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을 통해서 본 가정의 의미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가정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장소’로서 파악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가정이란 사람이 그의 ‘어떠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 곧 ‘있음’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못생겼거나,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하고, 게다가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마저 없다고 한다면, 그는 가정 밖 사회에서는 인정받거나 사랑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가정이란 가족 중 그 누가 설령 못생겼다고 해도, 또는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하고 해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다고 해도 그의 ‘있음’ 그 자체를 기뻐하고 사랑하는 장소, 또 그래야만 하는 장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 가정을 ‘안식처’라고도 합니다. 안식처란 ‘쉬는 장소’라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빠, 엄마는 물론이고 자녀들까지도 가정에서 나름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지요. 때로는 이 일들이 너무 많아 전혀 쉬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가정을 안식처라고 하는 것은, 가정에서 만큼은 누구든 자신의 ‘어떠어떠함’, 즉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편하다는 말입니다. 그의 ‘있음’ 그 자체로써 인정받고 사랑받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예를 들어 자녀가 나쁜 성적을 받으면 부모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그 아이의 성실하지 못함을 나무랄 수는 있지만, 그 아이의 ‘있음’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그것은 거꾸로 부모가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아이가 자기 부모의 존재를 기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가족이란 그 누구도 상대의 ‘어떠어떠함’ 때문에 사랑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정은 결코 안식처가 아니고, 심지어 가정이라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된 가정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드러내 보여주는 문학 작품들도 적지 않지요. 그들 중 하나로 체코 출신의 천재적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쓴 『변신』이라는 작품을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저것 때문에” 못살겠으니 “없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직물회사 외판원인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 마리 곤충으로 변합니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과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갈색의 배, 그리고 불안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는 수많은 다리를 가진, 아마도 거대한 바퀴벌레쯤 되는 곤충으로 변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가족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한편으로는 절망하게 되지요.

 

이유인즉, 5년 전 아버지의 갑작스런 파산으로 그레고르가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빚까지도 온전히 떠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에게 차츰 슬픔은 사라지고 오히려 귀찮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저것 때문에” 못살겠으니 “없앨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외치기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지던 예전의 든든한 아들이자 오빠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그레고르의 ‘어떠어떠함’이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사랑도 변했지요.

 

결국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냉대와 폭력, 그리고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야겠지요. 왜냐하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끌고 나갈 수 없다.”라고 원망을 퍼붓는 누이동생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에게 훨씬 강했기 때문입니다. 흉측한 외모에다 돈까지 벌지 못하는 인간이 현실 세계에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거지요. 그에게는 가정마저도 안식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새벽 3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감동과 애정을 갖고 집안 식구의 일들을 걱정하며 결국 숨을 거둡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그의 주검 앞에서 신께 감사를 드리고 악몽 같았던 지난 몇 달의 고통을 씻어버리기 위해 교외로 소풍을 가지요.

 

따뜻한 봄 햇살이 비쳐드는 전차 안에서 앞으로의 일들을 이것저것 상의하다가 장래의 희망도 이야기하며 그들끼리 훈훈한 가족애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들의 장래도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지요. 그들에게는 어느덧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딸이 있었고, 이제 그녀가 그레고르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떠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카프카 문학이 가진 특유의 상징성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가정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즉, 만일 우리가 가정에서마저 가족의 ‘어떠어떠함’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변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소설 『변신』은 ‘곤충으로의 변신’이라는 기발한 극적 장치를 이용하여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아마도 소설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요? 하지만 요즈음 신문에 보면, 이보다 더한 일들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이나,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자식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요. 물론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일들은 가족의 ‘있음’ 그 자체를 사랑해야만 하는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이 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는 “가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있음'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랑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영화 <집으로>는 두메산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77세 할머니 집에, 두 달 동안만 아이를 맡기려는 엄마 손에 이끌려 7살 난 외손자 상우가 찾아옴으로부터 시작하지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오두막, 벌레가 나오는 단칸방에서 혼자 살며,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진 허리와 추레한 외모, 떨어진 고무신마저 기워 신는 데다 말조차 못하는 외할머니에 대해 서울에서 온 상우는 처음부터 업신여김을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할머니에게 대놓고 “병신”이라 내뱉는 것이 그 한 예이지요. 손으로 김치를 찢어 밥 위에 얹어주는 할머니의 행동이 더럽기만 하고, 밤이면 요강에 변을 보아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결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상우는 그 김치가 놓인 밥을 수저로 떠서 다시 할머니 밥그릇에 던져놓고, 서울에서 가져온 스펨을 꺼내 쩝쩝거리며, 요강은 발로 걷어차 버리지요. 비단 그것만이 아니지만 어째든 할머니는 그때마다 화석처럼 굳은 손으로 자기 가슴을 문지르며 그저 ‘미안하다’고만 합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본다면 옳다고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지만, 할머니가 상우의 그 ‘어떠어떠함’을 전혀 탓하지 않는다는 점, 그 어떤 것도 그저 견딘다는 점, 그 모든 것을 그대로 포용한다는 점, 바로 이러한 점에서 관객들은 윤리적 잣대는 들여댈 짬도 없이, 어떤 묘한 정서와 그 정서에 대한 짙은 향수에로 곧바로 빠지게 되지요. 흔히 ‘모성’,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단어들로 연상되는 이 특별한 정서에 대한 향수는 알고 보면 우리가 살펴본 가정 또는 안식처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떠어떠함’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를

 

                영화 '집으로'의 한장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과 그것이 주는 안식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되며, 그럼으로써 하나의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화는 차츰 상우의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어떠어떠함’에 대해 곧 그 병신 됨, 그 초라함, 그 불편함에 대해 마냥 업신여기고 짜증만 내던 상우가 할머니의 그 어떤 것도 전혀 탓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그저 견디는, 그 어떤 것도 모두 포용하는 사랑에 의해 점차 바뀌어 갑니다. 훔쳤던 은비녀를 다시 돌려주고, 편찮은 할머니에게 이불을 덮어준 다음 밥상도 차리려 하지요.

 

그리고 엄마를 따라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날 밤에는, 눈이 어두워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바늘마다 실을 꿰어 놓기도 하지요. 글을 몰라 편지를 쓸 수 없고, 말을 못하여 전화조차 할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보고싶다’, ‘아프다’라고 쓴 그림엽서도 미리 마련해놓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부치기만 하면 되게끔 서울 집 주소도 잊지 않고 써놓지요. 버스정류장에서 이별을 하면서는 어린 가슴에 손을 대고 둥그런 원을 그리며 문지르기도 하지요.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요? 그 동안 할머니를 괴롭혀서? 아니면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가서?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우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상우와 엄마를 실은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서울을 향해 떠나고, 할머니는 다시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산길을 올라 돌아가며 영화 <집으로>는 막을 내리지요. 

 

 

 ‘집’은 어디에?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곧 이 정향 감독이 그의 작품의 제목을 <집으로>라고 했을 때, 그 ‘집’이 상우가 돌아가는 서울 집일까, 아니면 할머니가 사는 두메산골 집일까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상우에게 진정한 가정은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스펨과 TV, 전자오락기 그리고 롤러 블레이드가 있는 서울 집에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사랑과 안식이 존재하는 공간, 그래서 상우가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으로 배우는 장소 곧 할머니의 집에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모르는 한, 그 사람은 영화 <집으로>를, 그리고 나아가 카프카의 작품 『변신』을 이해한 것이 전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kaka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