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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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뚝거려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너는 곧 이어폰 줄로 목을 맬 것만 같고 나는 모든 걸 멈추려 지구를 붙잡으러 갔지 태양이랑 화해하길 바랐는데 둘, 진득이 삽질 중이더라 네 두 무릎에 박힌 무화과, 네가 깨물은 건지 누가 부숴버린 건지 그래 영영 떠나버려 저 멀리로, 어라 근데 무화과 조각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내 눈물 내 붉은 뺨처럼 함빡 젖은 네 무릎

364번의 겨울과 1번의 여름이 지나가서 사는 게 겁이 나요

십자가가 대충 쓰이니 효과죽인 죽음을 생각하자 예고 없던 세례로 나의 이름을 삼켜버린 그대여 입천장에 붙은 초코 소다 껌들 넌 검은색으로 떠났고 내게 투명한 꿈으로 찾아오지 뒷골목 쥐가 알려주기를, 지구랑 태양이 화해했대 그러면 뭐하니 네가 없는데

물기를 머금고 굴러다녔던 눈동자들 이제는 길을 잃은 외지인처럼 우두커니 서있어 내 눈동자는 눈사람의 심장 뻔뻔한 보닛처럼 한여름에도 고개를 쳐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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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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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버스 안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버스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존재했다. 무릎 위 책가방, 그 위 교과서의 목차만 적혀 있는 종이, 그 위 종이를 잡은 준혁의 두 손이 있었다. 준혁은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준혁은 종이에 적혀진 목차를 보며 작은 입 모양으로 교과서의 내용을 중얼거렸다. 준혁은 종이를 놓고 손가락으로 손톱 옆 살을 계속해서 뜯기 시작했다. 자신이 손톱을 왜 뜯는지, 이유가 있는 것인지 준혁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준혁은 대체로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뜯었지만 가끔은 피가 날 때도 있었다. 하얀 피부 위로 군데군데 피딱지와 너저분한 거스름들이 있었다. 준혁은 손짓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버스 창문 위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 위로 얼굴이 불투명하게 보였다.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원래 눈 크기보다 더 작아 보이는 눈, 매끄럽게 뻗어 있는 코만이 선명히 보였다. 준혁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창문을 바라봤다. 준혁은 창문을 보며 나는 지금 온전히 살아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준혁은 평소에도 거울이나 자신의 입김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자주 했다.
준혁이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길옆 광활한 도로에는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다. 준혁이 5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줄지어 있는 단지로 들어섰다. 아파트 현관 앞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4대 정도 있었고 그 자동차들 밑은 길고양이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베이지색과 검은색 페인트칠이 벗겨져 동 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건물로 준혁이 들어갔다. 준혁의 집은 5층이고 계단 단차는 높아서, 준혁이 계단을 다 오르면 숨이 옅게 떨리곤 했다. 준혁이 현관문을 열자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와 계단에 울려 퍼졌다.
빛없이 캄캄한 집 안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오는 빛과 연예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준혁의 엄마는 벽에 등을 기대고 이불을 덮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검은색 무지 반소매는 목이 다 늘어나 있었다. 그 옆에는 언제 먹었는지 모를 소주병 두 개와 과자 봉지들이 있었다.
그녀는 알코올의존자다. 40살 즈음부터 비정상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낮에는 소셜커머스 기업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술을 계속 들이킨다. 그녀가 술을 먹지 않았을 때와 술을 먹었을 때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술을 먹었을 때는 폭력성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남편, 즉 준혁의 아빠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도 알코올의존자다. 그의 아버지도 알코올의존자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었다. 비록 시골에 살았었지만 부유한 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 똑같이 그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심기가 거슬리거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술병을 손에 쥔다. 그는 술에 취하면 집에 가거나 잠을 자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끝까지 술을 들이켠다. 그는 점점 입지를 넓혀가는 중소기업의 과장이었는데, 술 때문에 회사에서 잘렸다. 밤낮 가리지 않고 3일 내내 술을 마시다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서였다. 거메진 피부와 초점이 없는 눈이었던 그의 모습은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 눈은 사람의 눈이 맞는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후 그는 지방 대학 졸업의 학력과 적지 않은 나이 덕에 구멍가게 같은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녀와 그는 알코올의존자고 그것은 정신병이다. 일반인들이 금요일 밤에 술 한 잔 기울이고, 2차 3차로 술을 먹으러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부류의 일이든 사소한 일만 생겨도 술잔을 들고, 술버릇은 점점 난폭해진다. 알코올 의존은 뇌의 호르몬을 변화시켜 일상생활까지 좀먹는다. 그녀와 그가 매일 풍기는 술 냄새는 준혁까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준혁은 무언가의 결핍이 무언가의 중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결핍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준혁은 둘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알아낸다 해도 그것을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채워주고 싶지도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준혁이 높낮이 없는 일정한 톤으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준혁을 힐끔 쳐다보고 다시 텔레비전을 봤다. 고개를 돌리는 간단한 행동조차 준혁에게는 로봇 같이 느껴졌고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넓은 땅 가운데 혼자 우두커니 있어야만 그 기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준혁은 초점이 없는 엄마의 얼굴을 볼 때 자신은 혼자라는 것,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음에도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사람을 더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신발장 바로 옆 자신의 방으로 준혁이 들어갔다. 곧이어 준혁의 아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준혁이 방에서 나왔다. 두 세 걸음 걸어 식탁 쪽으로 간 준혁이 휴대폰 불빛을 켜 식탁을 비추었다. 냄비에 국물은 없고 김치와 고기 조각이 말라비틀어진, 언제 요리 했는지 모를 김치찌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냄비 아래에는 두껍고 판판한 수능특강 문제집이 있었다. 준혁의 방에는 책상이 없어서, 엄마와 아빠가 술을 먹느라 집에 있지 않을 때면 준혁은 항상 식탁에서 공부를 했었다. 준혁이 냄비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자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냄비가 들렸다. 문제집에는 찌꺼기들이 냄비 모양을 따라 묻어 있었다. 준혁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준혁이 물티슈를 찾다가 화장실에서 나온 아빠랑 마주쳤다.
“인사도 안하냐?”
“오셨어요.”
준혁은 절대로 아빠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화장실 옆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 속에는 야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준혁은 텔레비전 옆에 가만히 섰다.

한번은 이랬던 적이 있다. 준혁이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여름방학 숙제로 가족과 함께 놀러갔다 온 후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제출하라는 숙제를 받아온 적이 있었다. 준혁의 아빠는 준혁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의 경기를 예매했다. 경기 당일, 출발 전 그는 자신이 제일 즐겨먹던 치킨집에서 치킨 두 마리를 포장했다. 혹여 버스에서 냄새가 날까봐 비닐봉지 3개를 덧씌워 꽉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 둘이 탄 버스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창가자리에 앉았던 준혁은 창 밖 풍경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경기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예매했던 자리는 상대팀 진영 쪽이었다는 것을. 서로 부딪치면 투웅 소리가 나는 주황색 긴 응원 풍선들 사이 그와 준혁의 흰색 풍선이 있었다. 상대팀이 홈런을 쳐 주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치어리더들이 춤을 췄다. 그때면 그와 준혁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준혁은 경기 내내 눅눅해진 치킨 껍질만 오물거렸고,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경기 속 선수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준혁은 집에 가서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선수들이 뛰는 경기장과 많은 관중 속 준혁과 준혁의 아빠의 모습은 없었다.
방으로 들어온 준혁은 벽에 등을 기대앉고 이어폰을 꽂았다. 준혁은 집에 엄마와 아빠가 있을 때면 항상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준혁이 벗어날 수 없는 집안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6월 중순의 햇볕은 뜨겁다. 에어컨이 없는 집 안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절로 난다. 준혁의 방바닥에는 원래 하얀색이었지만 색이 바래서 누레진 선풍기가 있다. 선풍기의 날개가 빨리 돌아간다. 날개가 돌아가는 내내 선풍기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습하지만 강한 바람에 준혁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준혁이 윗옷 목 부분을 잡고 펄럭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찬 물이라도 마셔서 더위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부엌 쪽으로 가니 식탁 위 널려있는 갈색과 초록색의 병들이 있다. 그 옆에는 병뚜껑들이 흩어져 있었다. 준혁은 술병들을 한 쪽으로 밀고 쓰레기봉투를 가져왔다. 준혁이 쓰레기봉투에 병뚜껑들을 손으로 쓸어 담다가, 멈칫했다. 은색 플라스틱 병뚜껑들 사이에 눈에 띄는 금색 병뚜껑이 있었다. 준혁은 집게 손 모양으로 금색 병뚜껑을 집었다. 준혁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병뚜껑에 적혀있는 흰색 글씨를 읽었다. 병뚜껑에는 ‘축 2등! 부산 미라지 호텔 이용권 3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준혁, 준혁의 엄마와 아빠 셋이 식탁에 다 같이 앉았다. 누구도 취해 있지 않았다. 준혁의 엄마는 신기한지 금색 띠가 둘러진 미라지 호텔 이용권을 손에 쥔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녀와야지, 뭐.”
준혁의 아빠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살면서 이런 일도 다 있나, 그는 생각했다.
“전 못 가요. 곧 시험이라.”
준혁이 식탁 모서리만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준혁이 가지 않겠다고 한 건 시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엄마와 아빠랑 여행을 가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준혁에게는 15살 즈음 이후에 부모님과 같이 놀러갔던 기억이 없다. 집구석에 같이 있기도 싫은데 여행이 무슨 말인가, 준혁은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1박 2일 동안만큼은 끊임없는 공부와 찜통 같은 집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한 번만 가자.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니?”
준혁의 엄마가 준혁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엄마가 정말 나랑 같이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남을 이용권이 아까워서 그러는 걸까 준혁은 생각했다. 준혁의 엄마의 옷가지 중 산 지 5년을 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들을 대부분 집에서 입었다. 보푸라기가 일어나거나 많이 빨아서 쪼그라든 세타들도 능숙하게 세탁해서 입고 다녔다. 그녀가 3년 전에 샀던 유명 브랜드의 제일 싼 흰색 운동화는 이미 색이 바랜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신을 만 하다며 기분이 좋을 때는 그 운동화를 신고 외출했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는 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아닐까, 준혁은 생각했다. 우연히 이용권이 생겨서 가는 거야, 이용권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놀러가지 않았을 거야라고 준혁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드디어 여행 전날이다. 준혁과 준혁의 엄마 아빠 셋 다 슬리퍼를 끌고 동네 작은 마트로 향했다. 준혁의 엄마 손에 들려있는 살짝 구겨진 흰색 포스트잇에는 일회용 샴푸 등 세면도구와 자잘한 간식거리들이 적혀 있었다. 몇 안 되는 가로등조차 깜빡거리는 골목을 5분 정도 걷자 동네 마트가 나왔다. 알록달록한 세일 안내 플랜카드가 항상 붙어있는 마트였다. 준혁의 엄마는 생활용품 코너에서 손가락 한 뼘 크기인 샴푸, 클렌징, 바디워시, 린스가 담겨있는 작은 파우치를 가져왔다. 준혁의 아빠는 장바구니에 봉지과자들과 음료수를 쓸어 담았다. 술을 네 병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돈을 아끼려고 하는 준혁의 엄마에 비해 그는 잘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준혁은 가만히 서서 핸드폰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검색했다. 하지만 1박2일인데다가 호텔로 가니 세면도구 외에는 특별히 필요할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이렇게 많이 담았어.”
준혁의 엄마가 장바구니를 보며 인상을 쓴 채 말했다. 그녀가 준혁의 아빠를 째려봤다. 그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웃고는,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 뒤에는 준혁의 아빠와 준혁이 따라갔다. 평소와 같았으면 그녀는 그를 타박하며 장바구니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빼내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혁은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두 사람이 평소보다 들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그녀와 그의 선명한 모습은 준혁에게 오랜만이었다.
기차 시간은 아침 9시, 지금은 7시 반이다. 준혁이 다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는 먼저 일어나 이미 씻기까지 한 상태였다. 엄마는 부엌에서 햄과 참치 통조림들을 배낭에 넣었고, 냉장고를 열고 작은 사각 김치 통을 꺼냈다. 식탁에 빈 플라스틱 물통이 놓아져 있었는데, 그녀는 물까지 싸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호텔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지 알 리가 없었다. 준혁은 이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음식을 담는 엄마에게 굳이 다가가서, 이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빼라고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의 아빠는 베란다에 있었는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베란다에서 텐트와 그 안에 깔 매트, 돗자리를 꺼내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덕분에 5평정도 남짓한 거실은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준혁은 엄마의 배낭과 거실에 널려있는 짐들을 보며 다 들고 갈 수 있으려나, 생각했다.
가본 적 없는 사람도 익숙하다 느낄 만한 서울역 안에는 온통 분주한 사람들뿐이다. 그 속에 준혁과 준혁의 엄마, 아빠는 멈춰 있었다. 준혁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돗자리를 내려놓았다. 준혁이 내려놓자 엄마도 음식이 가득 담겨있는 분홍색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텐트와 매트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마주치는 승무원들을 붙잡고 물어보며 겨우 뽑은 기차표.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세 사람 중 지방 출신인 준혁의 아빠만 유일하게 기차를 타봤는데, 그마저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이들이 타야하는 열차는 부산행 9:00 행복열차이고, 지금 행복열차 승강장 앞이다. 그런데 셋은 각기 다른 이유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유난히 준혁의 엄마가 난처한 표정이었는데, 기차표를 검사하는 곳을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준혁은 그냥 최근에 방침이 바뀌었거나, 승객들이 탑승 한 뒤에 검사를 하리라 생각했다. 준혁의 아빠는 빨리 짐을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시간은 8시 55분. 준혁의 엄마가 목소리를 섞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
준혁의 아빠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무 의미 없이 나온 말이 준혁의 엄마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는 당장 기차가 올 텐데 어떡하나, 이곳이 진짜 승강장이 맞냐고 투덜거렸다.
“검사를 안 해도 우리 자리인건 안 변하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말투나 단어, 목소리 크기와 톤까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을 준혁은 잘 알고 있었다. 준혁은 최대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주말이라 승강장은 준혁의 가족처럼 놀러가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웃고 떠들고, 분주해보이기도 한 사람들 속에서 준혁의 가족만이 짐을 내려놓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준혁의 아빠는 손으로 연신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지금 부산행 행복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익숙한 중저음 여성 목소리의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승강장 앞에 한줄로 섰다. 준혁도 바닥에 있던 돗자리를 챙겼다. 준혁과 준혁의 아빠는 기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 쪽으로 향했고, 준혁의 엄마는 그들을 뒤따라갔다.
이데아만이 변하지 않는 불변의 세계이다, 준혁이 노트를 보며 입으로 중얼거렸다. 준혁은 기차 안에서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좌석 4개가 서로 마주보는 형태라, 준혁이 노트를 봐도 맞은편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준혁은 집중이 되지 않아 주위를 둘러봤다. 옆줄에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모와 6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아빠는 이가 다 보이도록 웃으며 아이에게 과자를 먹여주었다. 아이는 짓궂게 웃으며 도리질했다. 아이가 도리질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부모는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나에게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준혁은 가만히 옆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준혁의 아빠의 희미한 코 고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는 서울역까지 온 것만으로도 지치는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준혁의 아빠는 그새 고개를 뒤로 젖혀 잠을 자고 있었다. 코고는 소리는 희미해서 굳이 준혁이 아빠를 깨울 필요는 없었다. 준혁의 엄마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이들은 체력을 비축해 두는 걸까, 아니면 그저 피곤해서 자는 걸까. 아침만 해도 기대에 찬 눈빛이었는데, 금세 사그라졌다. 준혁은 다시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준혁은 어렸을 적부터 책읽기나 공부를 좋아해서 그런지 남들보다 집중력이 좋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집중이 도저히 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흐려 보이는 창문 밖 풍경, 그리고 소곤소곤 떠드는 옆줄의 가족, 지쳐 잠든 준혁의 엄마와 아빠까지. 들뜬 기분이어야 할 여행의 시작은 한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한 낭만이 가득할 것 같았던 부산 바다는 생각과 달랐다. 낮 12시라 하늘이 제일 맑을 때인데, 지금은 비가 오기 전처럼 탁하고 짙은 색이기만 했다. 덕분에 철썩철썩 치는 파도는 힘이 없어 보였다. 놀러온 사람들도 몇 없어 보였다. 모래사장 위 텐트도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었다. 준혁의 엄마는 메고 온 갈색 크로스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검은색에 테가 두껍고, 오른쪽 알 옆에 어느 회사인지 모를 금색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준혁의 아빠는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검은색 썬 캡을 쓰고 있었다. 준혁은 바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를 켜 자세를 잡았다. 비록 날이 좋진 않아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준혁 주위의 평범한 10대 친구들처럼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되냐?”
준혁의 아빠는 짐이 무거운지 바닥에 내려놓았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준혁은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는 미라지 호텔 위치를 검색했다. 엄마는 정말 지쳤는지 말이 없었다. 준혁이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텔 안은 조명과 벽 색 등 전체적으로 갈색 톤이었다. 지친 엄마와 아빠를 뒤로 하고 준혁이 프론트에서 키를 받았다. 방은 3층이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도대체 뭘 했다고 부모님이 지친 걸까, 준혁은 궁금해 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준혁의 엄마와 아빠의 표정이 바뀌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베란다를 통해 부산 바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날씨는 흐렸지만 감탄할 만 했다. 그 옆에는 깔끔히 정돈된 흰색 2인용 침대가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은색 스탠드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세련돼 보이는 주황색의 대리석 식탁이 있었다. 준혁은 배낭과 돗자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준혁의 집에는 침대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준혁은 친구 집에 있는 침대를 보고 속으로 부러워했던 적이 많았다. 준혁의 엄마는 베란다 창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지쳐 보였던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준혁의 아빠는 호텔 방이 신기했는지 싱크대 물을 틀어보기도 하고,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싱크대 위 서랍 속에는 각종 냄비와 그릇, 컵들이 진열 돼 있었다. 준혁의 엄마는 바다를 바라보다,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황급히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바구니에 담아온 각종 통조림과 반찬들을 냉장고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 크지 않은 흰색 냉장고 안에는 이미 생수 몇 병이 있었지만 그녀는 따로 챙겨온 플라스틱 물통을 냉장고에 넣었다. 준혁은 가져온 스킨, 로션과 책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서 조개구이 좀 먹자.”
준혁의 아빠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재촉하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혁의 엄마는 조개구이집에 가기 전에 해변을 좀 걷고 싶다고 말했다. 준혁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엄마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학교와 집만을 반복해 다니다가 바다에 오니 준혁은 그나마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에게도 바다는 오랜만이었다. 준혁이 어렸을 적, 그러니까 유치원에 다닐 때 셋은 자주 놀러 다녔었다. 바다는 물론이고, 놀이공원이나 한강도 자주 갔었다. 잘 놀러 다니다가 준혁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셋이 따로 놀러 간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준혁이 공부로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고, 사춘기가 온 것도 그쯤이었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의 알코올의존증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삶도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서먹서먹하고 말도 하지 않는데, 놀러갈 리가 만무했다. 흐린 해변에 서서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해변을 걸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신발이 모래 속에 파묻혔고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준혁의 아빠는 준혁을 보며 예전에 야구장에 놀러갔던 때를 떠올렸다. 준혁의 현재 모습은 기억 속 그때와 달랐다. 지금의 준혁은 키가 제법 커졌고, 젖살이 빠지고 턱선이 굵어졌다. 물살도 빠져 어깨선과 목젖이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그때는 정리되지 않은 덥수룩한 곱슬머리였지만 지금은 보기 좋은 생머리가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준혁의 아빠와 준혁에게는 같은 위치의 점이 있었다.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이다. 이 외에도 준혁의 아빠와 준혁의 공통점은 많았다. 고기 중에서도 유난히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거나,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는 등, 외에도 사소한 것들이 많았다. 준혁의 아빠는 준혁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닮은 모습을 보며 오히려 불안해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을까봐 그렇게 생각했다. 야구장에 갔을 때, 아들과 좋은 나들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좋은 아빠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 할 것이라고 준혁의 아빠는 생각했다.
창문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조개구이집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준혁네 가족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준혁의 엄마는 이번만큼은 돈을 아끼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 시킨 건 모듬 조개구이 중 가장 작은 세트와 바지락칼국수 2인분이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 두병이요.”
주문 한 지 5분 뒤 준혁의 아빠는 큰 목소리로 손을 든 채 말했다. 그 뒤로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준혁의 엄마와 아빠에게 소주 2병이란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자 파멸의 길이기도 했다. 소주 2병을 마신 그들의 머릿속에는 밀린 세금이나 준혁의 학비와 급식비, 앞으로의 불확실한 생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학교생활은 좀 어떠니?”
정적을 깨고 준혁의 엄마가 준혁에게 물었다. 어색함을 깨려는 말이었지만 내용이나 어투 전부 형식적이었다.
“그냥 잘 지내고 있어요.”
준혁이 입 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순간과 분위기에서만큼은 웃으면서 대답해야 할 것 같다고 준혁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준혁은 평소에 엄마와 아빠랑 대화 할 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를 다른 가족들처럼 많이 하지도 않았다.
준혁이 엄마와 아빠랑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준혁은 술에 취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본 후, 자신이 알던 엄마와 아빠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얼굴을 보기 싫어했다. 얼굴을 보면 안 좋은 기억이 자꾸 오버랩 되기 때문이었다.
그 무수한 안 좋은 기억들 중 제일 큰 사건은 준혁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길고양이와 떠도는 개들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새벽 1시, 준혁의 엄마는 여느 때처럼 술을 잔뜩 마신 채 가만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준혁의 아빠가 집으로 들어왔고, 다짜고짜 있는 힘껏 지갑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가만히 있던 엄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준혁의 아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카드가 다 막혀서 결제를 못했다, 돈이 없으니 파산을 해야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준혁의 엄마는 그걸 듣고 또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준혁이 방에서 이어폰을 꽂고 공부하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와 보니 엄마와 아빠는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온전히 그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준혁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귀 바로 옆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준혁의 아빠가 갑자기 윗옷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준혁이 상황판단을 하기 전에 준혁의 아빠는 라이터 불을 켜고 식탁에 던졌다. 식탁에 있던 준혁의 얇은 문제집 모서리에 불이 붙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준혁은 황급히 달려가 문제집을 집어 바닥에 여러 번 내리쳤다. 다행이 작은 불이라 금방 꺼졌다. 준혁은 문제집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이 준혁의 아빠는 다시 집 밖으로 나갔고, 엄마는 거실에 가만히 서있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준혁의 엄마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문을 닫는 손길에 힘이 없었다. 준혁은 모서리가 검게 탄 문제집을 부엌에 있던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조개가 담겨진 쟁반을 들고 준혁네 가족이 있는 테이블로 왔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네요. 바다도 예쁘고, 좋죠?”
주인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유, 그럼요.”
준혁의 아빠는 당연하다는 웃으며 맞받아쳤다. 준혁의 엄마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아저씨의 말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준혁의 엄마는 준혁을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해 보여야 하는 걸까, 준혁이 생각했다. 준혁은 주인아저씨와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난건 아니지만 꼭 묻고 싶었다. 아저씨, 정말로 우리가 좋아 보여요? 아빠, 바다를 제대로 구경하기나 했어요? 술 생각밖에 없진 않아요? 우리는 그냥 좋은 척 하는 거잖아요 엄마. 준혁은 모두가 답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맛있겠다. 얼른 먹자.”
준혁의 엄마가 집게로 조개껍질을 벌리며 말했다. 때마침 주인아주머니가 바지락 칼국수를 들고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준혁의 엄마는 조개껍질 속살을 떼어 준혁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준혁의 아빠는 칼국수 면을 잔뜩 퍼 준혁의 앞에 놓아주었다. 국자로 국물을 따로 퍼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도 조개와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 뒤로 그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조갯살이 불판 위에서 타는 틱, 틱 하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저녁에 비가 올 예정인지, 6월이라 해가 늦게 지는 날들에 비해 오후 5시는 캄캄했다. 준혁과 준혁의 엄마, 아빠는 조개 구이 가게에서 나와 미라지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모래사장 위, 준혁이 제일 뒤처진 채 걸어가고 있었다. 준혁은 가만히 멈춰 섰다. 오전에 찍지 못한 바다 사진을 찍기 위함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니 돌아볼 수라도 있게 무언가를 남겨야겠다고 준혁은 생각했다. 준혁은 핸드폰 프레임 안에 모래사장과 먹먹해 보이는 바다, 수평선과 하늘까지 담았다. 화면 가운데를 살며시 눌러 초점을 잡았다. 준혁이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초점이 흐려졌다. 핸드폰 화면으로 준혁의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잔잔히 움직이는 물살 앞에 무릎을 쪼그려 엉덩이가 바닥에 닿지 않게 앉았다. 그녀는 오른손을 뻗어 파도치며 오고가는 바닷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준혁의 아빠는 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준혁의 엄마 옆에 가만히 섰다. 준혁은 잠시 핸드폰을 내리고 이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준혁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도 저랬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생각했다. 준혁의 아빠는 묵묵히 준혁의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바다엔 이상하게도 준혁과 준혁의 엄마와 아빠밖에 없었다. 준혁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핸드폰 프레임 안에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담았다. 그대로 찰칵, 하고 사진이 찍혔다.
금세 밤은 깊었고 얇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혀 톡톡 소리가 났다. 준혁의 아빠는 술에 살짝 취한 채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준혁은 침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준혁의 엄마는 술을 별로 먹지 않아 말짱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햄, 참치 통조림들과 김치, 반찬통, 그리고 플라스틱 물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옆에 있는 장바구니에서 즉석밥 3개를 꺼냈다. 준혁의 엄마는 요리를 하려고 했다. 준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갔다. 준혁이 엄마가 아무렇게나 놓은 통조림과 반찬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준혁이 식탁 위에 있던 룸서비스 안내와 메뉴판 책자를 발견했다. 준혁은 그 책자를 식탁보 아래에 끼워놓았다. 준혁의 엄마는 싱크대 위에서 은색 스덴 냄비를 꺼냈다. 그녀는 냄비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보기도 하고 손으로 톡톡 쳐보기도 했다. 그녀는 냄비 안에 돼지고기랑 미리 썰어 온 김치를 넣었다. 준혁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끓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준혁은 보고 있지 않은 척 몸을 돌려 애꿎은 식탁 위를 정리했다. 그녀는 냄비 앞에 서서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준혁은 식탁에 가만히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글보글 소리가 나면서 김이 나자 그녀는 집에서 챙겨온 양념들을 넣었다. 통에 따로 덜어 온 다진 마늘도 넣었다.
돼지고기와 김치가 들어가고 국물이 넉넉한 김치찌개가 완성되었다. 식탁에는 즉석밥 3개가 놓여 있었다. 준혁과 준혁의 엄마, 아빠는 식탁에 앉았다. 굳이 냄비에 고개를 가까이 해 냄새를 맡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준혁이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왠지 많이 먹어 본 것 같은 익숙한 맛이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밥을 먹고, 주말에는 대부분 편의점 음식으로 식사를 때우는 준혁에게 김치찌개는 흔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매일매일 술을 먹고 집안일에 신경을 잘 쓰지 않던 엄마와 아빠 탓에 집에는 보통 버려야 할 음식들밖에 없었다. 준혁은 이럴 때면 굳이 해 먹기보다는 그냥 굶는 쪽이었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도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은은한 조명이 켜진 호텔 방 안에서 김치찌개라니, 크게 거슬리지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이질감이 있었다.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어?”
준혁의 아빠가 밥을 빠르게 떠먹다 말고 준혁에게 물었다.
“네, 재밌었어요.”
준혁이 오랜만에 아빠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하면 정말 재미있어질까, 하는 바람에서 나온 말투와 눈짓이었다. 준혁의 엄마는 준혁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나란히 식탁에 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쳐갔다. 호텔 베란다 창문에는 빗방울들이 매달려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비가 올 것이라 잠시 쉬어가는 차원에서 그치는 걸까, 아니면 달빛에 비가 말라가서 그치는 걸까. 전자든 후자든 희망을 가져보기엔 충분한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언제 흐렸냐는 듯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평범한 여름날처럼 햇빛이 쨍하게 내려왔다. 준혁네 가족은 아침부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퇴실까지 2시간 전이었다. 준혁의 아빠가 여행 전날 마트에서 샀던 과자들과 술병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가방에 다시 담았다. 준혁의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였던 냄비의 물기가 다 마른 것을 확인하고는 싱크대 위에 다시 놓았다. 그녀는 식탁 위와 냉장고에 있던 빈 반찬통들을 장바구니에 다시 넣었다. 준혁도 짐을 정리했다. 책들을 가지런히 포개 배낭에 넣었다. 차곡차곡 짐을 정리하던 준혁이 갑자기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곤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와요, 바다.”
강한 햇빛을 받아 미약하게 움직이는 바닷물이 글썽였다. 준혁은 물로부터 세 발자국 떨어져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도 준혁의 양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부실만한 햇빛이었지만 준혁의 엄마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넓은 바다를 보며 그동안의 자신의 생을 떠올렸다. 그녀는 인생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생을 하다 보면 삶을 구원하듯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오고, 그 행복을 누리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힘들어 진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 중 진정한 행복이 찾아왔던 때가 있었었나, 그녀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어 그녀는 멀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믿으면 정말 행복해질까봐. 하지만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기에 이런 생각들을 더 하려고 마음먹었다.
준혁의 아빠는 준혁이 7살이었을 때 자신과 바다 속에서 놀았던 때를 떠올렸다. 물을 무서워하던 준혁은 튜브를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물 앞쪽에서만 헤엄쳤었다. 그는 준혁의 가감 없던 미소를 그리워했다. 그렇지만 그 미소를 거둔 건 그 자신이었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과거에 한없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끊임없이 마주치고, 부딪치려 해야 한다. 한 가정의 떳떳해 보이는 가장인 그는 누구보다도 겁쟁이였다.
준혁은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다. 준혁은 바다를 보며 현실의 모든 것을 다 잊고 환상 속에만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끝없는 바다처럼 자신에게 밀려 올 현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실은 피하려 하면 할수록 뇌리에 깊게 들어왔다.
준혁은 바다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준혁의 엄마와 아빠도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독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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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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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잔인한 꿈 속이길 바랐어 물 밖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내 가슴 눈물을 한방울 흘릴 때마다 시구절을 낳아냈어 검은 화면 속 퍼지는 음울한 울음소리 생명을 만들어내거나 책임지는 것, 이어 가는 것은 결정으로 끝나선 안된다고, 남은 생명을 가차 없이 버린 내가 말했어 무너진 건물 속 새빨간 장미이길 바랐지만 나는 물에 적셔진 판자때기일 뿐이었어

 

고양이로 환생하길 꿈꾸던 너는 구멍 뚫린 시험지를 입고 있지 나는 곧 무너질 집 속에 서 뒤로 달리는 중이야 네가 접어 준 종이비행기를 만지며 하늘을 나는 꿈을 꿔 정작 너는 여우탈을 쓴 채 내게 악몽으로 찾아오고, 있잖아 나만 모르는 내가 주인공인 각본 속에 있나봐 개미처럼 톱니바퀴처럼 추락하는 별들처럼 철저하고 정교한 각본 시곗바늘은 더 이상 한발짝도 갈 수 없대

 

혼자가 된 눈물과 머리카락의 양은 비례해 무자비한 나의 가위질 그렇다면 탯줄을 잘랐을 엄마의 손길은

 

엄마 나를 닮은 곰인형이 숨을 토하다 솜을 토해 곧 길을 잃을테니 찾지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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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일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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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너를 읽어가는 과정일까 네가 나에게 너의 성경책을 맡겼던 때가 떠올라 나는 그것이 전부 내 것이라고 착각했었지 나는 달리는 모든 것들 너는 가라앉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했었어 밤이면 나는 하늘을 덮어 턱 끝까지 끌어올렸어 내 속삭임을 들은 분홍색 별이 지구로 추락할 땐 내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통성 기도를 했지

 

세상에 이해 받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니, 너는 존재까지도 부정 당하고 비가 쏟아지자 같이 쏟아지는 무지개들 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아 내가 너의 언어를 찾았어 우주속에서 우리 둘만 고독해져도 서로의 허리를 뿌리삼아 버티자고, 이번 여름에는 내내 너만을 노래할 테니 제발 지지마 나를 보더니 눈을 둥글게 말아 환하게 우는 너

 

빗물을 흘리는 초록 잎들이 스스로 자신을 잘라내겠다 속삭여 내 한숨은 언제부터 천둥이 되어버린 걸까 태양에게 큰 죄를 산 걸까 도저히 빛을 볼 수가 없잖아 지워진 네가 잘못인건지 빠져버린 내가 잘못인건지 누구에게 탓해야 할지 난 지금 삐걱거리는 세탁기 안이야

 

무더운 여름보다 더 무더운 감기에 걸릴 줄 몰랐어 있잖아 너와의 마지막은 꼭 보고 싶었어 영원할 감기는 치밀한 선인장을 껴안는 것, 나의 세례는 너만이 거행할 수 있어 아니면 난 무명, 무세계(無世界)로 떠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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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삼켰기에 한없이 돌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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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막 가운데에 유일이 입을 다물던 별이 박혔어요 그 이후 창조주가 부린 오지랖들로 만들어진 나의 이생 나는 단명한 여행가의 캐리어처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다 당신이 실수로 누르고 간 버튼에 빛바랜 나에게서 바람이 질질 새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의 모든 결핍의 시작은 다정한 사랑의 높낮이일까요 당신 덕분에 생긴 후유증을 당신으로 해결해야 한다니 참 웃기죠 덕분에 언어의 색은 바뀌었고 영원히 어색할 테죠 이생은 우리가 삼킨 전생들 때문에 생긴 체기(滯氣)에요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은 먼지를 토할 자신이 있어요 어중간한 빠르기로 돌아가는 나의 꽃말은 흩어진 음표

 

회전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온몸이 떨려요 끊임없이 고개를 주억거려요 나는 그대를 보지 않을 때도 온몸이 뜨거운걸요 그대는 눈빛으로 내 날개를 찢고 다정한 말로 몸통을 부러트렸어요 그대 손짓 하나에, 그 빌어먹을 규칙 없는 손짓 하나에 생사를 오가잖아요 그대 때문에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이제 내 힘으론 이제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 뜨거운 빛 속이었지만 당신만은 왜 내 앞에서 항상 두 눈이 휘도록 웃었는지 이젠 알 것 같아 나 말이야 410000000000000000000kw를 전부 그대에게 쏟아부었어

 

내가 사랑하는 그대의 사랑은 누구에게 탓해야 할까요 정착하지 못하고 좌표 위를 떠다니는 우리의 추억들 한없이 헤매던 나는 하나의 선이 만들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대에게는 이미 피하고 싶지마는 피할 수 없는 태양이 있었나 보죠 나는 더 이상 돌아갈 힘이 없어졌어요 의미도 유래도

 

나 이제 날갯짓을 멈추고 우리가 매일 헤어졌던 대형마트 앞 정류장에 무기한 동안 서 있을게 그대에게 쓸모는 없겠지만 한 번이라도 보러 와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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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마시멜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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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글자는 쉽게 무너져요, 선생님 승자들은 신발에 노란 꽃을 달고 달려요 명심해요 미친 악마는 반드시 시간을 정해두고 당신을 찾아와요 사랑이란 이름 아래 살을 부딪치면 가난만 생겨나요 그게 유일한 유희지만요 거기 공을 높이 든 아저씨는 입을 다물어주세요 개천은 이미 썩었어요 우리의 손톱은 패자의 치아만큼 뭉툭하지만 뭐든 만져보자 숨이 턱턱 막히는 게 모두의 병은 아니야 골목 안쪽에 숨어 바들바들 떠는 병원에 들어가 봐 괜찮다고 말하는 네 입술 사이로 보이는 뱀같이 늘어진 소매

 

자 하나 둘 셋 하면 셔터가 눌리고 바위가 푸름과 입 맞춰요 우리가 낭만으로 날아다니는 바다가 갈매기의 변소에요 그 새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뱉어요 그런데 우리는 공식 없던 모래 놀이를 잊고 빈틈을 어딘가에 대입하려 해요 그래서 우린 썩어가고 줄지어 거울의 방으로 가요 그런데 그 거울의 방 안에서 A는 잘 걸어가지만 B는 비틀거려요 Z는 넘어져서 아래로 곤두박질쳐요 Z는 일어나려고 하죠 근데 수많은 A와 B들은 Z를 비웃어요 Z에게 손가락질해요 Z 뒤에서 수군거려요 Z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요 자신들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가 동경하는 푸른 것들은 달빛 속에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달이 무엇인지 몰라요 모든 것들이나 거절들을 거절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이미 창조주에게 거절당해서 여기 온 거야 이 바보야 안 그랬다면 우릴 이렇게 놔두시겠어 이리저리 흩어지는 인생의 그래프가 뭐가 중요하냐는 당신의 말을 믿었어요 그 속에 짙은 선이 있는 줄 모르고 나는 자꾸 넘으려 했죠 선생님 그 시절의 우리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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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강에서 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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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피부 위 진득이 눌어붙은 흰색 알코올 딱지
원인은 그저 유전이거나 불명이었고,
엄마는 죽음만이 답이라고 했다
그가 모는 자동차의 기름도 알코올
차는 벌거벗은 투견처럼 달리고
지금까지 삶을 연명해 온 건
우리 가족이 꽉 쥔 낡은 십자가 덕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 사이 내 피부는 어디론가 숨기 시작했는데
나는 우울이란 질문의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알고 있었던 것은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나는 그 위 물구나무를 선 채 있다는 것
그런데 겁쟁이인 나에게는
실수로 누군가 깬 거울 조각 같은 게 필요했다

아빠에게 보이지 않은 병을 물려받은 나에겐
왼쪽 눈 아래 희미한 눈물점이 있다
나는 길 위에서 아빠와의 공통점을 찾을수록 좌절하곤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달콤했다면 어땠을까
탄생이 불행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았을까
어쩌면 좋아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깊은 물속이야 엄마

누군가에겐 힘이 될 푸른 물에서
익숙한 아빠의 술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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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 비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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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발목까지 와야 사랑이 끝난다 나는 거울을 보며 또 거짓말을 하고 턱까지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수 있다 나와 당신은 불행과 연필과 종이가 없으면 만날 수 없다 우리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 뜻 없던 명찰은 이미 허공에서 찢겼다 나는 당신 앞에서 항상 잿빛이어야 한다 당신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척 그저 성인이면서 어른인 척 사실 내 눈에는 우리 둘다 십자가 아래 있어도 틀렸거든 당신 심장은 왼쪽으로 뛰고 내 심장은 오른쪽으로 뛴다 그리고 내 사랑 손가락이 닿으면 금방 타버릴 빨강인지 바늘이 달린 투명인지 나도 몰라 어쨌든 이 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단 하나

다정함을 먹고 불어난 마음이 온몸에 들어찼다 희미한 입김이라도 필요했던 맨몸의 심지에는 붉은 옷이 필요했던 하지만 이 모든 세계는 맞물리지 않았고 그 틈을 채운 나를 좀먹던 재채기들 그만큼 딱 사랑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한걸음도 떼지 못한 내 사랑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돌아보면 있을 아픔들 그래도 덕분에 눈을 감지 않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성경책 위에 두 손안에 해바라기 위에 뒤틀린 안경 안에 먹구름 위에 추락하는 별 하나 탕, 탕, 탕, 탕 그대 이름은 나를 향한 총성 소리로 들리고요 그대를 떠올리려 하면 나는 한없이 가라앉고요 덕분에 영원히 그대를 원하겠네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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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는 검은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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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꽃잎이 들은 총을 놓지 않았다 당신은 낮은 사다리에서 떨어져도 끝이고 보닛 위에 선다 해도 움직일 수 없다 빽빽하지만 회색인 편지는 누구에게도 전해질 수 없다 당신은 반짓구멍에 초록색 머리를 집어넣을 수도 없다 초록색들은 죄다 자유로운데 당신은 아니다 철새는 당신과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시끄럽게 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목숨을 자동차 창문 밖으로 내놓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천장이 다 무너진 집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침묵도 말도 긍정이 아니다 하느님 하나님 그 외 이름 모를 창조주님 마음대로 만드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게다가 남들에 비해 결함까지 있잖아요


당신이 첫 장만 본 무지개색 시집들이 방바닥을 채운다 당신은 화면 속 입을 다물고 희망을 외치는 모습에 넘어갈 만하다 손톱 옆 살을 먹고 자라나는 새싹은 대부분 초록색은 아니지만 무채색이다 공사장 안에서 달려봤자 눈 뜨면 출발점이고 먼지만 날린다 심장이 뛰어야 다리도 뛰는데 숨을 이어갈 숨이 딸려서 숨을 끊는다 한 평생 편히 눈 감아 본 적 없는 당신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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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게를 버렸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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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견처럼 달리는 그의 차를 누가 막을 수 있나
그의 알코올이 기름 되어 차가 움직인다


그의 냄새 덕분에 그의 가족들은 뒤로 걸어갔다
그들의 인생이 검게 물들어갔고
십자가는 낡아빠져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탄생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는 장남이었고 새싹부터 흔들렸었다
그와 그의 자식에게는 눈물점이 있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차치할 수 밖에 없는것 또한 불행이었다


만개하는 벚꽃 아래 아픔이 부서진다
불꽃이 튀기고 차는 보기 흉하게 단단히 쪼그라든다


가족의 사고가
가족의 죽음이
앞이 보이지 않는 탈출구가 된다

절뚝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그들이
탈출구에서 온전히 걸어 나갈 수 있을지
그것이 또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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