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호수

 

아메리카노가 색을 잃는다. 찬 얼음이 미적지근한 물에 중화된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푯말이 썰렁한 허공을 메운다. 이목을 잡아 끈다. 나는 '안녕히'의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어쩐지 자라면서, 안녕히 -라는 의미에 더 이상 두려움과 아쉬움을 느끼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 안에 안녕히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찬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유리창을 날려 버리고 손아귀를 뻗어 조수석에 앉은 그녀를 낚아챌 것처럼 덜컹, 덜컹 성난 황소처럼 달려든다. 나는 쏟아지는 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 감아 버린 그녀를 본다. 그녀는 나이가 들었다. 그녀는 노화했다. 그녀는 안녕히 – 가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그렇다고 안녕히를 경외하지도 않는. 그런 나이가 돼 있다. 나는 그런 나이가 된 그녀를 태우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 그녀에게 안녕히 -를 고할 것임을, 나는 안다.

아내는 그녀가 너무 늙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뇌는 퇴화됐고, 그녀의 굽은 척추는 척추의 신비 따위를 잊은지 오래라고, 아내는 말했다. 나는 머리도, 뇌도, 눈도. 가진 것들이 전부 새하얗게 질려버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내는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씻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밥상을 차려 내왔다. 나는 그 사실을 묵인했다. 커튼 뒤 창 너머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은둔자처럼, 나는 아내와 그녀 단둘이 남는 공간을 애써 가려버린 것이다.

"어머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셔. 글쎄, 나한테 쌍욕을 퍼부으면서 엉엉 울다가도, 갑자기 끌어안고 우리 딸, 우리 딸, 거리는 거 있지?"

아내는 크게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아내가 지닌 슬픔의 보폭은 어쩐지 좁아 보였다. 그 날 저녁, 아내는 과도로 사과를 반듯이 깎았고 껍질이 도려내진 사과는 맨 몸을 드러낸 채, 그녀 앞에 놓였다. 아내는 포크로 사과를 콕 찝어서는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고, 그녀는 신이난 아이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며 사과를 먹었다. 아삭 아삭 소리가 여덟시 뉴스 소리에 뭉개진다.

뒤척임의 연속인 밤이 찾아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울 담요에서 세탁한지 오래되지 않은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나는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내는 꿈의 기로를 열려던 찰나 그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머님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셔,라는 말에 나는 커다란 실의를 느꼈다. 그녀의 모든 생명력은 터부시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로서의 작동을 하지 못했다. 아내가 내 손을 잡아끌어, 볼록 튀어나온 배 위에 올렸다. 따듯한 기운이 전이됐다. 아내는 더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어나면.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어쩌지. 아이가 돼 버리신 것 같아. 그냥,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그런 기분이 들어."

아내는 졸음에 잠겨 중얼대며 말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나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다. 베갯잇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뱃속에 생명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보내야만 했다. 어둠이 온몸을 찔렀다. 뾰족한 바늘이 손끝을 찌르듯 괜스레 따가운 기운이 전신에 퍼졌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야만 했던 얘기에 관해 끊임없이 늘어놓았고, 나는 그런 그녀의 얘기를 콩자반을 집고, 반 한 숟갈을 뜨고, 국을 마시면서까지 들었다. 그녀의 노고는 생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생명력을 잃다니. 더 이상 격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멈춰버린 것이다.

*

산기슭에 다다르자, 도로가 점차 좁아졌다. 외진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잎사귀를 잃은 나무들이 앙상한 잔가지를 드리웠다. 돌담 위로는 푸석하고 어두침침한, 한 겨울의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비게이션 안내에 눈을 떴다. 그녀가 경박스러운 하품을 게워낼 때, 모퉁이 너머 잿빛 건물이 정수리를 드러냈다. 그곳은 장소의 역할에 완벽히 걸맞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나는 사진과는 제법 달리 화사함을 잃은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를 넌지시 살펴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전벨트가 불편한지 벨트를 푸르려고까지 하며 앓는 소리를 냈는데 어쩐지 나는 그 모습에 걱정과 안타까움에 뒤섞인 탄식보다 짜증과 노여움을 느꼈다. 나는 사랑과 애정의 기운이 다 한 그녀를 보았다. 그러는 새 차량은 요양원의 입구에 다다랐고, 그녀는 생경한 것을 발견하여 이러 저리 관찰하는 호기심 많은 학생 마냥 창 너머의 건물과 자동차, 휠체어를 탄 노인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건물의 외관은 생기 없는 회색 시멘트로 뒤덮여 있었고, 푸른빛을 띤 커다란 창문이 동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죽음을 목도한 이들이 여생을 알음알음 살아가는 곳 같다는 – 그런 불손한 생각이 퍼뜩 들어 나는 그녀의 연약한 손마디를 꼭 잡았다. 그녀의 푸석한 손 주름과 희미해진 손금, 그리고 그녀의 검버섯 핀 얼굴을 나는 뚫어져라 보았다. 기억 속에 자리한 그녀의 젊음은 윤곽만이 남은 채 아른거렸다. 나는 그녀의 두 눈에서 과거를 찾았다.

요양 보호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나의 팔목을 붙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꼭,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그녀는 건물 내부로 걸어갔다. 느린 걸음이 기운을 잃고 허물어진 잔디를 짓밟았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벤치 위로 말라비틀어진 잎사귀가 두어 개 널브러져 있다. 건물 뒤편에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보인다. 휠체어를 탄 노인과 아직은 머리가 검은 중년의 여성이 호수를 바라본다. 움직이지 않는 물 위로 옅은 햇빛이 포개어진다. 손에 쥔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녹은지 오래이다. 밍밍하다. 쓴 맛을 잃은 메리카노를 내려놓는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아래가 투명히 비친다. 나는 그 너머를 본다. 흰 바탕에 주홍빛 점을 가진 녀석이 꼬리를 활개치며 얼음벽 너머를 헤엄치는 모습을, 뚫어져라 본다. 얼음은 깨지지 않는다. 옅은 햇빛은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그러나 녀석은, 그 꽁꽁 얼어붙은 얼음 호수 밑에서 격동하고 있다. 나는 뒤를 돌아 그녀가 사라진 문을 본다. 잿빛 건물의 푸른 창이 태양의 잔여물을 난 반사한다. 모든 게, 부수어진다. 꽁꽁 언 얼음 호수가 침묵한다. 노인들의 웃음소리가 뒤편에서 들린다. 목울대가 뻣뻣이 선다. 뜨거운 기운이 울컥 울컥 치민다. 얼음벽 너머 갇힌 녀석이 뜻 모를 눈동자를 하고는, 저 너머로 헤엄쳐 나아가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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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is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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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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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현

와, 이번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은 것도 좋았고, 장면 묘사도 좋았습니다. 다만 처음에 나온 안녕히, 를 마지막까지 끌고 나갔으면 좋겠고, 부인이라는 인물을 좀 더 활용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두 부분을 참고하여 꼭 퇴고하셔서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5월의 무언

결국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말 좋았던 것만 남을 거라고 읊조리는 희망찬 말들도 결국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그건 얼음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너무 아득하고 멀지도 몰라요. 월장원, 축하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