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그 애가 울었다. 이걸로 세 번째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처럼까지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빨강부터 검정까지 세상 모든 색깔이 담긴 듯한 팔레트와 반쯤 채워져 있던 분홍색 물통을 잔뜩 교실 바닥에, 정확히는 반장의 티셔츠와 책상 밑에 엎지른 채 그 애가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아무도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 아이들이 하고 있는 짓이라곤 엉엉 우는 반장을 달래 주며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진 물을 물티슈로 닦아내는 일 뿐이다. 그걸 물티슈로 닦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마른 휴지로 먼저 닦으라고 말할 힘도 없었다. 선생님마저 반장을 타이르고 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 애는 지적 장애인이다. 어른들 말씀을 빌리자면 남들보다 생각 주머니가 작은 친구라고 했다. 학기 초 그것도 6학년 2학기 초에 전학온 터라 친구가 없었다. 사실 친구를 사귄다고 해도 그게 그 애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 학교 애들은 친구로 두기에 좋은 애들이 아니다. 선생님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그 애와 애들을 붙여 놓으려고 애쓰셔서 답답할 따름이었다. 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비아냥거리는 말씨의 욕을 들어도 그저 히죽거리며 웃기만 하는 그 애를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어 데리고 밖으로 나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도 그 애는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애들이 놀리면 그건 나쁜 거잖아. 거기다 대고 웃고만 있으면 어떡해. 화를 내든가 선생님을 불러야지. 그 애에게 어려울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애는 또 아무 말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 대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냥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애의 '친구' 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꼭 매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얼마든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애와 나는 그런 관계다.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괴롭히는 반 애들을 피해 항상 같이 있을 뿐이었다. 도서관이든 영어실이든 하다못해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라도 우리는 같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데리고 갔다. 내 여자친구가 그 애라는 소문이 퍼질 만큼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나는 나 스스로 내가 그 애에게 꽤 의지되는 존재일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껏 그렇게 믿어 왔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애가 팔레트와 물통을 엎은 아까 전부터 쭉 들었다. 반장은 그전부터 그 애를 가장 많이 괴롭히던 애였다. 미술 시간이었다. 반장이 그 애의 그림을 보고 장애 같다고 했다.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함께 그 애의 팔레트를 툭, 툭 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애가 울었다. 그 애가 울어서 반장이 찐따 같다고 발로 찼다. 그러자 그 애가 화를 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매일 당하고만 있던 그 애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왜 그동안 참고 있었던 건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물통과 팔레트와 붓이 반장의 얼굴을 스쳤다. 그 애가 반장을 때렸다. 지켜보던 반 아이들이 소란을 떨며 잠깐 나가 계셨던 선생님을 모셔 왔다. 찌질하게도 반장이 울었다. 그 애가 울 때면 늘 찌질하게 울기까지 한다고 아이들을 잔뜩 끌어모아 비웃던 반장이 그 애 때문에 울었다. 분을 못 이겼는지 그 애가 엉엉 울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애가 손을 댄 문에 얼룩 자국이 남았다.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나는 벌떡 일어서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 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애들이 괴롭힐 것 같으면 항상 그 애를 데리고 어딘가로 도망쳤던 나인데 도망치는 건 더 이상 내가 아닌 그 애였다. 여태 도망간 것은 그 애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왜 몰랐을까.

그 애의 손에서 나온 물감 자국은 복도 벽에 몇 개가 더 찍혀 있을 뿐 아무 데도 없었다. 여전히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내가 교실 밖으로 나왔는지 안중에도 없는 교실은 그 애에게 덕지덕지 박혔을 얼룩한테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반장의 옷과 책상에 묻은 얼룩만 열심히 지우고 있었다. 반장의 얼룩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는 그 애를 찾으려 무작정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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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웃음에 대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냥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 웃음에 대고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라 나도 그냥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는'과 '도'는 한 글자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저 웃기만 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웃었다,와 나도 웃었다는 다른 의미라는 말이죠. * "매일 당하고만 있던 그 애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 "매일 당하고만 있던 그 애가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 그 애가 울고 화를 내는 것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괴롭히는 상황은 그 다음에(그 애가 반장을 때렸다)에 등장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