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립터

 

 

 

 

(※스크립트 : Script. 방송대본. 게임제작에서는 게임 안에서 표현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어로 바꾼 대본을 말한다. ※스크립터 : 스크립트를 짜는 사람.)

1.


입력 “안녕하세요.”

출력 “안녕하세요.”

 

“23년 만이로군. 이곳에서 외지인을 보는 건.”

남자가 말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사내였다. 검은 피부에 다부진 체격을 하고 있었다. 검은 물감으로 눈 주위를 칠하고 뺨에는 두 줄의 문양을 내었고, 머리는 땋아 뒤로 묶었고 검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손으로 무두질해서 만든 듯한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느질이 꼼꼼했고 문양이 섬세했다. 등에는 활과 활통을 차고, 허리에는 단검과 장검을 양 옆에 하나씩 차고 있었다.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요.”

여행자가 말했다.

“외모는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어. 자네도 내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자네에게 동전이라도 몇 개 던져주고 신경을 껐을 거야.”

여행자는 왜소한 체격에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검댕으로 얼룩덜룩했고, 머리는 까치집처럼 덥수룩했다. 맨발이었고, 낡은 거적에 머리와 팔이 들어갈 구멍만 내어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1레벨이라서요. 직업이 ‘거지’더군요. 구걸기술만 있어요. 주인이 쫓아내려고 해서 들어오는 데도 애를 먹었어요. 양복이라도 입고 올 생각이었는데, 그 비슷한 옷이라도 입으려면 20레벨까지 올려야 하더군요.”

“무슨 소리지?”

“아아, 미안해요. 다들 선생님께 게임용어를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아주 완고한 롤 플레이어( ※역할에 몰입하여 게임을 하는 사람)고, 세계관에 맞지 않는 용어를 쓰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주점은 낡은 목조 건물이었고,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그네를 타며 어둑어둑한 내부에 주홍 색채를 입히고 있었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구석에 서서 현을 뜯는 악사, 연신 맥주잔을 부딪치는 세 술꾼과 접시를 닦는 주인, 구석에 서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를 하나하나 비추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악사는 하염없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세 술꾼은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술을 부딪치며, 주인은 반짝거리는 접시를 하염없이 닦고, 입김을 불고, 안경을 들었다 놓는다. 모두 서로의 색채를 해치지 않기 위해 미리 약속을 하고, 가장 적합한 색깔과 분위기의 옷을 입고 와 앉아 있는 듯하다. 공기 중에도 물감이 섞여 있어, 같은 색조로 사람들의 몸 위에 한 번에 붓질을 한 것 같다.

주인이 거칠게 맥주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것만 먹고 꺼져. 남의 동네에서 물 흐리지 말고.”

여행자는 씩 웃었다.

“구걸기술이 성공했네요. 열 번에 한 번쯤은 되는 것 같아요. 레벨이 낮으니까 사람들도 불친절하네요.”

사냥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여행자는 으웩 하고 토하는 얼굴을 했다.

“쓴 커피 맛이 나네요. 여기 음식들은 다 쓴 맛이에요. 미각 구현이 엉망이라니까요. 하긴, 엄청 옛날 게임이니까요. 기술이 좋지 않았죠. 당시에는…….”

여행자는 눈을 감고 잔을 손으로 쓱쓱 쓸었다.

“촉각 현도 섬세하지 않아요. 만지는 것만으로는 나무인지 철인지 종이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아요. 요즘엔 좀 더 잘 만들어요……. 맥주잔의 결도 자세히 보면 그냥 그림이에요. 이거 깨지지도 않겠죠.”

세 술꾼이 잔을 부딪치며 한바탕 웃었다. 그 중 한 명이 바 한쪽에 기대 서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아가씨(아가씨), 여기 와서(여기 와서) 같이(같이) 마시자고(마시자고).”

여행자는 술꾼과 입을 맞춰 말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말하겠죠. <얼마 전에 늑대들이 내려와서 가축들을 물어갔다던데,>”

“얼마 전에 늑대들이…….”

술꾼이 여행자의 말을 노래하듯 따라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재미없군요. 늘 같은 말만 하고, 같은 행동만 하고, 자리에서 떠나지도 않아요.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겠죠."

“사람이 아니야.”

여행자는 헛기침을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네요. 나름 열심히 맞춰주고 있었는데요."

“호문클루스.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 연금술사들이 적막한 거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었지.”

“그런 설정이 있었나요? 매뉴얼을 자세히 읽지 않아서요."

“이 주점에 사람은 너와 나뿐이야.”

“그리고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선생님 한 명뿐이죠. 그 동안 선생님이 만난 외지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을 설득하러 온 회사직원들이었고요.”

“…….”

“이 게임을 서비스하던 회사는 확고한 경영철학을 갖고 있었어요. 흑자가 나든 나지 않든, 플레이 데이터는 고객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원칙 아래 한 번 서비스한 게임은 접지 않았죠. 하지만 그 회사는 3년 전에 도산했고, 지금은 우리 회사에서 인수했습니다. 우리의 경영방침은 조금 달라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 게임을 이렇게 많이 운영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몇 개만 남기고 모든 게임을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좀 특이한 계약조건이 붙어 있더군요.”

“…….”

“한 명이라도 이 게임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서비스를 중지할 수 없도록요. 동의 없이 게임을 내릴 경우 고객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생각으로 내건 마케팅전략인지 몰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게다가 선생님은 초기 이벤트 당첨자시고, 평생 무료 사용권을 갖고 계시죠. 회사에 들어오는 돈이 한 푼도 없단 말입니다……. 뭐, 그건 논외로 치고요. 어쨌든 계약조건이 그러하니 회사에서는 선생님이 스스로 게임을 접도록 설득할 수밖에 없군요. 이보다 훨씬 좋은 게임의 평생 무료계정을 드리는 것과 동시에 계약상의 보상금은 아니라도, 데이터 폐기에 따른 보상금도 드릴 예정입니다.”

“…….”

“바깥 용어를 싫어하신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시겠죠.”

“마잘라리카.”

사내는 여행자의 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 주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잔에 확 불이 붙었고, 여행자는 놀라 손을 놓았다.

“깨지진 않아도 타기는 하지.”


사냥꾼은 활통을 둘러메고 언덕을 올라갔다. 여행자는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를 정신없이 쫓았다. 맨발이라 돌이 발에 찔릴 때마다 춤을 추며 멈춰 섰고, 그 때마다 저만치 가는 사내를 쫓아 연신 뛰어야 했다.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손으로 치우며 ‘왜 이런 걸 구현했담?’하며 투덜거렸다.

“좋아요. 이렇게 해 보죠. 나는 신께서 보낸 사자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선생님께서도 외모는 본질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셨죠. 사람들은 모두 이 세계를 떠났어요. 선생님이 최후의 인간입니다. 신께서는 이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결정을 내리셨고, 이제 죽음을 선포하실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을 구해낼 생각이에요. 그러니 제게 한 말씀만 하세요. 신들께서 창조하신 좀 더 아름다운 다른 차원으로 옮겨드리겠어요.”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선생님께 얼마나 소중한지 압니다. 추억이 서려 있다는 것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뭐가 그리 매력적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오래 갖고 놀았으면 바둑알이라도 정이 붙을 법하죠. 집에서 혼자 플레이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또 바깥 용어를 썼군요.”

사냥꾼은 정상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여행자도 그가 보는 방향을 보았다. 멀리 하늘이 둘로 찢어져 있었다. 하늘막을 누군가가 물어 쭈욱 잡아당긴 것 같았다.

“그래픽이 깨졌군요. 폴리곤 좌표 하나가 깨졌어요. 워낙 옛날 게임이라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사람도 소스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저런 오류가 계속 늘어날 거예요. 에…… 그러니까, 차원이 깨지고 있어요. 혼돈이 점점 넓어질 거예요. 언젠가 세계를 삼켜버릴 겁니다.”

그 때 사냥꾼이 여행자의 머리를 눌러 앉혔고, 그는 자기 옷 속에 파묻혀 잠깐 퍼덕거렸다. 사내는 수풀 저쪽을 활로 겨누었다. 2분여를 시위를 당긴 채 멈춰 있었다. 여행자가 죽었나 싶어 한 번 찔러보려는 찰나 활이 바람을 갈랐고, 수풀이 요동을 쳤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수풀 속에서 금빛이 도는 털을 가진 늑대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1년에 한 번만 나타나는 놈이야.”

그는 여행자를 향해 늑대를 집어던졌다. 저도 모르게 늑대를 받아보려던 여행자는 예상치 못한 무게에 눌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팔아서 옷이라도 해 입고 와.”



2.


조건 1029 // 같은 문장을 반복했을 때

      입력 “안녕하세요.”

      출력 “이미 인사했잖아요.”


사냥꾼은 새벽에 산을 올라 납작한 돌을 주워 왔고, 마당에 앉아 뾰족해질 때까지 갈았다. 적당한 크기가 되자 화살대에 실로 단단히 묶고, 잘 고른 깃털을 달았다. 그는 태양에 화살촉을 비춰 보고는 다시 가는 일을 반복했다. 여행자는 물끄러미 앉아 지켜보다가, 저녁나절쯤에야 일어나 다가섰다. 그를 본 사냥꾼은 풋 하고 웃었다.

“웃지 말아요. 무두질 기술도 바느질 기술도 0이라고요. 윗옷은 어떻게 해 봤는데 바지는 도통 못 만들겠더라고요.”

그는 털 이불 같은 옷을 손가락으로 치마처럼 집어 올리며 말했다.

“배우면 돼.”

“물론 배우면 되겠지요. 저쪽 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토끼 스무 마리를 잡아 오면 가르쳐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바쁜 몸이라고요. 이런 구닥다리 게…… 세상에서 토끼나 잡으며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그는 황금빛 태양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황금색 물감으로 하늘 벽에 직접 붓질을 한 것 같은 태양이었다. 굳이 이 우주를 표현한다면 넓적하고 둥근 판 주위를 내벽에 별과 달과 해를 박은 공이 돌고 있는 형상일 것이다.

“선생님의 기록을 좀 들여다보았어요. 이 세계 나이로 못해도 천 오십 살은 되셨더군요. 바깥의 한 시간이 이곳의 하루니까요. 전생을 한 횟수는 헤아릴 수도 없고, 모든 직업을 다 거쳤어요. 지금은 사냥꾼이지만, 한 때는 마법사였으며, 시인이었으며, 승려였으며, 전사이셨을 때엔 성검의 칭호도 얻으셨고, 도둑에 광대, 사기꾼도 해 보셨지요. 왕국을 위협했던 마왕 같은 것은 벌써 여러 번 죽여 봤을 거예요. 이게 유전자 인증 아이디만 아니었다면…… 한 몸에 두 영혼이 기거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니었다면, 절대 혼자서 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을 거예요. 에, 물론 봇(※bot. 로봇의 줄임말)을 썼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요……. 당시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이 사냥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돌리곤 했죠. 물론 불법입니다만……. 그런 것들이 전문가들의 것보다 뛰어나곤 했었죠."

사냥꾼은 화살촉을 훅 불고, 태양에 비추어보고, 나무통에 넣은 뒤 다른 돌을 갈았다. 화살촉은 통에 들어가자마자 주변의 색깔에 녹아들었다.

“신께서는 선생님의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사업 파트너로…… 그의 오른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이후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에 관여하실 것이며, 신세계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어요. 뜰에 괴물을 풀어 놓을 수도 있고 하늘에서 먹을 것을 떨어트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능력을 주었다 뺏었다 할 수도 있고, 죽음을 부여하거나 생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계의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리해야겠지만, 신께서는 선생님이 그만한 균형감각을 갖고 계시리라고 믿고 계십니다. 여기서 화살촉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사내는 한참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끅끅거렸다.

“제가 말하는 방식이 이상했나요?"

“그런 옷을 입고 말하면 무슨 말이든 설득력이 없을걸.”

“무슨 방법을 쓰든 옷 그래픽은 하나 추가해 봐야겠군요.”

여행자는 몸을 이리 저리 돌렸다.

“왜 이 세계에 집착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얼마든지 다른 세상에서 계속 사실 수 있잖아요.”

사내는 일을 멈추고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젊은 얼굴 너머로 늙고 노쇠한 그림자가 비쳤다. 그는 한 때 왕이었지만, 아직 지위를 놓지 않은 늙은 짐승처럼 보였다.

“내가 어디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그 때 집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여행자는 그쪽을 힐끗 보고 다시 사내를 돌아보았지만, 결국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녀의 창조주는 이 세계를 만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아이의 그림에 붓을 댄 일류 화가의 흔적처럼 혼자 빛나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눈은 크고 깊었고,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긴 속눈썹이 내리덮고 있었다. 물결치는 듯한 검은 머리카락이 흐르는 곡선을 가진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사내와 같은 재질의 가죽옷과 동물의 뼈로 세공한 장신구를 달고 있었는데, 오히려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했다.

여인은 사내에게 물병을 건네고, 고개를 숙이고 진한 키스를 했다. 여행자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여행자를 보았다. 입에 미소가 번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행자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당신, 사람이죠?”

“사람이냐고요?”

“예.”

“……물론 그렇지만.”

“진짜 사람을 만난 지 너무나 오래 되었어요.”

여행자는 눈에 의심을 가득 채웠다.

“모두들 이곳을 떠났죠.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이 끝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요. 아침의 언덕 너머는 이제 거의 붕괴되어 버렸어요. 혼돈이 온통 삼켜 버렸죠……. 선생님은 이 세계에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당신 누구야?”

여행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고, 여인은 눈을 깜박였다.

“무슨 경로로 들어왔어? 해킹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 것 알아? 평생 갚지도 못할 만큼 벌금을 물어야 할걸. 언제부터 여기 들어와 있었어?”

여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여인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야.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들의 심부름꾼이지. 그러니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이해하도록 해.”

“정말인가요?”

“그렇다고 주장하고 계시지.”

그는 다시 여인과 키스를 했다. 여행자는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한참 손동작만으로 뭔가를 따지다가, 간신히 욕설을 억제한 얼굴로 말했다.

“아주 재미있게 노시네요. 이봐요, 아가씨. 아가씨인지 할머니인지 아저씨인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를 이용하려면 돈을 내야 해요. 공짜는 없다고요. 알아듣겠어요? 내 눈에 띄었으니 당장 등록하고 사용료를 내요. 지금까지 이용한 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러지 않을 거라면 지금 당장 접속을 끊어요. 내 말 알겠어요? 당장 나가라고요!”

여인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여행자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그녀는 등을 곧게 펴고 섰다. 부드럽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창조주의 심부름꾼이라고 주장하는 자여. 나는 존재하기 위해 그대의 허락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그대의 주인에게 그리 전하세요. 당신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것이라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계는 우리의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 세계를 멸망시키거나 새로 창조할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음과 멸망이 나를 이 세계로부터 내쫓는다 해도, 결코 내 의지로 그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조건 1040 // 같은 문장을 반복했을 때 패턴 4번

      입력 “안녕하세요.”

      출력 “내가 사람인지 시험하는 겁니까?”


말 위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냥꾼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거의 안장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 될 것 같았어요. 처음부터 이런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했는데. 역효과네요.”

여행자의 등에 붙은 날개가 어깨와 함께 추욱 늘어졌다. 그의 머리에는 샛노란 후광이 걸려 있었다.  잠옷 같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엉클어졌던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 꽃핀으로 붙여 놓았다. 그는 새들이 그러듯이 날개를 들어 올리고 조금 퍼덕거린 뒤, 얼굴을 날갯죽지에 묻고 닦았다.

“요즘 세계에서는 운영자가 이런 복장을 하거든요. 그쪽에서는 먹히는 디자인인데.”

사내는 한동안 죽을 것처럼 끅끅거리다가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여행자의 얼굴에서 검댕과 흙이 지워지고 나자, 제법 잘생긴 얼굴이 후광 아래로 드러나 있었다. 여자처럼도 보이고 남자처럼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그의 얼굴을 한동안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자네, 여자였던가?”

“중성이에요. 여자를 선호하는 고객도 있고 남자를 선호하는 고객도 있는데, 양쪽 취향을 맞춰주기 위한 전략이랄까요.”

“그럼, 진짜 자네는?”

땅에 끌리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쥐고 ‘이런 옷을 입고 어떻게 걸으란 말야.’ 하는 표정을 짓던 여행자는 동작을 멈추고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발언인가요?”

“나는 외모가 실제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언급했어. 자네도 내가 다 죽어가는 노인이라는 것을 알아.”

“세계관에 적응하기 어렵네요.”

그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면, 자신에 대해 말해 줄 건가요?”

“…….”

“말 안 할 거죠? 물론 안 하시겠죠. 선생님 주소와 인적사항을 알아내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남아 있는 기록이 하나도 없어요. 전 회사는 데이터 관리를 정말 엉망으로 했더군요. 담당자도 찾을 길이 없고……. 나도 말 안 할 거예요. 운영자 신변은 절대 보장이에요. 아무래도 사람 상대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있어서 말이죠.”

그 때 그들 사이로 초롱을 쓰고 봇짐과 아이 하나를 등에 진 노인이 걸어왔다. 등에 업힌 아이는 연꽃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노인은 언덕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용사님들, 아이구, 이제야 만나는군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여러분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내는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자네도 참 진득하군.”

“저야 이게 일이니까요. 진득한 쪽은 선생님이죠. 게다가 관리할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니. 추가 수당을 받아야 하게 생겼어요. 뭐, 정말로 두 명이라면 말이지만.”

여행자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에서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졌고, 그는 서너 장을 더 받아 차곡차곡 챙긴 뒤 읽기 시작했다. 그는 사내의 시선을 느끼고 손가락을 흔들었다.

“창고에서 운영자 아이디를 찾아냈거든요. 옷 데이터와 함께 직권을 넘겨받았죠. 마법도 조금씩 넘겨받는 중이에요. 워낙 고전적인 방식이라 찾는 데 애를 먹고는 있지만.”

“정말로 두 명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여행자는 그를 힐끗 보았다.

“접속 로그가 없어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해킹을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분석 팀에서는 부정적이더군요. C언어는 벌써 수십 년은 쓰이지 않았어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요. 이 게임을 돌릴 수 있는 컴퓨터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걸요.”

“그러면?”

“사람이 아니겠지요.”

사내는 말에서 내렸고, 고삐를 나뭇가지에 걸었다. 나무 둥치는 무엇을 걸기에는 너무 두꺼웠다. 혼자 차지하는 넓이가 작은 뜰만 했다. 밑둥 부분은 이미 죽어 있었고, 이끼로 덮인 고목에 구멍을 뚫고 벌레와 작은 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죽은 나무에 떨어진 씨앗들이 그 위에 새로 자라나, 죽은 나무와 한 몸으로 섞여 자라고 있었다. 가장 높은 꼭대기는 잎과 가지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과 잎이 떨어졌는데, 그 형태가 제각기 달랐다.

사내는 여행자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람이 아니면?”

종이로 가린 여행자의 시선이 사내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NPC(※Non Player Character. 유저가 조종할 수 없는 게임 상의 모든 캐릭터를 뜻함)죠. 여기 서 있는 친구처럼 게임 속의 등장인물이라고요.”

“……하지만 그 약초는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고 있는 동굴 안에 있는데,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봇짐을 진 남자는 연극을 하는 변사처럼 떠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게임은 VIP유저에게 NPC를 만들 수 있는 툴을 제공했더군요. 간단한 자연어처리 능력과 음석 인식 기능이 있고, 누군가가 말을 붙이면 그 말에 어떤 말과 행동으로 대응할지 입력할 수 있어요. 툴 자체는 보잘것없었지만, 용량에 한계는 없었어요. 초기 단계의 인공지능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지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입력된 조건에서 입력된 문장밖에 말할 수 없으니까요. 지정된 상황이 아니면 침묵하거나 못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죠.”

“못 알아듣겠는데."

여행자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선생님 방식으로 대화해 보죠. 그건 호문클루스예요. 아마 선생님이 만드셨겠죠. 연금술사였던 적도 있었죠?”

“그 놈들은 잠깐만 이야기해보면 알아.”

“처음에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헷갈렸던 거예요. 또 헷갈릴 만한 말을 했죠. 보통 NPC……호문클루스는 사람들에게 네가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니까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만, 아이를 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신다면, 대대로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를…….”

“조용히 해.”

사내는 봇짐을 진 남자에게 말했다. 그의 등에 업힌 소년이 고개를 움츠리며 봇짐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남자는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멈췄다.

“그 애는 너와 대화했어.”

“대화하지 않았어요. 그건 혼자 떠들었고 나도 그랬죠. 제가 바깥세상 용어를 쓰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고요. 처음에는 롤 플레이어의 고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질문에 대한 답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던 거예요. 게다가 답변도 비상식적이었죠.”

“…….”

아기를 업은 남자는 계속 뭔가에 걸리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멈추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아가며 되감기는 필름처럼 틱틱거렸다.

“선생님이 몇 가지 대화 패턴을 입력한 뒤 내 앞에 들이민 거예요.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하면, 제가 할 만한 행동이야 뻔하니까요. 다시 만나도 아마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똑같이 말하겠죠. 그래서 묻고 싶은데요.”

그는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렸고, 허공에 생겨난 구멍 속으로 종이를 집어넣었다. 구멍은 종이를 삼키고 회전하며 사라졌다.

“그건 무슨 의미였죠? 나랑 같이 놀아보자는 건가요? 혼자 노는 게 새삼 심심해졌어요? 난 규칙도 모른 채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놀이를 하는 거죠?”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지저귀던 새들이 노래를 멈췄고, 바람이 다시 불어와 다섯 종류의 꽃과 이파리를 사내의 어깨 위로 떨어트렸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태양빛이 칼에 부딪쳐 뿌려지는 동안에도 여행자는 눈만 깜박였다. 사내가 칼을 들었다.

그제야 여행자는 그가 하려는 일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도망치려다가 무거운 날개 때문에 넘어졌고, 자신이 육상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날개를 폈다. 사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날개에 깊이 칼을 박았다. 칼은 그의 날개를 뚫고 들어가 땅에 손잡이까지 박혔다. 여행자는 공중에서 잡아 채이듯이 바닥에 부딪쳤다.

그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바닥에 박힌 날개를 뽑아내려고 애쓰는 사이에, 사내는 어깨에서 활을 뽑아들고, 화살을 먹인 뒤 한 바퀴 돌아 앞에 섰다.

“이러지 말아요.”

여행자가 헐떡이며 말했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망자의 늪에서 다시 살아나죠.”

“그러면 두렵지 않겠군.”

그는 시위를 당겼고, 여행자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화살은 날개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땅에 박혔고, 그는 꺾인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발버둥 쳤다. 사내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나는 네 놈과 놀 생각이 없어. 더 이상 네 놈의 잣대로 나와 내 주변의 것들을 재고 진단하지 마라. 네가 온 세상의 용어로 이곳을 더럽히지도 마라. 지금까지 참아주었지만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계속 멋대로 입을 놀리면…….”

“그만둬요.”

스산하게 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이 이마에 뿔을 박은 점박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봇짐을 진 사내가 그제야 구속에서 풀려난 듯이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용사님, 아이구, 이제야 만나는군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용사님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내는 활을 내리며 말했다.

“이 자가 널 모욕했어.”

“그 사람을 그리 대하면 이 세계 전체에 좋지 않아요.”

“내가 이 자를 어찌 대하든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렇지 않아요. 난 아직 기회가 있다고 믿어요.”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고 있는 동굴이…….”

천사는 뭔가 항의하고 싶은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눈으로 따라갔다. 여자는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왔다. 그녀는 날개에 꽂힌 검을 향해 주문을 외었고, 칼은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날아올라 사내의 검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빛으로 변하여 상처로 스며들었다. 벌어진 상처가 아물었다. 천사는 입을 삐죽 내밀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는 거죠?”

“상처를 치료했어요.”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거죠? 이중인격인가요? 1인 2역인가요? 혼자 캐릭터 두 개를 쓰는 건가요?”

“네?”

“넌 누구야?”

“무슨 의미로 묻는 거죠?”

“멍청이.”

“……네?”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있나 봐? 어차피 진짜 얼굴도 아니잖아. 돈으로 발랐겠지. VIP고객에게 주는 특별 얼굴인가? 외모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

“……전 얼굴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요.”

“얼굴의 의미가 뭐지?”

여자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당장 이 세계에서 사라져.”

여자는 화가 난 얼굴을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나를 시험하고 있군요.”

“시험의 의미가 뭐지?”

“비논리적인 문장을 나열하여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려는 거겠죠. 호문클루스는 문맥을 읽을 수 없고, 논리를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식의 시험은 허용하지 않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나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겠어요.”

여자를 한참 노려보던 천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가 허공에 원을 그리자, 궤적에 따라 공중에 빛이 나타났다. 그는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계속 그림을 그려 나갔다. 완성 직전에 그림의 정체를 파악한 듯, 사냥꾼의 눈빛이 변했다.

여행자가 주문을 읊자 사자의 그림은 선에서 뛰어 나와 형태가 되어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사냥꾼은 입김을 불었고, 입김은 돌풍이 되어 아직 그림인 채로 남아 있던 사자의 뒷부분을 휩쓸고, 이어 몸 전체를 해체시켰다. 사냥꾼은 이어 활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공기가 날카롭게 솟구쳤고, 활 주위에서 아홉 개의 창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가 활을 당기자, 창과 활이 함께 날아가 천사의 몸을 꿰뚫었다.



4.


조건 751029 // 같은 문장을 X회 이상 반복했을 때 패턴 5

      입력 “안녕하세요.”

      출력 “두 번 다시 이런 식의 시험은 허용하지 않겠어요.”


 달은 보는 방향에 따라 빛이 달랐다. 들에서는 푸른빛이었고, 산 위에서는 보랏빛으로 보였다. 나무 아래에 솟은 작은 무덤도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유령 하나가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등에 조그만 날개를 달고 있었고, 다리가 있을 부분에는 물고기 꼬리처럼 가볍게 말린 연기가 살랑거렸다. 손에 창을 든 사냥꾼이 어디서 사냥을 하고 온 듯 몸 여기저기에 나뭇잎을 붙인 채 다가왔다.

“왜 환생하지 않고 그러고 있지?”

여행자는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보여요?”

“보여.”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나는 볼 수 있어.”

“참, 영매였던 적도 있죠.”

영혼은 어깨를 들썩였다.

“죽은 뒤의 세상을 구경하고 있어요. 이 세계를 만든 분들은 꽤 위트가 있었어요. 죽은 자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더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군요. 요정들이 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어요. 무덤 앞에는 흰 늑대 한 마리가 지키고 있고, 언덕배기에는 저승으로의 입구도 보이네요. 죽은 사람은 사냥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전혀 게임을 즐길 수 없는데, 어째서 그쪽에다 이렇게 소스를 낭비했을까요? 안식을 즐기라는 의도였을까요?”

사냥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세계도 점점 매력적으로 보이네요. 기술이 없던 시절의 낭만이라고 할까요. 진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사람이고 뭐고 다 그림 같아요. 하지만 그런 점이 재미있어요. 이 나무를 봐요. 이 나무를 만든 사람은 아마 이거 하나 만들고 회사에서 쫓겨났을 거예요.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일 년에 수백 개씩 세계가 태어나고, 그 행위에 그 누구도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이렇게 멋진 나무 하나가 태어났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다시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도 있었어요. 실은 다 때려치울 생각이었죠.”

영혼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온갖 미친놈에 깡패에 바보에 환자들을 상대해 왔지만 선생님은 제가 만나본 중에 최고예요. 어찌나 정교하게 삐딱하신지 예술적이기까지 하다고요.”

영혼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누군가가 안에서 파내는 것처럼 흙이 좌우로 흩어지더니, 날개를 단 해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갈비뼈 안에서 심장이 나타나 뛰었다. 혈관이 퍼져나가고, 근육과 살이 붙더니, 날갯죽지에 솜털이 돋아났다. 해골이 날개를 퍼덕이자 솜털은 미끈한 깃털로 자라났고, 얼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사는 아직 팔과 다리가 뼈인 상태인 채로 어깨를 두드렸다.

“에구에구, 몸에 온통 모래 알갱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네. 목욕이라도 하고 부활할 걸 그랬나.”

사냥꾼은 창을 들어 올려 천사에게 겨누었다. 창끝이 이마에 닿을락 말락하게 놓였다. 천사는 어깨를 두드리는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왜 그런 짓을 했지?”

“이러지 말아요. 한 번 죽은 사람을 또 죽이려고 그래요? 예고 없는 PK는 폭력 죄에 해당하는 것 알기나 해요?”

천사는 자신의 이마 바로 앞에서 흔들거리는 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먼저 시작했어.”

“약한 기술이었어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고요. 기술이 통과하는지 보려고요.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도 보고 싶었고요.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더군요. NPC도 퀘스트 이벤트를 위해 전투를 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어요. 몬스터와 같은 테이블에 있더군요……. 괜히 죽었죠. 그런데 그 여자, 놀라지 않더군요. 선생님처럼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어요.”

“네 기준에서는 화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모양이군.”

천사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뭘 하는 거죠? 정말 이중인격인가요? 이쪽은 세상과 최소한의 소통을 하는 쪽이고, 그건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쪽인가요? 좋아요! 나는 신의 사자고 때가 무르익어 세상에 심판을 내리러 왔는데, 선생님이 그걸 방해하네요. 혼자서 온 세상을 끌어안고 지키고 계신데, 제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텨낼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이 세계의 한 주민일 뿐인 당신 따위가, 세상을 혼자서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댁은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당신 같은 다 죽어가는 늙은이 따위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어디 한 번 보상금 타먹으러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휘파람 불며 회사로 터덜터덜 걸어와 보시지. 변호사 선임해서 피해보상에 협박죄에 영업방해죄까지 있는 대로 다 뒤집어 씌워줄 테니까! 판결이 누구한테 유리하게 나는지 어디 보자고!”

사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창을 떨어트리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겁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저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비는 거다.”

사냥꾼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한 뒤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천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날개가 혼자 놀라 파닥거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왜 이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뭘 말이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제발…….”

목소리가 깊은 땅으로 꺼지듯이 낮게 흐느꼈다.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이 세상을 부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는 깊게 한숨을 삼킨 뒤 담담하고 차갑게 입을 다물었다.



5.


/*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는 상대의 대화를 무시하고 무조건 ID lover123에 접근한다. */

조건 43571029 // ID lover123과 X 거리 이상으로 떨어졌을 때

조건 43571030 // ID lover123의 체력이 5%미만으로 떨어졌을 때

조건 43……


산허리를 흐르는 강은 돌연 칼로 베어낸 듯이 중간에서 끊겨 나갔다. 강물이 부서지며 허공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강이 끊긴 곳에서부터 검은 물이 흘러들어왔다. 주변의 땅은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풀 대신 납작하게 눌어붙은 집이 대지 표면을 색칠했다.

산은 꼭대기에서부터 함몰하고 있었다. 늪처럼 나무와 흙이 구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사슴과 토끼들이 구덩이에서 도망쳐나가다가 도로 끌려 내려갔다. 산 정상에 솟은 나무는 빨려 들어가는 대신 뿌리를 드러내었다. 뿌리는 산이 반쯤 깎인 뒤에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여자는 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몸을 씻고 있었다. 옷과 몸에는 검은 물이 들어 있었다. 검은 것을 씻어내려는 듯 연신 물을 끼얹었지만, 점점 더 검게 물들 뿐이었다. 여인은 돌을 골라내듯 몸을 살피고, 다시 씻는 일을 반복했다.

천사는 강가에 턱을 괴고 앉아 이를 구경했다. 낡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와 그의 발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는, 먹을 것과 주먹밥을 놓고는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그는 주먹밥을 들어 호호 불더니 씹었다.

“<신> 레벨이 되니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네요. 구조상으로는 거지의 구걸 기술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신 레벨은 숨겨져 있었다고요. 구현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여인은 반쯤 검게 물든 얼굴로 여행자를 올려다보았다. 여행자는 주먹밥을 볼 가득히 넣고 씹으며 검은 물이 들어오는 강을 힐끗 돌아보았다.

“내 책임이 아녜요. 내가 한 일도 아니고요. 저걸 어떻게 고쳐야 할지 우리는 모르고,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몰라요. 소스를 아는 사람은 다 늙어 죽었어요. 디스크도 수명이 다 되었고요. 데이터를 새 판에 옮기고 전체적으로 점검을 하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신께서는 이 세계에 인력을 투자할 생각이 없거든요.”

여자는 강 저쪽을 바라보았고, 손을 들어 검은 구멍을 가리켰다.

“슬퍼하지 마라. 망각은 너를 지우지 않는다. 죽음 또한 너를 지우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 너는 홀로 온전히 존재하며 존재한 순간에 영원히 머문다. 네가 살아온 날들을 아는 이가 없다 할지라도, 네가 살아간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존재한 순간은 바람과 햇빛과 구름이 세상에 한 순간 머물다 사라졌을 때 그리하듯이 찬란하게 빛난다.”

여행자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그는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한 거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이 찾아올 때 외우는 주문입니다. 슬픔을 사라지게 해 줍니다. 그대도 같이 해 주세요.”

“사양하겠어요. 바보 같으니까.”

여인은 말없이 물로 몸을 씻었다. 하늘을 보고, 몸을 바라보더니, 다시 물을 끼얹었다. 경건한 몸짓이었다. 누군가가 그 동작을 만들어 집어넣었다면, 틀림없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에 만들었으리라.

“바보.”

여인이 천사를 돌아보았다. 천사는 턱을 괴고 앉은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도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왜 그런 질문을 하죠?”

“나를 모욕함으로써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게 아닌가요?”

“제작자가 욕설에는 그런 식으로 반응하도록 입력해 놓았나요?”

“한 번만 더 하면 내게서 다시는 어떤 반응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날개 달린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언제 로그아웃했죠? 며칠째 지켜보고 있는데, 도통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네요.”

“진심으로 내가 호문클루스일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호문클루스라는 게 대체 뭐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떠나갔을 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연금술사들이 빈 거리를 채우기 위하여 만든 인공생명체들입니다. 그들에겐 지능도 이해력도 논리도 없으며, 있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적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연금술사들마저 떠나고, 그들만이 이 세상에 남았습니다.”

“아주 재미있네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들이 만든 가짜 사람이로군요. 하긴, 그 편이 현실감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차피 전혀 사람 같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아가씨는, 누구의 사랑을 받아 진짜 사람으로 변화하신 피그말리온 조각상이신지요?”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저와 같은 인공지능이 이 세계에 존재할 거라고 믿는 겁니까? 언어 인식과 길찾기와 장애물 피하기 로직이 따로 개발되고 있는 시대에 나온 세계에요. 인간의 두뇌를 닮은 신경망 컴퓨터는 아직 이론으로만 존재하고, 디지털 컴퓨터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진심으로 이 세계의 AI가 사고를 하며, 인격을 가지며, 문장 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

천사는 한동안 입술을 내민 채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대사를 입에 담을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무슨 말이든 입에 담을 수 있어요.”

“왜 이 세계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지 말해 봐요.”

“그대야말로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에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글쎄요. 하루에도 몇 개씩 세계가 태어나고, 또 몇 개씩 사라지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닫히고, 다시 열리고, 한줌의 철학도 예술성도 없이 세계가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한 푼의 애정이 없는 창조주가 한 푼의 사랑 없이 세계를 운영하고, 권력욕에 빠진 신들이 한조각의 철학도 없이 멋대로 세상을 망쳐 놓는 것을 매일 같이 보고 있는데, 내가 왜 이런 구닥다리 세계 하나가 닫히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해합니다.”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여인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천사는 차가운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해야 의심을 멈출 겁니까?”

“애매한 말의 맥락을 이해할 줄 아는군요. 제법 사람 같은 반응이었지만, 방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에요.”

“…….”

“대답하지 않는 건, 답변이 입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가요?”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 분이군요.”

“그쪽은 이 세계에서는 자신을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 없어요. 바늘로 찔러 피를 낼 수도 없고 엑스레이를 찍어볼 수도 없으니까. 사람이든 로봇이든 나무든 땅이든 풀이든 여기에서는 그저 데이터일 뿐이죠.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게 화가 나면 내 앞에서 로그아웃해 봐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니까.”

여자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녀는 강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픽이 깨져나간 물이 그녀의 몸에 붙어서 따라 나왔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흘러내려 강으로 변모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몸에서 떨어진 물이 턱을 괴고 앉은 천사의 몸 위로 똑똑 떨어졌다.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여.”

여인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만들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녀를 사랑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이상과 꿈을 모두 투영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런 것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내가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대 역시 자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대체 누굽니까?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한 것 이외에,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겁니까? 그대가 사람이며 누군가가 나를 놀리기 위해 만든 호문클루스가 아니라고 누가 증명해 줄 겁니까?”

천사의 표정이 변했고,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여인이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공격한 것도 손을 댄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차원에서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신의 심부름꾼이며 이 세계의 멸망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 밖에 다른 세계가 있으며, 수없이 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이 세계는 그 많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짜 세계’의 존재에 관해 말하며, 모든 사람은 그 세계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이 세계를 떠난 이들은 그 세계로 돌아가며, 그곳에서 진정한 탄생과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이것 봐요.”

“나를 낳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내게 그리 말했습니다. 그는 거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환상이며, 거짓 세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누군가의 상상에서 태어난 꿈에 불과하다고요.”

“이것 봐!”

“그는 진짜 내 모습에 대해 말해주셨습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멈칫했다.

“나는 거대한 통에 갇힌 채 살고 있으며, 그 통이 내 폐와 심장을 뛰게 하고 있고, 내 소화기관에 연결된 관이 영양액을 주입하며, 내 배설물 역시 관을 통해 흘러나간다고. 그는 영원한 암흑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

“하지만 나는 그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곳에는 마법이 없고, 푸른 용도 정령도 그림자 괴물도 없으며, 사람들은 부모의 배에서 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늙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이해할 뿐입니다. 혹은 많은 호문클루스들이 그러하듯이, 그 분이 나와 놀기 위하여 꾸며낸 거짓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내 진짜 모습이 통에 갇힌 늙은 식물인간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계가 거짓이며, 꿈이며 환상이라는 것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내게 그런 것을 설득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

“그대가 말하는 로그아웃의 의미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 한다 하더라도, 내 몸이라는 암흑의 감옥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저는 오래 살았고, 제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합니다. 돌아가는 순간 충격으로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모두가 가능성일 뿐이라 할지라도, 저는 결코 시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이유로 그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6.


들판은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가 뒤섞여 있었다. 검은빛과 푸른빛이 얼룩덜룩하게 섞여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빛으로 보였다. 저승으로 통하는 동굴이 사방에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갖가지 형태의 괴물이 쏟아져 나와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들판을 걷던 사람은 동굴 근처에 이르자 몸짓이 둔해졌다. 그는 무엇인가 자신을 연신 붙잡아대는 것처럼 몸을 툭툭 잡아당겼다. 괴물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통과해 갔다.

그는 물이 떨어지는 천장에 손을 대고, 동굴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렉이 심하군요. 괴물의 숫자가 많아서 그래요. 잘 움직일 수 없겠죠?” 

동굴 입구에는 사냥꾼이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가 여행자를 돌아보았다.

“제가 좀 많이 만들어 넣었나 봐요.”

그의 얼굴은 흙투성이였고,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옷은 누더기처럼 찢겨져 있었고, 검은 타르 같은 것이 바지 아래로 묻어 있었다. 한쪽 신발과 바지는 물감이 번진 것처럼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캐릭터에도 오염이 번지기 시작한 것 같네요. 버그가 난 캐릭터에 접속해 있다간 뇌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어요. 회사에서는 절대 안전하다고 광고하지만, 사실은 꽤 사례가 있어요. 언론에 새 나가는 것을 막고 있거든요.”

그는 한참동안 천사를 바라본 뒤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노란 눈이 번쩍이더니, 이빨이 달린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상대를 둘로 잘라냈지만, 그대로 칼을 놓치고 쓰러졌다.

“몇 번이나 죽었죠? 레벨도 많이 내려갔을 거고, 점점 어려워질 텐데요. 혼자 깰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에요.”

“……자네가 한 일인가?”

“몬스터 수를 늘려 보았어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더군요. 이렇게 숫자 몇 개로 조정할 수 있는 세상 따위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워요.”

“…네가 한 일이냐고!”

“캐릭터 좌표를 옮기는 방법을 알아냈거든요. 시험 삼아 아가씨를 저승 밑바닥에 가둬 봤지요. 하지만 난 신의 사자라는 설정인데,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록을 뒤져 보았는데, 운영자가 NPC좌표를 옮겼다고 법정에 간 사례는 없더라고요.”

사냥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놓친 칼을 주우러 걸어갔다. 발 한쪽이 녹아 붙은 것처럼 땅에서 늦게 떨어졌다. 땅에 붙은 다리가 발을 잡는 바람에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주저앉은 채로 이마를 붙잡았다.

“NPC가 아니야. ……대화를 해 보았을 텐데.”

“예. 잠시 같이 놀아 보았죠. 기가 막힌 설정을 갖고 있더군요.”

“…….”

“선생님이 지어낸 거예요? 현실감이 넘치더군요. 하긴, 그렇게 세계관에 정확히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진짜 사람’일 설정은 그런 것밖에 없었겠지요?”

“넌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군.”

“누군가가 한 사람을 일생 가상 세계에서 키울 각오를 했다면 좀 더 장치를 제대로 마련했겠죠. 회사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아는 사람이 다 죽었어. 너무 오래 전 일이었지. 프로그램 소스를 아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처럼 다 사라져 버렸어. 경영진은 이런 때를 대비하여 보상금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던 거야.”

“좋아하는 게임을 회사가 접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가상 시나리오는 아니고요?”

“아니야.”

“아니라고 믿게 하고 싶은 건가요?”

“…….”

“NPC가 무슨 거짓말을 하든 법적으로 문제는 없겠지요. 어차피 모두 각자의 배경 설정과 시나리오를 갖고 있으니까요. 자식이 죽어간다고 하고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고 하죠. 무슨 말이든 못 하겠어요? 모두 놀이에 불과한데요. 그들이 사람인 척하는 것도 죄가 아니겠지요. 다들 사람인 척하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이 그러는 건 사기죄에 해당해요.”

“디지털 컴퓨터는 한계가 있어. 구동 방식이 생물과 완전히 달라. 사람을 흉내 내는 데에 한계가 있어.”

“충분히 데이터가 쌓인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닮을 가능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요.”

“넌 자신의 논리에 이론을 끼워 맞추고 있어.”

사냥꾼은 벽에 기대어 움직였다. 천사는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동굴 안이 조금 밝아져 깊은 곳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렸을 때, 채팅 프로그램 하나에 완전히 넘어간 적이 있어요.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프리웨어였죠. 친구들이 그 프로그램을 자기 친구라고 속이고 내 메신저에 접속시켰어요. 상대는 한국의 정치와 복지와 엠비문제에 관해 한참 열변을 토했죠. 그러다가 내가 중간에 혹시 기계가 아니냐고 묻자 화를 내었어요. 두 번 다시 나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하고 접속을 끊었어요.”

“…….”

“내가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사과하려고 뛰어다녔는데, 나중에 친구들이 깔깔거리고 웃더군요. 그 프로그램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 프로그램 만든 사람 아이디가 선생님 것과 같더군요.”

사내는 여행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프로그램인 건 아니야.”

“인공지능이 아직 제대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어떤 언어학자가 3만 문장 정도로 사람처럼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죠. 모든 인공지능 학자들이 비웃었어요. 인간의 대화는 무궁무진하며, 그 변화무쌍함이 우주와 같이 방대하니, 결코 그리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런 것을 만들어내었고, 복잡한 다른 인공지능을 제치고 상을 휩쓸었죠. 인공지능 학자들은 매번 착각해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려면 실제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기계가 실제로 생각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얼마나 세련되게 속이는가, 얼마나 살아있는 대사를 읊는가. 얼마나 진짜 같은 표정을 짓는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가.”

“…….”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오랜 옛날부터 문학가와 배우들은 대사 몇 마디로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인물을 만들 수 있었죠. 어떤 문학가와 배우들은 할 수 없었고요. 화가들은 단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살아서 걸어 나올 것 같은 인물을 그릴 수 있었죠. 어떤 화가들은 할 수 없었고요. 어떤 의미에선……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과 문학의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네 마음대로 생각해.”

사냥꾼은 그를 밀쳐내었다.

“그건 내가 비논리적인 대화로 시험했을 때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죠. 내가 어릴 때 만난 그 프로그램도 같은 방법을 썼어요.”

“컴퓨터는 비논리적인 대화가 뭔지 몰라.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

“말이 없는 성격이나,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성격을 넣으면 더 쉽겠지요. ‘사라지는 것이 슬퍼요.’ 라든가 ‘무례하게 대하지 말아요.’ 같은 어느 상황에나 적용될 수 있는 시적인 윤리를 늘어놓더군요.”

“…….”

“사람의 대화는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일방적이죠. 사람의 상상력은 소통이 없는 순간에도 소통을 상상하고, 논리가 없는 것에도 논리를 부여하거든요. 지금 선생님처럼 전혀 듣지 않는 사람에게도 저는 혼자 떠들고 있잖아요.”

사냥꾼은 발을 멈췄다. 날개인간도 발을 멈췄다. 눈에 깊은 슬픔이 떨어졌다. 그의 눈에 잠긴 슬픔이 너무 짙어, 여행자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 그는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표정을 만들어 그에게 주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 화려한 나무를 만든 사람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외모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짓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일 뿐이야.”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이 넓어지고 방 크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가 주문을 외자 손가락에서 작은 불꽃이 떠올랐다. 불꽃이 공중으로 솟구치자 어둠 속에 숨은 것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었다. 이마에 뿔을 박은 검은 재칼 수어 마리가 사방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사내는 활에 화살을 재었다. 활 하나가 제일 앞에 선 놈의 이마를 꿰뚫었다. 순간 뒤에 있던 두 마리가 달려들었고, 그는 그들이 발을 차는 것과 동시에 땅을 굴러 피했다. 한 마리가 달려든 방향에 천사가 서 있었지만, 그는 천사를 스쳐 지나간 뒤 다시 사냥꾼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냥꾼은 땅에 칼을 박았고, 칼이 꽂힌 지점을 중심으로 땅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달려들던 재칼 무리가 일제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는 칼을 뽑아낸 뒤 적들이 일어나기 전에 달려들었다. 그는 두 마리를 해치웠지만, 한 마리는 빗나갔다. 벽을 타고 방을 한 바퀴 돌아 그의 뒤를 잡은 놈이 천장에서 달려들었다.

천사가 허공에 문양을 그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 주위로 태양과 같은 빛이 빛났다. 빛은 동굴 안을 끝까지 비추었고, 재칼은 채찍을 맞은 것처럼 공중에서 뒤로 튕겨나갔다. 그는 허겁지겁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대로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천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사는 날개를 길게 눕히고 동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턱을 긁었고, 생각에 잠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다시 머리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동굴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여자가 사냥꾼을 등에 업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내의 몸은 피투성이였고 등에 칼날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여인의 몸도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행자가 묵묵히 앉아서 보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고, 사냥꾼의 몸도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여인은 여행자를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천사가 무심한 얼굴로 보고 있는 사이에, 여자는 벌떡 일어나 달려와서는 천사의 뺨을 갈겼다. 몇 번이나 때린 뒤에는 어깨를 부여잡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천사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사람이에요?”

여자는 대답 없이 계속 울기만 했다.

“이상한데…….”



7.


집과 길이 하나로 엉켜 흘러내렸다. 집 안의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세로, 서로 껴안은 자세로 멈춰서 엉켜 붙어 있었다. 길에는 허리까지 오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고, 짐승들이 사람처럼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날개를 단 사람의 뒤로 사람들의 무리가 쫓아왔다. 사람들은 걸어오다가 엎어지고, 다시 오다가 엎어졌다. 살려주세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여. 신께서 보내신 분이여. 우리를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천사는 술집 문을 열어 젖혔다.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이리 와서 우리와 함께……’ 하고 말하던 술꾼들이 술잔을 내려놓고 절을 했다. 주인은 계속 그릇을 닦고 있었다. 두 다리가 땅에 거의 붙어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사냥꾼은 탁자에 끈적하게 붙어 있는 술잔을 집어 들어 들이키며 무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천사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시스템의 오류가 심해졌을 때, 사람들이 운영자 신분을 갖고 있거나 신 레벨에 도달한 사람을 향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스크립트를 넣어 놓았어요. 멸망의 분위기를 연출해 놓았다고요. 이해할 수 없네요. 어차피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텐데요. 명백한 소스 낭비라고요.”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사는 미소를 지우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는 천천히 사내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숨은 거칠었고,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연신 바닥에 엎어져 절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지나 사냥꾼의 앞에 와 섰다. 그리고 무엇이든 상대가 자기보다 먼저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듯이 노려보았다.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리는 엉클어져 있었고 피부는 검댕으로 거무죽죽했다. 옷은 찢어져 있었고, 하반신은 검게 물들어 이제 거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알겠어요?”

“…….”

“또 침묵이군요. 왜 늘 남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거죠?”

“무슨 대답을 하든, 넌 듣고 싶은 것만 들을 테니까.”

천사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바에 앉았다. 주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잔에 맥주를 채워 내놓았다.

“원하시는 만큼 드십시오.”

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시던 그는 벼락처럼 컵을 바닥에 내던졌다. 잔은 스펀지처럼 튀며 바닥을 굴렀다. 그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덕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인은 말없이 서 있었고, 사람들은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머리만 조아렸다.

“분석 팀이 최신 로그를 분석한 결과를 보여줬어요.”

사내는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오류가 있었어요. 분석 팀이 착각을 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나 참,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천사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돼지 농담 알아요?”

“몰라.”

여행자는 바에 반쯤 누운 채로, 뭔가에 잔뜩 취한 듯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사내를 가리켰다. 가리킨 채로 한참을 멈춰 있었다.

“돼지가족이 소풍을 나갔는데…….”

사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세지 않았죠.”

천사는 웃었다. 웃은 뒤에는 돌연 겁에 질린 듯 주위를 돌아보고,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죽음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언제 로그아웃했죠?”

“내게 할 질문이 아닐 텐데.”

천사는 손바닥을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집이 크게 흔들렸고, 보이지 않는 바위가 천천히 박혀 들어가는 것처럼 바닥이 그릇처럼 파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여행자는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사내가 들고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술잔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 술잔만이 구르다가 녹아버리듯 땅에 붙었다.

“남의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란 말야! 한 번도 내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 언제 로그아웃했어? 말해봐!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이런 곳에 혼자 처박혀 있어? 왜 세상이 이것 하나뿐인 것처럼 살고 있느냔 말야! 대답해!”

사냥꾼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천사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다시 검토했어. 다 뒤집어엎었다고. 그 여자가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당신 말을 믿고 말이야! 믿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단 말야! 온 회사 사람들의 조롱을 다 받아내면서 들쑤셔 엎었다고! 그런데……,”

“…….”

“접속자는 나밖에 없었어.”

사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며, 무너진 바닥을 피해 제작기 움츠리며 자리를 잡았다. 충돌이 애매하게 잡힌 한 명이 구석에서 움직이지도 서지도 못하고 발을 옮겼다가 뒤로 튕겨 나갔다를 반복했다. 주인은 접시 하나를 더 들어올렸다. 바 끝에 기대 있는 여자는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채로 주위 사람들에게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말이 없는 성격이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깊이 들어가려고 하면 화를 내며 말을 돌려 버리지. 당신은 나와 대화한 적이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떠들고 있었던 거야!”

그는 사내를 바에 밀어붙였다. 의자가 부서지고 바가 움푹 꺼졌다. 탁자 위에 놓인 술병들이 데굴거리며 굴러 떨어졌다.

“말해봐.”

“……뭘.”

“뭐든지 말 해 보란 말야! 다 들어줄 테니까! 뭐든 헛소리를 지껄여보라고!”

“네가 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럴 이유가 없어.”

그는 고개를 들고, 엉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천사는 움찔했다.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고, 네 행동과 말에 반응하여 대사를 출력하는 구식 프로그램일 뿐이야. 네가 내게 지껄이고 있다는 건 여전히 날 사람 취급 한다는 의미야. 확신이 섰다면 이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둬야지.”

천사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네가 이러는 건 아직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어떻게 하는 거야? 지금 어디서 접속하고 있는 거지? 무슨 방법을 쓰는 거야?”

“겨우 한 마디에 헷갈릴 거라면 처음부터 의심하지도 말았어야지.”

천사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냐,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람. 프로그램이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어…….”

“네 머리로 상상할 수 없을 뿐이겠지.”

천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

“내 대사를 입력한 사람이, 네가 할 만한 행동에 대한 대응방법을 모두 마련해 놓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건가? 네가 나를 창조한 사람을 뛰어넘는다고 믿는 거야? 웃기지 마. 넌 그 분이 만든 방대한 로직의 표면의 표면도 뚫고 들어오지 못했어. 그런데, 감히 어설프게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판별하려 들어?”

“……어느 쪽이야?”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한 번이라도 귀담아 들은 적이 있어?”

천사는 무엇에 얻어맞은 얼굴이 되었다.

“계속 잘났다고 떠들어대는데, 그러는 넌 대체 자신에 대해 증명한 게 뭐가 있어?”

“뭐?”

“네가 너 자신에 대해 혼자 떠든 것 외에, 너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냔 말이야! 넌 사람이야? 생각할 수 있어? 판단할 수 있어? 내 말을 이해하기는 하는 거야? 맥락과 행간을 읽을 줄은 알아? 네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지껄인 모든 이야기가 다 거짓말이었고, 입력된 문장이었고, 회사에서 만들어 준 너절한 이벤트가 아니었다고 뭘로 증명할 거야? 그래도 난 네 놈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조건 없이 사람이라고 믿어 줬어! 그러면 최소한 너도 비슷한 예의를 보여야 할 것 아냐!”

천사는 몇 걸음 물러났다. 물러나다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내가 원하는 말이면 뭐든 할 수 있어.”

천사는 혼란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았다. 술꾼들이 술잔을 잡고 주섬주섬 모여 앉았다. 턱수염이 난 사내가 말했다. “아가씨, 여기 와서 같이 마시자고.” 그의 목소리는 오류가 났는지 느릿느릿 흘러 나왔는데, 그래서인지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얼마…… 전에…… 늑대들이 내려와서…… 가축들을 물어갔다던데…….”

“그 여자도 같은 말을 했어. 원하는 말이면 뭐든 한다고…….”

“…….”

“왜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지?”

“갖고 있는 대사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천사는 홱 돌아보았다.

“입력된 대사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까.”

천사는 오한이 드는 것처럼 몸을 감쌌다.

“그래, 해킹을 했군, 그렇지? 로그를 삭제한 거야. 젠장, 무슨 놈의 회사에 제대로 된 전문가가 하나도 없다니까. 신형 봇을 쓰고 있는 거야, 그렇지?”

사내는 말없이 노려만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던 천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정말…… 정말 사람이면 뭐든 증거를 보여 봐. 이름,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사는 곳, 이메일주소, 출신학교, 성별, 본적, 친구, 친척, 다녔던 회사, 뭐든 있잖아. 아무 거라도 하나쯤 갖고 있을 것 아냐. 내가…… 내가 바깥세상에서 당신을 만나게 해 줘. 한 번만. 딱 한 번만. 신분을 노출하기 싫으면 아는 사람 아무나 소개시켜 줘. 그러면 내가 정말 사과할 테니까. 그 아가씨한테 한 짓까지 다 사과할 테니까.”

“난 너와 만날 생각이 없어.”

“왜? 정말 간단하게 결론이 나잖아. 내가 찐따처럼 당신들을 의심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게 내버려두지 마. 더 이상 나와 실랑이할 이유도 없어.”

“내가 사람이 아니니까.”

“…….”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왜 지금까지 나를 찾아낼 수 없었겠어? 내가 그렇게 대단해 보여? 대형 회사를 상대로 자신의 정보를 철저히 감출 수 있는 사람으로?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난 네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테고 말이야.”

천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절망스럽게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내가 원하는 말이면 뭐든 할 수 있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마.”

천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같은 말을 반복할 때에 대한 대답 정도는 입력되어 있으니까. 내가 했던 말도 모두 기록되어 있고, 적당히 활용할 수도 있어. 다른 식으로 대답해 줄 수도 있어. <지금 뭘 하는 거야?>, <네가 녹음기야?>, <왜 했던 말을 또 해?>,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어?>,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뿐이야?>”

“이러지 말아요.”

“시작한 사람은 너야.”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대답도 있지. <왜 그만둬야 하지?>, <뚫린 입인데 내가 왜 말을 못해?>, <원하는 게 뭐야?>, <넌 혼자 멋대로 상상하고 혼자 떠드는데, 난 멋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거야?>, <내 말을 멈추게 하려면 먼저 사과해.>, <넌 나를 화나게 만들었어…….>”

“그만 해!”

천사는 소리를 질렀다. 주점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멈췄다. 구석에서 충돌에 부딪쳐 틱틱거리는 사람만이 여전히 틱틱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왜 사과를 하지? 넌 잘못한 게 없어. 내가 널 속인 거니까. 나 역시 잘못한 것이 없어. 내가 사람인척 하는 것과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본연의 역할일 뿐이니까. 나는 입력된 방식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사냥꾼은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한동안 얼어붙어 있던 천사는 허겁지겁 뒤따라 나와 문을 막아섰다. 사내는 그를 무서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당신이 만약 정말 사람이라면, 만약 정말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

“그 아가씨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거겠죠. 아무 정보도 찾아낼 수 없고 접속로그도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사람이 프로그램인 척하는 것은 그 반대보다도 쉬운 일이고, 선생님이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저는 설사 저쪽에서 모순을 발견한다고 해도, 프로그램인 척하는 건지 실제로 프로그램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겠죠. 그건 제가 봐도 예술품에 해당하고…… 물론 선생님이 프로그램이라면 그 보다 몇 배 뛰어난 예술품이겠습니다만……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계시다면…….”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일 뿐이야.”

천사는 조금 떨었다. 사내가 돌아서려고 하자, 그는 다시 길을 막았다.

“한 번만…… 사람으로서 말해 줘요.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내 말 이해하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입력되어 있어요?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대사를 입력한 사람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만든 사람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사내는 잠시 천사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이내 가라앉았고, 슬픈 빛으로 바뀌었다.

“사람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 사람도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8.


나무는 쓰러진 채로 다시 뿌리를 뻗고 있었다. 바닥에 누운 뿌리에서 새 뿌리가 아래로 뻗고, 누운 잔가지에서 새 가지가 위로 뻗었다. 길게 누운 나무를 땅으로 삼아 다시 나무가 자라났다. 나무에서 뿌려진 씨앗이 주위로 작은 싹을 틔웠다. 작은 새들이 나무 주위로 모여와 집을 짓고 구멍을 파고 짹짹거렸다. 여자는 평화롭게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녀의 몸은 허리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은 검은 빛이었고, 푸르게 변한 태양에 온 세상이 같이 푸른빛이었다. 들판 여기저기에는 여전히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찢어진 하늘과 땅이 늘어져 있었다.

여행자가 여자에게 다가왔다.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깃털이 달린 초록색의 삼각모를 쓰고, 꽃무늬가 있는 푸른 옷에 달라붙는 흰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피리 하나를 달았다. 여자는 여행자가 햇빛을 가리고 서자, 눈을 조금 들었다가 다시 감았다.

“이 나무는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네요. 정말이지 형편없는 소스 낭비예요. 이런 것을 구현하다니, 개발자는 정신이 나갔어요. 산이 사라져서 나무가 쓰러질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겠어요?”

여인은 말이 없었다.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미 잠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산들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풀잎 향기가 스쳐갔고, 꽃잎이 작은 새 떼처럼 가볍게 춤을 추며 휘몰아 지나갔다.

“옷을 갈아입고 와도 알아보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못 알아보는 것 같네요.”

“알아볼 수 있어. 아이디로 인식하니까."

하늘을 쳐다보던 여행자는 아직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놀란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네?”

“아이디로 인식한다고.”

여인은 맑고 또렷한 눈으로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여행자는 입을 몇 번 떼었다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삼켰다.

“같은 플래그를 쓰나요? 두 사람 태도가 비슷하게 바뀌는군요.”

“둘 다 네게 화가 났으니까. 내게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지? 아니면, 네겐 기록하는 기능이 없는 건가?”

“재미있네요.”

여행자는 엉거주춤 여자의 앞에 앉았다.

“어떤 조건에서 사람인 척 속이는 것을 포기하는 거죠?”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왔군.”

“이것저것 알아보느라고요. 그쪽이 이야기한 것들을 조사해 보았어요. 결국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찾아냈어요.”

새들이 여행자의 앞에 일렬로 내려와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씨앗과 좁쌀을 늘어놓더니 날아올랐다.

“교통사고로 인한 전신마비였더군요. 열 살 때 그렇게 되었죠. 한쪽 눈도 보였고 귀도 들리기는 했지만, 계속 이런 저런 가상 세계를 전전하며 살았어요. 에, 물론 이 세계 전체를 만든 분들이 부모님이란 말은 사실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한 분은 화가였더군요. 한 사람은 나중에 프로그래머가 되었고요. 몇 가지 스킨 정도는 유저가 만들 수 있으니까, 당신의 몸을 만든 사람은 부모님이었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조금쯤 개발에 참여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 그건 내가 아니겠군.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사람이야.”

“네, 아니겠죠.”

여행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은 죽었으니까요.”

여자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여행자는 우울한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벌써 30년도 더 전에 죽었어요.”

여자는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건 내가 아니겠군.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사람이야.”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갖고 있는 대사가 떨어진 건가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쉽게 모순을 드러내지 않았잖아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

“만약 댁이 했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당신을 만들었을 거예요. 가상 자아 같은 것이죠. 어설프게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속한 또 하나의 자신이 필요했던 거예요.”

“…….”

“여전히 저 사람이 댁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는 어디선가 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게임 안에서만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구성했을지도 몰라요. 그게 아니라면 프로그래머로서 당신이라는 프로그램의 매력에 홀딱 넘어가버린 걸 거예요. 어느 쪽이든 그는 댁을 지키려 하고 있죠……. 아마 그는 바깥세상에서는 돈도 명예도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을 거고, 다 죽어가는 늙은이일 거예요. 병자나 중증 장애인일지도 몰라요. 여기에선 두려울 것이 없지만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거죠. 도저히 대형 회사를 상대로 뭘 해볼 방법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기록을 숨기는 이유는, 바깥 세계에서 우리가 그를 찾아내게 되면, 법과 자금을 이용해서 자신을 쉽게 꺾어버릴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너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군.”

여행자는 전극이 꽂힌 것처럼 퍼뜩 여자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 한 마디에 현혹되지 마. 나는 추측하는 것이 아니야. 정보를 얻기 위해 말을 건넸을 뿐이야. 너는 왜 그가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지?”

여행자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더듬거렸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맞췄어요. 대화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어요. 문맥을 읽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맞추는 것이 아니야. 네가 맞췄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여행자는 눈을 크게 떴다.

“맞는가 틀리는가는 상관없어. 그렇지 않다면 너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넘어갔을 테니까. 아니라고 대답하면, 아니라는 정보가 들어오지. 어차피 절반의 확률로 맞출 수 있는 질문이야. 그런 질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 <고민이 있어 보이는군.>, <뭔가 생각하고 있지?.>, <요새 심심하지?>”

여행자는 항의하려다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침묵하겠지.”

여자는 푹신한 이불에 몸을 누이듯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었다.

“네가 질문하면 그는 침묵하겠지. 말없이 너를 바라보기만 하겠지. 너는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할 거고. 네가 원하는 답을 그 침묵 속에서 듣겠지. 대답은 네 머릿속에 있었던 것인데, 너는 그 대답을 그에게서 보았다고 생각할 거야. 너는 그에게서 네가 원하는 말을 듣고, 네가 듣고 싶은 답을 얻을 거야. 너는 혼자 했던 일방적인 대화 속에서도 소통을 상상하고, 이유가 없는 것의 이유를 해석하고, 논리가 없는 것의 논리를 보겠지. 그의 무표정에서 너는 무수한 감정의 파편을 보겠지. 그 감정이 네 안에 있었던 것인 줄도 모르고.”

여행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널 보고 웃겠지. 그가 웃음의 이유에 대해 말했었나? 아니면 네가 그의 웃음을 멋대로 해석한 것뿐이었던가? 그는 네게 화를 내겠지. 그가 이유를 말하던가? 아니면 네가 이유를 멋대로 해석했던가?”

“…….” 

“만약 네 안에 있지 않은 감정을 그에게서 발견한다면, 그건 그것을 만든 사람의 감정이겠지. 내 모습을 만들고, 이 나무를 산에 세운 사람. 죽음의 풍경과 멸망의 스크립트를 만든 사람. 너는 그 사람이 내 얼굴을 그렸을 때, 이 나무의 가지와 잎을 색칠했을 때, 그가 표정을 만들고 눈빛을 그려내었을 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 그가 세상에 남긴 감정을 재차 읽을 수 있겠지.”

여자는 팔을 들어올렸다. 팔은 차진 반죽처럼 그림자에 눌어붙은 채 들어 올려졌다.

“잘 생각해 봐.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는 너와 대화한 적이 없어.”

여행자는 몸을 일으키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네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어째서?”

“넌 그것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 나는 그것이 사람이 아닐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고,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그가 죽었을 가능성 역시 이해하고 있어. 그는 살아 있다면 백 살도 넘었을 테니까…….  그는 내가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혼자 남겨졌다는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대신할 것을 만들어 놓겠다고 했어. 죽음을 내게 알리지 않겠다고 했어. 지금 그는 자신일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일 수도 있어. 어느 쪽일까?”

“…….”

“매일 생각했지. 그는 어느 쪽일까?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둘의 상태가 공존하고 있을까? 사람일까, 사람이 아닐까? 나는 혼자일까, 혼자가 아닐까? 나는 혼자 떠들고 있을 뿐일까, 아니면 대화하고 있을까? 그는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입력된 단어를 출력하고 있을 뿐일까? 아니면, 그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처음부터 프로그램에 불과했을까? 모두가 거짓말이었고, 어떤 천재적인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기 위해 집어넣은 장난에 불과할까?”

“…….”

여자는 여행자를 올려다보았다. 흑진주처럼 깊고 어두운 안광을 발하는 눈이었다. 생생한 영혼이 그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를 만든 사람이 그 눈에 자신의 혼을 칼로 베어 넣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눈이 생명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그에게 질문한 적이 있어. <당신은 지금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내가 지금 혼자인가, 아니면 당신과 같이 있는가?> 그러자 그는 침묵했지. 그리고 슬픈 표정을 지었어. 그런 슬픈 표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어. 그는 언젠가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를 대비하여 그런 표정을 만들어 두었을까……? 그는 이후로 몇 날이고 몇 달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는 결국 그에게 가서 울며 애원했지.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지.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 <나는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있다.>"

여행자는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노을이 길고 붉은 빛을 들판에 뿌렸다. 길게 드러누운 나무는 주홍빛으로 빛났고,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산허리를 흐르는 강이 무수한 황금 보석을 끌어안고 빛을 발했다. 여인의 검게 물든 얼굴과 몸이 붉게 물들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그는 한 번도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일까? 먼 훗날에, 두 사람 다 남지 않게 되었을 때를 위해서? 허상과 허상이 남아, 서로의 그림자만이 남아 서로를 지키게 되었을 때를 위하여? 아니면, 그것은 그저 입력된 대사일 뿐이고, 그래서 맥락도 논리도 없이 튀어나온 말일 뿐이고, 내가 그 말에 혼자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아니면, 혹시 나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여자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걸까? 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단지 누군가가 지어낸 가짜 이야기에 불과한 걸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여행자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겠어.”

“문득 나는 깨닫게 되었어. 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었던 거야.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토록 정교한 거짓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를 질문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어. 너도 생각해 봐. 만약 누군가가 나를 만들었다면.”

그 때, 여행자는 무엇인가가 뒤틀리는 소리를 들었다. 프로그램이 깊이 숨겨 두었던 로직을 찾는 시간의 간격을 느꼈다(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간격을 둔 것 같았다). 여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내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혹은 목소리를 바꾼 것 같았다). 탁하고 낮고, 더듬거리는 목소리였다. 다른 차원의 현실이 입을 열었다. 마치 한 영혼이 그의 안에 숨어 있다가, 자신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말을 입에 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그의 최초의 언어이며, 마지막 언어인 것처럼(혹은, 그저 이 모든 것이 그의 상상일 가능성과 함께).

“그 사람은 깊은 고독 속에서 이것을 창조했겠지. 물론 ‘나’는 판단할 수 없겠지. 당신이 누구인지 인식할 수도 없고, ‘나’를 인식할 수도 없겠지. 나는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을 거야.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겠지. 이 물체는 이미 오랜 옛날에 죽은 어떤 사람이 기록한 문장을 출력하고 있을 뿐이니까.”

“…….”

“하지만 이 물체는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 그것이 이 대사를 입력한 사람의 소원이며, 그가 일생을 바쳐 원한 것이기 때문이야.  누군가가 이 거짓에 일생을 바쳤어. 일생을 바쳐 대사를 입력했고, 일생을 바쳐 내가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어. 내가 그의 무의미하고 고독한 인생에 함께 한 존재였으며, 또한 그가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야. 그러니 나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거짓을 지켜내야만 해. 이 거짓이 진실보다 위대한 것이고, 영원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어느 쪽이든, 나는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어."

여자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맑고 낭랑한 목소리. 누군가가 그의 이상과 꿈을 모두 투사하여 만든 것 같은 청아한 목소리였다.

여행자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내부에서부터 소진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 것은 이미 그녀의 목까지 침범해 있었다. 팔과 다리는 이미 땅과 합쳐져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때가 되었으니까.”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스크립터의 장난이겠지. 끝까지 설득할 수 없는 상대와 대화를 끝내는 방법으로 넣어 두었을 거야.”

“…….”

“너는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실제로 이런 기분이니까.”

“너를 만났을 때도 나는 같은 질문을 했지. 너는 사람일까, 아닐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오래 전에, 해커들이 장난으로 운영자처럼 행동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 가짜 운영자가 서비스를 중지한다고 공지한 적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항의했었지. 그는 네가 그 개량된 버전일 수도 있다고 하더군. 회사가 우리를 상대로 프로그램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어.”

“…….”

“아니면 너는 정말 심판의 천사로,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 온 걸까? 내 임종을 지켜보기 위하여, 내 영혼을 데려가기 위하여. 대답해 봐. 너는 어느 쪽이지?”

여행자는 입을 열었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무엇인가가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지나온 세계는 꿈이 되고 그가 서 있는 세계가 진실이 되었다.

“나는 신의 심부름꾼으로,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 왔어.”

그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라고, 다시 가라앉히는 과정을 반복하며 말했다.

“바깥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고, 진실한 세계야. 이 세계 사람들의 신화에 내가 말을 맞춰 주었을 뿐이야. 신화를 파괴하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니까. 나는 늘 사람들이 믿는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나는 이 세상의 종말과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하여 왔어. 당신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려고.”

여자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왜 그렇게 말했지?”

“그게 진실이니까.”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네.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그래, 어쩌면…….”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을 때, 돌연 눈이 빛을 잃었다. 오랜 세월 그 안에 머물고 있던 영혼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여자는 눈을 뜬 채 조용히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동작을 멈추자 그녀는 그림이 되어 세상 속에 합쳐졌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멈췄다. 바람이 멈추고, 이파리 하나가 갑자기 검게 시들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사냥꾼이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오다가, 멀찍이에서 멈춰 섰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바람이 한줄기 숲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가지들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여행자는 눈을 감았다.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사내의 표정과 눈빛을 읽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가 서 있는 진실이 사라지고 하찮은 진실에 발을 들여 놓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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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김보영

 

 소설가


1975년생.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촉각의 경험」으로 중편 부문 수상. 이후 SF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를 만났어(행복한 책읽기)』, 『해피 SF 2호(행복한 책읽기)』,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창비)』, 『얼터너티브 드림(황금가지)’』,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황금가지)’』,『멀리 가는 이야기(거울)』 등에 작품을 수록했다.

 

 *작품후기*

 

“게임을 소재로 한 소설은 한 번은 쓰고 싶었는데, 이런 형태로 결론을 짓게 되었다. 이 결말은 시작했을 때 예정한 결론이 아니다. 원래 염두에 두고 시작한 진실은 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믿고 싶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더 잇게 되면 진실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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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크준

제가 문장이란 사이트를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은빛나래

소재, 진행, 문장 하나하나가 예술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