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_단편소설_운] 영수증

 

[단편소설_4월_운]

 

 

영수증

 

 

 

우다영

 

 

삽화-영수증

 

 

    현철 씨가 딸의 지갑을 열어본 것은 딸이 죽기 나흘 전의 일이었다. 딸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은 후 면접용 구두를 사기 위해 다니던 대학교 인근의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엘리베이터 안에는 딸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있었지만 느닷없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달려든 괴한에게 pH 2.1의 염산을 얼굴에 맞은 사람은 딸뿐이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체포된 삼십대 남성의 자백을 토대로 그 사건을 불특정 여성에게 반감을 품은 묻지마범죄로 결론지었고, 딸은 병원으로 이송된 지 아홉 시간 만에 깨진 손거울로 손목을 여러 차례 그은 후 봉합수술을 받았지만 출혈량이 많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현철 씨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연주의 연락을 받았다. 딸의 병실 앞에서 만난 연주는 탈수증세가 있어보였지만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대. 아내는 편집증이 심해서 잠든 사이에 휴대폰을 뒤지거나 외출 후에 벗어놓은 속옷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대.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해져서 자해를 하기도 했나봐. 그런데 그 여자가 아주 예민해졌을 때 젖을 먹던 아이가 그만 젖꼭지를 세게 깨문 거야. 아주, 운이 나쁘게도 말이야.”
    연주는 물어뜯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치 퀴즈를 내듯 물었다.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주의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이미 현철 씨는 병원으로 오는 길에 통화한 담당형사로부터 범인의 진술내용을 전해들은 후였다. 그 여자는 아이의 얼굴에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부었고, 어린 아이의 연한 피부는 온수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그 여자의 남편은 여자에 대한 증오심에 휩싸여 백화점 한복판에서 염산을 뿌렸고, 딸은 그 염산을 얼굴에 맞았다. 그러나 현철 씨는 남자가 무차별 염산테러를 벌인 것보다 딸이 동맥이 끊어질 때까지 자신의 손목을 위아래로 긁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딸이 그런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현철 씨는 연주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런 현철 씨의 손등을 보며 연주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는 괜찮았을까?”
    이혼 이후 처음 듣는 ‘우리 아이’라는 말에 현철 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색하지 않으며 연주의 손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철 씨에게는 다른 여자가 없었고 몇 년 전 박봉의 물리학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작은 제약회사에 들어간 덕분에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다. 그 돈으로 보험이 되지 않는 딸의 치료비를 충당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연주와 딸이 비참해지지 않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딸의 얼굴은 생각보다 손쉽게 고쳐질 수도 있고 다른 여자들처럼 구두를 신고 면접을 보고 평범한 직장에 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현철 씨는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주가 골똘히 얼굴을 기울이며 손목처럼 하얗고 반들반들한 병원 바닥을 향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속삭이자, 그 뜨거운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오기 위해 연주가 집에 간 사이 현철 씨는 딸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 맞은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연주는 경찰이 추가 증거물로 요청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남겨두고 갔는데 거기에는 염산으로 엉망이 된 옷가지와 딸의 지갑이 들어 있었다. 마모가 조금 있는 다홍색 중지갑은 현철 씨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 저녁을 먹을 때면 딸은 식탁 위에 그 지갑을 올려놓곤 했다. 현철 씨는 딸이 화장실에 갔을 때 가끔 지갑 안에 용돈을 넣어두기도 했다. 딸이 용돈 이야기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현철 씨는 별다른 의도 없이 딸의 지갑을 열어보았다. 의문이나 직감 같은 단어는 조금도 떠올리지 못한 순진한 얼굴이었다. 지갑 안에는 수납 칸을 채우고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카드와 얼마간의 현금, 그리고 아무렇게나 구겨진 영수증이 가득했다. 주로 식사 영수증이었는데 번화가의 스시집이나 일본 가정식 식당, 호텔 뷔페나 근교의 전골요리집에서 대학가 삼겹살집까지 다양했다. 점심때도 있고 그보다 이른 시간이거나 늦은 저녁시간일 때도 있었지만 같은 곳에서 두 번 식사한 영수증은 없었다. 영수증은 모두 2인분 식사였다. 현철 씨는 딸에게 남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펼쳐본 영수증을 꼼꼼하게 접어 다시 딸의 지갑 안에 넣고 차갑게 식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대수롭지 않게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현철 씨가 딸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연주와 이혼했고 그전에도 종종 별거했기 때문에 딸과의 사이는 썩 각별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가졌던 저녁식사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딱딱함이나 적의와 서글픔이 교차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습관처럼 행해지는, 현철 씨에게도 딸에게도 별다를 것 없는 저녁식사였다. 식탁 위에 저녁이 차려지면 딸이 주로 말하고 현철 씨는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구나, 재미있구나, 대꾸하곤 했다.
    정말로 딸의 이야기는 재밌었다. 웃기거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무심히 귀를 기울이며 듣게 되고 어느 날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나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앉았을 때 불현듯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딸이 아직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엔 같은 학년이지만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한 여자애 이야기를 했다.
    그 애는 매일 나랑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버스를 타요. 등교를 할 때는 내가 먼저 타고 하교를 할 때는 그 애가 먼저 내려요. 그러니까 나는 그 애와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그 애가 어디쯤 살고 몇 시쯤 학교를 가고 또 몇 시쯤 집에 가는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아주 무심결에요.
    그렇게 말하며 딸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현철 씨는 말없이 물병을 들어 딸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물이 반쯤 남아 있던 딸의 컵에서 쪼르르 맑은소리가 났다.
    그런데 지난주예요. 정말 추웠던 날 있잖아요? 수년 만의 폭설이라고 떠들썩했던 큰 눈이 내리기 바로 전날 말이에요. 그날은 눈구름 때문에 아침인데도 한밤처럼 깜깜해서 늦잠을 잤어요. 거의 수업이 시작했을 시간에 버스를 탔는데 그 애도 그 버스에 타는 거예요. 나는 그 애가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곤 나랑 그 애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에요. 그 애는 얇은 감색 재킷만 입고 있었고 장갑이나 목도리는 하지 않았어요. 낮게 묶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가 아주 빨갰어요.
    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철 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어진 목소리는 느리고 부드러웠다.
    그날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애를 또 보았어요. 그 애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애들 곁을 지나는 순간 대화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짧은 순간에요. 그 애 친구가 춥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 애는 목도리를 버스에 풀러놓고 그냥 왔다고 말했어요. 나는 그때 잠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는데 그 애가 멀어지면서 다시 한 번 말했어요. 오늘 처음 매는 보라색 목도리였는데…….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 애의 귀는 여전히 아주 빨갰어요. 그날 온종일 그 애의 보라색 목도리에 대해 생각했어요.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이 필요했을까. 여러 가지 사정을 가정하고 상상해봤지만 떠오르는 답은 하나뿐이었어요. 그 애는 그냥 거짓말을 한 거예요.
    딸은 입술을 오므리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철 씨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무언가 어울릴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딸의 컵에 물을 좀 더 따라주었다.
    딸의 이야기는 대개 친구에 관한 이야기거나 친구에게 들은 다른 친구의 이야기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딸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현철 씨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이 있으리라 믿고 곰곰이 딸과의 저녁시간들을 떠올려봤지만 기억 속 어디에도 딸의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 현철 씨는 지난 십여 년간 딸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딸이 매 저녁식사 때마다 의도적으로 선별하고 신중하게 계획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이야기를 듣는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몹시 두려워졌다.
    딸이 대학에 가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딸은 이따금 자신이 쓴 소설을 깨끗한 용지에 프린트해 음식이 담긴 접시 옆으로 건네주곤 했는데 현철 씨는 한 번도 딸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딸의 글은 입담과 달리 한 문단을 읽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앞서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렵게 쓴 글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끝까지 읽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문장은 있었다. 어린 연인이 작고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 흘러나오던 노랫말이었다.
    나는 강간으로 태어났어요. 아름답고 평범해요.
    수상한 촛불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연인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죽은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이따금 따뜻한 물수건이나 새 포크를 주문할 뿐 좀처럼 음식을 먹지 못했다. 사실 현철 씨는 이러한 소설의 정황을 확신할 수 없었는데, 차갑고 반듯하게 인쇄된 그 노랫말의 철자들 사이를 오랜 시간 맴돌며 읽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때 현철 씨는 웬일인지 침울하고 불쾌해져서 더 이상 그것을 읽지 못했다. 다음 저녁식사에서 딸이 그 소설에 대해 물었을 때, 주인공이 너랑 많이 닮은 것 같더구나, 둘러댔다.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는 딸은 아름답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 혈색이나 눈짓, 입가 근육의 움직임이 가려진 딸의 얼굴은 차갑고 완고해 보여 병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손목의 봉합자국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딸은 팔십 시간가량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긍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던 의사도 점차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들이 여덟 시간마다 고름이 들러붙은 딸의 붕대를 벗기고 일그러진 눈두덩과 광대와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피부에 약을 발라주었는데, 그때마다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연주와 달리 현철 씨는 괜찮았다. 붕대 아래 가려졌던 딸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면회가 허락되지 않던 시간 굳게 닫힌 병실 문 앞에서 다친 딸의 모습을 상상하고 오한을 느낄 때보다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현철 씨는 화들짝 놀라 딸의 병실을 뛰쳐나왔다. 길고 좁은 병원의 복도를 걸으며 그에게 찾아온 이름 없는 감정에 대해, 그것이 주는 죄책감에 대해 생각했다. 딸은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엔 누구의 책임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고는 일어났고, 방향을 알 수 없는 죄의 작용을 현철 씨는 속수무책으로 감당할 뿐이었다. 잠을 자지 않으려는 연주의 등을 밀어 집으로 보내고 병원 편의점에 기대서서 인스턴트 야채죽으로 늦은 점심을 먹을 때에야 현철 씨는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현철 씨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작은 체구의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자신을 딸의 대학 동기라고 소개한 여자는 유난히 검은 눈동자와 입술을 붉게 강조한 화장 때문에 여백 없는 유화처럼 진한 인상을 풍겼다. 좋은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고 신고 있는 에나멜 플랫과 손에 들고 있는 작은 토트백의 가죽은 새것처럼 반질반질했다. 이런 여자가 딸의 침대 위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냈다니 현철 씨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병실에서 나와 대기실 의자에 앉은 여자는 붉어진 눈으로 현철 씨를 못미덥게 쳐다봤다. 아빠가 안 계시다고 들어서요. 여자는 변명하듯 말하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현철 씨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판기 커피를 건넸다. 여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딸과 친하게 지냈느냐는 현철 씨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운 상태이긴 하지만요.”
    뜻밖에 말에 현철 씨는 깜짝 놀랐다. 딸이 친구와 싸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딸의 친구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현철 씨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여자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여자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이유를 몰라요. 내비게이션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내비게이션이라고? 현철 씨가 되묻자 여자는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전석 옆에 달아놓는 내비게이션이요. 수업이 끝나면 제 차로 함께 이동할 때가 많았는데, 어느 날 제가 커피를 사서 차로 돌아왔을 때 내비게이션을 보고 있었어요. 최근 검색한 지명이나 지나온 경로 따위를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어요. 그 후로 저한테 화가 나 있었죠.”
    여자는 기억을 더듬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살짝 신경질적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맞아요. 저한테 화가 나 있었어요.”
    현철 씨는 불현듯 딸이 저녁을 먹으며 들려주었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졸업을 하고 은행에 들어간 선배가 있어요. 은행을 다니면서 선배는 고약한 취미가 하나 생겼는데, 아는 사람들의 통장내역을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 핸드폰 대금이나 후불 교통카드 요금은 얼마인지 다 살펴보고 그 사람을 만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뗀대요. 심지어 선배의 여자친구가 잔다고 했던 시간에 술집이나 편의점에서 결제한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어느 날 여자친구가 산부인과에서 카드를 쓴 적이 있는데 얼마 안 되어 통장에서 현금 사십만 원을 인출했대요. 그 후로 반년 넘게 만나고 있지만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 적은 없대요.
    어쩌면 딸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고, 현철 씨는 생각했다.
    여자는 굳게 닫힌 딸의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옆얼굴과 매끄러운 병원 바닥 위로 초겨울의 차가운 햇살이 길게 내려앉았다. 창백한 빛줄기를 타고 작고 가벼운 먼지들이 바람 없는 복도를 떠다녔다. 여자는 이미 식은 커피를 양손에 쥐고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종이컵은 잇자국이나 립스틱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현철 씨는 문득 딸의 친구가 임신 중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만 가보겠다고 돌아서는 여자를 향해 현철 씨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다행히 그 질문은 혹시 임신 중이냐는 무례한 질문은 아니었다. 현철 씨는 딸이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여자는 복도 끝을 돌아 완전히 사라졌다. 현철 씨는 텅 빈 대기실에 앉아 여자가 오래도록 바라보던 딸의 병실 문을 똑같이 바라보았다. 그 일은 현철 씨와 딸 사이의 거리를 부유하고 있는 먼지들의 알 수 없는 경로를 보는 일 같기도 했고, 길게 드리워진 빛의 모호한 윤곽을 추리하는 일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저 문 너머에 죽어가는 딸이 있었다. 얼굴과 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딸을 현철 씨는 조금 알 수 없게 되었다. 딸의 얼굴은 어떠했더라. 아주 예뻤던 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딸의 지갑에서 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꺼내보지 않은 것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그런 후회는 길고 좁은 복도 끝에서 연주가 나타날 때까지 이어졌고 연주가 현철 씨의 곁에 다가와 한쪽 어깨를 살짝 잡았을 때 증거물로 제출한 딸의 지갑을 이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현철 씨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연주의 손을 잡으며 경찰서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경찰서에서 현철 씨는 딸의 지갑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서의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던 현철 씨를 딸의 담당형사가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는 마침 연락하려던 참이었다며 소란스러운 조사실 너머 조용한 방으로 현철 씨를 데려갔다. 유리창 너머로 취조실이 보이는 폐쇄된 공간이었는데, 현철 씨는 그곳의 무거운 공기에 주눅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묻는 현철 씨에게 담당형사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우선 이걸 보시죠.”
    담당형사는 취조실 유리창과 나란히 놓인 모니터에 한 영상을 재생시켰다. 취조실의 녹화 영상인 듯했는데 검은 벽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등을 보자마자 현철 씨는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그는 현철 씨가 상상했던 것보다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어깨를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진술하고 있었고 대부분 현철 씨가 담당형사에게 들었던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의부증 아내가 있었고 외도의 증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흥분한 아내는 아주 난폭해져서 결국 아이에게 뜨거운 물을 부었다는 이야기. 담당형사는 재빨리 다음 영상을 보여줬다. 또 다른 취조 영상이었는데 남자는 꽤나 무료해 보였다. 딱딱한 책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은 담당형사가 잔뜩 약이 올라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치기도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종이에 낙서를 했다.
    “여기, 이거.”
    담당형사는 영상을 멈추고 특정 부분을 크게 확대시켰다. 남자가 낙서를 하던 종이였는데 그곳에는 성의 없는 글씨로 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현철 씨에게 담당형사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피해자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철 씨는 일시 정지된 화면의 글씨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딸의 이름이 흐릿한 화질로 일렁이고 있었다. 담당형사는 이어서 다른 영상을 보여줬다. 백화점 엘리베이터 내부를 비추는 CCTV영상이었다. 현철 씨가 이미 예상했듯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앵글 안으로 베이지색 코트와 앙고라 카디건을 입은 딸이 들어왔다. 뒤이어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빠르게 안으로 달려들었는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에 담당형사는 영상을 멈췄다.
    “잘 보세요.”
    담당형사는 바로 다른 영상을 재생시켰다. 마찬가지로 백화점 CCTV영상이었고, 백화점 정문의 카메라와 화장품 매장 근처의 카메라 영상을 연달아 보여주었다. 모든 영상에서 베이지색 코트와 앙고라 카디건을 입은 딸이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 검은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이동하고 있었다.
    “보셨죠? 정확히 피해자를 노린 표적 테럽니다. 까다로운 경로로 강산을 구입한 정황을 보면 충동범죄도 아니고.”
    현철 씨는 손이 떨려서 두 손을 맞잡았다. 담당형사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경우 금전 아니면 치정이에요.”
    현철 씨는 순간 현기증이 나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눈을 부릅떴을 때, 여전히 정지된 모니터 화면 속에서 딸은 조금 들뜬 표정으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CCTV영상은 딸의 얼굴을 겨우 형체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화질이 엉망이었지만 현철 씨는 딸의 표정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상한 건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우발범죄인 척 연기하는 계획범은 많아도 묻지마범죄인 척 보이려는 놈은 없어요. 형량이 가중되니까요. 어쩌면 이 새끼, 그냥 또라이일지도 모릅니다.”
    담당형사는 쿨한 농담을 한 것처럼 현철 씨를 돌아봤다. 말없이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현철 씨의 등을 향해 담당형사는 조사결과가 나오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현철 씨는 딸의 지갑을 돌려받지 못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어두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가는 남자와 탁한 눈의 노인을 뒷좌석에 태우고 서행하는 경찰차가 현철 씨 옆으로 지나갔다. 차로 돌아와 시동 꺼진 운전석에 앉고서야 딸의 지갑 속 영수증들이 떠올랐다. 번화가의 스시집이나 일본 가정식 식당, 호텔 뷔페나 근교의 전골요리집에서 대학가 삼겹살집까지 크고 작은 크기의 식탁들이 떠올랐다. 딸의 지갑 속 영수증들을 꺼내어 버리지 않은 후회가 밀려왔다. 경찰조사에서 그 남자의 카드내역이나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경유지가 딸의 영수증에 찍힌 식당들과 일치할 수도 있었다. 이제 현철 씨는 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병실에서 연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은 자동차 핸들위에 이마를 대고 불손한 예감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나는 강간으로 태어났어요. 아름답고 평범해요.
    불현듯 딸의 소설 속 노랫말이 떠오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많은 일들이 연유나 전조 없이 일어났다. 그 소설 속 어린 연인은 슬픔에 잠긴 게 아니라 떨리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라 서로의 죽음에 대해, 새로 주문한 깨끗한 포크가 얼마나 쉽게 사람의 목을 꿰뚫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철 씨는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퍼뜩 놀란 사람처럼 가속기를 밟았다.

 

    사실 현철 씨가 저녁식사에서 딸에게 들려주려고 준비한 이야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현철 씨는 딸에게 당시 강단에서 가르치던 물리학에 대해 들려주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은 그의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딸이 재미있어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현철 씨는 딸과의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화장실 거울을 보며 말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시광선을 보며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영역이 있단다. 우리는 평생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지만 보이지 않는 빛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빛이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아니야. 때때로 우리의 눈은 실수를 해서 아주 희박하게 다른 영역의 빛을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영혼이나 유령을 보는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영역의 빛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야. 절대로 그것을 온전히 볼 수 없단다.
    그러나 현철 씨는 딸과 식탁 앞에 마주앉으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현철 씨가 준비한 이야기도 현철 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딸이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에 부딪히고 굴절하여 돌아올 수밖에 없는 반사광의 이야기였다. 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다면 딸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현철 씨는 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개방 주차장에 주차를 한 현철 씨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로수 길을 따라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차가운 벤치와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서로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연인들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현철 씨는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마침 한산해 보이는 그곳에서 딸이 소속한 학과의 조교를 만날 수 있었다. 현철 씨가 딸의 이름을 말하자 조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각한 얼굴로 딸의 안부를 물었다.
    “저는 병문안을 갈 만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키가 크고 마른 조교는 딸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다. 현철 씨는 불쾌해졌다. 조교가 현철 씨에게 딸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을 때, 그냥 삼촌이라고 대답했다. 친삼촌은 아니고 딸의 아빠와 잘 아는 동생이라고 구체적으로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조교에게 현철 씨는 딸이 쓴 소설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소설을요? 문집에 실린 것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어렵지 않게 딸의 소설이 실린 지난 몇 년간의 문집과 학내 문학상 수상집을 서너 권 찾아왔다. 현철 씨는 조교가 조잡하게 제본된 책을 복사기에 뒤집어 넣고 빛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힘주어 누르는 모습을, 그리고 다시 다음 페이지의 복사를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복사기 옆에 서서 순서가 뒤섞여 나오는 소설의 단면들을 하나씩 받아냈다. 그중 수상집의 복사본 끝에는 딸의 수상소감이 함께 복사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현철 씨는 눈에 닿는 곳부터 대충 읽었다. 나는 문고리를 돌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잠그는 것을 좋아해요. 문 뒤에 숨어서 아무도 내가 숨은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을 느껴요. 글을 쓰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 뒷부분은 복사되지 않아 읽을 수 없었다.
    현철 씨는 노란 빛이 새어나오는 복사기를 가만히 지켜보며 일그러진 얼굴의 갓난아이를 떠올렸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아이의 사라진 얼굴을 생각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없이 우는 아이였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얼굴 없는 아이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젖꼭지를 세게 물거나,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 간 것처럼 운이 나쁜 아이들이었다. 그 불운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현철 씨는 생각했다.
    조교는 가지런히 철을 한 딸의 소설들을 건네주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돌아서려던 현철 씨는 딸이 만나는 남자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곧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그저 딸을 찾아왔던 친구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조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알긴 알죠. 근데 그 애 이야기를 해요? 둘은 인사도 하지 않는 사이일 텐데.”
    현철 씨는 딸의 소설을 손에 들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철 씨가 딸의 병실에 그 여자가 찾아와 울었다고 말하자 조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조가 묘하게 냉소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 저는 잘 모르니까요.”
    현철 씨는 한동안 조교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손에 들린 딸의 소설은 물을 먹은 종이처럼 무거웠다. 그것을 뿌연 자동차 실내등 아래서 모두 읽었지만, 슬픔에 잠기거나 분노에 몸을 떠는 연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같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이야기들이었다. 하늘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고 현철 씨는 온몸이 진흙 속에 빠진 것처럼 피로했다. 현철 씨는 술을 조금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은 저녁 현철 씨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연주는 불 꺼진 병실에 홀로 앉아 반듯하게 누운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철 씨는 비틀비틀 그 뒤로 다가가 연주의 목을 껴안았다. 연주는 손을 쳐내거나 몸을 비틀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철 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연주의 머리에 뜨거운 입김만 뱉어냈다. 한참 만에 연주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뭘 하고 있어?”
    현철 씨는 오늘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무엇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주가 현철 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오늘 어떤 남자가 왔어.”
    현철 씨는 연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남자?”
    연주는 대답이 없었다. 순간 현철 씨는 머리가 쭈뼛 섰다. 연주의 몸을 돌려 마주보고 어깨를 움켜잡으며 물었다.
    “나이 많은 남자야?”
    “몰라. 그냥 우리 애를 아는 남자가 왔어.”
    “왜 왔어?”
    연주는 입을 앙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현철 씨를 바라보는 연주의 눈동자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철 씨는 갑작스레 화가 치밀었다.
    “왜 말을 안 해? 그 자식이 누구냐고!”
    “날 또 때리려고?”
    “뭐라고?”
    “당신 지금 술 마셨어.”
    연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철 씨는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화를 꾹꾹 누르며 애원하듯 말했다.
    “연주야. 이건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야. 내가 다 설명할게.”
    연주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현철 씨를 들여다보았다. 현철 씨의 거친 숨소리와 딸의 심전계에서 나는 규칙적인 기계음이 병실 안에 울리고 있었다. 불현듯 연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현철 씨는 우는 연주를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길고 앙상한 손가락으로 감싸쥔 우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딸을 보았다. 딸은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을 하얗고 깨끗한 붕대가 빈틈없이 동여매고 있었다. 현철 씨는 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연주를 감싸안고, 그 연약한 등을 가만가만 두들겨주었다. 술기운이 단숨에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병원 근처 백반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담당형사로부터 부재중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지만 현철 씨는 휴대폰을 다시 외투주머니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 둘은 서로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두부가 들어간 찌개는 기름기가 많았지만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것이었다. 현철 씨와 연주는 번갈아 숟가락을 뻗어 고춧가루가 묻은 하얀 순두부를 건져 조밥 위에 비벼먹었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연주는 물을 자주 먹었고 그때마다 현철 씨는 연주의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문득 현철 씨는 내일이 딸과 저녁을 먹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일 딸은 식탁 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을까.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였을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거나 잘못된 기억일 때도 있고, 혹은 다홍색 중지갑에서 얻은 이야기거나 누군가의 보라색 목도리에 관한 이야기일 때도 있지만, 제법 재미있는 것들이었다. 다시는 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저 여자는 알까. 현철 씨는 마주앉은 연주를 보았다. 낮고 완만한 코와 윤기 도는 귓불의 연약한 피부를 관찰하며 입 안에 남은 것들을 세심하게 씹었다. 식탁을 넘어가는 걸음은 이미 어림잡아 두었다. 연주는 식탁 위에 숟가락을 내려놓는 현철 씨에게 왜 더 먹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혼자서 밥과 식힌 순두부를 비벼 먹으며 조금씩 물을 마셨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날 밤, 딸의 병실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던 연주는 문득 잠에서 깼다. 어떤 꿈을 꿨지만 이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고 찬찬히 둘러본 병실 안은 깊게 고인 물속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달빛이 드는 창가 옆 간이의자에서 팔짱을 낀 채 잠들어있는 현철이 보였다. 갑자기 연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현철이 잠에서 깨어나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연주를 발견하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봐주길, 몹시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당혹스러운 열망이었지만 이내 운명적 확신으로 바뀌었다. 현철이 깨어난다면 연주는 그에게 다가가 내밀한 것들을 고백하고 간청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어쩌면 지금과는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현철은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죽은 사람처럼, 기울어진 늙은 나무처럼 잤다. 연주는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현철이 자고 있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조금 연 뒤 담배를 피우며, 오늘밤 현철은 결국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난하고 술에 취한 남자였다. 그리고 연주는 자신의 딸이 다시는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히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을 하며, 딸의 침대 옆에 딸린 간이침대로 돌아가 몸을 작게 말고 누웠다. 얇은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사고를 당하고 처음 마주한 딸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연주의 마음에 이상한 감정을 일으키는 아주 의문스러운 말이었다. 하얀 뼈가 드러난 얼굴로 딸은 말했다. 괜찮아요, 엄마. 이건 아주 평범한 사고예요.
    연주는 얼굴뼈를 움직여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밤의 결심이나 사소한 예감들을 짧은 꿈처럼 잊게 해줄, 깊고 달콤한 잠에 빠졌다.

 

 

● 창작후기

 
    사나운 마음으로.

 

 

작가소개 / 우다영(소설가)

1990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글틴 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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