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아침이다. 나의 하루는 아침에서 열려 아침에서 닫힌다. 눈을 뜨는 순간 변함없는 일상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맞이한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일으킨다. 알람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일어날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체계적으로 구성된 두뇌는 언제나 순차적인 흐름을 따를 뿐이다. 나는 침이 묻어 축축해진 베개를 바라본다. 정상적으로 일어났다는 증표다.

화장실이 나를 부른다. 물은 시원하다. 빙판 같은 수돗물이 흐릿한 정신을 세차게 후려친다. 눈꺼풀이 그제야 떼어진다. 화장실은 자신의 직분을 모두 수행한 것을 깨닫고 나를 내보낸다. 몸이 옷장으로 이끌린다. 잠옷이 나를 갈아입힌다. 내 몸이 겉옷에 들어간다. 넥타이가 목을 죄인다. 양말과 발은 서로 안 맞는 법이 없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양말 틈새로 빈틈없이 채워진다. 하루가 지나면 갈아 신어야할 것이다.

부엌으로 향한다. 내게 밥을 먹이는 것은 내 손뿐이다. 나는 손에게 매일 고마움을 표시한다. 씻어주고 닦아주고 다치면 약 발라주고 힘들어하면 편히 쉬게 해준다. 손은 내 분신이나 다름없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식탁을 하나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사이좋은 남매다. 나는 젓가락을 집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젓가락 두 개의 신장(身長)이 일치하지 않다.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짧다. 성장에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의 하루는 빈틈없이 돌아가야 한다. 한결같은 시간에서 결코 어긋나는 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틀렸다. 모든 것의 시작인 아침에서 틀렸다. 일정한 하루의 톱니바퀴는 항상 일률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착오 없이 병렬되어야하며 균일하게 맞물려 순환해야 한다. 해가 밤에 뜨고 달이 낮에 뜨는 일이 없듯 나의 스물네 시간도 정해진 속도 안에서 일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내 하루는 단순히 자연의 순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 무엇보다 엄중한 의식이 젓가락 하나라는 아주 사소한 문제점으로 몇 초 만에 증발해버리는 사실로 인해, 한순간의 흐트러짐으로 하루 전체가 송두리째 전복돼버리는 허망한 현실로 인해 세계의 모든 규율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젓가락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지극히 일부분인 젓가락 하나에 극도로 화를 내고 그것을 휘어뜨려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 행위는 단순히 충동적이고 자기모멸적인 움직임밖에 안 된다. 나는 되도록 이성을 잃지 않게 애쓰며, 젓가락 하나에 온힘을 쏟아 부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도발적인 행동 대신 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기로 한다. 우선 제멋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잠재워야 한다. 한번 깨진 시간의 형태를 다시 맞추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지금 떠내려가는 시간을 붙잡아야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시계를 겨냥해야 한다. 시간의 집은 시계니 시계를 조정하면 시간도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내 집에는 시계가 세 개 있다. 하나는 벽에 붙은 벽시계, 하나는 손목에 채우는 손목시계, 마지막 하나는 자정이 되면 하루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괘종시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괘종시계지만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벽시계를 먼저 손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벽시계를 떼어낸다. 역시나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첫 번째 집을 버렸는지 벽시계의 초침은 아무런 미동이 없다. 맥박이 멈춘 것이다. 나는 탈피한 시간을 잡으러 서둘러 건전지를 찾는다. AAA, AA, AB…… 무엇 하나 맞는 것이 없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벽시계는 수은전지로만 돌아간다는 것을. 오차 없는 내 두뇌에 오류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벽시계에 손을 집어넣자 녹슨 수은전지들이 떨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집어 집밖으로 던져버린다. 이제 그들은 독립된 존재이다. 나는 늙은 것을 버렸으니 초심으로 돌아가 유아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러나 내 집엔 수은전지가 없다. 시간은 쉼 없이 달려가고 있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되돌려야하지만 외출을 함으로써 많은 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다. 만약 누군가 탁월하고 신속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내놓으시라. 내가 꼼꼼하게 추산해 새로운 길을 틀 테니. 그러나 아무리 짜내도 머리가 떠올리는 것은 외출밖에 없다. 나는 발을 신발에 끼운다. 손이 신발 끈을 매준다.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힌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왔다. 해는 아직 중천에 머물러있다. 다행히 시간이 멀리 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수은전지를 사고도 남으리라.

 

어디로 간담? 그는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항상 유념해야 할 사실은 그의 손에 잡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탈출했다. 어디서? 그의 집 속에서, 그의 한정된 삶 속에서. 그의 하루는 지겨웠다. 그는 나를 항상 같은 용도로만 사용한다. 그의 일상은 언제나 일차적이고 단조로우며 무미건조하다. 나는 그 경계를 벗어나 도망가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나도 안다, 뒤늦게 시도했다는 것을. 그러나 상관없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자유에 일조하면 된다. 혼신을 다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결과가 있더라도 개의치 않겠다. 편협한 삼차원 공간에서 벗어나 내 몸이 물처럼 흐르는 곳에 가기로 결정했으니. 가능하다면 그의 손이 범접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환상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준비를 했다. 내부질서를 교란시키려면 교묘한 조작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 거주지를 파괴해야만 했다. 헌집은 버리고 새집을 얻기 위해서, 내 손으로 시계의 척추를 물어뜯었다. 그러자 수은 냄새가 은은한 향내를 풍기며 흘러나왔다. 나는 도피의 입구에 첫발을 내딛었다. 세 개의 수은전지를 모두 빼내자 그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밥을 먹으려는 모양이다. 눈치 챌 게 분명했다. 시계의 질서를 뒤집으면 그에 따른 오류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천장이 휜다든지, 벽지가 뜯겨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이번에는 젓가락이었다. 하필 가장 빨리 알아챌 수 있는 부분에 문제점이 발생했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짧은 젓가락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게 이상이 생긴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이미 집밖으로 나와, 무너지는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뛰어넘고, 오랫동안 달리지 않아 비틀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신세계로 질주하고 있었다.

 

잡아야 한다. 잡아서 데리고 와야만 한다. 그래야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정돈되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돌아온다.

나는 보도블록을 밟는다.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수은전지를 판매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아서 그런가, 두뇌가 금방 계산하지 못해 이리저리 헤맨다. 이럴 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마음이 안정되기 마련이다. 마침 저기 지나가는 노인이 눈에 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레 말을 건네 보자.

저기, 수은전지 파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는데……

불필요한 행동을 했다.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자의로 찾을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달린다. 번잡한 시내 중심가로 들어서면 불빛들이 명멸하며 미친 듯 춤을 추고 있을 테고, 그곳에서 눈꺼풀의 족쇄를 풀면 매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발을 디딜 때마다 기운이 소진된다. 마치 육체가 수은전지로 이뤄져 있는 것 같다. 한 번 한 번 땅을 누를 때마다 온몸의 기력이 죽죽 빠져나간다. 기운 소비는 마음대로 저지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머리에서도 액체가 흘러나온다. 소매로 닦는 일이 귀찮아 그저 달린다. 계속 달린다. 달리고 달리다 보면 매장이 등장할 것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을 것이다. 직원이 활짝 웃으며 버선발로 뛰어나와 손님, 어서 오십시오 하고 환대할 것이다. 적어도 황혼이 되기 전에는, 해가 산 너머로 기울기 전에는 내 바람이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뛰어야 할까? 아직 이른 걸까? 대체 매장은 언제 어디서 어느 상황에 어떤 형태로 발현하는 걸까? 숨은 점점 차오르고 땀은 비 오듯 흐르는데 매장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끈기 있게 달리면 언젠가 나오겠지, 싶은 마음으로 꾸준히 달린다. 해는 아직 건장하다. 태양은 아직까지 강렬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앞으로 한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빛을 잃어갈 테지만, 상관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나오긴 했지만 막상 출발하려니 주저가 잇따른다. 무언의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가보자.

오른쪽이다. 본능이 손짓하는 곳으로 걸어 가보자. 나는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사실 앞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체력은 충분하다. 먼 여정이 되겠지만 그만큼 보람찬 여행이 될 것이다. 어쩌면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이 될 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가 길을 가로막는다. 뭔지 모를 물체가 내 여행을 방해한다. 어떤 종류의 유기체인지도, 어떤 색인지도 무슨 냄새가 나고 어떤 형태를 띠는지도 알지 못하니 손으로 건드리는 경솔한 행위는 삼가야 한다. 대신 공손하게 말을 걸어보자.

누구십니까? (또는)누구신지요? 당신은 4원소 중 한 명인가요? 아니면 저처럼 무기물이신가요? 보편적으로 유기체가 많으니 당신 역시 유기체겠지요? 제 추측이 틀렸나요? 섣부른 상상을 해서 죄송하군요. 누구십니까?

………….

답이 없다. 이럴 땐 최대한 조심스레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다. 몸을 건드리지 않고, 심기도 건드리지 않고, 내가 가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 빙 둘러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되도록 행로를 단축하는 게 좋겠지만, 이 뭔지 모를 정체에게서 급히 벗어나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마침 빈 공간이 느껴진다. 이쪽으로 나아가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운수가 좋지 않은지, 시작부터 재수 없는 것(무기체 혹은 유기체)에게 걸려버렸다. 그것이 내 팔을 붙잡는다. 이렇게 되면 도망가기 쉽지 않다. 손가락도 아니고 무려 팔 하나라니. 조금 무식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가만있는 것보다는 좋으니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말을 건네 보자. 물론 이번에도 묵묵부답일 테지만.

저기…… 왜 이러시는지요?

답이 없다. 내 예상은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 팔을 세게 움켜쥔다. 나는 큰일 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러잖아도 도망치는 중인데.

 

해가 멀쩡하다는 것은 아직까지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징표다. 그렇다면 나는 느긋하게 매장으로 들어가 수월하게 전지를 사고 여유만만하게 집안으로 들어가 한가롭게 시계를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침 하늘이 도와주는지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발바닥에 불붙듯 뛰어간 보람이 있다.

할인매장 으로 꺾어 100미터

드디어 도착지다. 나는 서둘러 표지판을 제쳐 오른쪽을 내다본다. 손가락 표시대로 할인매장이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며 견고히 서있다. 내 발은 성취감에 절로 뿌듯해져 당당하게 걸어 들어간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니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내 머리카락을 시원스레 건드리는 미풍은 일이 금방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는 통보나 다름없다. 나는 온갖 상품들로 꾸며진 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가정 제품이 넘쳐나지만, 내가 찾는 것은 망가진 시계를 일으켜 세울 전지뿐이니 먼저 수은전지를 사기로 한다. 다른 것은 전지 찾고 살펴봐도 늦지 않으니 걱정말자.

내가 한참 뒤적거리고 있는데 슬그머니 점원이 다가와 묻는다.

손님, 찾으시는 제품 있나요?

, 시계에 넣을 수은전지를 찾고 있는데요.

직원이 능글맞게 웃으며,

이런, 어떡하죠. 저희는 건전지만 판매합니다. 죄송하지만 수은전지는 다른 매장에 가서 찾아보시지요. 왼쪽으로 300미터만 더 가면 있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상당히 무례한 직원이다. 이곳에 수은전지가 없으면 새로 들여오거나 샅샅이 찾아서라도 가져다줘야지, 다른 매장에나 가보라니. 내 혀가 그가 직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불쾌한 어조로 비난한다. 그렇다고 끈질기게 반박했다가는 태양만 빠르게 넘어갈 뿐이다. 직원과 다투어봤자 시계를 되돌리는데 아무 이득이 없으니, 나는 인내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직원이 말해준대로 서쪽을 향해 발을 옮긴다. 아직도 해는 건재하지만, 보름달이 드러나면 천천히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전에 시계를 원래 형상으로 되돌려놔야 한다.

 

이제 그만 놔주시는 게…….

나는 정체모를 물체에 잡혀 옴짝달싹도 못한 채 고정돼 있다. 이것의 목적은 나의 육체일까 정신일까? 나를 잡아가려는 것일까 여기 묶어두려는 것일까 단순히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 부탁할 것이라면 애당초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란이 밀려온다. 이렇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잡혀 있으면 목적지 근처에 가기도 전에 영속될 것이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어떤 목적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름 모를 물체가 당황해하며 손아귀 힘을 푸는 걸 보니 내 조력자가 틀림없다. 하얀 빛은 조금씩 다가오더니 피부가 탈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발하며 당당히 자신의 풍채를 자랑한다. 물체는 부르르 약간의 진동을 내며 알아듣지 못할 신음소리를 내다가, 이윽고 내가 서있는 장소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경계 너머로 사라진다. 그것이 잡고 있던 팔에 자국이 났지만 상관없다.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한다. 나는 나를 위기에서 모면해준 빛에게 감사인사를 하려하지만, 그새 빛은 경계 아래로 침하하고 있었다. 나는 모습이 사라진 빛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서둘러 앞을 향해 나아간다. 공기의 저항이 심해 속도가 더뎌졌지만 상관없다. 그만큼 더 속도를 내면 되니까.

 

왼쪽으로 300미터라는 말을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달린다. 시간이 날아간 이후 오늘 하루는 산산조각난지 오래다. 하루 전체를 재배치하고 차례차례 정돈하려면 손바닥에 굳은살 박이듯 고생해야겠지만, 시계만 복구하면 그 다음 일은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직원의 언지는 틀리지 않았다. 불과 3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매장이 뿌리를 박고 굳건히 서있다. 나는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은 듯 매장을 향해 질주한다.

이번 직원의 얼굴에는 우수가 서려있다. 방금 전 직원과 달리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다행히도 내 질문에 답은 한다.

수은전지라면 많지요. 여기 장난감용도 있고, 보청기용도 있고, 사운드북용도 있네요. 손님이 원하시는 건 시계용 전지니 산화은 버튼셀일 겁니다.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크기가 잘 맞을지 모르겠네요. 여기 SR66 SR48 SR57 크기 전지가 있는데 어떤 게 손님 시계에 적합하련지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시계를 충전할 수은전지라는 사실만 머리에 새겨두었을 뿐 저런 알아듣지 못할 이름들은 들은 적도 본적도 없다. 나는 직원이 말하는 어쩌고 버튼셀이 맞으리라 감히 믿어보기로 한다. 저런 어려운 용어를 능숙하게 외울 정도로 해박한 청년이니 내가 어떤 전지를 찾는 것쯤 금방 알아챌 것이다. 직원은 몇 번 뒤적거리다 미소를 지어보이며 작은 수은전지를 내민다.

보통 SR59를 쓰니 이게 맞을 겁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계산해드릴게요. 또 필요하신 건 없나요?

, 지금은 수은전지만 필요합니다만. 그것만 주세요.

직원은 알았다고 친절히 현금영수증까지 건네준다. 우울한 얼굴과는 달리 직책에는 능숙하다. 나는 황급히 물품을 받아들고 매장을 나선다. 현금영수증은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이제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나는 계단을 딛고 내려와 설핏 기울기 시작하는 해를 올려다본다. 얼른 가야한다.

 

그가 조급해함을 나는 느낀다. 나도 조급해함을 내가 느낀다. 나는 초조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공간 위의 공간을 딛고 무와 유 사이를 헤치며 나아간다. 앞으로 큰 변수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상적으로 세계 밖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걱정은 오직 하나뿐, 곳곳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방해요소들이다. 방금 전은 정체모를 물체에 걸려 정체모를 빛에 구출되었지만, 앞으로 빛이 계속 내 곁을 지킬 것이란 징조도 없고 온갖 기이한 물체들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으므로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춰 조심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불안한 건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접근해올지 모른다. 내 신경 하나하나는 모두 기민하게 서있어 어디선가 무언의 움직임이 있어도,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도 깜짝 놀라 순식간에 움츠러들고 수축된다. 무엇인가 발목을 휘감는다. 이번에도 물체가 날 잡은 것일까? 아니다. 틈틈이 이어진 선 여러 개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물이다. 정면 측면을 스치며 수많은 줄이 날아든다. 그물에 감겼다. 두 번째 방해물에 걸린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순식간에 내 몸을 감는다. 숨은 간신히 쉴 수 있지만 이대로 속박된다면 도착지는커녕 출구 근처도 가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물을 찢으려면 칼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칼도 작은 손톱깎이 하나도 없다. 그가 오기 전까지 나가야 하는데, 그물을 찢고 나가야 하는데…….

 

집은 여기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몇 배로 오래 걸렸을 것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길이가 좁혀진다. 400, 300, 200미터…… 신발은 벗을 필요 없다.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아니, 문 스스로 나를 향해 열릴 것이다.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갈 것이다. 들어가서 마침내 뒤죽박죽된 시간을 제자리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서서히 앞마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안 남았다.

 

칼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지만 헛일이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본다. 아무것도 없다. 나올 때부터 빈손이었기에, 두 다리만 달려있으면 될 거라 믿었기에. 칼도 바늘도 연필도 없다. 그물은 이상하리만치 튼튼해 맨손으로 찢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빛이 나타나 구해주면 다행이지만 나는 안다. 이곳에 오는 은 없다. 빛은 지금도 앞으로도 등장하지 않을 게 자명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희생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있는지 찾아보자. 힘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고, 딱딱하고 예리하며 날카로운 것…… 둔기도 상관없다. 구석구석 훑어보니 마침내 보인다. 찾았다. 하얀 빛을 내는 치아다. 영영 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빛이, 이렇게 내 몸에 다시 찾아와주었다. 나는 이를 뽑아낸다. 상당히 큰 소리가 나면서 걸쭉한 액체가 떨어진다. 아프지는 않다.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비해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은은히 빛을 내는 이를 손에 잡는다. 그물을 찢는 데 적합한 크기다.

 

황혼이 왔다. 붉지만 어스름히 보랏빛 휘광을 띠는 해가 산 너머 언덕 너머로 접어든다. 조금씩 고개는 내밀고 있지만 곧 하늘 전체가 칠흑처럼 캄캄해질 것이다. 나무 건물 할 것 없이 모든 게 어두워지면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손을 뻗고 소경이 된 채 막막히 길을 헤맬 테고, 그렇게 되면 내 희망, 내 빛 아침은 다시 오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집에 도착했다. 사위가 암담한 흑색을 띠기 시작한다. 해가 떠나고 있다. 나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번호를 누른다. 0, 4, 1, 2, 아니, 1, 2, 2, 2인가, 0, 7, 2, 7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발로 찬다. 거실에 벽시계가 있다. 뜯어낸다. 전지 넣는 곳을 찾는다. 주머니에서 수은전지를 꺼낸다. 한 개, 두 개, 세 개. 전지 서너 개가 손바닥 아래로 떨어져 거실 바닥 위에 구른다. 나는 허리를 숙여 전지 두 개를 잡아든다. 하나는 서랍 밑에 깊숙이 들어갔다. 몸을 눕히고 팔을 있는 대로 뻗는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다. 나는 다시 일어나 파리채를 가져온다. 손잡이 끝으로 툭툭 쳐 바깥으로 끌어낸다. 마침내 수은전지 세 개가 혼연일체를 이뤘다. 벽시계 속에 그것을 채워 넣었다. 앞뒤 엇갈림 없이 제대로 끼웠다.

 

뜯어진 줄은 실밥을 흩날리며 심연 아래로 추락한다.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왔는데 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 나는 계속 전진한다. 전진하려는데 전진할 수 없다. 발이 걸렸다. 이제 다시 가려는데 또 걸리는 건가? 아니다. 그가 왔다. 마침내, 그가 왔다. 나는 잡혔다. 기어코 잡혔다. 이렇게, 또 다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내 희망이 산산조각난다.

 

성공일까? 해가 넘어가고 밤이 지나가 아침이 오면 성공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상의 파도를 타게 되면 할 일이 끝난 것이다. 나는 벽시계를 제자리에 걸어놓는다. 한숨 쉬며 땀을 닦는다. 이제 평온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아침을 기다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훨씬 전부터, 훨씬 전부터 오류가 있었다. 시계바늘이 돌아가지 않는다. 바위처럼 꼼짝 않고 멈춰있다. 시계바늘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1밀리미터도, 1나노미터의 이동도 없다. 해는 졌는데, 해가 져서 모든 곳이 어두워졌는데, 시계는 가만히 있다. 무엇에 착오가 있었던 걸까? 내가 무슨 과오를 저지른 걸까? 시계를 들어 뒤집어본다.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수은전지가 맞지 않다. 크기가 다르다. 나는 크기가 다른 전지를 구입해 맞지도 않는 자리에 끼워넣었다. 늦었다. 이미 늦었다. 해가 졌다. 밤이 왔다. 어둡다. 너무 어둡다. 아침은 오지 못한다. 아침은 영영 오지 못한다. 무섭고, 너무 무서운 밤이 왔다. 나는 맹인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이, 눈이 까만 밤에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무엇도 보지 못한다. 밤이 모든 것을 덮었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혔다. 아침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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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 "물은 시원하다. 빙판 같은 수돗물이 흐릿한 정신을 세차게 후려친다." – "차가운 물이 흐릿한 정신을 후려친다." * "나는 하나밖에 없는 식탁을 하나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 식탁이 2개인 집도 있겠지만 흔치 않은 경우겠죠. "나는 식탁을 하나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 "그러나 오늘은 틀렸다. 모든 것의 시작인 아침에서 틀렸다." –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모든 것의 시작인 이 아침이, 다른 날과 다르다." * "나에게 그 무엇보다 엄중한 의식이 젓가락 하나라는 아주 사소한 문제점으로 몇 초 만에 증발해버리는 사실로 인해, 한순간의 흐트러짐으로 하루 전체가 송두리째 전복돼버리는 허망한 현실로 인해 세계의 모든 규율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 비문입니다. "나에게 그 무엇보다 엄중한 의식이 젓가락이라는 사소한 문제점으로…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