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_시_운] 블랙박스

 

[4월_테마시_운]

 

 

블랙박스

 

 

최호빈

 

 

 

 

1

 

비질하고 보니 빨간 돌 부스러기들이 꽤 많다
누가 가져온 걸까
어디서 묻어온 걸까
보이지 않던 부스러기가 자라고 자라서 네모반듯한 돌이 되고
돌은 계속 쌓여 이리저리 골목을 만들어 내는데

 

담배연기 찌든 방에 앉아 우리는
각자 형편에 맞는 불행에 대해 지껄이며
언제쯤 골목을 벗어날지 생각한다

 

헐값의 얼굴들로 범벅이 된 창 하나
부스러기에 뚫을 때까지

 

2

 

비를 맞고 서 있다
네 개의 바퀴가 여행가방에 달려 있다

 

제자리를 걷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을
신호등처럼 분명하게
밤새
구별할 수 있을까

 

배수구로 흘러들어가는 물살에 거품이 일어난다

 

온몸 마디마다 까만 연골이 끼워져 있는 길을
횡단보도라 부를 수 있을까

 

길을 건너다
녹아버리진 않을까

 

소금처럼

 

3

 

적조, 골목을 어루만지고 남겨둔
죽은 물고기들의 비행운

 

 

● 시작 노트

 
    야외 훈련 중 나는 운전병인 동기 대신 5톤 트럭의 시동을 걸기 위해 작은 버튼을 눌러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오르막길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은 시동을 걸자마자 후진을 시작했다. 운전면허가 없어서 브레이크 페달과 가속 페달을 구분 못 했던 나는, 나의 발은 이미 불운의 페달을 힘껏 밟고 있었다. 후진에 가속이 붙었을 때 하필 대대장과 간부들이 트럭 뒤쪽을 지나고 있었다. 운전병인 동기와 나는 훈련을 중단하고 바로 자대에 복귀하여 내무반에서 TV를 보며 영창에 가져갈 짐을 꾸렸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가 두 대의 항공기 충돌로 무너진 날이었다. 우리가 완전히 무너진 건, 영창에 빈자리가 없으니 일주일을 기다리라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이었다. 이미 마음이 영창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실제 징계는 4박 5일이 아니라 11박 12일이었다.
    우리의 징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야외 훈련을 마친 사람들이 복귀하여 내무반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다음 날 징계 수위가 영창에서 완전군장 구보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하루 만에 우리는 비운의 버튼을 잘못 누른 주인공에서 영창이 꽉 차서 징계가 철회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연병장을 돌고 돌면서도 우리는 힘들다기보다는 내심 즐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우리는 타 부대 병사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기 부대의 한 이등병이 자신이 받은 가혹행위를 수첩에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국방부에 직접 투서했고 이로 인해 몇몇 간부를 포함한 백여 명에 이르는 중대원이 영창에 들어갔다고 했다. 씁쓸했다. 그 뒤로 동기와 나는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의 첫 울음을, 인간의 영역 너머에서 넘어온 정체불명의 힘을 감지한 최초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뒤를 돌아보면 출생의 순간까지 뻗어있는 길고 어두운 길을 볼 수 있다. 길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이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그림자를 닮았다. 심지어 그림자가 빛에 종속된 것처럼 길 역시 대자연의 움직임에 종속되어있다. 그러나 길은 그림자가 아니다. 길은 분명 우리에게서 생겨나고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길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구멍 난 곳을 메꾸어 줄 수도, 더러워진 곳을 청소해 줄 수도, 아름답게 가꿔줄 수도 없다. 길은 냉정하다. 결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알면 다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일을 앞두고 운에 기대거나 어떤 사건을 운에 한정하여 해석하는지도 모른다. 길도 옷을 입는다. 옷장에는 필연적 우연의 옷과 우연적 필연의 옷이 모두 걸려 있다. 아침마다 사람들은 옷장 앞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한다.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면 현관문 앞에서부터 길이 펼쳐져 있다. 인간의 영역 너머에서 넘어온 힘이 녹아있는, 길을 걸으며 길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작가소개 / 최호빈(시인)

1979년 서울 출생.
2012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글틴 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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