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꿈

벌써 하늘이 새까맸다. 원진은 마루에 누워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할머니댁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는 분명 이런걸 기대한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시골에 내려오자마자 장마가 시작될건 또 뭐람. 올해 16살이 된 원진은 좀이 쑤셔 견딜수가 없었다.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기세로 쏟아진게 벌써 3일째였다.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마루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다보면, 원진의 할머니가 간식거리를 들고 오곤 했다. 오늘도 역시 원진의 할머니가 가래떡과 조청을 가지고 원진의 옆에 앉았다. 원진은 그쪽은 거들떠도 안보고 궁시렁거렸다.

"할머니, 심심해."

"심심해?"

그러면 할머니는 별 다른 말 없이 옛날얘기를 시작했다. 별로 관심없는 척 하기는 해도, 할머니의 옛 얘기는 참 재미있었다. 원진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가 일거리를 달라고 했지……. 원진은 눅눅한 공기냄새를 느끼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동이 트기 이전이었다. 새벽이라 살짝 찬기가 느껴졌다. 왠일로 비가 그쳐있어, 원진은 밖에 나가기로 했다. 기분이 들떴다. 습기 때문에 축축한 느낌이 드는 샌들을 구겨신고 할머니 댁을 나섰다. 비가 막 그친, 새벽 여름은 참 정적이고 묘했다. 시골에는 곳곳에 개가 돌아다녔다. 원진은 개와 뛰어다니기도 하고, 물 속 물고기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할머니 댁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중턱에 큰 연못이 있다. 원진은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그 연못으로 향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연못을 둘러싼 바위, 그 중 가장 큰 바위 틈에서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루일까. 아지랑이? 하지만 아직 해가 뜨기 이전이었고, 빛깔은 너무나 선명했다. 흰색과 무지갯빛이 섞인듯한 색, 그건 원진이 다가갈수록 점차 강해졌다. 원진은 홀린듯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꺅……!"

그 순간, 빛이 강해지며 눈 앞을 가렸다. 원진은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감고 있었을까, 조금씩 눈부심이 가라앉았다가 이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원진은 눈을 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바위 틈새는 고요했다. 방금 본게 뭐였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원진은 배가 고파져,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진이 수풀을 헤쳐 내려갔다.

멀리서 할머니 댁이 보였다. 하지만 원진은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모양과 위치는 할머니네 집이 맞는데, 묘하게 달랐다. 원래 지붕의 색은 푸른색이지만 지금은 나무판자 같은 것이 올라가 있었다. 또, 낡아있던 할머니네 댁 외관은 흠집과 멍없이 깔끔히 변해있었다. 그 사이로 분주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누구지?'

집에는 낯선 차림을 한 남자 너덧명이 돌아다녔다. 한 명은 허름한 삼베옷을 입고있었고, 나머지는 군복을 입고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원진은 덜컥 겁을 먹었다.

할머니는 어디에 있을까. 원진은 할머니를 찾아 용기를 내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어렴풋이 말 소리가 들렸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일본어?'

어디 말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본어였다. 사람들은 잔뜩 성이 난 말투로 일본말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로 한국말이 번쩍 귀에 꽃혔다.

"이상하다, 분명 한 명 더 있는데……."

그 순간, 그 말을 중얼거린 사람과 원진의 눈이 마주쳤다.

"저, 저기……! 저 계집애요……!"

그가 원진이 있는 쪽을 검지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원진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원진은 주춤거리다가 시내가 있는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원진이 달리니 뒤에서도 쿵쿵거리며 원진을 쫓아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잡히면 안될 것 같은 직감이 들어 이를 악물고 달렸다. 숨이 턱 끝 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원진은 정신없이 달리던 급박함도 잊고 땅에 못 박힌듯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마침내 도착한 시내의 풍경은 평소에 보던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건물, 낯선 길, 낯선 옷을 입은 사람들. 그런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일순간 원진은 전에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를 떠올렸다. 그건 그러니까, 군인 신분의 남주인공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는 내용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여주인공으로 나와 보았다가 눈물 콧물 다 뺐던 그런 드라마였는데……, 지금 눈 앞에 보인 풍경이 그 드라마에서 봤던 풍경과 묘하게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원진이 넋을 빼놓고 있자, 누군가 원진의 손을 잡아챘다.

"안뛰고 뭐하니?"

원진은 멍하니 맞잡은 손을 따라 낯선 이의 뒷모습을 봤다. 흰 옷 위로 단정하게 땋은 검정 머리카락이 뛰는 폼에 맞춰 물결쳤다. 목소리가 앳되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원진의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렸다. 원진도 그에 맞춰 정신없이 발을 움직였다. 다시금 긴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좁은 골목 틈새에 들어가서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녀가 숨을 몰아쉬는 원진을 보았다.

"괜찮아?"

"으응, 근데 너…… 누구야?"

"명이라고 불러. 우리 가족들이 날 그렇게 부르거든."

명이도 아까 그 이상한 사람들한테 쫓기는 신세라, 그들을 피해 숨어있다가 원진을 보았다고 했다. 원진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타난 명이가 친숙하고 반가웠다. 하지만 길게 말을 나눌 새도 없이, 둔탁한 발소리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골목 주변에서 둘을 찾고있었다. 명이와 원진은 숨을 죽이고, 더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벽에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기 전임에도 별들이 사방에서 반짝거렸다. 원진은 처음 겪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덜커덕-

갑자기 저 옆쪽에서 막힌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완전히 골목길인줄 알았더니, 사람사는 집이 있던 모양이었다. 깊고 어두운 골목 안쪽에 하필이면 문도 새까만 검정색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지친 행색으로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있는 두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마침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남자는 먹을거면 들어오라고 말한뒤 문 안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원진과 명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갈등하는 눈빛이었다. 낯선 남자의 집에 막 들어가도 되는걸까. 그 순간 열린 문 틈으로 고소한 음식냄새가 훅 풍겼다. 짭짤한 생선구이와 갓 지은 밥이 절로 연상되는 냄새였다. 그제야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뱃 속이 요동쳤다. 원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자 명이가 작게 웃었다.

"들어가자."

명이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서고, 원진이 뒤따랐다. 내부는 어두컴컴한 바깥 모습과는 다르게 무척 밝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밥상에는 정말 생선구이와 흰 밥, 그리고 잘 익은 김치가 올라와 있었고, 밥과 수저는 세 사람몫이 놓여있었다. 명이와 원진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자, 남자는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연신 침을 삼키던 원진도 밥을 먹었다. 그 날밤의 식사는 여태껏 원진이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니, 남자는 그릇을 가져가 밥을 더 퍼다주었다. 그 덕에 원진은 두 그릇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동이 트기 전까지 나가라."

식사가 끝나고, 남자는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고는 또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졌다. 명이와 원진은 남자가 가리킨 곳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그곳에는 방이 있었고, 두 명분의 이부자리가 놓여있었다. 원진이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네……."

"고마운 사람이지. 자, 이리와."

명이가 선뜻 이불에 앉아, 원진에게 이리 오라는 뜻으로 이불을 두어번 두드렸다. 원진과 명이가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웠다. 명이는 잠이 오지 않는지,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꽤 재미있어서 원진은 조용히 들었다.

"난 어릴때 부터 언니랑 꼭 붙어다녔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일을 하는 동안 언니가 날 돌봤거든."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금은 언니가 일을 해 둘이서 힘들게 살고 있지만, 명이는 그래도 좋은 언니가 있어서 행복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후에 언니가 저 대신 끌려갔다고 말할때에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언니가 도망가라고 소리쳤는데 차마 갈 수 없어 결국 집에 돌아갔다가 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내가 저로 오해받는 것 같아 두고 갈 수는 없었다고. 명이가 훌쩍거리는걸 듣고 있으니 괜히 원진의 마음도 서글퍼져 눈물이 났다.

명이와 원진은 깊은 밤까지 얘기하다가 어느새 잠에 들었다. 명이가 먼저 일어나 곧 동이 틀 시간이라며 자는 원진을 흔들어 깨웠다. 둘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집에서 나와 새벽 거리를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원진이 느끼기에 명이는 참, 좋게 말하면 마음이 따뜻했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었다. 길을 걷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해보이면 후다닥 달려가 사람들을 도왔다. 한 상인의 짐을 나르는 것을 돕기도 했고, 길을 잃은 어린아이를 토닥이며 안심시켜 주기도 했다. 몇 발자국 걸으면 멈추고, 또 몇 발자국 걸으면 멈췄다. 원진은 명이를 보며 투덜거렸다.

"넌 왜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명이의 눈동자는 신기할 정도로 맑아서, 원진은 그 말에 공감하지 않음에도 그녀에게 서서히 감화되었다. 원진도 명이를 따라서 서툴게나마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명이 옆에서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한 아주머니를 목적지까지 부축해주니, 그가 고맙다며 삶은 계란 몇 개를 쥐어주었다. 둘은 희미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서 달걀을 나누어 먹었다. 어느샌가, 맑았던 명이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원진은 그런 명이가 걱정되었다. 명이는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언젠가 꼭 돌아올거야. 그렇지?"

"그래."

"하지만 언니가 없는 동안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내가 혼자 잘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또 다시 집으로 찾아오면……."

"그 사람들은 이제 오지 않을거야."

"……정말?"

근거 없는 말이었으나, 원진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저가 지금 명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알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답을 정해놓은 것 처럼, 기묘한 확신에 원진이 입을 열었다.

'……무지하게 큰 건물이 있었어. 그 바로 뒤에 한 공장이 있었는데, 거긴 노동자들에게 나름 양심적인 대우를 해주는 몇 안되는 곳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가 일거리를 달라고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행운이었어.'

명이는 활짝 웃으며 원진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원진."

"원진아. 너한테만 내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줄게."

그리고 명이는 원진에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명이의 보물이 거기에 있었구나. 명이는 이내 원진을 보며 밝게 웃어보인뒤, 원진이 말해준 곳으로 향했다. 중간에 몇번씩이나 뒤돌아 손을 흔들면서. 원진은 명이의 뒷모습이 사라질때 까지 명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명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원진은 곧바로 뒤돌아 달렸다.

할머니네 집 뒷산, 중턱에 있는 연못, 가장 큰 바위 틈새……

그곳에서는 은은한 빚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진은 홀린듯 그 빛에 손을 뻗었다.

원진아, 원진아. 미약한 흔들림과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할머니 댁 마룻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뭐였지?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웃으며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할머니의 반대쪽 손에 낡아보이는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 어릴적 묻어두었던 건데 문득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고 했다.

"……산에 있는 연못 바위 아래?"

나는 할머니의 놀란 눈을 뒤로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속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들어있었다. 반지, 손수건, 책, 뭐라 쓰여있는지 알아볼 수 없는 종이, 그리고…… 낡은 사진 한장. 사진에 묻어있는 이물질 같은 것들을 정성스레 털어내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활짝 웃고있는 명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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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현

연송아님 안녕하세요. 한 편의 동화같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항상 어른들께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까무룩 잠들었던 기억이 많아서 그 장면이 더 좋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다만 산에 있는 연못 바위 아래, 라는 설정이 그닥 힘을 받지 못하는 점, 중간에 잠자리를 제공해준 남자가 한 번 쓰이고 말았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퇴고시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눈여겨 보며 고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