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소설가(2013) [4월_빛_소설] 뒷면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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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의 우주

 

배명훈

 

 

글틴_배명훈소설삽화

 

   “바다군요.”
   최신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인 남자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이렇게 물었다.
   “바다라. 그렇죠, 바다죠. 놓치고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바다지요. 바다에 관한 추억이라도 있으신지요?”
   “추억이요? 글쎄요. 하나 있네요. 예전에, 스물아홉인가에 만난 남자. 낭만적이었는데.”
   “지금은 만나지 않는 모양이죠?”
   “당연하죠. 그때가 언젠데. 지금은 뭘 한다더라. 별 찾는 일인가 뭔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외계행성인가 뭔가를 찾는 일인데, 천문학자는 아니고요, 그쪽 관련된 공무원이었어요.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그 남자 참, 낭만적이기는 했어요. 아무 날도 아닌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곤 했거든요. 정작 생일 같은 날에는 별로 특별한 것도 없었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사람만 나타나면 아무 날이나 생일이 되곤 했으니까. 금요일 저녁에 일이 모두 끝나면 제일 먼저 자기를 만나서 차를 마시고 주말에는 바닷가를 걷자고 했는데.”
   “집이 바닷가였군요.”
   “아니요, 그게 문제였죠. 바다까지 가려면 차로 두 시간은 달려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주말이면 꼬박꼬박 바다를 보러 갔어요. 그때는 그게 참 낭만적이었죠.”
   “지금은 많이 달라지셨군요. 낭만하고는……”
   “눈치 채셨어요? 담을 쌓았죠.”

 

   오후 3시 22분.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소리 없이 조용히 바닷가 마을을 향해 다가갔다.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속도였지만, 어쩐지 망설임이 느껴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백인 남자, 야콥 스벤손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최신지 씨,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왕실이 있다고 해서 왕가가 무언가 특별한 권한을 갖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왕실의 누군가가 독단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따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스벤손 씨. 세자비 전하께서 우리 기관에 보여주신 호의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최신지 씨, 세자비 전하께서 귀하의 기관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본인 소유의 시설을 임시 피난처로 내놓으신 행동에 대해서는 우리 추밀원 역시 반대하지 않습니다. 탁월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행정부는 할 수 없지만 왕가라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왕가를 대신해서 그런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는 게 우리 추밀원의 임무이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만, 이 일은 절대 밖으로 노출돼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점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치가 발각된 건…….”
   “잠깐만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신처의 위치가 발각되고 그곳으로 미사일이 날아든 건 물론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게 이 상황에서 제일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건 실패가 아니라 부패입니다.”
   “부패요?”
   “우리 경찰의 초기 수사 결과에서 밝혀진 것처럼 정말로 기관 내부에 협력자가 있었던 거라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세자비 전하께서 곤란해지실 거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겠죠. 그렇게 되면 귀 기관과 우리 왕실과의 관계도 지금처럼 우호적인 관계로 남을 수 없을 겁니다. 당연히.”
   “스벤손 씨. 그건 제가 최대한 철저히 조사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른 것 같은데요. 아직 내부자가 개입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부자 없이 과연 그 일이 가능했을지가 의심되는 상황이지요. 원래 계획대로만 됐더라면…….”
   최신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황을 보면 그렇게 믿는 게 당연했다. 밤 12시 20분경, 바다 건너에서부터 날아온 미사일이 호텔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미사일은 생각보다 폭발력이 크지 않았다. 딱 방 한 칸 정도를 날릴 폭발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미사일이 날려버린 딱 그 한 칸이 바로, 최신지가 소속된 기관이 은신시키고 있던 바로 그 인물, 슈미르 박사의 침실이었던 것이다.
   ‘은신처로 삼은 건물이 노출된 건 실패겠지만, 방의 위치가 알려진 건 부패라는 말이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가능하다면 그 의심을 풀어주는 게 최신지의 첫 번째 역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최신지는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내부자가 있었다면? 어쩌지?’ 물론 답은 알고 있었다. 그때는 최신지 본인 손으로 기관을 완전히 해체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기관 본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특별 감찰관의 자격으로.
   차가 호텔 근처에 다다르자 추밀원 장관 스벤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왕실의 권위를 빌려 해 드리는 마지막 협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장이든 관련정보든 필요한 건 뭐든 접근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절차상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추밀원으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싶은 건…….”
   “사건 자체보다는 내부자가 개입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하라는 말씀이시죠?”
   최신지가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대답인 듯 뒷좌석 유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오후 3시 54분. 최신지가 사건 현장 쪽으로 돌아서자 미리 와 있던 감찰팀 조사원 윤희나가 먼저 알아보고는 그쪽으로 다가왔다.
   “안경 쓰셨네요.”
   “눈이 건조해서. 비행기 때문에.”
   “공항에서 바로 오시는 길이세요?”
   “추밀원에 잠깐 납치당했다가. 그보다 새로 발견된 건?”
   “아, 네, 새로 들어온 소식이……. 잠깐만요, 여기 메모가, 아, 우선, 미사일이요, 목격자들 진술에 의하면 미사일처럼 날아온 게 아니라 순항미사일처럼 꽤 천천히 날아왔다는데요.”
   “미사일치고는 목격자가 많은가 보던데.”
   “그러니까요. 거의 장난감 비행기 같은 속도로 날아온 모양이에요. 경찰에서는 아무래도 자체 제작한 걸로 보인다고 하네요. 아직 분석 중인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같지는 않은 게 원래 미사일에 들어가는 부품이 아닌 것 같은 게 들어가 있었다고 하고요.”
   “그게 뭐지?”
   “그러니까 무선조종 비행기 모형에 들어가는 부품 같은 게 나왔다는데. 다른 몇 가지도 아직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군용 부품은 아닌 것 같다고.”
   “개조했다는 거군. 그럼 그런 걸 조립할 기술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겠군.”
   “현지 수사팀이 알아보고 있답니다. 정보국 쪽에서도 협조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야겠지. 그건 그렇고 자기 머리는 왜 그 모양이야? 서둘러 나오느라 그래?”
   “그렇죠 뭐. 그보다, 배치되어 있던 우리 쪽 현장요원들 몇 명은 현지 경찰이 데려가는 바람에 아직 접근이 잘 안 되는 상황이랍니다. 경찰 쪽에서도 비밀 임무라는 걸 알기는 아는 것 같지만, 정치적으로 워낙 애매한 상황이다 보니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못 내리고 있는 모양이고요. 우리 본부에서 손을 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결과는 알 수 없고요. 혹시 빼내실 건가요?”
   “됐어. 좀 내버려 둬. 일단 급한 것부터.”
   “네. 관련해서, 피해자 신원은 일단 오늘 자정까지 보도금지랍니다. 추밀원에서 연장 요청을 했다는데 아주 적극적인 것 같지는 않고요. 아직은 구체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걸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고, 결론은 나 있는 거지?”
   “네.”
   “디나이?”
   “네.”
   윤희나가 절도 있게 말을 끊었다. 최신지의 귀에는 그 대답이 ‘아무래도 그건 당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의미로 들렸다.
   “익숙한 패턴이구만. 이 파일은 어째 닫을 일이 없네.”
   윤희나로부터 파일을 잔뜩 넘겨받았다.
   “어째 희나 씨 표정이 홀가분해 보인다.”
   최신지는 맨 위에 놓여 있는 디나이 관련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국제청부테러리스트 D. Nye. 요 몇 년 새 그 이름을 볼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의 업무 영역이 기관의 활동 영역과 서서히 겹쳐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기관이 도피시키면 디나이가 추적한다.’ 기관 입장에서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느새 공식처럼 돼 버린 사건의 진행 방식이었다.
   기관은, 이름조차 제대로 밝힐 수 없는 초국적 비밀 민간기구였다. 비밀을 유지하는 이유는 기관의 보호를 받을 망명자와 난민들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 각국의 개인들. 다른 나라는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오로지 세상 어느 국가의 직접지원도 받지 않는 민간인들의 ‘우발적인 행동’으로만 도움을 줄 수 있는 복잡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그들을 돕기 위해 전 세계 37개 민간기구가 모여서 만든 그림자 같은 조직.
   디나이는 그런 기관의 또 다른 그림자였다. 어쩌면 기관에 기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디나이 입장에서는 기관이 움직이는 순간 또 한 건의 의뢰가 들어오게 돼 있었으니까.
   ‘우리가 무슨 브로커도 아니고 말이지.’
   윤희나가 내민 문건에는 디나이가 움직인 정황을 나타내는 첩보들이 믿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더 밝혀내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야콥 스벤손의 말처럼 내부자가 개입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케이는 왔어?”
   “안에 있어요. 여기 배치돼 있던 우리 쪽 요원들 동선이나 행동절차 같은 걸 확인하고 있을 거예요. 목격자도 찾는 것 같던데, 사람들이 사건 목격자를 찾는 걸로 오해하는 통에 애를 먹고 있더라고요.”
   “투숙객들은 누가 조사해?”
   “현지 경찰이요. 결과가 나오면 자료는 공유해 주기로 했어요. 아직 진행 중이지만 수상한 건 별로 안 나온 것 같습니다.”
   최신지는 윤희나에게서 넘겨받은 서류를 빠르게 훑으며 건물 정면 왼쪽에 나 있는 출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실 소유 자산답게 고풍스럽고 품격 넘치는 호텔이었다. 그렇게 웅장하지는 않지만, 평소 같았으면 분명 한 발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꼈을 세련된 정문.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살짝 어두워졌다가 다음 한 걸음에서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시야. 바깥세상을 보던 눈을 말끔히 정화해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건물 안쪽을 바라보게 만들려는 듯, 정교하게 계산된 명암의 전환.
   그 정문이 주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명료했다. 바로 권위였다. 어느 표지판에도 표시되지 않고 누구의 입으로도 말해지지 않은 왕실의 권위.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건물은 평화가 깨져버린 사건 현장이었고, 최신지 자신은 그 균열을 파고들기 위해 소환되어 온 일종의 검사 장치인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게다가 호텔 정문 앞에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차량이 꽉 들어차 있었다.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그리고 취재 차량. 굳이 어느 기관 소속인지 드러내지 않은 이런저런 기관들의 관련 차량들, 그리고 구경하려고 모인 인파.
   추밀원이 당황스러워할 만했다. 원치 않는 구경거리가 된 느낌. 왕실이야 어차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본인들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권리가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저작권처럼.

 

   오후 4시 10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호텔이었다. 옛날 성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이었는데, 원래 있던 성도 한 번에 지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맨 처음에는 주변의 다른 집들보다 조금 큰 저택 정도로 한 동이 들어서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건물에 기역자로 연결된 다른 한 칸이 만들어지고, 그러다 나머지 두 면에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닫힌 사각형 구조를 갖게 된 건축물. 남쪽면의 2층, 3층이 동쪽면의 2.5층, 3.5층과 층계참에서 맞닿아 있는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런 역사의 흔적인 듯했다.
   호텔 안은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수사기관에 소방서, 보도기관, 그리고 정보국 직원들까지, 온갖 종류의 현대적인 ‘프로’들이 고풍스러운 호텔의 공기를 어지럽힌 탓이었다. 심지어 호텔 직원들까지 덩달아 평소에는 좀처럼 보일 일이 없었을 정신없는 동선을 그리며 움직여대는 통에, 1층 로비는 거의 시골 기차역 대합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최신지는 윤희나가 안내하는 대로 리셉션이 있는 남쪽 건물의 비교적 한산한 2층 복도를 따라 동쪽 맨 끝까지 걸어간 다음, 다시 거기에서 계단을 반 층 더 올라가 동쪽 건물 3층의 어두침침한 복도에 들어섰다. 슈미르의 방은 그 동쪽 건물의 북쪽 거의 맨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정문이 건물의 남서쪽 끝에 있는 걸 생각하면 정문에서 제일 먼 쪽에 방을 둬야 사람이 하나라도 덜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골라놓은 위치인 것 같았다.
   복도를 걸으며 최신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방이 건물 바깥쪽에 붙어 있고 복도가 안마당 쪽에 있네.”
   윤희나가 물었다.
   “이상한 건가요?”
   “어쨌거나 방어시설로 생각하고 만든 집이잖아. 바깥쪽 벽은 창문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았던 것 같은데, 그 벽을 끼고 방을 만들면 방이 좀 어둡지 않나?”
   “그래서 그런지 낮에는 오히려 방안이 어두침침하기는 했어요. 물론 공격당한 방은 좀 다르지만. 대신 안쪽이 환하더라고요. 아까 사진 보니까 복도 쪽 조명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던데. 그래도 건물이 원래 그렇게 생긴 거니까 팀장님 말씀대로 개조하는 것보다는 그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안쪽으로 창문을 크게 뚫어놓는 바람에 복도에서 방 안이 보일 것 같잖아. 불안하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저 안쪽 벽도 깊이가 거의 1미터쯤 되던데요. 창틀을 거의 테이블처럼 쓰던데……. 창문 높이도 낮지 않고 시선 방향도 신경 써서 디자인했대요. 창문 앞에 앉아 있어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안쪽이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 투숙객들이 남의 방 기웃거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하긴.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고.”
   이윽고 두 사람은 문제의 방에 다다랐다. 현지 경찰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윤희나가 말한 그대로였다. 휑하니 뚫려버린 벽면으로 바닷바람에 꽤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 최신지는 사라져버린 벽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밖에서 안으로 폭발해 들어온 흔적이 눈에 띄었다.
   ‘깔끔하게도 처리했구만. 다른 인명피해가 전혀 없어. 옆방 손님들을 인간방패 삼아 공격을 피해보려는 의도가 없었던 게 아닐 텐데. 이렇게 잡음 안 나오게 깨끗이 해결해 버리니 의뢰하는 인간들이 끊이지가 않지.’
   절제된 폭발이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허용될 수 있는 최대 한계치에 가까운 폭력이었다. 그 작은 폭발로도 목표를 확실히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은 도저히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을 정교한 한 수. 그 정도면 현지 경찰이든 정보국이든 누가 봐도 내부 공모자 이야기가 나올 만도 했다. 상대의 수를 완전히 읽지 않고는 감행하지 않았을 것 같은 공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수는 분명히 실수였다.
   실수. 슈미르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곳에 그의 은신처를 마련한 건 최신지 본인이 주선한 일이었다. 보다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을 때까지 짧으면 사흘, 길어야 일주일 정도를 머무를 만한 임시거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다. 슈미르 박사는 학술회의 참석차 출국하는 바로 그날 아침에 기관 측에 망명요청을 했다. 그리고 기관은 요청이 접수된 직후 딱 열일곱 시간 만에 이 작전을 강행해야만 했다. 그 순간, 마침 이곳이 떠올랐다. 기관에 호의적인 세자비와, 믿음직한 추밀원 장관 야콥 스벤손이.
   최신지는 방안을 찬찬히 살폈다. 안전할 줄 알았는데. 며칠만 기다리면 가족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이 방이라는 걸.’
   최신지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일단 정보가 새 나간 건 기정사실이고, 어디에서 샌 걸까? 리셉션 쪽?”
   “글쎄요, 아무튼 거기도 우리 쪽 위장요원이 계속 지키고 서 있긴 했죠.”
   “슈미르 박사가 머문 기간이 이틀 조금 넘었지? 그 기간 근무교대 일지는 나 줬어? 보자, 여기 이거군. 여섯 시간 2교대라. 아니카하고 셰흐리반이 투입됐군. 잠깐씩 자리 비웠을 때 확인 절차는 어떻게 되지?”
   “1층 잠복요원이 리셉션 근처에 와서 여기 직원들한테 말을 걸게 돼 있었습니다.”
   “딴짓 못 하게 하려고? 진짜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는 케이가 확인 중이라는 거지?”
   “네, 아무래도 지부조직들이 그쪽을 의심하는 눈치니까요. 압력을 느끼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의혹이 제기됐으니 일단 그것부터 확실히 해 두는 게 나으니까. 본부 쪽은, 역시 분위기가 별로죠?”
   “싸우고 있지 뭐. 남미지부에서 난리야. 리셉션 쪽에서 유출된 게 분명하다고.”
   “유럽본부에서는 3층 요원 의심하는 것 같던데요.”
   “3층에는 남미지부 쪽 요원이 서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연락 안 받으니까 자꾸 당신들한테 연락이 가지? 이제 그런 연락은 전부 나한테 돌리도록 해.”
   “네, 어차피 안 받으시겠지만. 그보다 팀장님 생각은요? 어느 쪽인 것 같으세요?”
   “이제 들여다봐야지. 머리를 비우고. 나까지 결론을 미리 내려두면 안 되겠지. 뭐가 됐든 누구 하나를 끝장내러 온 거니까. 자, 그 문제의 3층 요원 말인데.”
   “페레이라 요원입니다.”
   “그래. 사건 터졌을 때 교대 근무할 차례 아니었지? 설마 경찰에 잡혀갔나?”
   “네.”
   “셰흐리반은?”
   “이쪽에 있습니다. 마을 쪽 작전본부에요. 리셉션 쪽에서는 아니카가 경찰에 가 있습니다.”
   “좋아, 거기는 나중에 조용해지면 들르기로 하고. 일단 케이 요원 좀 불러줄래?”
   윤희나가 특유의 재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오후 4시 22분이었다.

 

   한참 뒤에 케이 요원이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디서나 눈에 띌 정도로 큰 키 때문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 사이를 걸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더 작아 보여서 어쩐지 원근감이 왜곡돼 버리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 일그러진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그의 윤곽을 식별해낼 수 있었다.
   “그 중력렌즈 같은 백인 친구 말이야…….”
   1년 전, 인질협상 때문에 디나이와 아주 잠깐 전화연결이 됐을 때, 그가 케이 요원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음성 변조된 그의 목소리. 이따금 본부 건물 긴 복도를 걸어가는 케이 요원을 볼 때마다 최신지는 디나이의 그 표현을 떠올리곤 했다. 정말로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농담을 알아들은 건 오로지 최신지 한사람뿐이었다. 최신지는 그게 더 의아했다. ‘어떻게 그걸 못 알아들을 수가 있지?’
   최신지는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중력렌즈를 잠시 동안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케이였다.
   “당신은 또 꼴이 왜 이 모양이야? 어째 우리 팀만 유독 지저분해 보이네.”
   “못 자서 그래요. 새벽 내내 운전해서 오느라. 그보다 전화 안 받으세요?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것 같던데.”
   “됐어, 받으면 귀찮아져. 이쪽 전화 받으면 저쪽 것도 받아야 돼.”
   “안 받으시면 저한테 오는데요.”
   “알아. 미안해. 좀 참아 봐. 알아낸 건?”
   “아, 예, 알아낸 거. 일단 리셉션 쪽은 대체로 절차대로 진행이 된 것 같아요. 수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고, 셰흐리반 요원과 같이 리셉션에 있었던 호텔 직원이 이야기한 게 있는데, 정문 앞에 작은 광장 있잖아요, 지금은 주차장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테이블이 여섯 개가 놓여 있었대요. 테이블에서 보면 리셉션 정면으로 보이는데, 어떤 남자가 그 테이블 하나를 이틀 내내 혼자서 차지했다더군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데…….”
   “왜?”
   “셰흐리반 요원이요, 잠복 같은 걸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남자들이 쫓아다니는 타입이라는 거야?”
   “눈에 띄잖아요.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뭐 아무튼, 확인해 보니까 마을 쪽에 있는 작전본부에도 보고가 된 것 같더라고요. 계속 감시를 했는데 수상한 낌새는 별로 없었던 모양이에요. 표면상으로는 이런데, 아침 내내 이게 좀 골치가 아팠어요.”
   “왜?”
   “남미지부에서 계속 작전본부 쪽으로 압력이 들어왔거든요. 그 남자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요. 작전본부 보고 자료를 공개 열람시켜서 그런 거겠죠.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저도 한 가지가 좀 걸렸거든요. 이 남자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쓸데없이 좋은 카메라여서요.”
   “관광지잖아.”
   “그래서 좀 애매해요. 시비를 걸기도 애매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튼 그 카메라로 계속 셰흐리반 요원을 찍어댔다는 거예요. 이틀째 저녁에는 삼각대까지 갖다놓고.”
   “셰흐리반 쪽을? 수상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예. 그런데 아침에 남미지부에서 압력을 넣는 바람에 작전본부에서 이 남자를 털었던 모양이에요. 계속 미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소지품을 슬쩍 한 거죠.”
   “사진을 털었다는 거야? 현장조사원들한테 내내 전화를 해대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럴 거면 감찰관은 현장에 왜 보내 놓은 거야? 그냥 현지경찰에 신고해 버려?”
   “그것도 방법이긴 하죠. 꼭 그렇게 하시라고 권하고 싶지만 어차피 안 그러실 거고. 하여간 거기서도 별로 쓸 만한 건 안 나온 모양이에요. 지부 쪽에서는 여전히 정밀분석을 해야겠다고 난리지만. 그래서 리셉션에 있던 호텔 직원 이야기를 들어 봤는데, 자기가 느끼기에는 그냥 셰흐리반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팀 요원들은? 유럽본부에서는 3층 쪽 요원 때문에 시끄럽던데.”
   “페레이라 요원이요? 아까 겨우 통화를 했는데요, 엄밀히 따지면 이건 페레이라 요원이 규정을 어겼다기보다는 슈미르 박사가 돌출행동을 한 거더라고요. 저쪽 층계참에 소파 놓여 있는 데에 전화가 있었어요. 거기서 슈미르 박사가 남편과 통화를 했는데, 원래는 영어로만 하는 게 규칙이었다는군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우리 쪽 요원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슈미르 박사가 갑자기 자기네 말로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보고서에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만 기록이 돼 있고 그 대화 내용이 정확히 뭐였는지가 빠져 있어서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모양이고요.”
   “내용은 알아냈어?”
   “페레이라 요원 말로는 별거 아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일단 슈미르 박사를 제지한 다음 통화 끝나고 나서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봤더니, 그냥 조금 전에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창문으로 슬쩍 보니까 누가 낚싯대를 들고 가다가 천장을 긁는 소리였다고. 누군가가 낚싯대를 쭉 빼서 들고 가는 바람에 위쪽 끝이 천장에 탁탁탁 부딪쳤는데, 그 소리가 자기 방 문 앞에까지 왔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또 한 번 문 앞을 지나가는 통에 누군가 자기를 찾으러 온 줄 알았다고요.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한 거였대요.”
   케이 요원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다시 최신지가 물었다.
   “낚싯대 들고 간 사람은 누구였어?”
   “애였대요. 3층 투숙객 아들인데, 아빠 낚싯대를 깃발 삼아 들고 행진 놀이를 했다나요. 애라서 그런지 자세한 건 기억을 못 하고요. 뭐 슈미르 박사가 이야기한 게 맞겠죠.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잘 기억 못 하는 걸 거고요.”
   “이쪽도 별로 문제될 건 없는 거군.”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그런데 본부에서 믿어줘야 말이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본부에서는 현장에서 올라가는 보고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세력으로 갈라져서 각자 자기가 보고 싶은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고 있는 눈치였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기관은 이미 와해 직전까지 가 있었다. 이번 사건이 없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고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최신지는 그게 안타까웠다.
   최신지는 기관이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했다. 반드시 필요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기 힘든 민감한 일들. 기관은 어느 국가에도 봉사하지 않았다. 오로지 인간에 대해서만 움직였다. 국적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개인이라면 누구든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독재 권력이든, 군대든, 비인간적인 문화적 관습이든.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분명 기관의 누군가는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인류 이외에는 그 누구도 대표해서는 안 되는 기관 구성원들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알력이 만들어졌다.
   ‘결국 내 손으로 끝장을 내야 하는 걸까. 증거만 나타나 준다면.’
   최신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런 증거 같은 건 절대 발견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증거가 있다면 반드시 잡아내야지. 증거가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를 바라야 하는 거야.’
   사명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케이 요원이 가지고 온 파일을 최신지에게 내밀었다. 최신지는 그 파일을 받아 안았다. 또 다른 공간 왜곡이었다. 케이의 팔에 들려 있을 때는 수첩처럼 작게만 보이던 파일이 최신지의 팔에서는 목성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뭐가 이렇게 많아?”
   “많긴요. 설마 그게 다겠어요? 지금 벌써 창고 한 칸 분량은 쌓였을걸요. 간단하게 보시라고 몇 개만 갖고 온 거예요. 목록은 제일 위에 있는 파일에 끼워 놨으니까 필요한 거 골라서 보세요.”
   그 순간 사명감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 이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지.’
   케이 요원이 덧붙였다.
   “본부에서 즉시 검토를 요청한 서류들이에요. 이런저런 지부장, 본부장 권한으로요. 저는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오후 5시 10분. 추밀원에서 써준 소개장을 제시하고 방 한 칸을 빌렸다. 침대 위에 일거리를 잔뜩 벌여 놓고 케이에게서 넘겨받은 목격자 증언 내용과 현지경찰로부터 넘겨받은 투숙객 신원조사 보고서를 들여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림자가 내내 최신지 곁을 맴돌았다.
   ‘투숙객들 중에는 별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없어 보이고……. 역시 내부자 쪽일까.’
   날이 어두워지고, 검은 빛이 감도는 하늘 어딘가에서 제일 밝은 별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신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변해가는 빛을 피부로 느꼈다. 바람이 불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깨에 옷을 걸치고는 케이 요원의 메모를 뒤적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복도를 걸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끝이 없을 거야. 남미지부와 유럽본부가 저렇게 의심을 해대는 한 검토를 기다리는 서류는 계속해서 만들어질 거고, 그 편파적인 주장들을 걸러내는 데만도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 내가 왜 그 장단에 놀아줘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이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보내는 자료가 아니라 아예 사건 자체를 재구성해 보려고 들이미는 문건들이잖아. 단지 감찰관 승인 도장을 받아내기 위해서.’
   베개 밑에 묻어둔 전화기를 꺼내 보았다. 받지 않은 전화가 이미 수십 통이었다.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익숙한 이름. 역시 청탁이었다.
   ‘점점 고위층으로 올라가는군.’
   압력이 느껴졌다. 안경이 콧등을 눌렀고 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방안이 점점 좁고 답답하게만 보였다. 숨통을 조여 오는 보이지 않는 손들. 결단을 내릴 시점이었다.
   최신지는 바닥에 쌓아둔 서류를 케이 요원에게 부탁한 다음 윤희나를 데리고 마을에 있는 작전본부로 내려갔다. 배후세력들이 아닌 현장의 소리를 들어봐야 할 때였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해서 청탁전화에 휘둘리게 될 거니까. 오후 6시 6분이었다.

 

   셰흐리반은 방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최신지는 셰흐리반의 모습을 곁눈질로 슬쩍 훑어보고는 현장책임자인 미셸 요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최신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최신지가 생각하기에 그의 팀은 기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믿을 만한 팀이었다. 그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요 조사대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셰흐리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조사에만 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셸 요원이 최신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긴 말 필요 없고 진실을 밝혀주기만을 바란다는 뜻 같았다. 그것도 일종의 청탁이었다. 현장의 청탁.
   “다만 슈미르 박사와 그 유족들에게는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가 …….”
   최신지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미셸 요원,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겠습니다. 지금은 다른 일이 먼저인 것 같아서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최신지는 셰흐리반이 있는 방으로 가서 그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심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혐의를 벗기려고 하는 일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이해합니다.”
   최신지는 셰흐리반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케이 요원의 보고서가 떠올랐다. 지난 사흘간의 행적은 모두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카메라를 갖고 있던 남자는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모르는 사람입니다.”
   “현장에 있는 동안 이야기를 나눈 적은?”
   “두 번인가 다가와서 말을 걸곤 했습니다. 한 번은 음료를 어디서 주문하면 되는지 물어보려고 왔고 다음에는 숙박요금을 물으러 온 거여서 곧바로 옆에 있던 호텔 직원이 대신 대답했고요.”
   “수상하다고 보고한 게 셰흐리반 요원이었지?”
   “네. 카메라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좋은 거였으니까요. 제가 신고했을 때는 이미 삼각대까지 놓고 제대로 촬영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안쪽을 촬영하려고 했나? 말을 걸려고 리셉션 쪽으로 왔을 때는?”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안쪽을 찍지는 않았습니다. 리셉션 쪽으로 다가왔을 때도 카메라는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요. 숨겨놓은 카메라도 없는 것 같았고.”
   케이 요원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본부에서는 직무태만으로라도 걸고넘어질 생각이었겠지만, 같이 있었던 호텔 직원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셰흐리반은 전혀 빈틈이 없었다. 목격자 증언을 들어봐도 그렇고 최신지가 알기로도 그랬다. 한 순간 주의력이 흐트러졌을 수는 있지만, 다른 요원들보다 더 그랬을 리는 없었다. 일부러 그러지 않는 한. 최신지가 다시 물었다.
   “계속 주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텐데. 아무 상황도 없을 때는 뭘 하고 있었지?”
   “텔레비전을 화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최신지는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셰흐리반이 말을 이었다.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장식용 텔레비전이었는데, 흑백이었고 화질도 별로였거든요. 골동품 느낌을 살리려고 갖다놓은 것 같은데 볼만한 건 없었죠. 그냥 그 위치에서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가게 돼 있었을 뿐이지.”
   “다른 요원들이 그 남자가 찍은 사진을 훔쳐온 건 알고 있지?”
   “네. 동영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제 저녁부터는 아예 동영상으로 찍었더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어제는 좀 심했으니까요. 아시죠? 그런 촬영이라는 게 주변 공간 전체를 긴장시켜버린다는 거. 리셉션 데스크뿐만 아니라 근처 다른 테이블 손님들까지 경직될 정도여서 그 정도면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보고를 한 겁니다.”
   “잘했어. 그런데 말이야……”
   최신지는 그렇게 말을 꺼내면서 태블릿으로 사진을 넘겨 보였다. 사진 속에 비친 셰흐리반은 눈앞에 앉아 있는 실물과 마찬가지로 단아하고 차분한 느낌의 아가씨였다. 누군가 눈길을 준대도 별로 신기할 게 없는, 어느 문화권에 갖다놔도 조금은 이국적으로 보일 것 같은, 눈에 띄는 미모. 하지만 한눈에 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최신지가 물었다.
   “사진들은 확인했지? 어때? 뭔가 이상한 거 없었어?”
   “초점이 안 맞더라고요.”
   “그렇지?”
   “누가 봐도 전문가처럼 찍고 있었는데.”
   “정작 사진은 엉망이었지. 거의 대포처럼 생긴 어마어마한 렌즈를 달고도 말이야. 그러니까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생각해?”
   “어떤 연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두 가지겠지. 당신한테 멋있는 사진예술가로 보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로 각인되기를 원했거나. 호텔 직원 말로는 그냥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걸로 보였다고 하는데, 내가 직접 보지를 못했으니 알 수가 없지. 아무튼 확실한 건 사진을 찍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남미지부에서 그 남자 신원을 파악했는데, 프로 사진작가가 맞대.”
   “그래요? 그럼 왜 그랬을까요?”
   “그러게. 그게 문제야. 그래서 남미지부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거지. 그 남자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사진을 찍는 척하면서 할 만한 게 뭐가 있었을까?”
   “특별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대부분 그냥 멍하게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멍하게 있었겠지.”
   최신지는 다시 한 번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사진. 멍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시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별 의미 없이 흐리멍덩한 풍경들.
   “그런데 셰흐리반 요원, 당신한테 불리한 사실이 하나가 더 있어. 본부 분석요원들이 밝혀낸 건데, 그 사진작가 말이야, 전에도 당신을 찍은 적이 있었어. 그 사람 블로그에 올라가 있는 사진들을 뒤지다가 발견한 모양인데, 당신이랑 그 사람, 같은 도시에 살고 있더라고. 몰랐지?”
   “몰랐습니다.”
   셰흐리반의 대답을 들으면서 최신지는 갑자기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일까. 본부 분석요원들이 알아냈다는 저 사실은,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는 한 걸까. 나는 뭘 믿어야 하는 거지? 내 눈에 직접 보이는 것들? 하지만 이건 진짜일까?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는, 정말로 보이는 것만큼 충직한 현장요원이 맞을까?’ 최신지가 말을 이었다.
   “그래. 몰랐을 거야. 동영상에 찍힌 걸 보면 딱 그래. 그런 건 연기로 커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래도 말이야, 그 사람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이대로 뒀다가는 나도 보고서의 한 챕터 정도를 당신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됐을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로 채우는 수밖에 없거든. 지금 이 상태라면. 물론 다른 챕터에는 다른 가설들을 써 놓게 되겠지. 예를 들면, 그 사진작가가 쓸데없이 당신을 찍게 만든 건 순전히 내부분열을 노리고 벌인 디나이의 술책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해. 실제로 기관 내부에 심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 진실이 뭔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아무튼 결과적으로 당신한테는 별로 안 좋은 상황이 될 거야.”
   셰흐리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신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뒤에 최신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셰흐리반에게 말했다.
   “일단 그 남자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보러 갈까?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자세히 설명 좀 해 주겠어?”

 

   6시 42분. 방을 나오는데 윤희나가 속삭였다.
   “잘하셨습니다.”
   “뭘?”
   “디나이 단독범행으로 방향을 잡으신 거.”
   최신지는 윤희나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내가 그랬나?”
   “서류는 내려놓고 현장조사로 가닥을 잡으신 거잖아요.”
   “지부나 본부에서 하는 주장은 무시하고 현장증거를 우선으로 보기로 한 거지. 내부자 소행이라는 증거가 나타나면 어느 쪽이든 가차 없을 거야.”
   “알아요. 알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디나이 스타일이라면…….”
   최신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윤희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희나가 최신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관에 공생하는 느낌이기는 해도 디나이가 정말로 내부자를 심어놓고 공생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건 디나이답지가 않아서.”
   “디나이다운 게 뭐지?”
   “글쎄요.”
   “케이 요원은 좀 다르게 생각할 텐데.”
   “그렇겠죠, 그 아저씨야 뭐. 아무튼 저는 찬성입니다.”
   “지금 감찰팀 안에 파벌 생긴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고. 케이 요원도 결국 팀장님 판단에 따르지 않을까요? 우리는 공증하러 온 게 아니라 직접 현장조사를 하러 온 거잖아요. 전권을 가진 감찰관은 어디까지나 팀장님뿐이고. 그러니……, 잠깐만요, 말하기가 무섭네요. 남미지부 총대표께서 직접 전화하셨는데요, 저한테. 받을까요?”

 

   7시 12분. 셰흐리반을 데리고 호텔 앞마당으로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 벌써 날이 저물어 호텔 벽면에 조명이 아름답게 밝혀져 있었다. 원래 방어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답게 호텔 바깥쪽은 안쪽과는 달리 투박하고 묵직하고 탄탄한 느낌이었다. 바깥쪽을 바라보는 창문이 작았던 것도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했다. 객실 안쪽에서부터 꽤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호텔 벽면은 누가 봐도 성벽처럼 보였다.
   그 성벽을 아래에서 위쪽으로 주황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그 앞에는 호텔에서 운영하는 테이블 여섯 개 중 두 개가 벽에 거의 닿을 듯 가까이 놓여 있었다. 최신지는 셰흐리반과 함께 그중 한 개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예약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우리 거야. 앉아.”
   두 사람은 말없이 건물 외벽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밝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오래된 물건들을 볼 때면 느껴지곤 하는, 변치 않는 존재들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것들. 하지만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바로 옆에는 당장 검토하고 답변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최신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윤희나를 바라보며 이게 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그러자 윤희나가 자기도 전화로 지시받은 대로 할 뿐 어쩔 도리가 없다는 대답을 손짓으로 돌려주었다. 최신지는 셰흐리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대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지. 하지만 다른 단서도 딱히 나타나지를 않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얼굴만 아는 추밀원 비서관이었다. 보도금지 시한이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나라 언론은 세자비 전하에 대해서 그렇게 관대한 편이 아니어서요. 지난번에 화제가 됐던 사진 못 보셨습니까. 일부러 그런 순간이 찍힌 사진을 골라낸다고요. 아니, 그건 사진도 아니죠. 동영상을 캡처한 거니까.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면 이상하지도 않아요. 앞뒤 다 잘라내고 그 순간만 남아 있으니까 이상한 거지. 아무리 훌륭한 홍보팀이 있어도 그런 순간까지 전부 대비를 할 수는 없잖아요.”
   “요점만 말씀하시죠.”
   “이게 다 최신지 씨 입장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스벤손 장관이 어디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는 분인 줄 아세요? 나나 되니까 특별히…….”
   전화를 끊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자비가 좀 심하게 놀림을 받기는 하지.’
   또 다른 청탁이었다.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들어주고 싶은 청탁이었다. 최신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천천히 넘기면서 말했다.
   “정말로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남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뭔가 손을 대면 댈수록 점점 더 꼬여버릴 것만 같은 꺼림칙한 사건이었다. 윤희나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는 공증하러 온 게 아니라 조사를 하러 온 거잖아요.’
   “하지만 그 남자도 분명 뭔가를 했을 거야. 사진을 찍었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록을 남겼으니까. 뭘 남기려고 한 걸까.”
   최신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출입문 안쪽 리셉션 데스크를 들여다보았다. 셰흐리반이 이따금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호텔 직원 두 사람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고, 셰흐리반이 2교대를 하며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현지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수첩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통화중인 호텔 직원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사진에서와 똑같이 주황색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감찰관님, 이게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이쪽에서도 역시 텔레비전을 바라보게 되는군요. 리셉션에 있었을 때랑 마찬가지로요.”
   셰흐리반이 말했다. 최신지는 그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게. 뒷면밖에 안 보이는데도 이 자리에 앉아서 멍하게 시선을 던지다보면 결국 저걸 쳐다보게 되기는 하네.”
   텔레비전은 출입문 근처, 리셉션 데스크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사이에 놓여 있었다. 거리는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리셉션 데스크 쪽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여 있어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보면 옆면과 뒷면밖에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그 텔레비전은 딱 봐도 골동품이 아닌 게 분명했다. 구식 텔레비전 모양을 흉내 내기는 했지만 표면의 질감이 현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빤질빤질한 주황색 플라스틱 재질에, 독특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된 모서리. 짧은 은색 다리 네 개가 뻗어 나와 텔레비전 본체를 받치고 선 모양. 호텔 내부 디자인과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하나만 따로 놓고 보면 결코 존재감이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소품.

 

티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직감이었다. 뭔가를 본 것 같았다. 지금 그 자리에서 처음 본 게 아니라 예전에 이미, 반드시 봐야 할 무언가를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최신지는 카메라를 갖고 있던 남자가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들었다. 뭐가 새삼 눈에 띈 건지 알 것 같았다. 최신지는 셰흐리반에게 사진들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 사진 말이야, 여기 앉아서 보니까 뭔가 달라 보이지 않아?”
   “글쎄요, 특별히 달라진 건 별로, 아, 이건…….”
   “초점이 있지?”
   최신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텔레비전 쪽으로 걸어갔다.
   “초점이 안 맞은 게 아니라 저걸 찍은 거였어. 초점이 맞아. 딱 여기에서.”
   최신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윤희나가 그쪽으로 다가왔다. 빠른 걸음걸이였다. 최신지는 텔레비전 뒷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황색 표면에 밝은 불빛 여러 개가 반사되어 있었다.

 

레드광

 

   “희나 씨, 이거 봐봐. 상이 맺혔어. 그런데 이게 어디 불빛이지?”
   윤희나가 대답했다.
   “저거 같은데요. 객실 앞 복도에 있는 저 등.”
   “그렇겠지?”
   “네, 그런데 왜요?”
   “그 사진작간지 뭔지 하는 남자 말이야, 셰흐리반이 아니라 이걸 찍고 있었어, 내내.”
   두 사람은 호텔 중앙에 있는 마당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 바깥쪽 벽을 비추는 조명 색깔과는 또 다른 밝은 주황색 불빛이 복도 중간중간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어시설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안식처에 가까운 풍경. 호텔의 밤은 온통 그런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현지경찰이 자리를 비운 틈에 최신지가 재빨리 리셉션 데스크로 다가가 이렇게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물을게요. 저 텔레비전은 원래 저 위치에 놓여 있었나요? 저 각도로?”
   호텔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최신지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닌 것 같아요.”
   호텔직원 하나가 그렇게 속삭였다.
 

   8시 17분.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작전본부로 돌아가 회의를 소집했다. 감찰팀 조사관들과 현장책임자인 미셸 요원이 참석하는 소규모 미팅이었다. 최신지가 전화통화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떠들썩하던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최신지가 입을 열었다.
   “방금 추밀원을 통해서 확인한 내용인데, 정보국 말로는 슈미르 박사가 남편에게 건 전화는 아무래도 남편 쪽 회선을 통해서 도청당한 것 같다고 판단한다는군요. 윤희나 요원, 이거 관련해서 우리 본부 쪽에서는 입장 변화가 있나요?”
   “본부 쪽에서는 보안대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으니 그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입니다. 정확한 건 아직 아무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통화 내용인데, 이미 아시는 것처럼 위치가 노출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본부에서도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도청됐다는 사실이 확정된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까요.”
   “뭐 그건 그쪽 팀에서 계속 추적할 문제고,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선택은 두 가지겠지? 본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고 지금부터라도 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각종 자료들과의 끝없는 전쟁에 돌입할 것인가, 아니면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도청을 당한 걸로 가정하고 디나이가 뭔가 기막힌 마법을 부렸을 가능성에 대해 창의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조사를 시작할 것인가. 물론 후자겠지? 다들 이의 없죠? 좋습니다. 그럼, 윤희나 요원은 연락을 전담해 주세요. 남미지부나 유럽본부가 시끌시끌하다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뭔가 문건들을 잔뜩 생산하고 있거나 이미 생산된 문건들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걸 지연시켜주는 것만 해도 큰일일 거예요. 그리고 현지경찰한테서 일반투숙객 조사 결과 업데이트하는 거 잊지 말고. 아무 것도 안 나온다고 무시하지 말고요. 뭔가가 나오면 그 순간부터는 그게 제일 중요해지는 거니까. 아셨죠? 다음으로, 케이 요원, 그 사진에서는 뭐 새로운 게 나왔나요?”
   “본부에 협조요청해서 분석중인데, 내부정치 때문에 공정성을 유지할 요원을 구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일단 진행 중이긴 한데, 텔레비전 뒷면이 곡면이어서 반사된 상이 똑바르지가 않더라고요. 돌출된 데는 불빛이 집중돼 있고 움푹 파인 부분은 상대적으로 불빛이 적고요. 어느 불빛이 어느 전등인지 파악하려면 건물 도면을 받아다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잠깐만요, 그걸 지금 꼭 해야 되나요?”
   “저쪽에서 이 화면을 어떻게든 이용했다면 똑같은 작업을 거쳤을 것 같아서요. 정확히 무슨 일을 한 건지 재구성을 해 보려면, 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효율적이군요. 하지만 좋습니다. 대안이 없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되죠?”
   “사진 자체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분석해야 하는 건 어쨌거나 사진에 찍힌 화면 자체니까요. 그런데 이 사진만 갖고는 아무리 확대를 해도 불빛 말고 다른 건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기술 같은 건 없을까요? 우리한테는 없어도 디나이한테는 있을 가능성은?”
   “그걸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특수한 기술은. 그런데 솔직히 제 의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예?”
   “거의 그렇다고 봐야죠. 어떤 기술을 어떻게 적용하든 결국 원본의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 해상도 가지고는, 그 거리에서 슈미르 박사를 식별할 만큼의 정보는 절대 못 얻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픽셀 몇 개로밖에 안 보일 거거든요.”
   “가능성이 낮다는 거군요.”
   “대단히 낮죠. 슈미르 박사가 픽셀처럼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좋아요. 일단 오늘까지는 그렇게 가 봅시다. 하지만 뭐든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으면 알아봐주세요. 디나이가 사용했을 것 같은 기술이 존재한다는 게 확인되면 그 기술 자체가 단서가 될 거니까. 희귀하면 희귀할수록 추적 범위도 좁혀질 거고요. 마지막으로 미셸 요원은 현장요원들과 함께 사진작가 쪽을 맡아 주세요.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이쪽 정보국이나 기관 내 다른 조직에게 뺏겨서도 안 되고요.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이 남자가 제일 중요한 참고인이 될 거예요. 아셨죠?”

 

   밤 9시 40분.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 맡은 일로 돌아갔다. 최신지는 다시 텔레비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올 만한 구멍이 없을 것 같았다. 호텔 밖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텔레비전 뒷면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며 지금까지 나온 증거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조금 전에 케이 요원이 다른 사람들 몰래 뒤따라와서 건넨 말이 떠올랐다.
   “저는 아무래도 셰흐리반 요원 쪽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왜? 뭐 나온 거 있어?”
   “셰흐리반 요원이 그 사진작가와 이미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그 블로그에 있는 사진 하나만은 아니었거든요.”
   “그건 어디서 나온 정보야?”
   “남미지부에서 추적을 계속하고 있었더군요.”
   “당신까지 왜 이래? 안 그래도 화가 날 지경인데. 내가 방금 당신한테 그걸 검토하라고 지시한 게 아니잖아.”
   “지시한 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지시가 떨어지기 전부터요. 이건 남는 시간에 본 겁니다. 결국 누군가는 봐야 할 거니까요. 그리고 서류 검토를 계속 거부하시는 건 팀장님한테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심스러운 점들이 많아요.”
   “나에 대한 탄핵권이 당신이나 희나 씨한테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려는 거야?”
   “그럴 수도 있죠. 수시로 상기시키라고 제 업무지침에 나와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든지. 하여튼 말하는 거 하고는. 어쨌든 당신은 원래 셰흐리반 요원 싫어하잖아. 어차피 그쪽도 그다지 객관적인 판단은 아닐 텐데.”
   “뭐 어쨌든 새로 발견되고 있는 증거들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일단은 팀장님 판단대로 진행하시죠. 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말에 턱 아래 근육이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결정적인 증거라니. 그건 셰흐리반에 관한 걸까 아니면 나에 관한 걸까.’
   추밀원 장관 야콥 스벤손이 말한 것처럼 호텔을 임시 거처로 삼은 게 발각된 건 부패가 아닌 기관의 능력 문제였던 것으로 판명되고 있었다. 보안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었다. 최신지로서는 그게 더 뼈아픈 실책이었다. 어쩌면 직접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제는 지금 당장 최신지가 다룰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디나이가 슈미르 박사가 묵고 있던 방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내부자가 있었던 걸까. 셰흐리반은 진짜로 그 사진작가의 정체를 몰랐던 걸까. 알았다면? 다른 사람 모르게 뭔가 신호를 주고받은 거라면?
   서류철을 열었다. 남미지부에서 보낸 파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꼭 봐야 한다며 케이 요원이 손에 쥐어준 파일. 표지를 넘기자 사진이 나왔다. 어딘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셰흐리반 요원의 옆모습. 그 시선을 따라 사진 속 맞은편 건물로 눈을 돌렸다. 카메라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보였다. 문제의 사진작가. 내내 셰흐리반을 찍고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파일을 덮고 전화를 받았다. 유럽본부 최고위급 인사였다. 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더니 체념한 듯 차분한 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제일 먼저 당신 차례가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최신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말이 맞을까? 그는 정말로 그 사실을 알고 말한 걸까.
   ‘사라지더라도 이 일은 다 끝내고 사라져야 될 텐데. 여기까지는 분명히 내 임무니까.’
   파일을 내려놓고 다시 텔레비전 뒷면을 바라보았다. 빤질빤질한 주황색 플라스틱 표면에 노란색 불빛이 잔뜩 박혀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전처럼 또렷해 보이지가 않았다. 콧등을 만져보니 안경이 없었다. ‘이런!’
   텔레비전 바로 뒤로 다가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불빛이 조금은 선명해진 것 같았다.
   ‘문제는 저거야. 저게 객실 밖 복도 조명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지만 그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디나이가 저걸로 뭘 했다는 거지? 결국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그냥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서류를 들여다보는 편이 나은 걸까. 그러다 보면 뭔가 쓸 만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범답안을 훔쳐보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정답이 아닌, 단지 누군가가 모범답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을 뿐인 또 다른 오답. 이미 뭔가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해낸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다 맞춰진 퍼즐인데, 예전에 한 번 맞춰본 퍼즐 같은데, 그래서 분명히 가능한 퍼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지금 당장은 안 맞춰지는 걸까. 내가 뭘 잊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동영상. 왜 동영상을 찍었을까.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서? 텔레비전 위치를 옮겨가면서까지 뭔가를 확인하려 했다면……. 그런데 그게 뭘까.
   텔레비전 뒷면에는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불빛. 빛. 작고 동그랗고 가물거리는 빛. 눈에 힘을 뺐더니 어느새 상이 희미해졌다. 다시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디나이가 떠올랐다. 기관의 기생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아주 좋지 않은 삶의 방식이었다. 스스로 자기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하긴, 그 사람 그런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
   그 사람을 떠올렸다. 디나이의 머릿속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별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걸 뭐.’
   별. 다시 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람. 3층 복도 조명등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찡그려도 더 이상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거리. 습관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조건 선명하게 보는 게 잘 보는 건 아니랬지. 누구한테서 들은 말이었는지를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꾸 인상 쓰지 마, 무서워. 잘 안 보이면 그냥 잘 안 보이는 대로 봐. 희미하게 봐야 보이는 것도 있다니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최신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별, 불빛, 카메라,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광원.
   꼭 맞는 퍼즐조각을 찾아낸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저 빛 자체를 찍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
   빛 자체. 빛이 담고 있는 정보들에 관한 지식. 천문학. 우주.
   최신지는 태블릿을 꺼내 문제의 사진을 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뒷면에 비친 불빛을 확대했다. 이미 여러 번 해 본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확대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그 부분을 확대했다. 무언가를 알아보는 건 고사하고, 의미 있어 보이는 건 거의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마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사진을 확대하면서 보니 텔레비전 뒷면에 비친 불빛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수십 미터 뒤, 복도 조명등 주변이 보일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불빛 그 자체는 선명한 둥근 모양을 꽤 오랫동안 유지한 채 최신지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가자 형체나 뉘앙스는 모두 디지털 단위로 쪼개져 사라지고 불빛의 둥근 실루엣마저도 조금씩 깨져나가더니 마침내 각진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픽셀이었다.
   ‘저것보다 작은 건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어. 보인다 해도 모자이크처럼 보일 테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모양을 전에 어디서 봤더라.’
   그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최신지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저건 거의…….’
   그것은, 마치 우주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상에 숨겨진 작고 선명한 주황색 우주.

 

레드2

 

   최신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불빛 하나하나를 별로 생각한 거구나!’
   전율이 일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망원경으로 아주 멀리 있는 별을 들여다 볼 때도 결국은 저런 모습을 보게 되겠지! 천재였잖아, 디나이! 당신 진짜 천재였어!’

 

블랙

 

   그리고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케이 요원이었다. 최신지는 흥분된 마음을 재빨리 가라앉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케이에게 물었다.
   “뭔가 나온 거 있어?”
   “아, 새로운 게 발견된 건 아니고요, 곡면 때문에 생긴 왜곡을 보정하는 작업이 일차로 끝나서요. 텔레비전 뒷면에 비친 구부러진 공간을 반듯하게 펴는데 성공했는데, 그림이 썩 보기 좋지는 않지만 어느 불빛이 어느 등에서 나온 건지 위치 정도는 알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좋아. 일단 은하계 지도를 완성했다는 거지?”
   “네. 네? 뭘 완성해요?”

 

   9시 59분.
   “태양 주위를 도는 것도 명왕성 저 바깥에 있는 건 잘 보이지도 않는다며? 외계행성이라는 건 아예 저런 멀리 떨어져 있는 별 근처를 돌고 있는 행성 말하는 거 아닌가. 그럼 어차피 못 보잖아.”
   최신지는 오래 전에 헤어진 그 사람을 떠올렸다. 주말이면 함께 바닷가를 걷기 위해 왕복 너덧 시간씩 도로 위를 달리곤 했던 그 시절의 기억. 기억 속의 그가 기억 속의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럼 블랙홀은 눈에 보이냐? 뭔가 보여야 되는 게 있는데 안 보인다는 건 어떻게 알겠어.”
   “주위에서 다른 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주위에 다른 게 뭐가 있는데?”
   “별?”
   “그러니까. 어차피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별밖에 없잖아. 다른 것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일단 저 별만 열심히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니까. 온도가 몇 도인지, 구성 성분이 뭔지, 몇 살이나 먹었고 언제 죽을지도 알고. 죽을 때 어떤 식으로 죽을지도 알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 주위를 도는 행성이 크기가 얼마고 질량이 얼마고 밀도나 항성에서부터의 거리 같은 것도 다 알 수 있다니까. 그 빛의 성질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직접 안 봐도 그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게 엄청 많다고. 딸려 있는 행성에 대해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딸려 있는 행성에 위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 어쩌면 수천만 년 뒤에 태양에서 우주로 날아간 빛을 관찰하게 될 어느 외계문명의 과학자는 그 빛만 보고 니 이름까지 딱 알아맞힐지도 모르지. 아, 역시 촌스럽구나, 하면서.”
   “웃기시네.”
   웃기시네. 웃기시네.

 

   10시 5분. 최신지는 3층 복도로 뛰어올라갔다. 슈미르 박사가 머물던 방 근처였다. 똑같이 생긴 동그란 조명등이 복도를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수십 개의 조명등에서 나오는 따뜻해 보이는 불빛이 호텔 안쪽을 환하게 비추었다.
   ‘제일 중요한 목격자는 바로 이 조명등일 거야. 그런데 대체 뭘 본 걸까. 이 조명등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등 불빛이 텔레비전 뒷면에 펼쳐진 우주를 통해 카메라에 줄 수 있는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거의 다 왔어.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이게 몇 만 광년 떨어진 별이야. 저 밑에 있는 텔레비전 뒷면이 천구고, 그 천구를 들여다보는 천체망원경이 바로 그 카메라가 되겠지. 그럼, 그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천문학자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1층 로비 쪽을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이 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희미한 주황색 점.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밖으로 새 나오고 말았다.
   “트랜짓(transit)!”
   재빨리 케이 요원의 파일을 펼쳐 들었다. 이미 본 것 중에 힌트가 있었다. 3층 잠복요원의 실수. 페레이라 요원의 실수는 아니었지만, 막을 수 있었다면 수화기를 통해 새 나가지 않도록 막는 게 좋았을 슈미르 박사의 사소한 한마디.
   케이 요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던 거 멈추고, 지금 내가 말하는 것 좀 확인해 줘. 됐어. 당신이 누구 편이든 이제 상관없어졌어.”

 

   11시 3분. 케이 요원이 그 결과를 전화로 알려왔다. 그리고 맨 끝에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언제나 감찰관님 편이었다는 건 잘 알고 계시죠?”
   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추밀원 장관 야콥 스벤손이었다.
   “최신지 씨, 세자비 전하를 뵐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바쁘시겠지만 잠깐 브리핑을…….”
   “이쪽으로 오고 계신가요?”
   “근처입니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보셨겠지만, 복장은 격식에 맞지 않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에 자신이 있으시군요.”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존칭 문제인데요, 그냥 편하게 ‘전하’를 붙이시기 바랍니다. 의전이, 최근에 그렇게 통일이 됐거든요. 어려운 부탁은 아니겠죠?”
 

   11시 47분. 야콥 스벤손의 관용차 안. 최신지는 태블릿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세자비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침묵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싶을 때쯤 마침내 이렇게 운을 뗐다.
   “낚싯대가 지나갔습니다.”
   세자비가 눈썹을 아주 조금 치켜 올렸다.
   “낚싯대가요?”
   “네, 낚싯대를 든 아이 하나가 3층 복도를 지나가면서 낚싯대 끝으로 천장을 때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혹시 위치가 발각된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 했다는 이야기를 슈미르 박사가 남편에게 했다고 합니다. 전화로요.”
   “들었어요.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 퍼즐조각이었습니다. 그 낚싯대 뒤에 조명등이 달려 있었거든요. 복도를 따라 쭉 늘어서 있는 그 조명등 중 하나가 슈미르 박사가 머물던 방 문 앞에도 달려 있었습니다. 낚싯대가 그 앞을 지나갔고요. 그때 천장을 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낚싯대는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사람 키보다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조명등 앞을 분명히 지나쳐간 겁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페레이라 요원의 근무일지에는 정확한 시간이 나와 있었습니다. 슈미르 박사가 그 말을 했던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전화통화는 슈미르 박사를 쫓던 보안부 직원들에게 도청당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저쪽에서도 분명히 슈미르 박사가 그 말을 한 정확한 시간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 단서가 중요했습니다.”
   “그럼 3층이 문제였다는 건가요? 리셉션 쪽은요?”
   “사실은 둘 다 문제였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요원들 문제는 아니었지만요. 셰흐리반 요원은 디나이와 내통한 내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의심받기 좋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뿐이죠. 디나이는 영악하게도 그 점을 놓치지 않았고요. 디나이를 도왔던 사진작가는 사실 셰흐리반에게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셰흐리반의 사진을 찍지도 않았고요. 그가 그렇게 열심히 찍어댄 건 텔레비전 뒷면에 비친 불빛이었습니다. 너무 작아서 불빛이라는 사실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불빛들이었습니다. 저희 팀 케이 요원이 호텔 도면과 대조해서 그 불빛들의 위치를 확인해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불빛을 통해 슈미르 박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거나 한 건 아니었습니다. 거의 픽셀 몇 개로밖에는 안 보이는 불빛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이게 결정적인 단서였습니다.”
   “디나이는, 그걸 통해 뭘 알아낼 수 있었죠?”
   “밤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 행성이 있는 별을 찾아내는 방법을 아십니까? 미시중력렌즈 현상이나 시선속도 같은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몇 가지 방법들 중에 트랜짓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법이 있습니다. 행성이 별 앞쪽을 지나칠 때 그 행성의 크기만큼 별빛을 가립니다. 아주 미세하게요. 그 미세한 밝기 변화를 측정해서 행성이 있다는 걸 알아낼 수 있습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앞에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물론 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은 헤드라이트도 겨우 보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별들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그냥 조그만 점 하나로 보일 만큼 멀리. 그 거리에서는 그 점 말고는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서부터 날아온 빛만 잡아낼 수 있을 뿐이죠. 그런데 그 빛을 열심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미세한 빛의 변화를 관찰하면 주위에 행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행성의 크기나 공전주기도 알 수 있거든요. 셰흐리반 요원을 찍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카메라는 이 사건에서는 천체망원경 역할을 했습니다. 빛을 찍은 겁니다. 슈미르 박사가 전화통화 중에 이야기한 그 순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낚싯대가 슈미르 박사의 방 앞을 지나쳐간 순간, 바로 그 순간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겁니다.”
   “그걸로 방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케이 요원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가능하더군요. 우선 페레이라 요원의 증언에 따라 그 아이가 낚싯대를 가지고 움직인 동선을 재구성했습니다. 그 소리는 아이의 가족이 묵고 있던 방에서 시작해서 슈미르 박사의 방 앞까지 왔다가 다시 처음 왔던 방향 쪽으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슈미르 박사의 방 앞을 지나갔습니다. 디나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텔레비전 뒷면에 비친 우주를 관측한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천체망원경 역할을 하는 카메라로 녹화한 영상을 다시 면밀하게 검토한 거겠죠.”
   “어떻게요?”
   “그 순서대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별이 있는지 조사했을 겁니다. 낚싯대의 굵기를 대충 알고 있으니 조명등을 얼마나 가리게 될지 계산해 낼 수 있었을 거고요, 실제로도 딱 그만큼 불빛이 어두워졌겠죠. 아이가 걷는 속도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비슷하게 추측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낚싯대가 조명등을 가리기 시작해서 완전히 조명등 밖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측정하면 아이가 그만큼을 걷는 데 걸린 시간을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우리 팀도 정확히 그 패턴으로 움직이는 불빛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이런 식의 도표를 얻게 됐다는 겁니다.”
   최신지는 태블릿 화면에, 조명등 빛의 밝기 변화를 나타낸 도표를 띄웠다.

 

도표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자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신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겨 그런 도표 여섯 개가 들어 있는 그림을 태블릿 모니터에 불러냈다.
   “낚싯대를 든 아이의 움직임을 여기에 대입하면, 이 여섯 개의 도표 중 어떤 게 슈미르 박사 방 문 앞에 있는 조명등의 밝기 변화를 나타낸 건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알아보시겠습니까?”
   세자비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화면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여섯 개의 도표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두 번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가, 다시 한 번 어두워진 불빛?”
   “그렇습니다. 아이가 딱 그런 식으로 움직였으니까요.”
   “재미있군요. 하지만 아주 미세한 밝기 변화를 알아내는 거라면서요. 가만히 놔둬도 그만한 밝기 변화는 늘 생기지 않나요? 연기가 지나가거나 텔레비전 근처에 다른 불빛이 켜지기만 해도……. 디나이가 그런 불확실한 단서만 가지고 단 한 번의 미사일 공격을 강행할 만큼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확신했을 겁니다. 천문학자가 대기권 밖에 떠 있는 케플러 망원경을 통해 발견해 낸 외계행성의 존재를 믿는 정도로 거의 의심 없이 믿었을 겁니다. 관측환경 때문에 생기는 밝기 변화는 걸러낼 수가 있거든요.”
   “어떻게요?”
   “주위에 있는 불빛을 같이 관찰하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별의 밝기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별과의 밝기 차이를 측정하는 거죠. 만약 텔레비전 옆에서 다른 조명이 켜지는 바람에 두 불빛이 동시에 약간 더 밝아졌다고 해도 그 두 개의 불빛이 똑같은 정도로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기만 한다면 두 별의 밝기 차이는 일정할 거니까요. 그렇게 하면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게 낚싯대가 지나가면서 생긴 밝기 변화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낚싯대가 조명등을 얼마나 가릴지는 대단히 정확하게 계산할 수가 있어서 측정만 정밀하게 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꽤 분명했으리라 봅니다.”
   세자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신지는 가만히 세자비의 얼굴을 살폈다. 세자비는 당연히 왕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누구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지위가 아니라 대단히 눈이 높은 누군가에게 후천적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세자비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디나이가 일부러 함정을 파고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건가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낚싯대를 든 아이가 그 조명등 앞을 지나간 건 우연이었으니까요. 슈미르 박사가 그 이야기를 전화로 흘린 것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텔레비전을 옮긴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그 방향에 놓여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안쪽을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방향을 살짝 튼 거였습니다.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었죠. 누군가 슈미르 박사를 그 호텔에 숨겼다면 정문 출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뒀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아마도 디나이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둔 다음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마리가 주어진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슈미르 박사의 위치를 알아낸 거고요. 관측이 끝났을 때, 디나이는 아마도 그 결과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확신합니다.”
   “흥미롭네요. 그런데 감찰관, 감찰관은 어째서 그걸 확신하는 거죠?”
   “사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 첫 번째 열쇠도 디나이에게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디나이가 케이 요원을 두고 중력렌즈 같은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디나이는 분명 제가 방금 설명한 이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전에서 활용하는 방법도 정확히 알고 있었고요. 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방법도 아닙니다. 영상으로 포착된 빛의 밝기를 그냥 합산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물론 디나이가 실제로 그 방법을 사용했을 거라는 증거는 찾아내셨겠죠?”
   “네. 아직 보고는 안 됐겠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일단 현지경찰이 슈미르 박사의 방을 공격한 미사일을 유도한 신호를 조사해서 디나이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을 찾아냈습니다. 거기에서 발견한 컴퓨터에서 이 작업의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어떤 흔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세자비 전하, 잘 아시겠지만 전하의 왼쪽 볼에는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누구든 세자비 전하를 생각할 때면 맨 먼저 떠올리게 되는 매력적인 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단순한 캐리커처를 그린다고 해도 그 점만은 빼놓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세자비 전하의 얼굴을 표현해야 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딱 한 개의 화소 말고는 아무것도 없 상황이라면, 그런데도 반드시 그 점을 표현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점이 있는 얼굴과 점이 없는 얼굴이 반드시 구별되게 해야 한다면, 사진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요?”
   “글쎄요.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냥 생략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법은 있습니다. 그 한 개의 화소를 아주 살짝 어둡게 하는 겁니다. 세자비 전하의 얼굴에서 그 점이 차지하는 비율만큼 정확히. 그러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없는 얼굴을 화소 하나로 찍은 것과 점이 있는 얼굴을 화소 하나로 찍은 것을 비교해서 화소가 어두워진 정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면 얼굴 전체에서 점이 차지하는 비율을 알 수 있을 거고, 다른 화질 좋은 사진을 통해 세자비 전하의 얼굴 크기를 알 수 있다면 그 비례를 통해 그 점의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트랜짓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방법을 쓰려면 별 하나가 화소 한두 개로 표현되게 의도적으로 설정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디나이가 실제로 확보한 영상보다 오히려 해상도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거죠. 마치 안경을 쓰고 있던 사람이 일부러 안경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그런데 이건 우연일 수가 없습니다. 뭔가를 감시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누군가 일부러 그 목적에 적합하게 영상을 가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가공한 영상이 발견됐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디나이를 추적하는 데 그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그 텔레비전 위치를 옮긴 사람의 정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부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다행히 기관 소속은 아니었고 호텔 직원도 아니었습니다. 호텔 납품업체 직원이었는데, 그가 텔레비전 위치를 아주 약간 옮겨 놓았다는 증언을 확보했거든요. 이 남자를 추적했더니 연락처 몇 개가 나왔습니다. 결국 또 다른 아지트가 나오더군요. 두 군데에서 발견된 걸 따로 놓고 봤을 때는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못 찾았는데 연결해 놓고 보니까 결과가 달랐습니다. 퍼즐이 맞아 떨어졌죠. 아직 조사 중이기는 하지만.”
   “그렇군요. 자세한 결과는 추밀원을 통해서 확인하도록 할게요. 정말 훌륭한 추리였네요. 덕분에 저도 한시름 놓았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세자비가 시계를 가리켰다. 이미 보도제한 시한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최신지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워 보였다.

 

   “아, 그런데 그 사진작가 말인데요.”
   “네.”
   “셰흐리반 요원과 아는 사이라는 의심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던데. 결정적인 증거도 있었고요. 보셨죠?”
   “네, 그 두 사람이 같이 찍힌 사진 말씀이시죠? 아마 가짜일 겁니다.”
   “어째서죠?”
   “그 두 사람이 너무 완벽하게 찍혀 있는 사진이었거든요. 그리고 사진 한 장에 그 두 사람이 모두 피사체가 됐다는 건…….”
   “사진 밖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찍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겠어요? 이 사건 이전에 그 둘의 관계가 중요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선명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길 만큼 말이죠. 이 사건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일부러 시간을 되돌려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개연성이 없습니다. 너무 인위적인 타이밍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조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 그런 걸 만들어서 남미지부에 흘렸겠죠.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절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혼란을 야기하려는 디나이의 작전이었을 뿐. 늘 그런 식이었거든요.”
   “디나이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네, 세자비 전하. 아무튼 이 사건에 대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기관은 무능했지만 부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은 생각만큼 많이 무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텔레비전 뒷면을 가리지 못한 것뿐이었거든요. 본부 쪽에서도 확인을 했지만, 전화통화를 도청당한 건 불가항력이었다고 하고요. 내부자는 없었습니다.”
   세자비는 최신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디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소재를 알아냈고, 적어도 세 개 이상의 기관에서 무장한 작전팀을 보낼 것 같습니다.”
   “잡을 수도 있겠네요.”
   “기대하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세자비 전하, 사실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네?”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알아낸 게 또 있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곧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일인가요?”
   “네. 세자비 전하, 잘 아시겠지만 지난 몇 년간 기관에는 기관의 활동에 기생해서 불법적인 행동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그리고 저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있는 인연의 끈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둘이 사실상 하나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사람이 디나이였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세자비 전하, 저는 몇 해 전에 디나이가 될 사람과 알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죠. 아주 사적인 관계였고요. 그리고 시간은 정직하게만 흘러서 그는 결국 디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은신처가 노출된 건 실패지만 정확한 방의 위치가 드러난 건 부패라고 하셨죠? 제가 결론내린 것과 같이 부패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는 있었습니다. 결정적 실수였죠.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디나이는 저를 추적해서 슈미르 박사의 임시 은신처로 사용된 건물의 위치를 알아낸 겁니다. 제가 세자비 전하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네, 아마도 왕실 재산 목록을 뒤졌겠죠. 그 중에서…….”
   “외국인이 단기간 머물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을 감시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곳 한 곳만 감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 겁니다. 그러다 셰흐리반 요원을 발견했겠죠. 디나이는 그런 식으로 저에게 기생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관이 아닌 저에게. 그러니까 문제는 저였습니다. 제가 바로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이게 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가 조용히 차 안을 맴돌았다. 한참 뒤에 세자비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면서요.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그 눈 때문입니다. 집요한 시선. 모두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곳을 끈질기게 파고들어서 결국 그 안에 조그만 우주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 내는 힘. 그게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만약 그게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이 본 것과 똑같은 것을 제가 그렇게 빨리 발견해냈을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리고 그걸 발견하는 순간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솔직히 신이 났습니다. 수수께끼가 풀려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더 재미있어 보여서였습니다. 그건 제 일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훨씬.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진심으로 그가 부러웠습니다. 그 사람이 잔악무도한 악당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고 있던 저보다 그 사람이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또 천재적인 방식으로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저한테는 이제 그런 미래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 시절의 저는…….”

 

   새벽 0시 17분. 보도제한 시한을 넘긴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세자비가 개입된 부패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기관에는 사실상 해체선언과 다름없는 일이었고, 왕실의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한 일이었지만, 추밀원은 보도제한 시한을 연장하거나 최신지가 새롭게 밝혀낸 사실에 의거해 정정 보도를 요청하는 등의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함정이었다. 진실은 날이 밝은 뒤에, 혹은 이틀이나 사흘쯤 시간이 지나고 왕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경계를 완전히 풀고 날카로운 발톱을 거침없이 드러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 뒤에 조금 천천히 밝혀져도 상관없다는 세자비의 뜻에 다른 조치이기도 했다.
   기관은 그대로 와해될 운명이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남느니 차라리 그렇게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세자비의 명예는 진실만 밝혀지면 금방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기관에게는 그 진실마저도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쩌라는 거지?’
   최신지는 그런 생각에 잠긴 채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추밀원 장관 야콥 스벤손이 뒤따라 차에서 내리더니 최신지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연락이 갈 겁니다.”
   “연락이요?”
   “당장은 처리할 일이 많으실 테니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으시겠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한 몇 달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시면 됩니다. 그럼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누굴요?”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스벤손은 그 말만 남긴 채 다시 조용히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추밀원 장관과 세자비를 태운 차는 어둠속을 달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아마도 세자비를 만나게 될 거라는 뜻인 것 같았다. ‘뭐야, 나 지금 면접 본 거야?’
   일단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모양이었다. 최신지는 세자비가 한 말을 되새겼다.
   “그런 걸 왜 저한테 고백하시는 거죠? 저는 성직자가 아닌데요. 왕실이 신을 대리해서 이 땅을 다스린다는 말 같은 건 어차피 아무도 안 믿는 거짓말인데. 그리고 디나이가 바로 그 남자라는 건 그냥 최신지 씨 생각일 뿐이잖아요. 십대들이 하는 착각 비슷해 보이는데, 이 타이밍에 제가 겨우 그런 말을 믿고 섣불리 다음 행동에 나서는 건 아무래도 위험한 일 아닐까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확신은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었으니까.

 

   최신지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기다리고 서 있던 케이와 윤희나가 그쪽으로 다가왔다. 윤희나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망했지 뭐.”
   “그럼 이건요?”
   윤희나가 손에 든 서류들을 가리켰다. 최신지가 채택해주기를 기다리던 수많은 문서들 중 일부였다.
   “버려. 이제 그런 거 안 봐도 돼.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뭐. 기관도 내일이면 없어질 거고.”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홀가분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최신지는 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글쎄, 아마도 웃을 일은 아닐 텐데.’
   “자, 아무튼 한 건 끝났으니 샴페인이라도 한잔씩 합시다. 내가 살게. 희나 씨, 미셸 요원이랑 셰흐리반도 불러줄래?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끼리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호텔로 돌아갔다. 조금 전 언론 발표로 호텔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시끌벅적했다. 감찰팀 세 사람은 정문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리셉션 데스크에 샴페인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게 주황색 텔레비전 뒷면을 바라보았다. 케이가 테이블에 전화기를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디나이 포획작전 결과가 문자로 지연중계되고 있었다.
   “저런!”
   “왜?”
   “소재지라고 알려진 데를 급습했는데 폭탄이 터졌다네요. 사상자가 열다섯이나.”
   “디나이는?”
   “30분 전쯤에 빠져나간 것 같다는데요. 주요 도로 차단하고 검문하라는 지시가 보이네요.”
   최신지는 샴페인 잔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공기방울이 천상의 원소처럼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지 뭐.’

 

   0시 43분.
   별들이 줄을 지어 반짝이는, 주황색 우주가 펼쳐진 밤이었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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