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얼굴 그리기

커튼이 바람에 밀려 창문 옆 책상을 삼켜버릴 때가 있었다. 자리 주인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몇 년 뒤에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의 모서리는 둥글어졌다. 그렇다고 완벽한 원형의 모습은 아니었다. 곡선 끝에는 각각 다른 직선이 있어 우리가 흔히 엎드리던 책상의 모양이 되었다.

언덕을 네 번 넘으면 올해의 사진첩을 묻어두었던 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우리 발에 묻은 먼지가 나무의 무늬를 따라 빙빙 돌았다. 세 번째 언덕을 걷던 나는 너에게 물었다.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그러기로 했다. 돌아온 우리는 맨손으로 책상에 뚫린 구멍을 더 넓혔다. 그 안에는 사진첩이 있었다. 사진마다 글이 적혀있는데 눈을 찌푸려도 보이질 않아서 읽는 것을 관뒀다. 숫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분명 날짜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 모든 사진의 너머로 나무의 핏줄이 비쳤다. 책상의 가공된 부분은 반들거리고 볼록했다.

팔꿈치를 사진첩 곁에 두려고 움직이며 급여된 우유곽을 쳤다. 진한 냄새가 나는 방울들이 책상 모서리에 매달렸다. 나는 우유를 실수로 흘릴 때마다, 그 책상에 무슨 계절이 왔다고 불러야 하는지 통 알 길이 없었다. 우유 방울의 늘어나는 팔을 보면 고드름이 자꾸 떠올라 겨울이라 불렀고, 찝찝한 기운이 흐르면 여름이라 불렀다. 너는 사진첩을 보느라 흘린 우유를 늦게서야 보았다. 물수건을 꺼내 대강 얼룩을 닦아내는 네 뒤에서 나는 적당한 날씨의 계절을 그리워했다. 목련이 깔끔한 꽃잎을 내밀던 봄, 비둘기가 새털구름을 뚫기 위해 높이 날아올랐던 가을. 그러니까 언제나 하얀 얼굴을 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지만. 우리는 십 년 전부터 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지금 비린내가 나는 책상 앞, 그리고 네 곁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포갰다.

너를 잘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나는 웅얼거렸다. 자라며 잃고 얻은 것이 많아서. 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만난 적이 없으니까. 너도 나의 옷자락 대신 팔뚝에 있는 살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옷을 벗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서로의 살점을 꼭 붙들어놓았다. 이제 방과 후 교실에서 커튼만 일렁이는 것이다. 보드라운 귀 안팎에는 아무것도 매달리지 않았다. 다만 천이 스치는 소리가 뒷등을 따라 움직였다.

막연히 결핍만을 생각했던 시절에도, 평범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여덟 살의 나는 좀 더 깔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골목길 사이를 뛰어다니다, 뒤에서 늦게 따라오시는 할머니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 골목에는 공구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가게 주위에는 높은 턱이 길쭉하게 있었고 이를 살살 넘었다. 내리막길을 가다 보면 카네이션 서넛이 어느 텃밭에 자라있었다. 철로 된 울타리 너머 자리를 텄기에 그것을 직접 따올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자랄 수 없었지만, 나를 꽃처럼 바라보던 아이가 있었다. 권호는 몸집이 조금 컸다. 행동도 둔한 감이 있었지만, 나도 똑같았다. 권호가 혼자서 아이들의 시선을 견디다 파괴되었을 때, 나는 그 애의 손목을 끌어 복도로 나갔다. 우리는 태권도를 배웠다. 얼른 힘센 어른이 되어서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권호와 나는 함께 다녔다. 네가 우리 집에 같이 가주겠다며 골목길을 내려갔던 날. 열병에 지겹도록 앓았다. 햇빛은 무너질듯한 각도로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땀을 질질 흘리며 걸어갔다. 나는 공구 가게 앞, 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너조차 쓰러지면 안 된다고 되새김질했다. 아지랑이와 바람 사이에서 우리는 몇 마디를 나누지 않았다. 너는 입을 오물거리다 한참 후에야 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호는 전학을 갔다. 나는 너의 고백을 잊었다. 너에게 쏠렸던 시선이 내게 차곡차곡 쌓여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빴다. 바닥만 보고 다니느라 어깨가 뻐근해졌다. 혼자 걷는 골목에서 말을 걸어주는 이가 없었다. 단 한 단어도 내게 오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태로 카네이션이 내 쪽으로 더 기울고 있을 뿐이었다.

교실에 걸려있던 벽시계의 시곗바늘이 잠시 멈췄는데. 시간의 앙금이 뭉쳐 흘러가질 않았다. 친구 셋과 떡볶이를 먹기 전까지 일상이 무엇인지 어른들에게 물었다. 떡볶이를 사기 위해 현금을 챙겨와 각자 돈을 나누어 냈고, 내 앞에 앉은 친구가 약하게 틀어놓은 노래는 귀에 스며들었다. 옷에 튄 떡볶이 국물을 물티슈로 닦으니 옷에 젖은 부위가 한층 진해졌다. 나는 젖은 옷감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촉촉하고 납작한 모양새였다.

권호야, 너는 매일 바닷속에서 표류했던 것일지도 몰라. 너도 모르는 사이에 물에 빠졌던 거야. 교탁 아래 한 줌의 모래 덩어리. 너는 툭하면 부서질 듯하지만 겨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네가 옆에서 의자 하나 끌어와 앉게 된다면 나는 떡볶이 3인분쯤은 줄 수 있을 텐데. 가족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고 떡볶이는 맛있으니까. 나만 소스를 입에 묻히며 웃을 수는 없잖아. 그동안 눈치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교실에서 우린 뭘 배웠는지 알 수 없었다. ‘용기’는 날개가 다시 자란 앵무새처럼 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졸업을 앞둘 무렵에서야 ‘용기’가 교실 밖 나무에 앉아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역시 그곳에도 없었다. 하얀 얼굴을 하고 눈부신 하늘 사이에 숨어 달아났다.

갈라진 길을 걷는다고 해도 늘 곁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우유를 조금 흘렸고 퍼진 우유는 여전히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같은 색의 커튼이 흩날리고 책상은 다시 잡아먹힌다. 밖에서 아이들의 노래가 오토바이의 괴성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너의 고백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덜 울었을까. 사진첩에는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우리의 첫 여름 방학을 기록하지 못했다. 칠판에 간혹 우리를 놀리던 글자가 비뚤게 적혔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책상에 엎드리는 일만 했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새들이 날아가는데, 그 군단에 나의 ‘용기’가 끼어있었다. 하지만 손을 뻗으면 다른 이들이 수군거릴까 봐 점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기 있으니. 강렬한 이파리의 향이 풍기는 계절에는, 나의 숨결도 네 코끝을 간지럽힐 것이라고. 책상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어내린다. 비어있는 이름표가 여느 낯선 이름으로 채워지기 전에 실컷 울어둬야겠다. 네 번 언덕을 넘어 너의 곁에 다소곳이 앉고 싶었다. 반쯤 가려진 네 얼굴을 다시 그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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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일

사랑하마 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어느덧 여름입니다. '하얀 얼굴 그리기' 잘 읽었습니다. 문장력이 정말 좋아서 읽는 동안 전율합니다. 친구가 떠난 뒤 겪는 일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니! '너에게 쏠렸던 시선이 내게 차곡차곡 쌓여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빴다. 바닥만 보고 다니느라 어깨가 뻐근해졌다. 혼자 걷는 골목에서 말을 걸어주는 이가 없었다. 단 한 단어도 내게 오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태로 카네이션이 내 쪽으로 더 기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네가 옆에서 의자 하나 끌어와 앉게 된다면 나는 떡볶이 3인분쯤은 줄 수 있을 텐데.'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 문장에 잘 담겼어요. '‘용기’는 날개가 다시 자란 앵무새처럼 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졸업을 앞둘 무렵에서야 ‘용기’가 교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