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적(敵)



 

이종호

1


난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요즘 들어 매일 같은 꿈을 꾼다. 이번에도 사랑하는 내 가족 놈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지금은 잠에서 깼고 그 끔찍한 일들이 모두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복받친 감정의 여운은 여전히 날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꿈속에서 느꼈던 끔찍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공포는 고스란히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와 내 영혼을 뒤흔들었다. 난 견딜 수 없는 비탄과 자책감에 얼굴을 감싸고 미친 듯이 오열했다. 비록 꿈속이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울부짖다 익숙한 예감에 옆을 돌아봤다. 잠에서 깬 아내가 핼쑥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현실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했지만 난 얼른 그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매일 같은 꿈을 꾸면서 단 한 번도 가족을 구하지 못한 비겁하고도 무능력한 가장의 모습을 아내가 눈치 채는 건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꿈속의 일을 아내가 알 리야 없겠지만 매일 잠꼬대를 듣다 보면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내는 이내 눈을 감고 돌아누운 다음이었다. 최근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의혹이 담기기 시작했다. 말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난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이상하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돌아눕자 난 늘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이불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참혹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간다. 일주일 전 그날 이후 악몽이 시작됐고 그 시간이 내겐 반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거실에서 물을 한 잔 마신 후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난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주와 영수를 같은 방에서 자도록 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문단속을 했다 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혼자보단 둘이 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마음 같아선 가족 모두가 한방에서 같이 자고 싶었지만 아내의 반대가 너무 심해 포기했다. 난 한참동안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현실에선 이 사랑스런 아이들을 절대로 무기력하게 잃지 않을 것이다.

아침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난 거실 창문의 두꺼운 커튼을 살며시 들추고 밖을 내다봤다. 언뜻 봐서는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는 거리엔 희미한 여명과 함께 초겨울의 한기가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난 저 일상의 평온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내 불안도 점점 더 커져만 갔다.

                                       

2


모든 건 일주일 전 출근길의 지하철 역사에서 시작됐다. 왁자한 출근길 인파 속에서 유독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남자는 ‘예수님과 함께 사탄을 무찌르자!’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목에 걸고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그는 더 나아가 곧 세상에 종말이 다가올 것이며 우리 주변에 사탄이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평소 지하철에서 심심찮게 보는 풍경이긴 했지만 그는 다른 광신도보다 훨씬 절박해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악마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육신을 빼앗아 우리의 모습을 하고 우리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우리 모두는 육신을 빼앗기고 세상은 악마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내 눈엔 그들이 보입니다. 이곳에도 그들이 있습니다!”

절박하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 탓이었을까.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를 향했다. 광신도는 번득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갑자기 일단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러댔다.

“저기! 저들이 악마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부 가짜예요! 모두 사탄이고 악마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탄들이 틀림없어요! 오~ 주여! 저 사탄들에게 지옥의 불길을 보여주십시오!”

광신도는 스스로 사탄이라고 지목한 사람들 사이로 다가가서는 손가락으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내 눈은 못 속여! 내 눈엔 너희들 이마에 달린 뿔과 엉덩이에 달린 꼬리가 다 보인단 말이다! 이 사탄들아, 정체를 밝혀라!”

언뜻 봐서는 정신이 이상한 광신도가 애매한 사람들을 붙들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광신도가 사탄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은 다들 평범해 보이는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이상하게 보이는 건 오직 광신도 한 사람뿐이었다. 광신도가 인상을 찡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내가 아닙니다! 여기 이놈들이 사탄입니다. 이놈들의 이마를 보면 뿔이 달려 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실소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죠? 이 머리카락을 들추면 그 속에…….”

갑자기 광신도가 줄을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달려들어 이마의 머리카락을 들추려 했고 이내 그 남자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난 출근길이란 것도 잊고 묘한 호기심으로 그들을 지켜보았고 마침 지하철이 역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광신도의 모습이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들에 가려 잠시 사라진 다음 순간 쿵하고 뭔가가 지하철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뒤이어 또 다른 누군가의 비명과 울음이 이어졌다. 난 그제야 그 광신도가 지하철 철로로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광신도를 둘러싸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이 그제야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정말로 그 속에 있어야 할 광신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경찰과 지하철 직원이 달려왔고 광신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상대로 경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실랑이를 벌였던 남자가 광신도가 스스로 발을 잘못 디뎌 떨어졌다고 말했고 함께 있던 사람들도 증언을 통해 그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을 하자 조사를 하던 경찰도 납득을 하는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도 남자와 사람들의 말처럼 광신도는 혼자 날뛰다 발을 헛디뎌 철로로 떨어졌고 결국 처참한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광신도 주위에 있던 예닐곱 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한결같은 증언을 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잖아도 혼잡하던 출근길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지하철의 운행이 멈추면서 더욱 어수선했다. 아마도 시신을 수습하고 지하철 운행이 재개되려면 족히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재수 없는 아침을 욕하며 택시와 버스를 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난 선뜻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황당한 얘기지만 죽은 광신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의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실은 광신도와 실랑이를 벌인 남자를 얼마 전 화장실에서 만났고 난 거울을 보는 그의 이마에서 이상한 흉터자국을 보았던 것이다. 남자가 세수를 하고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데 광신도의 말처럼 이마에 기이한 모양의 흉터자국이 있었다. 마치 뿔이 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처럼 이마의 한가운데 흉하게 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워낙 뚫어지게 쳐다보자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던 기억까지 났다.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남자의 상처자국이 떠올랐다. 광신도는 남자의 이마에 상처자국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야말로 우연에 불과했던 것일까. 난 광신도와 실랑이를 벌였던 남자가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찰을 따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찰을 따라가던 광신도와 실랑이를 벌였던 그 남자가 흘끗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길은 정확히 날 향했고 무방비로 있던 난 그 갑작스런 남자의 시선에 까닭모를 공포를 느꼈다. 남자는 이내 고개를 돌렸고 경찰에게 이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선로에선 광신도의 시신을 수습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는 창백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시신의 잔해가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때 마침 구급대원이 광신도의 부서진 머리 반쪽을 수습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 광신도는 아직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한쪽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건은 정신 나간 광신도의 소동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기이하게도 내 머릿속에선 그 일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3


난 은행원이다.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한 건 뭐든지 싫어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약간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매일 업무가 끝난 후 마감작업을 하는데 입출금된 하루의 거래금액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액수와 관계없이 불안해서 다른 일을 못 할 정도다. 덕분에 마감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원만큼 내 적성에 맞는 직업은 없는 것 같다.

난 누구보다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원하며 변화를 원치 않는다. 소박하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해할 만한 요소들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도록 노력한다. 난 건강에 나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예쁜 여자가 먼저 다가와 유혹한다 해도 외도할 생각이 없다. 단지 내가 원하는 건 나와 내 가족이 큰 시련이나 고통 없이 평범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뿐이다.

그런 나에게 아침의 사망 사건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기분으로 하루 업무를 마치고 퇴근길 지하철역에 들어서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지하철은 광신도의 시신의 잔해가 어딘가에 묻어 있을 것 같은 선로 위를 태연히 달리며 연신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실제로 선로 옆 벽면에는 아직 채 닦지 않은 광신도의 검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남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난 꺼림칙한 기분을 억누르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객차 내부는 출근길과 다름없이 혼잡했다.

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며 힘겹게 중심을 잡다가 한 남자와 눈길이 마주쳤고 순간 깜짝 놀랐다. 그는 오전에 화장실에서 눈길이 마주친, 광신도와 실랑이를 벌이던 바로 그 남자였던 것이다. 이마에 기이한 흉터가 있는 그 남자하고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셈이었다. 남자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우연치고는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매일 같은 시각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 애써 그를 외면하며 한편으론 그를 힐끔거렸다. 이상하게 그도 날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순간 기이한 예감이 찾아들었다. 그 남자뿐만 아니라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날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제야 난 주위 사람들을 재빠르게 살폈고 다음 순간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모두 오전에 광신도가 사탄들이라고 지목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오전에는 다들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던 그들이 어느새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한기가 등골을 타고 내렸고 아침의 사건이 전혀 다른 형태로 되살아났다. 지금 날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광신도를 둘러싼 후 그를 그대로 선로에 밀어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순간 공포가 스멀거리며 목덜미를 죄어왔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난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거친 동작으로 그들을 밀쳐내고 출입문으로 달려 나갔다. 공간이 있음에도 그들은 내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섰지만 난 미친 듯이 그들을 밀쳐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아침의 광신도처럼 무슨 일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전신을 옥죄어왔다. 심지어 날카로운 칼을 든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선가 내 복부를 파고드는 것 같은 환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난 문이 닫히기 직전 쓰러지듯 지하철에서 내렸고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들은 뒤따라 내리지 못했다. 출발하는 지하철 안에서 십여 개의 무시무시한 눈동자들이 마치 한 몸처럼 날 주시하며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제야 난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무나 엄청나고 황당한 일이라서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상이 가면을 벗고 전혀 다른 무서운 얼굴을 들이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그들은 누구일까. 왜 날 쫓아온 걸까. 정체가 뭘까.

갑자기 어린애가 된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고 밑도 끝도 없는 막막한 두려움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경찰에 신고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지하철에 악마가 나타났다고, 그들이 오전에 광신도를 죽였다고, 그들은 이마에 뿔이 있던 흉터가 있다고 말한다면 경찰이 과연 내 말을 믿어줄까.

순간 오전에 광신도가 내뱉던 절박한 외침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금 되살아났다.

 ‘저기! 저들이 악마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부 가짜예요! 모두 사탄이고 악마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탄들이 틀림없어요! 오~ 주여! 저 사탄들에게 지옥의 불길을 보여주십시오!’

맙소사. 악마라니. 이마에 뿔이 달리고 엉덩이에 꼬리가 달린 악마를 떠올리다 난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망상이란 말인가.

하지만 난 그날 끔찍한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그들은 정말로 이마에 뿔이 달려 있었고 엉덩이에 꼬리가 붙어 있었다. 난 숨어서 그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내 사랑하는 아이들, 은주와 영수, 그리고 아내의 복부를 갈라 내장을 빼먹고 입에 피 철갑을 하는 모습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내와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너무 무서워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게걸스럽게 아내와 아이들을 잡아먹은 악마들은 어느새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으로 변해 어슬렁거리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을 때 난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바로 옆에서 놀란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

난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아이들 방으로 달려갔다. 은주와 영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뒤따라온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난 현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꿈이 너무나 생생했던 것이다. 마치 조금 전이 현실이고 지금이 꿈속인 것 같았다.

“한동안 은주하고 영수, 우리가 데리고 자면 안 될까?”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다 큰 애들을 자기 방 놔두고 왜 데리고 자? 당신 요즘 너무 피곤한 것 같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럼, 있잖아. 은주하고 영수 둘만이라도 같이 재워.”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씨팔!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

내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자 아내가 놀란 눈으로 입을 딱 벌렸다. 아내는 지금껏 내가 욕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4


꿈의 여운이 워낙 강했던 탓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사방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난 더 이상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았다. 조금 돌아가고 불편하더라도 버스나 택시를 탔고 그 정도의 조치만으로도 그들과 다시 마주칠 일은 없으리란 기대를 가졌다. 더 나아가 난 그들에 대한 온갖 호기심과 두려움을 망각의 창고에 가둬버렸다. 그냥 잊고 마주치지 않으면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악마는 태고 적부터 존재해왔음에도 우린 그들을 모른 지금까지 잘 지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가까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남은 시간을 은행 근처 벤치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눈앞을 오가던 무수한 사람들이 갑자기 뭘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인파에 떠밀려 에워이는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 실랑이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인파 속에서 몇 사람의 다급한 외침들이 들려왔다.

“이거 왜 이래? 놔! 당신들 뭐야? 경찰! 경찰 없어?”

언뜻 지하철에서 광신도를 에워싸던 모습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엉켜 있어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고통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는 절박한 비명과 무시무시한 울부짖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 소동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싸한 공포가 아랫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난 분명히 봤다. 다수의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긴 이마에 뿔이 달린 괴물이 소수의 몇몇 사람들을 물어뜯고 잡아먹는 소름끼치는 광경을. 비록 같은 패거리들이 교묘하게 시야를 가로막았지만 그 모습은 꿈속에서 내 가족을 잡아먹던 악마들과 완전히 똑같았다.

꿈속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그것도 거리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난 공포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대부분의 행인들이 다름 아닌 악마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혼자 서 있는 날 발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그때 마침 경찰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난 현장의 증거들이 없어지기 전에, 또 내게 위험이 닥치기 전에 얼른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경찰을 향해 몸을 움직였고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색의 모자와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모자에 얼굴의 반이 가려진 남자의 입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경찰도 저들과 한팹니다. 날 따라와요!”

난 잠시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잡아끄는 남자의 손길에 이끌려갔다. 남자는 날 데리고 근처에 있던 건물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남자가 턱짓으로 경찰들을 가리켰다. 과연 남자의 말대로 경찰은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웃거리며 그들과 무슨 얘기인가를 긴밀하게 주고받았다. 남자가 거리를 지켜보면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다들 한팹니다. 모두 악마들이에요!”

난 놀라서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대체 저들은 누구고 어디서 온 겁니까?”

“저들은 지구 밖 우주에서 온 자들입니다.”

난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럼 당신은 누굽니까?”

“나도 우주에서 왔지만 저들을 막으려고 온 겁니다. 내 말 잘 들어요. 당신들이 모르는 사이 세상은 이미 악마로 가득 찼습니다. 곳곳에서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죠. 우리가 경고의 메시지를 수없이 보냈지만 당신들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당신들은 아마도 변화가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현재의 상태가 지속되기만을 바라면서 눈앞의 진실을 외면했던 거죠. 궁극에는 탈선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다들 괜찮을 거라며 파멸을 향해 계속 달리는 기관차처럼 말입니다.”

난 혼란스런 와중에도 그의 말에 뜨끔했다. 그가 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유혈이 낭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 보세요. 이젠 저들도 더 이상 숨어서 활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습니다. 당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당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들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가나 경제인들,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배우들까지도 저들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제 곧 세상은 당신처럼 진짜 인간을 만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럼, 그 광신도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군요.”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광신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뒤에서 돕던 사람입니다. 원래 댁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너무 거대한 진실에 맞닥트리게 되자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돌행동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인정사정없는 악마들 앞에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셈이죠.”

“그럼, 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당신 자신과 식구들을 지키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외출하지 말고 외부의 그 누구도 집안에 들이지 마세요. 저들은 주인의 초대가 없으면 강제로 집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서 잘 버티다 보면 우리가 저들을 물리칠 것이고 예전처럼 평온한 시절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 다시 집 밖으로 나오세요.”

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음성은 마법의 주문처럼 마음을 휘저었고 내게 확고한 믿음을 줬다. 난 거리의 상황을 살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은행에 들어가서 하던 일만 정리하고 바로 휴가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내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예?”

“지금 이 시간 이후로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됩니다. 그깟 업무 따위가 뭐라고 그렇게 집착을 합니까? 이미 세상 대부분이 악마들에게 넘어가 버렸는데. 당신 직장인 은행의 창구직원들은 물론이고 차장이나 지점장들도 모르긴 해도 대부분 가짜들일 겁니다. 지금은 저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단 말입니다.”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말했다.

“아직 내 얘기를 믿지 못하는군요.”

맞는 말이었다. 거리의 모르는 행인들이 악마라고 하는 것과 오전까지만 해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몇 년을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가 악마라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렇다면 직접 보여드리죠.”

그가 먼저 앞장을 섰고 난 황급히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가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앞머리로 최대한 이마를 가리세요.”

난 그가 하라는 대로 따라했다. 그가 은행 건물 비상계단 앞에서 돌아서더니 말했다.

“은행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누구죠?”

난 잠시 생각하다 유리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 안쪽 책상의 김영준 대리라고 후뱁니다.”

그가 영준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다소 위험하긴 하겠지만 당신이 날 믿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 친구를 불러내서 이렇게 물어보세요. ‘내 가죽 잘 어울려?’ 하고 말이죠.”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하자 그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건물 뒤로 사라졌다. 난 망설이다 휴대폰으로 영준을 불러냈다. 영준은 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후배였다. 그가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과장님 무슨 일로?”

난 영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가죽… 잘 어울려?”

영준이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반문했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었어요.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난 긴장하며 또박또박 분명한 소리로 말했다.

“내 가죽, 잘 어울리냐고.”

그가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난 괜히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영준의 눈에서 광채가 이는가 싶더니 평소 음성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새나왔다.

“당신 언제 그 가죽 입은 거야? 그 가죽은 내가 오후에 잡아먹으려고 진작 찜해둔 건데.”

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으쓱하며 말했다.

“하긴 뭐 난 벌써 셋이나 잡아먹었으니 하나 정도는 양보할 수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죽 한번 볼 테야?”

그가 주위를 살피곤 몸을 가볍게 떨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모습이 영준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던 것이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이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 다 알면서. 이번엔 마지막 세 번째 가죽을 보여줄게. 이번 것은 꽤 특별하다고.”

그가 다시 몸을 떨었고 이번에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그것도 보통 여자가 아닌 꽤나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여자 연예인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 가죽이 제일 잘 어울려?”

난 너무 충격적인 상황에 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날 노려보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 인간이지?”

내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가 내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아름다운 여자 연예인의 동공이 노랗게 변하더니 괴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그랬군. 가증스럽게 인간 따위가.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그렇잖아도 잡아먹으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예쁜 여자 연예인의 이마에서 뿔이 튀어나왔고 꼬리가 나오며 엉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괴물이 입을 벌리자 무엇이든 자를 것 같은 촘촘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 이빨이 곧장 내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고 난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눈앞으로 뭔가가 휙 스치는가 싶더니 괴물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캑!”

고개를 돌렸을 때 괴물의 관자놀이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단도가 꽂혀 있었다. 괴물은 눈을 치켜뜬 채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 옷의 남자가 괴물의 관자놀이에서 단도를 뽑으며 말했다.

“이젠 절 믿으시겠죠?”

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까지 다가섰던 죽음의 공포는 평소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가 말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식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외부 사람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절대로!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인간이 남아 있는 한 놈들은 세상을 완전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나 아내도 믿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당신 한 사람만 버텨도 세상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나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집안으로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자가 안전하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5


이곳엔 색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어디를 봐도 창백한 흰색 외에는 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 형사가 담당의와 함께 병실에 들어섰을 때 흰색 환자복을 입은 김형우는 병실 안쪽 구석에 굳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언뜻 보면 생명이 없는 마네킹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조 형사가 담당의에게 물었다.

“대화가 가능해졌다구요?”

“예. 제한적이긴 하지만.”

지켜보던 조 형사가 형우에게 다가가려 하자 담당의가 제지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조 형사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담당의가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는 붉은색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건 마치 두 개의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처럼 보였다. 담당의가 말했다.

“선을 넘으면 환자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까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정보죠. 아마도 김형우는 선의 안쪽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보세요.”

담당의가 붉은 선 앞에 서서 마치 초인종을 누르는 것처럼 손을 움직인 후 입으로 ‘딩동’하고 소리를 내자 다음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김형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그의 입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움직였다.

“누구요?”

목소리는 잔뜩 긴장했고 불안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분명 놀라운 변화였다.

“어제 찾아왔던 ‘민’이라고 합니다.”

순간 김형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오? 난 댁한테 아무 볼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 형사가 신기한 표정으로 김형우와 담당의를 번갈아 보았다. 조 형사는 김형우가 지난 달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자신의 집에서 체포된 이후 뭔가에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처음 보는 셈이다. 당시 그는 아이들을 인질로 집안에서 대치하다 경찰이 집으로 진입하는 순간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깨어난 이후엔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식사조차 하지 못하는 그의 팔에는 지금도 영양제가 흘러들어가는 링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여기 함께 온 분이 물어볼 게 있다고 합니다.”

담당의가 조 형사를 돌아보고 속삭였다.

“오래 대화하긴 힘드니까 짧게 핵심만 물어보세요.”

말을 마친 담당의가 눈짓을 하자 조 형사가 앞으로 나섰다. 조 형사가 바닥에 그어진 선에 가까이 다가오자 형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조 형사가 선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은행 동료인 김영준 씨를 죽인 이유가 뭡니까?”

김형우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악마였으니까. 그리고 그는 내가 죽인 게 아니오. 그들을 막으러 우주에서 온 그 사람이 그런 거요.”

조 형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담당의가 계속 물어보라며 눈짓을 했다.

“그럼, 김영준을 죽인 그 사람은 지금 어딨습니까?”

형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예전의 아름답던 세상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오. 당신들이 오염시키기 이전의 평화롭던 세상 말이오. 그는 세상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오. 그를 가만 두시오.”

조형사가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 아내는 왜 죽였습니까?”

순간 형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건 나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소? 내가 죽인 건 진짜 내 아내가 아니었소. 당신들이 나와 아이들까지 없애기 위해 몰래 들여보낸 악마의 변신이지.”

“김형우 씨! 당신의 아내는 악마가 아닙니다. 당신은 아내를 살해하고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악마니 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만들어낸 겁니다. 대체 왜 당신 아내가 악마라고 생각하죠?”

“문을 열려고 했기 때문이야. 문을 열고 당신 같은 악마를 집안으로 초대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악마를 집안으로 들이면 절대로 안 돼. 그녀는 마지막 인류인 나까지 악마로 만들어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거야.”

“왜 당신이 마지막 인류라고 생각합니까? 그럼 난 누굽니까?”

“당신도 악마야. 비록 이마 뿔과 엉덩이 꼬리는 감추고 있지만 그 흔적까지 완전히 숨길 순 없지. 어떤 협박과 거짓으로 날 기만해도 소용없어. 난 절대로 당신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조 형사가 다시 질문을 했지만 김형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담당의가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 형사가 알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은행에서도 가정에서도 대단히 성실했고 평생 신호위반 한 번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또 어떻게 저런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담당의가 말했다.

“사람의 정신력이 대단히 견고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실은 유리잔 같아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덮치면 과부하가 걸려 쉽게 부서지거든요. 아마 저 사람도 그랬을 겁니다. 지난번에 형사님이 갖다 준 김형우의 수첩을 살펴보니까 최근에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받은 것 같더군요. 군데군데 메모가 적혀 있는데 세상의 온갖 문제를 혼자 다 짊어진 사람 같았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나 환경오염, 석유고갈, 넘쳐나는 범죄처럼 매일 뉴스나 신문에 넘쳐나는 각종 문제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혼자 너무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조 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건 선생님이 수첩에 적힌 메모의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게 아닐까요? 저는 김형우가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충동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봅니다만. 최근 김형우가 심부름센터에 부탁해서 아내의 뒷조사를 해서 불륜 사실을 확인했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일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겠죠. 그렇다면 김영준을 살인한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학교 선후배사이로 은행에서도 무척 돈독한 관계였다고 하던데.”

“실은 저도 그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김형우처럼 내성적이고 법과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에겐 지금의 혼란스런 세상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그에겐 훨씬 크게 와 닿았을 테니까요.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현재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하고 위태로운지 형사님이나 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형사님은 지구의 멸망보다 형사님이 먼저 죽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실제로 우리의 미래는 너무나 어둡고 끔찍합니다. 다만 우린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잠시 잊고 사는 것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조 형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형우가 망상을 가지게 된 과정에서 아내의 불륜은 단지 점화 스위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내의 불륜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그는 폭발했을 겁니다. 엉뚱한 망상을 만들어낸 것도 그것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한 정당방위로 그런 망상을 만들어낸 것이죠. 세상 밖으로 나오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는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시한부 행복을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을 철저히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김형우보다 우리의 망상이 더 견고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 형사는 진지하게 쳐다보는 담당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병실을 빠져나오는데 불현듯 아침에 들었던 뉴스가 떠올랐다. 저명한 과학자가 나와서 환경시계가 12시가 되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 지구의 환경시계는 멸망까지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침에 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에 와서 그 말이 묵직한 여운을 동반하며 되살아나더니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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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종호


   소설가

 1964년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과 졸업

전직 다큐멘터리 PD

 
   *작품활동*

1996년 <유체이동> 출간 (범우사, 전 2권)

1997년 소설잡지 엑스칼리버 창간호부터 장편 <그림자> 연재

2000년 <흉가> 출간 (씨앤씨 미디어)

2004년 <분신사바> 출간(황금가지) – 영화화 판권 계약

2005년 3월 <분신사바> 일본에서 <콧꾸리상>으로 출간 (카도카와 호러문고)

          7월 <이프(IF)> 출간 (황금가지) – 영화화 판권 계약

          10월 <한국공포문학단편선> 기획 및 단편 <아내의 남자> 수록

          11월 미출간장편 <붉은기와집> (황금가지 출간예정) – 영화화 판권계약

          12월 <분신사바> 태국판 소설 판권계약

2007년 1월 공포영화 <므이> 배경소설 중편 <므이의초상> 출간 (예담)

          2월 무크잡지 '파우스트'에 장편 <그녀 집으로 오세요>연재

          8월 <한국공포문학단편선, 두 번째 방문> 기획 및 단편 <폭설> 수록

2008년 7월 <귀신전 1, 2> 출간 (랜덤코리아)

          8월 <나의식인룸메이트(한국공포문학단편선3)> 기획 및 단편 <은혜> 수록

현재 KBS1 이야기배틀 프로그램인 '이야기발전소'에 심사위원으로 출연 중.

 

                              *작가후기*
  

 "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우울한 시간을 향해 다가서는 우리 마음속 우울과 불안의 크기는 점점 부풀어 오른다.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지금이 나을 수도 있다는 위안이 오히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더 늦기 전에 뭔뭐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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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와.. 좀 섬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