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여행⑧] 어떤 장소를 환영으로 가로지르기

 

[여행에세이_이 또한 여행⑧]

 

 

어떤 장소를 환영으로 가로지르기

– 앙코르와트와 타이베이

 

 

양재화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구아수 폭포, 우수아이아, 타이베이 야시장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홍콩과 싱가포르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는?
부산과 타이베이, 진과스, 주펀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 등장하는 장소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화양연화」 속 장소들이다(싱가포르 장면은 실제로는 태국에서 촬영했다고 하지만). 나는 저곳들을 모두 가보았다. 세 번째 답은 연관성이 좀 더 느슨하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두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 대만 타이베이와 진과스, 주펀이다. 내가 막 여행하고 돌아온 곳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1989년 영화 「비정성시」와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91년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을 본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김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 영화가 태어난 곳이자 영화 속 배경인 대만으로 날아갔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을 가로지르는 이동일 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차원의 이동,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체험이었다.
    한 장소를 그곳이 거쳐 온 시간, 곧 역사까지 포함해 사차원의 세계로 이해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한 가지 차원을 덧붙여 생각해볼 수 있다. ‘재현’된 공간, 곧 어떤 장소를 주제로 다루거나 배경으로 삼은 수많은 ‘텍스트’들로 이루어진 차원 말이다. 이를테면 영화와 문학과 미술 등의 작품들이 실재하는 특정한 장소를 바탕으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그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거짓이지만, 한 장소를 구성하는 상징체계에서만큼은 진실일 수 있다. 이 차원을 염두에 두면 어떤 장소를 여행한다는 것은 한층 더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일이 된다. 내 경우에는 여행만큼이나 좋아하는 영화, 아니 여행보다 먼저 좋아했던 영화 때문에 여행이 한층 더 복잡하고 흥미진진해졌다. 두 단어의 초성이 같다는 걸 나는 늘 무슨 운명처럼 생각해왔다. 사랑하는 대상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늘 어리석어 보이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영화의 환영을 좇아 현실의 공간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나 사물이 어떤 텍스트를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유일무이하고 기념할 만하며 심지어 경외심을 담아 바라보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타이베이 어느 평범한 거리의 표지판을 요리조리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으로 남길 때, 그곳에 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의아하고 한심해하는 눈으로, 때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 거리가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란 영화의 배경이자 제목에 등장하는 ‘고령가’, 곧 구링제(?嶺街)라는 건 그 순간에 내게만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또는 앙코르와트에 가서 내가 본 건 수백 년 세월을 버티고 선 돌로 된 사원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 역사뿐만 아니라, 「화양연화」에서 차우(양조위 분)가 사원의 벽 틈에 대고 비밀을 털어놓던 모습, 그리고 땅거미가 내린 사원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내가 남세스럽게 사원의 아무 벽에 대고 비밀 대신 소원을 중얼거릴 때 뒤통수에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들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셈이었다. 이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사랑인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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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1~2.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지는 땅거미가 질 무렵의 앙코르와트.

 

    그러나 환영을 좇는 여행에는 어쩔 수 없는 패배의 그림자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돌아가고 말리라는 예정된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시간은 흐른다. 공간은 변한다. 앙코르와트처럼 거의 변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그곳에는 영화 속 인물들이 없다. 욘사마를 좇아 남이섬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세워둔 「겨울연가」 간판은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상냥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찾는 곳들에는 대개 아무런 기념비도 입간판도 작은 단서나 흔적조차도 없다. 사랑은 사랑이되 보답받을 길 없는 짝사랑인 것이다.
    구글 지도에서 고령가를 찾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늦게 이미 어두워져버린 고령가에 도착해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내가 발견한 것은, 아마도 그 거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듯한 다 스러져가는 일본식 가옥 한 채와 높은 담장 위로 기와 지붕만 보이고 한 블록 정도를 온통 차지하면서도 구글 지도에는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저택, 오래되어 보이는 2층짜리 극장 정도였다. 그 밖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담소로 밤 시간을 보내고 주민들이 체조를 하는 자그마한 공원과 어쩐 일인지 다른 거리에 비해 유난히 많은 듯한 이발소와 미용실을 제외하면 평범한 주택가 골목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1960년이 배경인 이 영화를 1990년 또는 1991년에 바로 이 거리에서 촬영하진 않았을 테니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낡은 일본식 가옥은 주인공 소년인 샤오쓰(장첸 분)의 집일 거야, 저 의문의 저택은 극중 장군의 아들인 샤오마의 집 같은데, 저 극장은 샤오쓰가 친구와 서까래에 숨어 영화 촬영 장면을 훔쳐보고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손전등을 훔친 곳이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상상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게 문도 다 닫고 컴컴해진 거리를 부질없이 지칠 때까지 걸은 뒤, 오로지 고령가 1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흔하디 흔한 일본식 데판야키 집에 들어가 기름진 철판 볶음을 시켜 먹는 것으로 이 소소한 여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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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1~2.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된 고령가.

 

    다음 날에는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양조위 분)가 장(장첸 분)의 부모님 가게가 있는 야시장을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바로 그 야시장을 찾아갔다. 랴오닝(遼寧) 야시장은 타이베이의 대표적인 야시장으로서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스린 야시장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별도의 공간 없이 그저 차가 지나다니는 랴오닝제 중간의 100미터 남짓한 길 양쪽으로 해산물과 국수, 분식 등을 파는 식당과 간이 점포들이 늘어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찾는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아 퇴근길 직장인들이 들러 허기를 채우거나 한 잔 기울이는 정도였다. 영화 속 정신없고 활기 넘치던 공간과는 달랐다. 그래도 혹시 어느 가게 안쪽 벽에 이곳이 「해피 투게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장소임을 알리는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걸려 있지 않을까 해서 눈치를 무릅쓰고 한 곳 한 곳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자국에서 상업적인 성공과 세간의 인정을 얻지 못한 에드워드 양 감독과 달리 왕가위와 그의 영화들은 워낙 유명했기에 조금쯤은 기대를 해보았던 것이다). 몇몇 집에 대만 어느 방송에서 소개되었다는 캡처 사진 같은 것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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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1~2 「해피 투게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랴오닝 야시장.

 

    홍콩에서도, 앙코르와트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다. 기대하고, 찾아가고, 보고,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후회했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그곳들은 어떤 표지도 기념비도 없는 나만의 ‘성지(聖地)’였다. 대만 출신 감독 리안이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의 신이여,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지 좋았다. 그 신은 폭력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형상화된 존재, 때로 어떤 영화의 아우라는 마법과 같아서 이스터 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이나 바티칸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조각 「피에타」처럼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설명하는 존재일 터이다. 아무튼, 이러한 여정은 어쩌면 리안이 말했던 그 영화의 신을 따라가는 ‘성지 순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재화
 

– 대학에서 언론정보학 등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편집자로 1년 중 10개월은 돈을 벌고 2개월은 여행하며 살고 있다. 홈리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에 ‘여행의 뒷모습’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blog.naver.com/moodforlife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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