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삶 위에 또 다른 삶을 포개어 본다 (종현 '하루의 끝 ', 이하이 '한숨')

볶음밥을 먹기 위해 달걀을 깨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편의점에 겨우 들러 삼각김밥을 샀으나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지도 못한 채 다시 잠들고는 한다. 한 발짝 내민다는 것, 비록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 사소한 일조차 내 등을 억눌렀다. 어쩌면 이 무게가 다른 사람에게도 붙어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우리는 기분 부전 장애라고 스스로 처방했다. 내가 아픈 게 정말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한편 더 쉽게 느껴지는 단어인 우울증으로, 언론과 에세이 작가들 그리고 평범한 우리들 사이에서 우울이 주로 언급되었다. 나는 눈을 뜨면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불쾌했다. 그 아침을 혐오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면. 우울은 우리 사회의 모서리에 단단히 붙어 하나의 바위가 되어버린 듯하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로 보는 시선이 분명 있으면서도. 이러한 별칭은 주요우울장애 중에서도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를 다소 왜곡하여 보여주는 것 같다. 기분 저하 지속, 흥미 감소, 체중의 급격한 변화, 수면 장애 등의 증상들이 2주간 지속이 되면 주요우울장애로 진단을 받는다. 개인마다 우울증의 폭은 매우 큰 편이다. 매일 자살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육교에 올라 망설이는 사람과, 하루 종일 상호작용을 하다가 간혹 침대에 누워 우는 사람도. 같은 종류의 기분 장애가 진단될 가능성이 있다. 마음의 상처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남들보다 늦게 문을 닫는 나의 하루” (종현 하루의 끝)
“서툰 실수가 가득했던 창피한 내 하루 끝엔” (종현 하루의 끝)
“가끔은 실수해도 돼. 누구든 그랬으니까” (이하이 한숨)

우리는 잘못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갇힌 문화와 자유롭지 않은 사회의 억압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유교적인 시선은 늘 답습해오던 것만 남았다. 피해 끼치면 안 되기에 참아야만 하는 암묵적인 화병 전염의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중학교를 한창 다니다가 처음 들렀던 정신과에서 입원을 권유받았다. 지금의 나는 입원한 사실에 대해 별생각이 없다. 그 경험이 나를 잡아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앞길을 단단하게 조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병동에 입원했을 무렵에는 가족이 실망했을까 봐, 나 자신이 실패자인 줄 알았다. 병동 침대에서 우느라 ‘남들보다 늦게’ 내 ‘하루’를 정리했다. 지금도 과제를 하느라 하루를 늦게 마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온전한 나의 힘으로 하루를 연장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의 수행평가와 대회 그리고 입시는 나를 한 걸음씩 더디게 움직이도록 했다. 그 일들은 언제나 짐이었다. 내가 괜찮아 보인다는 전제를 놓고, 기대를 품은 시퍼런 표정으로 내 걸음을 얼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나의 길에도 여름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이들의 삶에도 선명한 그림자가 생겨, 그 안에서 온화한 바람을 마주하며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야간 수업을 들으러 대학에 간다. 누구는 퇴근하며 사라진 노을을 찾는다. 그들의 잘린 단면이 밤의 그늘에 안겨 납작한 별이 되곤 한다. 당신은 평범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당신은 생을 달리는 중이다. 사람들은 사실 당신처럼 강하다. 얼마든 실수를 반복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실수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 세밀한 마음이 그들의 가슴을 베는 것이다.

“숨을 크게 쉬어봐요, 당신의 가슴 양쪽이 저리게.
조금은 아파올 때까지. 숨을 더 뱉어봐요,
당신의 안에 남은 게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이하이 한숨)

이 가사를 들으며 내 몸 안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물리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형태가 가장 먼저 잡힌다. 그 외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가슴에서 야트막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이상 심리학을 다루는 DMS-5에서는 우울과 같은 정신 질환에 대한 소견을 정리해놓았다. 생물학적인 요인으로 가계 연구를 통해 우울증의 유전을 다루었고, 심리학적인 요인으로는 스트레스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스트레스 사건은 사람마다 지닌 성격 그리고 기질에 따라 다가오는 속도와 힘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겪는 스트레스가 사소한 것이라며, 그 문제의 심각성을 와해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을 우울과 기타 정신 질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잘 버틸 수 있게 하는데 그 사람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심리 검사를 진행할 때 우울의 정도를 보여주는 벡 우울척도 문항뿐만 아니라, 성격 검사로 수백 개의 물음에 답하는 과정을 실행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주요 정보 수집으로 추론해본다. 나는 정신과 담당의로부터 늘 솔직할 것임을 약속했는데, 이는 종이에 서명하는 방식으로 맺어졌다. 병동에서는 불안정한 이들이 있으니 문서형 약속은 마지노선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숨’과 관련된 이 가사에는 내가 마주한 공황을 앓는 이들을 몇 번이고 떠올리게 한다. 그들에게 오는 호흡곤란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것처럼 강렬하다. 정신과 교수님은 나에게 호홉 곤란이 오면 바로 의자에 앉아 10분간은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다. 이때 반드시 ‘심호흡’ 연습을 해야 한다. 숨을 크게 쉬고 다시 들이마시는 활동은 비록 간단하지만 충분히 효과를 본다. 호흡곤란, 가슴 통증이 심할 경우 나는 처방받은 진정제 반 알을 먹었다. 우리는 그런 식이라도 살아가고 있었다. ‘가슴 양쪽이 저리게’ 호흡을 더 뱉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괜찮다는 말, 말뿐인 위로지만.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이하이 한숨)

앞에서는 크게 우울증과 공황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덧붙였는데. 나는 공황을 겪고 우울증을 겪어 고통받는 사람을 무턱대고 도우려고 했다. 사람마다 남을 북돋아주는 방식이 다르니 이러한 위로는 맞고 어떤 것은 틀리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말을 해도 그것이 독이 되거나 약이 될 수도 있다. 공감이라는 영역 속에서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히는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말을 뱉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흔히 말 잘하는 사람을 동경했다. 병동 내 환자들, 친구들은 나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풀어나가고는 했다. 나는 조언은커녕 입 밖으로 던져낼 단어가 아무것도 없었다. 간혹, 애매하게 앉아있는 나를 경청 잘하는 아이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를 지닌 언니, 성범죄에 노출되었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들이 얼마나 아픈지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그들이 답답함을 한숨으로 표출해낼 때, 나는 그저 울먹거릴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야기밖에 쓰지 못한다. 다만 울면서 자학하는 친구를 위해 간호사를 부르고, 등을 토닥여주고, 휴지 몇 장을 뽑아주며 가만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위로의 시간이 끝나기 전 꼭 안아주며 그 아이의 어깨에 내 눈물 몇 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천장을 보았다. 흐릿한 형광등의 밝기에도 눈이 부셨다.

“빈틈없이 널 감싸 안는 욕조 속 물처럼, 따뜻하게 또 하나도 빈틈없게.” (종현 하루의 끝)
“너의 그 작은 어깨가, 너의 그 작은 두 손이,
지친 내 하루 끝 포근한 이불이 되고,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종현 하루의 끝)

우울의 굴레는 두껍다. 나는 위로를 받을 때마다, 그 무엇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자기 의심에 얽매여 있었다. 내가 아픔을 잘 타이를 정도로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둘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속으로 쏘아붙였다. 그들이 한때 나를 나약한 사람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말을 바꾼 것에 대해 적잖은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들을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위로 방식을 바꾼 것이다. 자신의 위로가 잘 맞기를 바라며, 내가 낫는 것을 소원으로 두었기 때문에 말이 바뀌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미는 ‘그 작은 두 손’이 좋다. 아홉 살에 몸살로 쓰러진 나를 힘겹게 업어가던 엄마의 ‘작은 어깨’를 떠올렸다. 가슴 밑까지 채워주는 그들의 품은 ‘욕조 속 물’ 그리고 ‘이불’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수십 번 게임에 지는 것. 죽음을 알면서도 삶 속에서 다양한 이들에게 지는 것을 선택했다. 우울과 내적인 불안은 고요히 흐르다 굳어 내가 되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고 자기연민 몇 번 해본다 해도 잘못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는 고생했고 정말 수고한 것이다.

“그래도 그대 옆이면,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다 숨 넘어가듯 웃다,
나도 어색해진 나를 만나죠.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종현 하루의 끝)

어느새 오늘은 곧 어제가 되어버리고, 내일이 다가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시간을 스치는 일,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는 일로 울었던 당신에게도 반창고를 붙이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사진 속에서 환히 웃는 그 사람, 그대는 가장 큰 별이 되어 우리를 기다렸으면 좋겠다. 세상에 남기고 간 그대의 노래를 들으니 몇 번이고 그립지만. 이제는 여름에 다른 별들과 도란도란 밤하늘에 앉아,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기를 바란다. 반짝이는 노래를 계속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그대는 우리의 자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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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교

안녕하세요, 사랑하마 님! 반갑습니다. 가수 종현님이 만들고 부른 노래들에 대해 감상과 비평 글을 남겨주셨어요. 좋은 음악 많이 남겨주신 멋진 뮤지션이라 저도 참 좋아해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현 님 팬을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 뷰 가사도 정말 좋아한답니다>_< 분석을 하고 싶어지는 노랫말을 정말 많이 남기셨죠? 월장원 선정의 말에도 소략했지만 가사에 나오는 '한숨'이라는 단어, 그러니까 피로와 절망 그리고 위로의 상징을 공황 중 호흡 곤란 상태와 연결시키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사랑하마님의 글을 읽고 보니 정말 그래요. 흔히 한숨은 낙담의 순간 분출되는 것으로 인식 하지만, 동시에 숨통을 트는 순간에 나오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한숨'의 시간을 절망의 순간으로만이 아니라 생명의 순간으로 변용하여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