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와 그 후예들 [1]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려는 까닭

 

"만약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만 중요하다면 그냥 그 문장을 표어처럼 암기하면 된다. 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겪으며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모험이야기가 전해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이제 그 즐거움을 향해 떠나 보자 …"

 


 

모험이야기를 읽어 볼까?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알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 프랑크푸르트 공항 지하철역에서 만난 청년의 말이다. 여행을 떠난 지 벌써 50일이 지났다는 청년은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티셔츠도 제 빛을 잃어 차라리 남루했으나 눈빛은 생기가 넘쳤다. 3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은 돈을 여행에 쏟아 붓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후회는 없노라고 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함께 읽을 문학작품을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어떤 것이 좋을까 고심하던 중, 문득 패기로 젊음의 희망을 읽게 해 준 그 청년이 떠올랐다. 그래, 모험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문학하면 성장소설을 떠올리는데, 모험이야기도 좋은 읽을거리가 될 것 같았다.

 

우선, 청년처럼 과감히 길을 떠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탈출을 꿈꿔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 진학이 절대명제인 양 여겨지는 현재와 미래의 수험생으로선 내신이며 수능의 압박에 옥죄일 터이고, 대학 진학이 아닌 다른 진로를 계획하고 있다면 더더욱 자신의 선택이 모험은 아닌지 곱씹을 성싶다. 게다가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빗대곤 하지만, 어찌 보면 인생은 위험을 무릅쓴다는 의미와 비일상적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모험에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사전답사도 할 수 없고 직접적인 가이드도 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모험이야기란?

 

모험이야기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위협이나 장애 또는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나고 겪으며 모험을 하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 모험적 행동에 흥미의 중심을 두기 때문에 무엇보다 재미있고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또한 미지의 세상 속에서 독립을 연습해야 할 시기인 사춘기와 그 전후의 격동적인 심리 상태와 걸맞아 청소년들이 읽기에 적당한 장르로 꼽힌다. 그러한 정신적 격동은 정신적으로 겪는 모험이기에, 많은 성장소설이 모험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모험이야기만큼 역사가 오래되고 범위가 넓은 장르는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꼽히는 「길가메시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역시 모험이야기가 아닌가. 서양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 로빈슨류(Robinsonade)라는 양식을 이룰 정도로 발표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모험소설의 고전이 된 18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인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풍자소설 「캉디드」(1759), 독일의 문호 괴테의 주인공의 정신적 편력과 완성을 다룬 대작 교양소설(성장소설) 「빌헬름 마이스터」(1798/ 1829), 이 모두가 모험이야기로 꼽을 수 있다.

 

물론 그저 재미로 읽고 넘길 작품들은 더욱 많아서, 온갖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에서 모험을 내세우기도 한다. 또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되 그것이 즐겁고 신나는 일임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에서 철학이며 역사, 과학, 논리, 수학 등 갖가지 학습용 주제에 모험이야기를 갖다 붙이기 일쑤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고 많은 모험이야기 가운데 무엇부터 읽어보는 것이 좋을까?

 

 

잠깐, 왜 우리 모험이야기는 찾기 어려운 걸까?

 

서양 고전도 좋지만 우선 우리나라 작품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작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론 아동문학 쪽에서는 모험이야기에 속하는 작품들이 더러 찾아지지만, 청소년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도 되지 않았다. 모험이야기 또는 모험소설로 이야기되는 것은 일반문학이든 아동청소년문학이든 거의 번역된 서구문학작품 일색이었다. 그래서 사전의 힘을 빌기로 했고, 「한국문학대사전」(문원각, 1975)과 「한국문예사전」(어문각, 1991)을 찾아보니 아예 모험소설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었다. 무척 뜻밖이었다.

 

대체 왜 우리 모험이야기는 찾기 어려운 걸까? 이것저것 자료를 뒤지다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선 모험이야기가 성립하고 전개된 사회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서구 소설의 역사는 기사이야기와 더불어 시작되는데, 이 기사이야기들이야말로 모험담이다. 기사들은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편력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기사의 기반인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새로운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외적으로는 남아메리카나 신대륙으로 가는 항로가 새로 열리면서 15세기 영국?프랑스?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 대서양 연안의 유럽 국가 대부분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복하기 위해 항해에 나선다. 말하자면 근대 모험소설은 식민주의를 배경으로 융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제도라든가 식민지 건설은 우리의 역사적 체험과는 사뭇 반대되는 일이다.

 

다음으로는 모험이야기란 아이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전편찬자들의 눈에서 벗어났을 수 있다. 「돈키호테」(1605)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이 작품을 쓴 목적을 '당시의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때까지 우후죽순으로 범람해 있던 기사이야기들은 황당한 모험과 에피소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나열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느슨한 전개방식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생생한 성격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서양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지위를 차지한다. 이렇게 소설이 성격 즉 '인간'을 그리게 되면서 하나의 사건에 이야기를 집중하고 더욱 치밀한 구성을 추구하며 근대소설로 발전해가는 동안, 모험이야기는 대부분 그때까지의 관행인 사건 나열식의 산만하고 느슨한 서술방식을 떠나지 못했고, 그 결과 오락을 위해 읽게 되는 '제2급의 문학'(아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38)으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오락성이 아이들 독자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하여 이후 모험이야기는 주로 아이들을 위한 문학으로 여겨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문학대사전」(학원출판공사, 1983)을 찾아보면 모험소설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를 보면 우리 문학에 모험이야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우리문학은 장르 구분을 달리할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환상적인 세계를 무대로 하여 기이한 사건이 풍부하게 전개되는 소설, 비현실적인 무용담이나 연애담의 요소를 지닌 소설을 모두 넓은 의미에서 전기소설(傳奇小說)에 포함시킨다.

 

 여기서 많은 모험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문학은 아니지만 「삼국지」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으로 읽혀온 「서유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문학 형식이 다양해진 현대문학에까지 이 구분을 적용하는 것은 마땅한 작품이 없다면 모를까 우리 문학자산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태도는 아니리라 싶다.

 

 

로빈슨 크루소 – 상징코드 '서바이벌'

 

뜻밖의 결과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다. 다시 작품을 고르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최근에 출간된 책들을 살펴보면 모험이야기 가운데 특히 '서바이벌' 또는 '살아남기' 이야기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삶이 치열한 경쟁으로 점철되고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의 발상이 '로빈슨 크루소'에서 비롯된 것임은 출간된 책 주인공의 이름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살아남기'를 뜻하는 상징코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살아남기’는 로빈슨 크루소가 상징하는 코드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조금만 꼼꼼히 읽어봐도 그 외에 생각해 볼 코드며 모티프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득 이번 기회에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알다시피 수많은 아류작들을 낳았던 당대 최고의 인기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자극은 한 시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우리나라의 '살아남기'류의 책들도 어쨌건 로빈슨 크루소의 모티프를 빌려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티프로 삼아 다시 쓴 작품들을 살펴보면, 문학을 보는 작가 개인의 관점이라든가 사회적 의식을 짚어볼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문학을 풍부하게 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문학을 풍부하게 하는 역할은 창작자와 독자(문학용어로는 수용자라고 부른다), 모두의 것이다.

 

만약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만 중요하다면 그냥 그 문장을 표어처럼 암기하면 된다. 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겪으며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모험이야기가 전해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이제 그 즐거움을 향해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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