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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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의 붉은 근육이
당신의 절규에 찢어지네요
찢어지는 붉은 근육 사이로
더 붉은 새빨간 피가 결을 따라 흐르네요
몇 번이나 당신의 목이 찢어졌을까요
이제는 사이사이 잔근육과 굳은살이
배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을 돌릴 때마다
흐른 피는 어느새 바다를 이루었네요
촉촉한 말과 뜨거운 언어
당신의 피로 이룬 바다에서
세상의 따뜻함을 가르쳐 주려고 했네요
언젠가는 이 바다에서 나가야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의 괴로움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이 따뜻한 바다에 머무를 게요
아직은 뜨거운 당신만의 언어가 필요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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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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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바닥에 걸려있는 곳
나는 이곳에 있다
검은 먹구름에 의지해 허공에 떠 있는 나는
온몸이 떨리도록 잔뜩 힘을 준 채
지하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올라간다면 후에 내려오겠지만
떨어졌다고 끝없이 추락하는 나는
하늘이 택한 낙하 물체인가 보다
나의 밑바닥인지 어디인지
가늠하고 싶은 자의 소행인가 보다
이곳이 끝이라고 여겼음에도
추락의 두려움은 땅 밑까지 파고들며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나는 지옥의 머리 부근에서 죽어가고 있다
매일 떨어질 준비를 한다
부디 하루하루 머리가 곤두박질 쳐서
바닥이 흥건해지길 바랄 뿐이다
붉게 생긴 물결 위로 내 영혼이
이제는 진득하고 자유롭게 다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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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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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고구마를 반 가른 듯 노란 것도
노란 것을 가두는 붉은 틀도
어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매번 다른 해라고 하나
색도 느낌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매일 뜨는 해를 두고도
365일이 지나서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듯 합니다
다를 것 없는 어제와 오늘에
특별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늘 그랬듯 두 손을 모으고
자체적인 암전을 시작합니다

오늘 만큼은 그대가
아프지 말게 해주세요
이번 해 만큼은 보다
행복하게 해주세요
평생 견디기 힘들 고통은
제게로 잘못 전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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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 소설1-살인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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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생각보다 검붉다.

생각보다 농도 짙고 생각보다 끈적하다.

 

전 날 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첫 살인에 대한 걱정이랄까. 아님 설렘이랄까. 따지고 보면 둘 다 맞는 말이지만 내 심정은 후자에 가까웠다.  '살인'이 범죄인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다는 묘한 흥분감이 전율을 통해 몸에 나타난 것이 죽이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보다 먼저였기 때문이다. 뭐, 개미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 또한 깨졌지만 말이다.

몇 시간 동안 부푼 기대를 안고 만난 개미는 작고 초라했다. 김이 소리를 내며 빠졌다. 기억을 되듬어 보니 실소가 약간 새어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20~25 cm밖에 되지 않는 칼에 벌벌 떠는 모습이 웃겼다. 웃기다는 말 외에는 딱히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왼손을 좌우로 휘휘 젓지만 그 손마저 떨리는 모습이, 얼굴로는 위협적인 표정을 하지만 다리는 덜덜 떨리는 모습이 놀이에 들어가기 전 긴장을 풀어줄 만큼 웃겼다.  확신이 들었다. 죽이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역시 놀이는 놀이일뿐 게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가 조금 감소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안정적인 게임을 위해 재미는 조금 포기한다고 생각했

처음은 복부였던 것 같다. 생각보다 배는 물컹했다. 지방을 지나 장기를 향해 꽃는 칼의 맛은 묵직하고 달콤했다. 물컹한 배지만 칼을 끝까지 집어넣기에는 묵직하다는 점이 손맛을 살렸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난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칼을 다 집어넣고도 빼지 않고 그 상태에서 개미를 뒤로 한 번 더 밀었던 것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질렀던 비명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아, 사람이 극한에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은 이런 거구나.' 생각이들었다.  칼을 빼자 개미는 피를 흘렸다. 색은 체리주스 같았다. 물론 그보다는 빨갰다. 그러나 체리주스가 같았다. 생각보다 색이 예뻐서 그런가. 뭐 개미는 배를 잡고 뒤로 물러섰고 나는 옆구리를 한 번 더 찔렀다. 찌른 자리쪽으로 몸이 휘어졌다. 와인통에 칼을 넣으면 튀어나오는 통아저씨가 생각났다. 처음이자 마지마으로 개미가 귀여워 보인 순간이었다.

_ 첫 살인 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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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서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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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서늘합니까>

핏기 마른 서늘한 시신 한 구

군데군데 어둠이 드리운 흰 천도

그 냉기 만큼은 가리지 못했나 봅니다

삐죽 튀어나온 백색의 손은

생기를 잃었습니다

가르키는 방향이 허공입니다

손목 끝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면

바닥으로 추락했을 손은

완전히 굽어지지도 펴지지도 않은 채로

세상에 떠 있습니다

몇 시간 전까지 줄에 의지해

허공에 떠 있던 껍질처럼

물론 손도 껍질도 무겁지 않습니다

번데기가 던진 말에 비하면

나비가 된 번데기는 허공을 향해 비행을 하겠군요

떠도는 단어와 석고상 사이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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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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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을>

이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누구 하나 힘들어 한다면 그저 모르는 척 하기로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의라며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

물론 도움을 청한다면 외면하지 않았다

손에는 투명한 장갑을 꼈지만 말이다

 

마을은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몇몇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했으니 행복한 마을이었다

좌절에 빠진 사람 중 기쁨을 찾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일부였지만 계속해서 좌절 속에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추방당했다

 

마을에서는 음악과 춤이 끊이지 않았다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스테인글라스가 빛을 내고 있었다

물론 무대 멀찍한 곳에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이 얼마 후 하늘에 걸려 있었지만

마을에서는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싸늘해진 사람은 마을에서 추방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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