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소설_맨]얼음이 녹기 전에

 

 

얼음이 녹기 전에

 

여동현

 

 

삽화-얼음이-녹기-전에

 

 

    달은 해가 지는 순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멋진 존재이고, 가장 비싼 전광판이다. 어릴 적부터 매일 달 광고판을 보고 자란 나는 꽉 막힌 노인들과는 다르게 달 광고판이 그럭저럭 도시 경치와 어울린다고 느낀다. 특히 대형 스크린과 홀로그램 전광판으로 번쩍번쩍한 뉴욕의 야경과는 정말 멋들어지게 궁합이 맞는다.

 

 

    20년이나 묵은 매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은, 뉴욕 지방지의 오래된 기사를 읽고서였다. 사실 그 신문 기사는 몇 십 년 전 게재된 날씨에 관한 작은 꼭지일 뿐이었고, 내 플렉시블 단말기가 구려서 화면이 제멋대로 스크롤되지 않았다면 바로 위칸의 「화성에서 재배된 빨간무 백악관 만찬에 올라와」라는 대서특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니 할아버지의 허풍을 진지하게 곱씹어볼 기회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매니는 내가 캐나다 북부 이칼루이트(Iqaluit) 외곽에 살던 촌스러운 시절 옆집에 살던 말 많은 노인이었다. 그 새까맣게 춥던 동네에서 꼬마들을 온실에 앉혀 놓고 온갖 종류의 이야기를 끝없이 해주었는데, 그건 젊었을 적 북극권의 워드헌트 섬(Ward Hunt Island)에서 관광코스 도우미로 일했을 때 습관이 되어서라고 했다. 온난화로 녹아내리는 만년설을 보겠다고 몰려온 관광객들은 질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극곰이 멸종되기 전에 본 적이 있나요? 어땠나요?" "재미있는 이누이트 전설을 가르쳐줄 수 있나요?"
    이누이트 혼혈도 아니고 심지어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던 매니 할아버지는, 위도 83도 겨울 세계에 남아 마지막 빙하를 지키는 신비로운 이누이트 행세를 하며 관광객들에게 주옥같은 전설을 들려주는 게 콘셉트였다. 우리에게도 알려준 이야기가 많았다. 그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바다로 빠진 관광객을 얼어 죽기 직전에 환상적인 수영 기술로 구출하고, 보트 주위에서 춤추던 상어 떼는 플라스틱 양날 노 하나로 다 때려잡았다. 백야가 끝나고 달이 떠오를 때엔 이누이트 전설을 들려주었다. '해'와 '달' 남매가 하늘에서 함께 살던 중 오빠 해가 실수로 여동생 달의 얼굴에 화상을 입혀서 달 표면에 흉터가 생겼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로 성형수술을 받아서 이제는 얼굴에 요란한 문신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그때쯤 우리는 아무리 어렸어도 달 표면에 새겨진 광고판이 한국 기업인 삼선(Samsun) 사(社) 소유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화상 자국은 달의 얼굴 한가운데에 있는데 문신은 왜 가장자리에 그려놨대요?"
    시치미를 떼고 우리가 대꾸하면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거추장스럽게 볼때기 중앙에 떡하니 새기리?' 하며 얼버무렸다.
    그런 온실 맡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흥미롭게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허풍처럼 끝났지만, 워드헌트 섬이 사라지기 전까지 할아버지가 그곳을 지켰다는 건 사실이었다. 최근에 찾은 오래된 신문기사가 내가 지금부터 얘기할 할아버지의 무용담에 얽힌 연결고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허풍이 많았어도 그곳에 대한 애정은 진실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다.

 

    2080년대 후반 매니 할아버지는 북극권 끄트머리 무인도에까지 관광 자본이 들어오자, 일자리를 구하러 처음 워드헌트 섬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20대 청년 매니에게는 사라져가는 얼음 세계를 지키는 마지막 이누이트 겸 관광 도우미 겸 경비 임무가 주어졌다.
    급조된 워드헌트 섬 깡촌의 주민은 매니와 같은 관광회사 직원과 이누이트로 위장한 불법 낚시꾼 몇 명, 온난화 관측소 연구원들 그리고 제비갈매기 떼가 전부였다. 다른 곳으로 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했고,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앞바다를 놓고 대기업들은 소유권 분쟁을 벌였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곳을 관광객들이 들어오는 이유는 북극곰이 멸종하기 직전의 처칠(Churchill) 관광 붐과도 닮았다. 영구 동토가 녹아서 무너져가는 워드헌트 섬 역시 몇 년 안에 지도에서 사라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매니의 업무는 매일 아랫동네에서 들어오는 이백 명쯤 되는 관광객과 페리를 타고 부근의 바다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관광객들이 일정에 맞춰 소형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면, 매니는 이들을 한 번에 스무서른 명씩 페리에 태워 북극해로 나간다.
    이 가짜 이누이트 청년은 페리 위에서 관광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관광객은 인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다. 세계일주의 마지막 코스로 이곳을 선택한 80대 노인도 있고, 극지대에서 신혼여행 중인 모험심 강한 신혼부부도 있다. 페리가 바닷길에 설치된 인공 선반얼음 위 '빙하를 건너는 사향소 기념상' 부근을 지나가면, 그는 해설을 시작한다. "둥둥 떠다니는 선반얼음 파편들-가짜지만-을 보세요,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살던 북극 지방의 동물들은 붕빙이 녹자 대부분 멸종해버렸죠. 이 사라져가는 마지막 빙하를 직접 볼 수 있는 여러분은 참 행운아입니다."
    부두로 돌아온 관광객들은 기념품 가게에서 북극 빙하수와 공장에서 만들어진 이누이트 전통 팽모자를 동이 나도록 사간다. 지구온난화의 피해 현장을 채증하듯 철컥철컥 플래시를 터뜨리던 관광객들이 이 눈과 이끼로 뒤덮인 불모지에 싫증이 나기 시작할 때쯤, 매니는 다시 그들을 비행기 정류장으로 안내한다. 일라닐루(잘 가요), 손님들!

 

    일상은 종종 어긋나는 법이다. 전날 돌려보낸 손님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긴급 연락이 왔다. 경험상 실종 사건은 숙소에서 늦잠 자거나 쇼핑에 정신이 팔린 손님이 마지막에 허탈하게 웃으며 나타나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가뜩이나 추운 관광지에서 불상사를 막으려고, 가이드들은 이동할 때 항상 사람들의 명단과 위치 추적 서비스를 확인한다. 어제 분명 매니도 그랬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그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사라진 손님은 태국에서 온 여성이었다. 매니는 자신에게 커피를 나눠주던 빨간 뜨개 모자를 쓴 얌전한 관광객을 기억했다. 매니가 갑판 위 난로 곁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꽁꽁 언 땅처럼 희뿌연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던 손님이었다.
    매니는 그날 페리 위에서 관광객을 쫓아다니는 대신, 경비들과 함께 마을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섬 위의 몇 안 되는 건물들을 샅샅이 뒤졌다. 얼어붙은 땅에 손님들이 두고 간 크고 작은 발자국들도 살펴보았다. 자신의 보물 1호인 하얀색 수륙양용 스노모빌을 몰아 앞바다에도 나가 보았다. 제멋대로 파이고 도드라진 바위절벽을 따라 해안선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듬성듬성 난 얼음과 이끼뿐이었다.
    바다가 밤빛으로 물들 무렵 탐색은 끝났고, 스노모빌을 타고 부두로 돌아가는 중 매니는 동료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매니, 내일부터 섬 관광이 중단될 거야. 경찰이 가고 있다니 협조해주게."

 

    마을은 곧 북적해졌다. 다음 날 새벽부터 헬기와 정찰선이 차례차례 와서는 관광객 대신 경관들을 한 아름 뱉어냈고, 모든 주민들이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게 만들었다.
    안경형 웨어러블 컴퓨터를 끼고 빨간 제복을 입은 경관들은, 도착하자마자 집짓기 습성이 있는 땅거미처럼 텐트로 된 임시 주둔소를 뚝딱 지어냈다.
    숙소 문 앞에서 사람들과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매니에게 경관 두 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리스 피오르드의 RCMP(캐나다 연방경찰) 본청에서 왔습니다. 잠깐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실종객을 찾지 못한 책임을 물을까봐 긴장했지만, 매니는 문을 열어 주었다.
    두 경관은 함께 매니의 집 내부를 둘러본 뒤 안경형 컴퓨터에 무언가 입력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실종된 여성의 옷차림이 어땠는지, 뭔가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지는 않았는지, 주변에서 수상한 물체를 발견하지는 않았는지. 매니는 기억을 끄집어내 자세히 답변해 주다 고개를 숙였다. "빨리 찾았으면 좋겠네요. 제 실수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하며 경관 하나가 안경형 컴퓨터를 톡 하고 눌렀다.
    매니와 경관 사이 공간에 홀로그램 그래픽이 펼쳐졌다. 실종된 여자 관광객의 표정 없는 얼굴이 선명한 해상도로 허공에 그려졌다. 얼굴 아래에는 긴 문장의 인적사항이 둥둥 떠다녔다.
    "정지연. 취소되어 삭제 처리된 관광객을 관광회사 측이 실종으로 착오해 신고되었습니다만, 조사하고 보니 인터폴 적색수배자더군요."
    경관은 TV쇼에서 청취자에게 신인 셀러브리티를 소개하는 노련한 사회자처럼 여자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이 수배자는 한국인 여성으로, 국적과 이름을 바꿔가며 활동합니다. 그가 급진 환경주의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삼선 사의 달 로켓 발사기지 폭파 미수 사건을 시작으로, 5년 전 보르네오 섬의 삼선 사 벌목공장에 화재를 일으켰으며, 그로부터 3년 뒤엔 삼선의 달 광고판 부품공장을 폭탄으로 박살낸 장본인이지요…….
    매니가 경관의 말에 깜짝 놀라 입을 벌릴 때, 홀로그램이 꺼졌다. 경관은 정중하게 말을 끝맺었다.
    "환경주의자 테러리스트가 북극권에서 노릴 만한 곳은 그들이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 주장하는, 경제수역 경계 부근에 있는 세계연합의 원유 및 천연가스 시추기지와 개발기지입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군경의 테러 진압작전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들은 경관들이 수선스럽게 돌아다니며 쌓은 발자국과 바퀴 자국으로 지워져버렸다.
    북극해 주변의 지형을 꿰고 있는 매니는 테러리스트 수색 작업을 돕게 되어서, 그날부터 경관들과 스노모빌을 타고 해안으로 정찰을 나갔다. 바다에서 돌아올 때마다 부두에는 사람들이 불어나 있었다. 헬기가 날아와서는 사람들을 뱉고, 바다 건너 온 정찰선이 또 뱉고 하는 모양이었다. 개중엔 경찰과 군인 이외에, 미쉐린 타이어의 오래된 마스코트처럼 옷을 두툼하게 껴입은 평범한 관광객 같은 이들도 있었다. 매니는 그들 중 추위로 덜덜거리던 한 명에게 온열 점퍼를 빌려주고 친해졌다. 그는 어느 인터넷 신문의 기자였다. 기자는 북극해를 배경으로 수선스레 움직이는 대원들의 사진을 찍고, 관광객이 끊기자 할 일 없이 집에 틀어박힌 주민들의 맥 빠진 모습도 3D 카메라에 담았다. 매니는 그에게 인터뷰도 해주었다.
    "글쎄요. 솔직히 테러의 공포는 잘 모르겠고요. 저한테는 손님이기도 해서 일단 그분이 이 추운 곳에서 살아나 있는 건지 찾아내어 안전하게 돌려보내고 싶네요."
    저녁 정찰 때 매니는 바다를 취재하겠다는 기자를 스노모빌 뒷좌석에 태우고 피요르드 협곡을 돌았다. 구불구불한 바위절벽 위에는 상현달이 솟았다. 하늘을 쳐다보던 매니가 인상 쓰며 달 가장자리에 새겨진 광고판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기자가 옆에서 한 마디 던졌다.
    "역시 북극 경치에 청량음료 광고판은 안 어울리긴 하죠."
    "그러네요." 매니가 맞장구쳤다. 기자가 덧붙였다.
    "왜 그 여자가 테러리스트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저 달 광고판 때문이라죠."
    기자의 말에 따르면, 정지연의 아버지는 삼선 사의 건설노동자였다. 2060년대에 삼선 사는 일찌감치 세계연합의 달 민영화 사업에 뛰어들어 달 표면의 남동쪽 3시부터 7시 방향 사이의 가장자리 구역인, 네아르코스(Nearch)에서 하그리브즈(Hargreaves) 크레이터 부근에 걸친 구간의 부동산과 개발권을 챙겼다. 그리고 다른 대기업들이 달의 광물자원을 지구로 옮기는 기술에 고심할 동안, 삼선 사는 대공사 끝에 달의 오른쪽 아랫면 가장자리를 '전광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월면 광고판은 작지만 달빛보다 강하게 빛나거나 혹은 태양빛에 반사되지 않고 어둡게 보이는 것도 가능했다. 심지어 그믐달일 때도 광고판만은 지구에서 보일 정도로 빛을 낼 수 있었다. 광고주들은 앞다투어 달 광고판에 자기네 제품을 띄우려고 러브콜을 해댔다.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사상 최고가의 광고판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 광고판 건설에 참여한 사람이 정씨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달에서 공사 중일 때 정씨는 어린애였고, 정씨는 공사가 빨리 끝나 아버지가 지구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준 천체망원경을 통해 렌즈 속의 개미만한 월면 건설 현장을 몰래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중 공사 현장에 대형 사고가 나서, 아버지는 우주공간으로 튕겨 나가 시체도 건지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제대로 된 우주법이 없던 시기라 보상조차 온전히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정씨는 삼선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고, 테러리스트까지 된 것이라 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범한 여성 관광객이 혼자서 정말 그런 커다란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부터 저는 잘 모르겠네요."
    어리숙하게 답하는 매니에게, 기자가 또 귀띔했다.
    "사실 시추 기지를 철통봉쇄 중인 군경을 누가 혼자서 박살내겠습니까? 게다가 그 테러리스트는 시설만 폭파할 뿐 살인범은 아닙니다. 일을 키우려고 과다 보도하는 거죠. 목적은 각 기업군(軍)이 출동하는 데 있어요. 테러 위험으로부터 자기네 시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기업에서 몰려와 은근슬쩍 또 북극권 경제수역 주장과 자원 분배 조약을 개정하려고 벌이는 시나리오가 된다, 이 말입니다. 먼저 세계연합에서 북극 개발을 중재하게 된 게 불만인 구블(Gooble) 사의 해군이 테러를 막는다는 핑계를 대고 군사 분계선을 넘었어요. 맥디날드(Mcdinald)와 아마돈(Amadon) 본사에서도 벌써 테러 척결을 선포했으니 군대를 보내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는 휴대컴퓨터로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별 볼 일 없던 그곳 누나부트(Nunavut) 지역 기사란이 속보로 꽉 채워진 보기 드문 광경을 보았다. 서로 북극 영해를 넘본다느니 불공평한 원유기지 자원 분배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느니 하는, 대기업들의 비난이 실시간으로 긴급 보도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기사는 이미 유행이 지났는지 새로운 헤드라인들에 가려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반대로, 일 주일 뒤엔 수색 작업이 거의 완료되는 분위기였다. 테러리스트 실종객은 발견되지도 않은 채 싱겁게 끝났고, 듣기로는 테러작전이 변경되어 지구대가 기업군과 함께 영해 경계의 인공섬으로 주둔지를 옮긴다고 했다. 경관들은 섬 안의 임시 주둔소를 해체하고 대부분 떠났다.
    관광 비행기 운항이 재개되기까지는 또 며칠 남아 있어서, 당분간 폐점한 생선 가게의 냉동고처럼 텅텅 빌 게 뻔했다. 매니는 한가로이 스노모빌이나 몰며 여가를 때우자고 생각했다.

 

    북쪽 바다로 나간 건 제비갈매기 때문이었다.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나 탐하던 놈들이, 허락도 없이 매니가 들고 있던 생선포를 채 갔다. 매니는 북쪽으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 떼에게 질세라 운전대의 레버를 눌러 쫓아갔다.
    그러다 빙하 보호 경계선까지 200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에 도착했다. 얼음을 보러 가끔 배를 타고 오는 곳이었다. 여기부터는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진귀한 잔 얼음들이 녹지 않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매니는 휴대컴퓨터를 꺼내 얼음 조각을 사진으로 찍었다. 새 떼는 이미 따라잡지 못할 만큼 먼 하늘로 날아가버려서 관심 없었다. 그렇게 근방을 돌다가, 그는 백 미터쯤 앞에 회색 스노모빌 하나가 멈춰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측소 사람들? 아니면 새벽에 나간 옆집 어부 아저씨인가?'
    북극곰도 바다표범도 없는 적적한 북극해에서 오고 가는 사람과 마주치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었다. 교신해보려고 내비게이터를 힐끗했지만, 회색 스노모빌의 GPS기능이 꺼졌는지 잡히지 않았다. 연료가 떨어져 조난이라도 되었나 싶어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회색 스노모빌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반가움에 매니는 스노모빌을 그 곁에 세우고 일어나서 인사했다. "안녕하세……."
    회색 스노모빌 좌석에 앉아 있던 이가 벌떡 일어서서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마!"
    화들짝 놀란 매니가 재빨리 두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얼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총 겨눈 이가 말했다.
    "위성전화기와 컴퓨터를 이쪽으로 던져."
    북극에 웬 도둑인가 싶어 매니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겁을 먹고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컴퓨터를 꺼내 던졌다. 그러고선 총 든 이를 살펴보았다. 왜소한 체구에 목소리가 날카롭고 높은 것으로 보아 여자였다.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총총한 두 검은 눈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페리 위에서 만났던 자신의 실종객인, 테러리스트였다.
    매니가 반가움 반 지푸라기 잡는 심정 반으로 말을 걸었다.
    "저, 기억하실는지는 모르겠지만 페리에 탔던 손님이죠? 도우미 매니입니다. 길을 잃으신 모양인데……."
    여자는 매니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방을 매니의 스노모빌로 던졌다. 다음엔 총구를 매니에게 고정한 채 자신도 하얀 스노모빌 뒷좌석으로 뛰어 건너갔다. 그리고선 말했다.
    "북으로 가줘."
    "네?" 매니가 질겁했다. 추위가 몰아닥치는 북쪽 빙하 구역을 스노모빌로 무작정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밤이 될 때까지만. 부탁이다."
    여자는 협박하고 있었지만, 두 검은 눈은 매니에게 오히려 애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매니는 여자가 자신보다 더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상태가 나빴다. 마스크 위로 살짝 보이는 새빨간 두 볼에 얼음 결정이 붙어 있었고, 어깨를 작게 떨고 있는 것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했다. 근 며칠 동안 행방불명이었지만 아마 오랫동안 익숙하지 않은 북극의 추위 속에서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쓰러운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던 매니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겠다는 듯, 여자는 총구를 돌려 하늘로 탕 쏘았다. 총소리가 물 위에 잔물결을 일으킬 정도로 메아리쳤다. 매니가 움찔했다.
    다시 여자가 총부리를 매니에게 돌렸다.
    "내가 범죄자라는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테러를 하러 온 건 아니야."
    매니는 페리 위에서 여자가 커피를 나눠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기업들의 북극 자리싸움에 희생양이 된 듯한 이 여자는 위험하기보다는 위태롭고 딱해 보였다. 게다가 후들거리는 다리와 달리 여자의 눈은 흔들림이 없어서, 그는 여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북쪽에 가려는 거죠?" 매니의 물음에 여자가 답했다.
    "달을 보러."
    "달은 섬에서도 보인다고요." 설득해도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안절부절못하다가, 하는 수 없이 매니는 '밤까지만이에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는 좌석에 앉아 스노모빌을 발진시켰다. 내비게이션이 북쪽으로 깜박였다. 그러자 여자도 뒷좌석에 앉았다. 총부리가 등 뒤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매니는 여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곧 매니는 여자의 말을 고분고분 들은 것을 후회했다. 왜 하필 북쪽으로 가서 달을 보자는 걸까, 원망하며 그는 침대만한 크기의 바다 위 얼음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찍고 싶은 욕심이 들 만큼 경이로운 풍경이었지만, 빙하 보호 경계 가까이 갈수록 얼음은 무서울 정도로 커졌다. 얼음 조각들은 섬 근처에 관광용으로 띄운 인공 선반얼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훌륭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물살에 이리저리 움직여 스노모빌의 앞을 방해하고 있었다. 기체가 얼음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여자는 깜짝 놀라 총을 제대로 겨누려고 휘청거리며 애썼다.
    이쯤에서 돌아가죠, 하고 매니가 십 수 번 말했음에도 여자는 총을 놓지 않았다.
    착잡해진 매니는 스노모빌의 음악재생기를 켰다. 음악이라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댄스 음악이 어울리지 않게 얼음 바다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러다 매니는, 여자가 총부리로 자신의 등을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스페이스 소음' 장르 안 좋아하시나봐요." 하며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음악을 껐다.
    매니가 머뭇하다 또 뒷좌석으로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프세요?" 그리곤 운전대를 잡은 손 하나를 풀고 뒤를 가리켰다. "가방 안에 먹을 거 있어요."
    잠시 뒤 등 뒤에서 부스럭부스럭 가방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은근히 매니는 안심이 되었다. 순간, 집채만한 선반얼음이 아슬아슬하게 스노모빌 옆으로 흘러갔다. 아까 본 얼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심장이 철렁해져서 그는, 일부러 큰소리로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온난화 없던 옛날이었으면 우린 여기서 벌써 얼어 죽었어요. 이산화탄소 뿜고 오존층 파괴한 인류한테 감사해야지. 달을 보려면 뉴욕이나 토론토 같은 대도시로 보러 가라고요. 왜 위험하게 북극 빙하까지 와서 고생인 거죠?“
    "달 위의 '다른 것'은 보고 싶지 않아."
    매니는 기자가 해준 여자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달 광고판을 만들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 때문에 여자는 달에 집착하고 있었다. 다만 굳이 북쪽으로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물어보아도 여자는 잘 들리지 않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번 대꾸해주다 입을 닫았다. 실은 말할 기운이 떨어져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여자가 총을 겨누고 위협하고 있다지만, 스노모빌을 몰고 있는 매니에게 여자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이상한 꼴이 되었다.
    내비게이터에 표시된 위도가 조금씩 북으로 올라갈 때마다 매니의 말수도 점점 줄었다. 추위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뒷좌석을 힐끗 쳐다보면, 여지없이 여자가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매니는 한숨을 쉬고 온열 점퍼의 온도를 끝까지 올렸다. 굳은 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었지만 드세지는 한기가 점점 두려워졌다.

 

    얼음 반 바다 반의 낯선 풍경에 익숙해질 때쯤, 너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스노모빌이 매니의 등 뒤에 총구가 아닌 다른 것이 툭 하고 떨어졌다. 흠칫 돌아보니 여자의 머리였다. 여자가 총을 쥐고 몸을 바로 일으켰으나, 다시 힘을 잃고 여자는 털썩 매니의 등 뒤에 기댔다.
    "괜찮아요?" 매니가 놀라 스노모빌을 멈추고 여자의 어깨를 부축했다. 여자는 뒷걸음질하며 총을 겨누었지만, 총을 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계속 가. 난 달을 보고 싶어."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에 매니는 참다못해 화가 났다.
    "이건 죽고 사는 문제라고요. 더 이상 올라가는 건 위험합니다. 돌아가요." 스노모빌 위에서 여자와 매니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여자는 계속 매니의 손을 내치며 총을 놓지 않았다. 여자는 가방을 매니에게 던지면서 매니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갑자기 스노모빌이 파도에 크게 흔들렸고, 둘은 중심을 잃고 휘청대었다. 그때를 틈타 매니는 여자의 손을 쳐 총을 바다로 빠뜨렸다. 여자가 매니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갑시다. 목숨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가 달랬다.
    "달 광고판 따위, 아버지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았는데……!" 쥐어짜듯 내뱉은 여자가 매니를 노려보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매니가 놀라 여자를 부축하고 흔들었다. 여자는 입술을 더 달싹이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추위에 너무 오래 노출된 여자에게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매니는 급하게 스노모빌을 제일 큰 얼음 조각 위에 세웠다. 여자를 좌석 아래 공간에 앉히고 생존킷 속 진공컵을 꺼내 온수를 마시게 했다.
    정신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뿌리치려는 여자를 달래며 매니는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저체온증일 거예요. 빨리 섬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매니 역시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에 몸을 움직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서 제비갈매기 똥 같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따가운 눈발이 매니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았다. 매니는 스노모빌의 전면 유리가 눈 결정으로 하얗게 뒤덮이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기체를 남쪽으로 돌렸다. 여자는 나지막하게 하얀 입김을 뱉고 있었다. 달을 봐야 해, 봐야 해, 하고 되뇌는 듯했다. 매니가 입술을 덜덜 떨며 답했다.
    "돌아가야 해요. 달은 어디에나 떠 있잖아요."

 

    매니는 뒷좌석의 여자에게 벨트를 채워주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내비게이터 화면에 안타깝게도 다른 배가 주위에 있다는 표시는 뜨지 않았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매니는 어서 근처에 배들이 지나가길, 경비대가 오길, 하고 속으로 빌었다. 남쪽으로 항로를 설정해서 최고 속도로 달리려고 했건만, 파도는 이미 얼음을 뒤집을 정도로 세차게 치고 있었다.
    매니의 스노모빌이 조심조심 얼음 조각들을 제쳤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얼음 조각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야가 온통 하얘서 바다와 얼음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장갑 속 손마디가 굳었는지 세게 힘을 줄 수 없었다. 매니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여자를 확인했다. 요동치는 스노모빌을 따라 여자의 몸도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지 마세요!" 매니가 얼어가는 입술을 힘들게 움직여 외쳤다.
    그때 스노모빌 바닥이 한 번 덜컹거리며 높게 떠올랐고, 매니가 아차 싶었을 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가 뒤에 있던 커다란 얼음에 부딪혔다.
    스노모빌은 충격으로 얼음 위에서 한 바퀴 구르고는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심하게 내팽개치지는 않았는지 매니와 여자가 기체 밖으로 튕겨 나오지는 않았다.
    매니는 등 언저리가 쓰라려 오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스노모빌에서 내렸다. 매니가 서 있는 곳은 들판처럼 넓은 얼음 조각이었다. 크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단단해 보였다. 매니는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뒷좌석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았다. 눈이 감겨 있었다. 당황한 매니는 빨리 여자를 들어 스노모빌 옆에 기대어 앉혔다.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아직 여자는 마스크 아래에서 하얀 숨을 내뱉고 있었다. 매니는 안도했다.
    매니는 스노모빌 전원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버튼을 누르자 시동음은 들렸지만,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번 반복해보던 그는 계기판을 쾅 하고 쳤다.
    사방이 흰색이었다. 눈덩이들이 무자비하게 날아와 매니를 덮쳤다. 매니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 온통 흰색뿐이라 자신이 북극에 있는 건지, 지구 위에 있는 게 맞기는 한 건지도 잘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얼음 위에도, 스노모빌에도, 매니의 모자와 온열 점퍼 위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매니는 날아드는 눈보라를 피해 여자 옆에 기대어 쭈그렸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추위에 몸을 둥글게 움츠리고 여자를 얼싸안았다. 피곤함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얼음 바닥의 진동이 매니를 깨웠다. 매니는 눈동자를 굴리고 힘주어 간신히 얼어버린 눈꺼풀을 걷어냈다. 하얬던 시야가 새까맸다. 그는 조금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이 눈이 그친 뒤 먹물이 새까맣게 풀린 밤하늘 아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빙하의 밤이었다.
    매니는 품에 안겨 움츠린 이의 모자에 쌓인 눈을 털면서 얼굴을 살폈다. 여자는 아직 눈을 감았지만 몸을 조그맣게 들썩이면서 가느다란 숨소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매니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망가진 스노모빌을 보았다. 둘과 스노모빌을 태운 빙하는 아이가 타고 간 그네처럼 양 옆으로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파도도 마법처럼 멈춰 있었다.
    매니는 이 얼음이 계속 남으로 움직여 섬까지 도착했으면, 하고 헛된 망상을 해 보았다. 허탈함으로 초점을 잃은 매니의 두 눈이 다시 까만 하늘을 향했다.
    그때 매니의 눈에 수평선 위의 빛이 들어왔다. 보름달이었다. 처음에 그는 보름달이 유난히 환한 것 같기도, 조금 생소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곧 왜인지를 알아채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려고 했던 거였나.'
    매니는 몸을 조금 틀어 여자를 조심스럽게 무릎에 뉘였다. 장갑 낀 손을 비벼 열을 낸 다음 여자의 눈에 맺힌 얼음 결정을 손가락으로 훑어서 떼어냈다. 여자는 있는 힘을 모두 쏟은 듯 눈을 깜박이다 완전히 떴다. 매니는 여자가 잘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의 먼 저편에서 밝은 별이 몇 개 반짝이더니, 곧 뱃고동 같은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매니의 얼굴에 얕게 미소가 떠올랐지만 헬기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더 오랫동안 시야에 담고 싶은 것이 하늘에 있었다.
    얼음 위의 두 사람은 주위 풍경에 섞여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상아빛 보름달을 감상했다. 그 얼굴에 항상 새겨져 있던 문신 같은 광고판은 그날 보이지 않았다.
    매니와 여자는, 수평선에 수줍게 올라온 맨얼굴의 달을 보았다.

 

    "에이, 거짓말!"
    이야기가 끝나면 우린 한목소리로 외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한 번도 광고판이 꺼진 달을 본 적이 없다. 밤하늘의 달은 언제나 얼굴 가장자리에 새긴 문신을 자랑스럽게 빛내고 있었다. 얼굴을 새까만 손바닥으로 가리는 초승달이 뜨는 날에도 하현달이 뜨는 날에도, 광고판은 혼자 날카롭게 빛나 꺼질 줄을 모른다.
    그러면 매니 할아버지는 우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글쎄, 거짓말일 것 같니?' 하고 허허 웃는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콧수염이 콧바람에 팔랑거리는 것을 보면서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하며 더 이상 이야기의 뒷부분에 대해 깐질깐질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럴 듯이 시작해 허풍처럼 끝난 할아버지의 무용담이었지만, 그건 재미있다기보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그즈음 갑자기 사라져서 날 슬프게 만든 우리집 개가 결국 광견병에 걸린 채 동네 언덕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슬픈 이야기의 뒷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대개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우리도 알고 있을 나이였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의 표정 역시 유쾌하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할아버지의 달의 맨얼굴 이야기를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은, 오래된 신문기사를 읽고서였다. 할아버지가 워드헌트 섬에 살았을 시절의 기사였고, 날씨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사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해본다.
    「우리가 매일 보는 달은 공전 시간과 자전 시간이 같아서, 언제나 한쪽 얼굴만을 지구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얼굴을 한 달을 봐왔다. 그런데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지구에서 달의 50%에 해당하는 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달의 궤도는 타원이므로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공전 속도는 일정하지 않아 어떤 날은 달의 왼쪽 끝이나 오른쪽 끝 뒷면이 살짝 더 드러나기도 한다. 또한 달의 자전축은 황도에서 약간 기울어져 있어 또 달의 아래쪽 끝이나 위쪽 끝이 조금 더 보일 수 있다. 이렇게 달은 칭동[libration]을 한다.
    요즘은 지구의 환경이 급속도로 변한 탓에, 몇 천 년 동안 다시는 보지 못할 특이한 기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리 말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을 지구 종말로 해석하여 절망하거나 이상한 종교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하자. 달의 칭동이 최대치에 달하는 날은 내일 밤인데,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던 평소보다 심한 상하 -10도 이상, 좌우 10도 이상의 달 칭동 현상을 겪게 되는, 다시는 없을 하룻밤이다. 내일 밤하늘의 보름달을 꼭 주목하라.」
    기사를 보자마자 나는 20년 만에, 빙하를 넘고 맨얼굴의 달과 만난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주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옛날이야기가 다 그렇듯, 할아버지의 달 이야기에도 과장과 허풍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할아버지가 광고판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보름달을 보았다면, 그건 신문기사대로 정말 최대 칭동이 일어난 그날일 거라 생각한다. 여성 테러리스트는 아마 원유기지를 테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직 파괴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높은 위도에서 달을 감상하려고 북극점에서 50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지구 최북단의 워드헌트 섬에 온 것일 테다. 지구의 꼭대기인 북극은 달의 아랫부분보다 정수리 부분을 더 볼 수 있는 위치이다. 그래서 여자는, 조금이라도 달 광고판을 보지 않기 위해 보름달의 최대 칭동일에 고위도로 올라가려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달은 해가 지는 순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멋진 존재이고, 가장 비싼 전광판이다. 어릴 적부터 매일 달 광고판을 보고 자란 나는 꽉 막힌 노인들과는 다르게 달 광고판이 그럭저럭 도시 경치와 어울린다고 느낀다. 특히 대형 스크린과 홀로그램 전광판으로 번쩍번쩍한 뉴욕의 야경과는 정말 멋들어지게 궁합이 맞는다. 많은 돈을 퍼부어 건설사들에게 로비를 한 덕택인지, 키재기 싸움을 하는 뉴욕의 마천루들도 삼선 사의 달 광고판을 가리지는 못한다. 달이 제풀에 얼굴을 어둠 속으로 감추는 날은 있어도, 그 속에서조차 달 표면의 광고판이 꺼지는 날은 없다.
    광고주들이 끝없이 불 붙일 돈을 들이부어서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매니 할아버지가 본 것처럼, 내가 만약 광고판이 꺼진 보름달의 깨끗한 맨얼굴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말이다. 한 번쯤은 보고 싶다. 언젠가 북극의 얼음이 모두 녹기 전에 말이다.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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