주지 않고 작가에게 조차 잊혀질테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일상이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일상보다 대단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윤서호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금 느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