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역사

선생님이 나무에서 목을 매셨다

 

여름이었다 곧이어 나무에는 복숭아가 열렸다 달고 맛있고 아무도 선생님을 내려 주지 않는다 선생님은 복숭아빛 얼굴이었다가 포도빛이 되었다 과학 선생님이 복숭아는 나무에서 열리고 포도나무는 덩굴이라고 말해 주셨다 그러니 얼굴빛을 따라서 복숭아가 포도로 변하는 일 따위는 없다

 

가을이 되자 나뭇잎은 갈색으로 변했다 여름을 지나면서 우리는 약간씩 키가 컸으며 이제 선생님의 매달린 허리에 머리끝이 닿는다 낙엽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결국에 나무에 달린 것들 중 떨어지지 않은 것은 선생님밖에 없다 그리하여 머리는 놔두고 밧줄에 감긴 목만 퍼렇게 주욱 하고 늘어져 구두를 신은 발이 땅에 닿는 것으로 떨어짐을 대신하셨고 잠자리들은 때때로 두번 묶은 매듭에 내려앉아 휴식을 취한다

 

겨울 눈발은 실로 모든 것을 덮는다 선생님은 눈사람이 되셨다가 녹으셨다가 다시 되시기를 반복하면서 과학실의 인체 표본처럼 변했고 자신보다 훨배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과학 선생님은 기죽은 것 같았다 우리는 어쩐지 자랑스러워져서 선생님이 다시 눈사람이 되실 때에는 꼭 목도리를 가지고 와서 매어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기어코 선생님이 내려지셨다 과학 선생님은 늘어진 몸을 땅바닥에 널어놓고는 우리에게 땅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하셨고 우리는 화단의 채송화를 뽑고 거기에 목을 두번 접어 선생님을 심었다 돌아와 보니 이번엔 과학 선생님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고 우리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키가 커서 이제는 턱끝이 허리에 닿는다 이번에도 역시 복숭아빛 얼굴이었다가 포도빛이 되셨지만 복숭아도 포도도 없이 나무는 다만 꽃뿐이었으며 우리도 본디 지나간 지식에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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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잃은 별

시체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는 부분에서 소름이 올라와요. 특히 복숭아 빛이였다가 포도 빛이 되는 과정을 본거면 아직 살아있는데도 아무런처치도 안한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그게 제일 소름끼쳤어요. 정말 시를 잘 쓰셨어요. 이 시는 사람이 죽어도 무관심한 세상을 표현했다고 느꼈는데 제가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해주

안녕하세요, 갖바치님. 시 잘 읽었어요. 제목도 흥미롭고 본문도 어디 딱히 걸리는 부분 없이 좋습니다. 여태 읽은 갖바치님의 시 가운데 저는 가장 좋게 읽혔습니다. “선생님이 나무에서 목을 매셨다”는 도입부로부터 전개가 차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잘 이어졌고요. 인상적인 문장도 많았습니다. “아무도 선생님을 내려 주지 않는다 선생님은 복숭아빛 얼굴이었다가 포도빛이 되었다 ” “낙엽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결국에 나무에 달린 것들 중 떨어지지 않은 것은 선생님밖에 없다 ” “우리도 본디 지나간 지식에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다” 등이 그렇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시 기대하겠습니다.

다중우주 시체詩體

표현이 인상적이라 요즘 매일같이 보는 시입니다. 과학 선생님이 나무에 매달렸다는 걸 보고 문득 든 생각인데, 처음에 매달린 건 역사 선생님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