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예측, 자유, 그리고 나

나는 글을 쓰게 될 때 어떤 느낌의 말에 사로잡혀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시작하게 된다. 근데 그렇게 쓰다 보니 글쓰기가 그저 글의 중심을 향해 나가는 길 닦기 정도의 일이 되어서는, 그것도 대충 쓱쓱 훑어대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상상의 형체를 찾아 떠돌기 마련이다. 또 그렇게 쓰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시작을 웅장하게 펼친 적도 있었는데, 그 뒤 작업은 마치 요란하게 흩뿌려댄 개막식 폭죽의 잔해들을 수거하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또 한 구상이 머릿속 어딘가를 유랑하다 사라진다.

어젯밤도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다. 나는 베개를 꽉 쥔 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댄 채로, 글쓰기를 강제종료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제는 생각이 끊이지 않게 떠올랐다. 단순히 부유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많은 압력으로 인해 터질 듯이 끓고 있었다. 너무 오래 묵혀둔 탓에 일제히 시위를 벌였다. 동시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창작하고자 쥐어짜내는 주머니가, 갑자기 터지려고 하는 것이 됐다. 나는 이것을 한밤중에 토해내려 했다.

처음에는 그대로 받아적으려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펜 끝에서는 오로지 검은 잉크만 짓이겨져 나올 뿐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유를 알았다. 내 많은 인상들이 너무나도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내 표현과 묘사방식을 통과하지 못한 채 머리가 꽉 막혀버린 것이다. 아마 이것이 두통의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차근차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작성하기도 했던 시는 해결책에 어울려보였다. 이 수많은 생각들을 한데 몰아넣고 시라고 우겨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도무지 그것들을 써낼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 하는 식으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것들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었고, 어떠한 사건이나 상황도 아니었고, 인상이란 말 이외에는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 시는 아마

인상,
인상에 인상을 인상하고
인상, 또 인상하지만
아주 인상한 인상

따위의 글이 됐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 과장된 표현도 아니다. 나는 그 인상들을 적어내려고 조사와 미사여구만 잔뜩 덕지덕지 붙여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나를 위한 쇼를 준비하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인상들은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활자의 장막 뒤에서 그대로 벌거벗은 채 어떤 것도 걸치지 않으려 했다. 차마, 인상 위에 글씨를 억지로 박아 넣었다가 흉터를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줄노트에는 다만 첫 글자를 떼려다 실패한 흉진 문장이 즐비했다. 줄글을 아무 의미 없이 내려 갈기는 것도 인상 없이 묻어나오는 영양가 없는 글 모형 같은 것이 될 뿐이었다.

나는 이 무의미한 씨름을 수도 없이 반복한 후에야 인상을 남기는 것을 포기했다. 이 수많은 아이디어를 몽땅 담고 있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버거웠다. 그리고 나는 흥얼거렸다. 흥얼거린다기보다 좀 작고 얕은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밤이라 조용히 해야 하기도 했거니와, 셀프 고문에 몸부림치는 비명 같은 거였다. 그러자 뭔가 이루어졌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인상의 끝뿌리라도 잡아낸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노랫말에는 정해진 자음도, 박자도, 음률도 없이 즉흥적으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전의 시를 쓰기 위한 노력은 폭포수를 페트병에 담으려는 행위에 불과했다면, 이 흥얼거림은 그 폭포에 물길을 터놓은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도 됐다. 나는 즐겼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흐름에 잠시 머리를 맡기고 흔들어보기도 했으며, 가끔은 손뼉으로 호응도 해주는 관객이 되었다. 인상들의 지시는 지휘자의 봉보다는 어떤 간질 환자의 손끝 같았다.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는 나는, 그들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긴고아의 고통은 잊은 채 불경처럼 소리를 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인상들은 불편했다. 인상은 어느새 자기들끼리만 형상을 갖춘 채로 내게 명령했다. 소리는 툭하면 기성 노래의 훅으로 넘어가려고 하고 단조로운 하나의 선율만 흘러나오는 내 흥얼거림을 폄하하기 시작했다. . 화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화음을 하나로 뭉치려는 인상의 뜻을 따라야만 했다. 나는 인상들이 점차 마음에 안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 한계를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언제부터 그들은 그들이 되었던가? 나는 독립해버린 인상들에게 주인은 오히려 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하지만 인상은 그것도 못하냐는 식으로 그저 나를 때리고 갈 뿐이었다. 그들은 이데아로 도망간 채로 그 속에서 새벽의 고3에게 불면증을 선사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삼라만상의 위치에 나를 초대하지 않는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했다.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들을 멀리서 투척하기만 할 뿐이라면, 나는 파업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앉았다가, 갑작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팔을 흔들고, 다리를 흔들기도 했고, 머리를 흔들기도 했으며, 사실상 안 흔든 부위 없이 마구 나부꼈다. 그러다가도 이불을 붙잡고는 무릎을 꿇었으며, 창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고, 베개를 내던지다가 부둥켜 끌어안았으며, 내 방의 부드러운 사물들은 죄다 요동쳤다. 그건 한밤의 이웃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고, 나를 위한 보호이기도 했으며, 물건들의 손상 방지였고, 인상들을 위한 복수였다. 그리고 인상들은 참으로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놀랐다. 인상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싸우고 싶었으나 그들은 어느새 날이 밝으면 까먹는 밤의 어두움처럼 사라졌다. 나 또한 만족했다. 그들을 위한 무대를 그치고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앵콜의 연호가 이어졌지만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두통이 가셨으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인상들은 다음 무대를 원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불쑥 찾아오곤 한다. 솔직히 나는 오늘 밤이 좀 두렵다.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충분한 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오늘 밤을 기대한다. 어제 인상들이 남기고 간 팁이 좀 있는데, 이게 꽤 두둑해서 소설 2편 정도를 쓰고도 남을 것 같아서이다. 그전에 까먹고 갈까봐 영수증으로써 이렇게 수필 게시판에 글로 남긴다.

그리고 나는 가끔 이 인상들의 밤무대를 벗어나 그들도 모르는 먼 곳을 상상하는데, 표현, 예측, 자유마저도 뛰어넘는, 꿈보다도 깊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깊은 어둠의 잠이 도사리는 지역조차 넘어서는 그곳은 아마 내가 처음 발견했으리라 믿고, 상상을 마치고 돌아온다. 사실 거기에는 원래부터 누군가가 살고 있고, 그게 나인데도, 오래 머물지는 못한 채로 다음을 기약하며 손이라도 건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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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일

한바지 님, 안녕하세요. 수필 게시판에서 처음 뵙습니다. 미세먼지도 없이 화창한 봄날입니다. 고3이라 바쁜시간을 보내고 계시겠네요. 그런 와중에도 부지런하게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표현, 예측, 자유, 그리고 나' 잘 읽었습니다. 차분한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창작의 고통을 잘 전달하고 있네요. 재미있는 문장도 참 많아요. '그 뒤 작업은 마치 요란하게 흩뿌려댄 개막식 폭죽의 잔해들을 수거하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또 한 구상이 머릿속 어딘가를 유랑하다 사라진다.' '내 많은 인상들이 너무나도 좁은 통로로 이루어진 내 표현과 묘사방식을 통과하지 못한 채 머리가 꽉 막혀버린 것이다.' '이전의 시를 쓰기 위한 노력은 폭포수를 페트병에 담으려는 행위에 불과했다면, 이 흥얼거림은 그 폭포에 물길을 터놓은 기분이었다. ' '줄노트에는 다만 첫…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