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연극에세이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길

 

[소소한 연극에세이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길

– 초연을 본 뒤 10년 만에 다시 마주한 연극 「춘천 거기」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교사)

 

 

 

 

참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손님이 오시었습니다.
이리로 길이 나 있는지 나도 몰랐던 그 길로 오시었습니다.
오신 걸음걸음이 길을 찾아오시었는지
오신 걸음걸음이 길이 되었는지
나 알지 못하나
참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손님이 오시었습니다.
희미한 예고도 없이 오신 손님 앞에 차려진
그 술상 위 첫 잔이 어찌나 단지 자꾸만 술잔을 비우고 맙니다.
반갑게 오신 손님이 날 울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손바닥만 한 두려움이 있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첫 잔의 달콤함에 술잔은 비워지고
비워진 술잔을 외면할 수 없음에 그렇게 채워져
결국 만취되어 두려움은 잊을 것이라는 겁니다.

 

연극 『춘천 거기』 중 ‘소녀’의 대사

 

 

    누구나 마음속에 떨림을 주고,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상관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나, 설명될 수 없는 이유로 혹은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로 헤어져 오래도록 보지 못한 첫사랑(짝사랑이 아니다, 처음으로 서로 호감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연애를 한 사람을 뜻한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일상에 지쳤을 때, 불현듯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현재 진행형인 애인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싸움을 하고 난 뒤, 문득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린다.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교차한다.
    연극 「춘천 거기」는 나에게 첫사랑과 같은 연극이다. 초연을 보고 난 뒤로, 다른 연극을 예매할 때마다 혹시 공연 중인가 살피게 되고, 막상 공연 중이라면 초연의 감동이 깨어질까 두려워 보지 못하고, 결국은 10년 만에 다시금 보게 된 공연. 그때보다 훨씬 매력을 더한 작품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른 장르인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매력을 알아봐 주길 바라게 되고, 언제든 연극이 주었던 감동이 그리워질 때면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소 짓게 된다.

 

    2005년 「춘천 거기」라는 연극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20대 첫 연애 상대와의 이별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일주일 내내 밤에 잠을 자다가 깨어 울었고, 동시에 새롭게 다가온 ‘사랑’의 감정에 늘 설레고, 들뜨고, 행복한 상태였다. 저렇게도 극단적인 감정이 동시에 한 사람의 감정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현실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그런 경험의 당사자가 나라는 사실에 스스로에게도 놀라고 있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서 각기 다른 사랑의 감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한다는 말만 남기고 이별 선언을 한 남자친구를 보려고 주소만 적힌 종이쪽지 한 장만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찾아갈 만큼 사랑에 열정적이었지만 결국 상대는 자신을 떠나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혼을 할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다시금 연락 온 그의 전화를 피하는 작가 ‘수진’이 쓴 희곡의 처음에 등장하는 니체의 문구로 연극은 시작된다. “사랑의 무자비한 착상. 모든 크나큰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죽이려 하는 잔인한 생각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단번에 변화의 난폭한 유희를 치워버리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랑이 파멸보다는 변화를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다.”라는 문구는 다소 어렵고, 무겁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랑이 이렇게 무겁기만 할 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연극 속의 인물들은 질투, 찌질함, 분노, 슬픔, 행복, 기쁨, 설렘, 떨림이 수반되는 사랑의 다양한 감정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수진의 친구 ‘선영’은 대학 강사로 곧 전임 교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 ‘명수’와 위태로운 사랑을 하면서 늘 번민한다. 자신들의 사랑으로 상처 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빨래가 한 세탁기 안에 같이 섞여 돌 수 없음에 가슴으로 한참을” 울 수밖에 없는 현실은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서로의 행복을 빌어 주는 선택을 하게 한다.
    서로의 사랑을 빨리 알아채지 못하고, 서로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연애를 했던 수진의 동생 ‘세진’과 남자친구 ‘영민’은 서로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진심을 바라보지 도 못하고 서로의 치부만을 드러내며 매번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싸운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자꾸만 감정이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찌질한 사랑이지만 마지막은 본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눈물 속에서 화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의 답답한 사랑이 언제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영민’의 친구이자,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해서 새로운 사랑에 두려워하는 ‘수진’만을 바라보는 연출가 ‘병태’는 오매불망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게 될 계기만을 찾고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감정의 사랑을 하고 있는 이들이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서 어떻게든 서로에게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 중인 여배우 ‘주미’의 소개팅 남자인 펜션 주인 ‘응덕’의 초대로 ‘춘천’에 모이게 되면서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도심에서 가까워서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지만 일상에서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각자의 감정에 충실해질 수 있는 공간인 ‘춘천’에서 청춘의 남녀는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질 수 있다. 요즘은 ‘춘천’이라는 공간이 ‘젊음’과 깊게 연관되어지지 않지만 80년대 90년대를 겪어 온 사람들에게 ‘춘천’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컸던 것 같다. 공연 속의 ‘춘천’은 관객들이 직접 경험하고, 전해들은 상상력이 더해진 공간 ‘춘천’과 만나면서 비로소, 각자의「춘천 거기」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고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마주하며 자신만의 사랑의 기억들과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관객과 소통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진 연극이 주는 감동은 그냥 쉽게 만들어진 작품들과는 다르다고 믿는데, 연극 「춘천 거기」가 바로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김한길 작가/연출을 비롯해서 참여 배우들이 각자 100만 원씩 공연제작비를 마련해서 백만 명의 관객이 극단의 작품을 찾는 날까지 공연을 계속 올린다는 의미의 “백만 송이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작은 극단이 초연 작품으로 백만 명의 관객을 모은 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진심을 담아서 만든 이들의 마음이 전달된 탓인지 동숭무대 초연 이후 앙코르 공연이 이어졌으며, 2006년에는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한다. 좋은 작품은 누군가는 알아보게 마련이고, 그것을 본 관객들은 입소문으로 또 다른 관객들을 끌어 모은다. 그리고 그들은 한 작품의 팬이 되어버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10년의 시간이 흘러도 연극 「춘천 거기」는 대학로에서 2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하기를, 그때 보게 될 연극도 여전히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본다.

 

    ps. 이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꼭 함께 춘천 여행을 떠나자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연극 「춘천 거기」의 ‘소녀’ 대사를 나지막하게 읊어주고 싶다. 이 글을 읽은 그대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 하나, 읊어주고 싶은 대사 하나쯤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은 어떨는지?! 가을이라 그런지 유난히 떨림을 주는 단어들에 여운이 남는 야심한 밤이다.

 

 

정유정 (경기영상과학고 교사)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졸업.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 수료. 고양시 연극협회 소속으로 연극연출 활동하며, 경기영상과학고등학교 촬영조명학과에서 연극영화 교사로 재직 중.

 

 

   《글틴 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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