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의 밤

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래.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언제나 유서를 같이 썼고 펜을 비웠다. 그걸 교환해 읽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유서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피로 유서를 쓴 것도 아닌데 읽다 보면 세상이 계속해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글로 자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건들이 터진 채로 곪아가고 있었고 절박한 절규들이 그 틈을 메웠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다정한 부모님과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의 관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재정적인 지원들과 감정적인 응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꾸었다. 미쳐도 내가 단단히 미친 거였다.

 

유서를 써야 했다. 아까 다 쓰지 못했는데 펜과 종이는 혜진에게 있었다. 피씨방의 문을 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본체를 켰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들은 게임을 했고, 컵라면을 옆에 쌓아두고 포커를 치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내가 죽기 전에 뽑아 놓을 유서를 써야 했다. 글은 내가 되고 나는 글이 된다. 순간마다 활자들과 함께 간신히 호흡했다. 죽고 싶어서 유서를 쓴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유서를 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한글 파일에 빨간 줄이 자꾸 보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일에 긁힌 흔적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지웠다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게 혜진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치 못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을까? 난 그걸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빨간 줄이 자꾸만 그어졌다. 내버려두었다. 혜진의 상처는 피부에 있었다. 어쩌면 내 상처는 나일지도 몰랐다. 화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의자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모니터가 일제히 꺼지기 전까지는.

 

열 시였다. 미성년자는 나가라는 알바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소리 여럿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꺼진 모니터 앞에서 아이들이 몰려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혼잡했다. 각자의 세계가 엉키듯. 전원을 내려버린 순간에 아흔 아홉 대 정도의 컴퓨터가 꺼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던 내 유서가 전부 날아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살할 날까지 하루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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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 "어스름한 비상구의 녹색등이 깜빡거렸다. 나는 그 꼴이 꼭 아까 건너던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첫 문장의 어스름하다와 두 번째 문장의 깜빡거리는 꼴,의 주어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 사이에는 하나의 진술문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비상구의 녹색등은 어스름하다. 어스름한 녹색등이 깜빡거린다. 깜빡거리는 꼴이 신호등을 닮았다'의 순차적 진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 손가락을 뜯는다는 건 퍽 무시무시합니다. 정말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 손가락을 뜯은 건가요? 손톱을 뜯거나 손거스러미를 뜯은 게 아닌가요? * "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 "긁힌 자국이었다." *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