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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태어난 아이들

1   그 애는 자기가 기차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2   향은 사흘 전, 같은 보육원 직원에게서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그날은 향이 밀렸던 휴가를 낸 금요일이었고, 또 연락이 온 것은 느지막한 저녁이었기에, 향은 한참을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면 휴가라는 정당한 이유를 대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직원은 향이 답장을 보내게 무섭게 죄송하지만, 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로 답했다.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긴 메시지를 보아선 미리 써놓은 글을 붙여넣기 한 게 틀림없었다. 향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휴가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긴급한 사안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향에게 넘어온 이상 그런 사건일 수밖에[…]

기차에서 태어난 아이들
/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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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1]

  수많은 연등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한 번쯤 위를 쳐다볼 정도로 많은 수였다. 단 하나의 연등만 빼고. 검은색 종이를 겹겹이 겹쳐 만든 연등이었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연등은 아래로 추락하다, 망가진 연등을 모아둔 어린이 병동 뒤뜰 포대에 안착했다. 꺼지지 않았던 불꽃은 다른 연등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병실 두 개가 불탔고 수백 명이 대피했다. 아이들의 쾌유를 위한 연등 행사는 그렇게 끝났다. 불탄 연등의 주인을 알기 위해 CCTV를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일은 보안실 직원인 내 것이 되었다. CCTV에는 그날 옥상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남자아이 하나가 검은색 연등을 띄우고 있었다. 아이의[…]

연등
/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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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네가 하늘을 날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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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펭귄처럼 두 팔을 퍼덕였고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뛰어내렸다 너는 새가 아니었으므로 다음 날 왼쪽 발목에 기브스를 하고 나타났다 초록다리인간이라며 내가 놀려댔는데도 너는 웃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새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자랑스레 내보인 초록 기브스는 날기엔 너무 무거워 보였다   2 비행기 조종사들은 매 비행마다 유서를 품에 안고 출발한다던데 너는 포스트잇을 등에 붙이고 다녔다 너도 모르는 사이 붙여진 포스트잇이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네 등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 걸어다니는 게시판처럼 보였다 포스트잇을 떼내기에 네 팔은 너무 짧았다 날지 못하는 두 팔은 포스트잇을 떼낼[…]

어느 날, 네가 하늘을 날았다
/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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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속 숨바꼭질 [1]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꺼졌다. 오늘 저녁인 삼각김밥을 돌리던 전자레인지도, 꾸역꾸역 음식들을 삼키고 있는 냉장고도, 이름 모를 아저씨들이 웃고 떠드는 텔레비전도. 모든 것이 한 번에 숨을 멈추고, 뒤이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왔다. 불현듯 덜컥 겁이 나 언니를 불렀다. 언니는 다급히 내쪽으로 뛰어왔다. 아파트 단지가 전부 정전이 되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언니, 갑자기 불이 꺼졌어. 무슨 일이야? ……새이야. 지금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벽장 안에 꼭 숨어 있어. 절대로 나오면 안 돼.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덧붙였다. 언니가 아빠 몰래 나가서, 우릴 도와줄 사람을 데려올게. 언니와 나는 자주 숨바꼭질을[…]

정전 속 숨바꼭질
/ 2021-08-31
63 나만의 문학 작품 소개 – 아가미 [0] 멜론소다 2021-08-16 Hit : 47 멜론소다 2021-08-16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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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옛날 일이다. (화이트 호스 (가원)을 읽고) [1]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가원 中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족 간의 사랑과 미움. 가정을 내팽개치고 현실을 모르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부양하는 아내. 그리고 할머니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런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더 어려운 손녀. 책의 소개대로 정말 누군가는 영영 알지 못할 이야기다. 그 점이 ‘가원’을 더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야기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화자, 화자의 할머니, 화자의 할아버지인 박윤보. 다 옛날 일이다. 로 시작하는 문장 답게 이야기는 사라진 할머니를 찾는 현재와 화자의 과거를[…]

다 옛날 일이다. (화이트 호스 (가원)을 읽고)
/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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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는데 네가 멸종해버렸고 [1]

    오랜만에 찾은 병실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싸구려 잉크로 인쇄한 종이들이 벽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침대는 이불이 흐트러진 채 텅 비어 있었다. 션이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가량. 기차표를 더 늦게 끊는 게 나았을까, 생각하며 간이침대에 걸터앉았다. 히터 바람에 벽에 붙은 종이들의 모서리가 가볍게 들썩였다. 보석달팽이, 도도새, 제니오니스. 이름만 남은 채 사라져버린 동물들. 종이 안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을 때마다 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인간의 욕심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라고 했어. 학교도 다니지도 않으면서, 어쩜 그리 멸종된 동물들의 이야기들은 잘 아는지 몰랐다. 션은 1시간하고도 10분이 더 지나서야 병실로 돌아왔다. 무채색인 병원복 탓에 안[…]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는데 네가 멸종해버렸고
/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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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열아홉 [1]

마지막 열아홉   어제부터 줄곧 내린 비 탓에 안방은 물로 흥건했다. 아침에 안방 문을 열고 나서야, 나는 어젯밤 창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창문을 닫아야 하나, 생각하다 그냥 안방 문을 잠그기로 했다. 방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든다고 그다지 생활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축축하게 젖은 이불들은 내버려 둔 채 장롱에서 이불 하나를 끄집어냈다. 반이 땅에 파묻힌 창문 너머, 분주하게 움직이는 운동화들이 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힘을 주어 이불들을 바닥에 닿지 않게 들어 올렸다. 솜이불의 끝자락이 간신히 발목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거실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벽지에 슨 곰팡이[…]

마지막 열아홉
/ 2021-07-22
멜론소다
1시간 전 [1]

비포장도로로 진입한 차는 평소보다 더 덜컹거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렸던 탓에 흙탕물이 여기저기 튀었고, 조금이라도 창문을 열면 축축한 냄새가 진하게 새어 들어왔다. 세연은 등받이를 조금 더 내렸다. 십 분 전부터 내비게이션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운전석에 앉아 있던 후배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비게이션을 바꿔야 할까 봐요. 세연은 대답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전화번호와 함께 쓰인 표지판의 글자들이 보였다. 세연은 입을 다문 채 혀로 그 글자들을 굴러보았다. 삼백, 미터, 김, 준, 석, 종, 오, 리, 농, 자. 자 밑에 이응은 빗물에 씻겨 내려갔는지[…]

1시간 전
/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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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동 아이는 누구일까 [3]

    우리 애가 사라졌어요. 그 한마디는 학교 문제로 입씨름하던 에더빌 아파트 학부모들에게 새 화젯거리를 던져주었다. 요 며칠 학교 문제로 구청까지 다녀왔다던, 303동 주민대표의 이야기였다. 303동은 발까지 동동 구르며 아들에게서 온 문자를 여기저기 들이밀고 있었다. 학원 갈 시간도 지났는데 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덤이었다. 나 친구 집에 다녀올게. 장소도, 시간도 없는 짤막한 문자였지만 다른 학부모들의 눈에는 그다지 걱정될 만한 문자로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건 흔한 일이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전화를 놓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만한 아이들을 키운다면 누구나 한두 번씩은 경험할 만한 일이었다.[…]

303동 아이는 누구일까
/ 202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