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태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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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태양에게」

 

[0. 네가]

 

20도 안팎의 온도임에도 수레를 잡은 손은 금세 땀에 절었다. 오르막을 향해 한발 내딛을 때마다 손바닥이 미끄러져 내렸다. 길 한 구석에 멈춰 서 수레를 세웠다. 숨을 고르며 들여다본 손바닥에는 온갖 고철과 수레의 손잡이에서 묻어난 녹이 배어 있다. 나는 두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쪼그려 앉았다.

 

빈틈없이 깔린 아스팔트 바닥이 시야에 가깝게 다가왔다. 한 군데 빠트린 곳도 없이 이어진 까만 알갱이들은 장벽과 같이 위와 아래를 가르고 있었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반대쪽에 무엇이 존재하긴 하는지 그 자체를 의심케 만드는, 그런 견고한 벽이었다.

 

태양이 이변을 일으켜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한 그 날, 아직 시공도 다 끝나지 않은 지하 도시로 모두가 몰려들었다. 일부는 태양빛을 받아 죽고, 일부는 인원 초과로 쫓겨나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파에 깔려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 터전을 일궜다.

 

이 바닥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밟힌 그 날 이후로,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흔한 범죄에 한 가지 종목이 추가되었다. 드릴이든 망치든, 온갖 장비들로 아스팔트 바닥을 깨부수는 공공기물 파손 죄다. 밤새 요란하게 저지르던 범인은 제 몸 하나 뉘일 만큼의 공간도 파내지 못한 채 새벽을 맞기 일쑤였고, 그가 이름 위에 새로이 한줄 그어가며 일군 아스팔트는 금세 일감이 고픈 중장비들에 의해 원상 복구되곤 했다.

 

조그만 꼬마였던 나는 그 골목을 지박령처럼 서성였고, 내가 자라 수레를 끌기까지 골목의 밤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예의 범인들도 비록 일방적일지라도, 훌륭한 대화상대가 되어주었다.

 

망치보단 드릴이 낫지 않아요?
소리가 덜 나는 무언가, 그러니까 염산 같은 걸로 녹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요란하면 잡힐 거고 잡히면 당신의 수고는 다시 시멘트로 밀봉될 텐데.
아니 아니, 어차피 평생 경찰을 피할 수도 없을 거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닌데 왜 하세요?

 

나는 끝없이 질문을 던졌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범인은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 아래, 깊숙이 파묻힌 게 흙인지, 과거인지, 아니면 나인지.

 

가로등 없는 길바닥의 어둠은 그의 표정을 가렸지만 목소리는 가리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어버린 귀는, 미묘한 높낮이와 떨림으로부터 비롯된 쓸쓸함까지도 한껏 받아들였다.

 

그때 그의 말을 내가 이해했던가? 아니, 지금은 이해하나? 나는 골목에 주저앉을 때마다 물음을 반추한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대답을 안고 자리를 옮긴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발 밑 깊숙이 파묻힌 게 무엇인지 모른다.', 고.

 

푸르게 칠해진 천장 빛이 점차 어두워져갔다. 6월경이니 점등 속도가 느리기는 하겠지만 서두르는 편이 나았다. 완전히 점등되고 나면 가로등이 희귀한 이 동네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암흑천지가 되었다. 지상에는 해가 져도 또다른 무언가가 떠올라 밤을 밝혔다지만 나는 기억나지도 않는 오래전의 이야기다.

 

나는 몸을 일으켜 수레를 끌 준비를 하였다. 그때, 하수구 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빛을 순간적으로 반사해 시선을 끄는 게 제법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다시금 발치에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끌던 수레를 놓고 시커먼 구멍 속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조용히 입을 다문 줄만 알았던 하수구는 내가 다가서자마자 시위하듯 악취를 뿜어냈다. 깊지 않은 곳에서 담배꽁초 사이에 숨은 동전이 보였다.

 

나는 수레에서 집게를 꺼내 하수구 틈새에 집어넣었다. 손가락만 살짝 창살에 댄 채로 동전을 잡아 올리자 쇳덩이의 표면에서 잿가루와 먼지가 떨어졌다. 후후 불어 그림을 확인하자 볼록 튀어나온 양각 숫자가 보였다. 500원이었다. 크기도 크고 학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구(舊)동전인 것이 분명했다.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담벼락, 바닥 대신 화분에 심어진 몇 송이의 민들레, 간간이 나뒹구는 쓰레기를 지나서 달렸다. 바닥의 작은 요철을 만날 때마다 수레는 요란하게 달그락거렸다.

 

주택가와 동떨어진 채 우뚝 서 있는 창고의 문을 등으로 밀었다. 그리고 뒷걸음질 쳐 창고 안으로 수레를 들였다. 끼익 대는 철문이 바닥에 끌리고 형광등의 매서운 불빛들이 쏘아졌다.

 

“찬이냐?”

 

어떤 용도인지 모를 기계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다. 그 가운데 앉아 스패너를 돌리던 남자가 나를 보았다. 내가 아는 한 언제나 똑같은 안경을 끼고 있던 그는 흰 머리카락을 모자 안 깊숙이 품고 있었다. 그는 수레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안경을 바짝 올려 쓰고 수레 안을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손에는 몇 가지 기계들이 들렸다.

 

“이거랑 이거는 kg당 1000원, 나머지는 420원씩.”

 

“왜 저번보다 안 나가요? 무겁긴 훨씬 무거운데.”

 

“무게보단 용도가 중요하지. 녹여서 쓸 고철이야 차고 넘쳐.”

 

나는 그가 건네는 돈을 대충 어림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위인들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 무게감을 살갗으로 느끼며 바닥에 앉았다. 힘 풀린 다리를 좀 쉬게 해줄 요량이었다. 멍하니 앉아서 바닥의 나사들을 쌓으며 놀고 있자니, 그는 다시 스패너를 들었다. 하루 종일 온 동네를 뱅뱅 돌아 찾아온 기계들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져 나가며 속을 드러냈다. 똘똘 말린 나사들과 톱니바퀴, 그리고 무언지 알 수 없는 나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괜히 바닥만 툭툭 걷어차며 눈을 끔벅거렸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기계가 오늘따라 눈앞에서 빙글댔다.

 

“그거, 하고 있는 건 잘 돼가요? 로카튼지 로킷인지 뭐 날아간다는 거.”

 

“인공위성에 가깝긴 하다만, 뭐, 이름이야 어찌됐든 이제 전보다는 좀 모양새가 나지 않냐?”

 

그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반팔 정도 길이의 철 덩어리를 가리켰다. 꽤 반듯한 사각형태와 내부를 메운 부품들이 보였다. 꾸부정하게 바닥에 놓인 기계는 비행체라기보다는 집에서 쓰는 전자기기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뼈대만 있었던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져 있었다.

 

“뭐, 네. 그러네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것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곧, 아마 이번 달 내로 마무리 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더 수고해라.”

 

“네, 네. 근데…….”

 

“……?”

 

“왜 만드는 거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까지 들여가면서 4년이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입 밖으로 나왔다. 별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이 그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이었는지, 침묵이 돌았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스패너를 돌리는 손만 쳐다보았다.

 

“비밀.”

 

“네?”

 

한참 후에 나온 애매한 대답에 얼떨떨하게 눈만 깜박였다. 그는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비밀이라고. 나중에 말해주지. 내가 내킬 때.”

 

***

 

그의 창고에서 집까지는 그다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불 꺼진 거리, 인적 없는 길바닥, 더 이상 쩔렁대지 않는 텅 빈 수레 같은 것들은 홀로 가는 시간을 계속 들여다보게 하였다. 입으로 숫자를 세고 걸음 수를 가늠하다, 10분전에 시작한 수가 몇 번이고 1로 되돌아가는 건 예사였다.

 

나는 한 손으로 수레를 질질 끌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른쪽에는 방금 받은 지폐와 동전이 있고, 왼쪽에는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구 동전이 있었다. 왼쪽에 손을 넣었다. 크고 무거운 것이 손가락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테두리는 손을 타 지나치게 매끄러웠고 녹슨 표면에서는 비린 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럼에도 구동전에는 그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나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하곤 했다. 구동전은 십년이 넘는 시간을 여행해온 UFO와 같다고. 난폭해진 태양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숨어든 인간과 다르게, 그 아래에서 살아 갈수 있음에도 인간을 따라 내려왔다고. 혼비백산 속에서 살아남은 동전은 그것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였다.

 

나는 동전을 한참 쥐고 걷다가 문득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멀리 보이는 집 쪽으로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미간이 굳었다. 머릿속 어떤 두려움의 스위치가 올라갔다. 바글대는 머릿수에 멈칫했던 것도 잠시, 나는 땀 찬 손바닥으로 수레를 움켜쥐고 내달렸다.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거대한 불빛이 켜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수레의 쩔렁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사방에서 웅웅댔다.

 

“축하드립니다!”

 

무엇을? 이라고 묻기도 전에 마이크가 들이밀어졌다. 커다란 은빛 반사판이 머리를 포위했다.

 

“김윤 씨 본인 맞으신가요?”

 

“네?”

 

“2062년 4월에 저희 프로그램 신청하지 않으셨나요?”

 

입이 벌어졌다. 나는 마이크를 들이민 여자와 카메라를 보았다. 커다란 렌즈가 집어삼킬 듯 집요하게 따라왔다. 여전히 시끄러운 주변의 낯익은 얼굴들과 침묵으로 기다리는 모르는 얼굴들이 뒤엉켰다. 내 발걸음이 뒤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 저는, 저, 아닙니다. 그런 거 신청한 적 없고, 김윤도 아닙니다.”

 

몇 걸음 딛자 발꿈치가 대문턱에 부딪쳤다. 나는 찌릿한 아픔은 접어두고 대문을 잡아당겼다. 거친 몸짓에 자물쇠가 흔들렸다. 황급히 자물쇠를 걸어 잠그자 바깥에서 요란하게 문을 두드려댔다.

 

“네? 잠시 만요. 아니 잠깐만요!”

 

못 들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계속 철컹대며 제 얘기를 들어달라고 울었다. 나는 방문을 닫아 잠그고 귀를 막았다. 막은 손가락을 걸러 들어오는 소리가 기이할 만치 멀어졌다. 나는 구석 모퉁이에 등을 대고 앉았다. 바닥에 닿은 엉덩이에 동전이 배겼다. 주머니에서 동전과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작은 책상 아래에서 유리병을 끌어냈다. 반팔만한 길이의 유리병은 이미 반 넘게 동전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동안 동전을 찾지 못해 손댈 일이 없었던 병은 먼지가 쌓여 뿌옜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쇠 비린내는 친숙한 것이었지만, 내 손에 밴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손을 넣어 지금은 쓸 수 없는 옛 동전들을 움켜쥐었다. 양손에 가득 쥐어도 다 들 수 없어 손가락 틈으로 우수수 빠져나갔다.

 

“윤. 김윤.”

 

익숙한 이름이 당연한 절차처럼 튀어나왔다. 나보다 9살이 많은 이름. 방금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내 것인 것처럼 부른 이름. 나는 그 짧은 이름을 중얼거리며 동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누나가 모은 동전들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밤부터, 누나가 수집하기 시작한 것들이다. 지나가다 발견한 것을 줍는 것은 당연하며, 누가 구 동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돈이라도 주고 사올 만큼 집요하게 그것들을 끌어 모았다.

 

나는 오늘 주운 동전을 유리병 안으로 떨어뜨렸다. 챙강, 소리와 함께 다른 것들과 뒤섞였다. 문 밖은 어느 틈엔지 조용해져 동전 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1. 없어도]

 

“저기, 잠시 만요. 얘기 좀 하고 가요!”

 

새벽녘 대문을 열자마자 나를 붙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마이크를 들이댔던 여자가 대문 앞 계단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일어섰다. 나는 한 걸음 주춤 물러서 그녀를 주시했다. 조용하기에 간줄 알았더니만, 남아서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 말씀드렸지만, 저 김윤 아닙니다.”

 

“알아요. 어제는 실례가 많았어요. 김윤 씨의 일은 저희도 어젯밤이 돼서야 알았어요. 정말 유감이에요. 저는 진행자를 맡고 있는 이지연이라고 해요. 저희는 방송국에서 나왔고, 이런 프로그램 찍는 팀이에요.”

 

지연은 싱긋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LIVE IN LOST TIME’ 명함에 적힌 프로그램은 나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다. 13년 전 잃어버린 가족, 친구를 찾아 추적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벌써 10년 넘게 방송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보와 신청이 끊이지 않는다던가.

 

“저는 신청한 적 없습니다.”

 

“네, 그렇지요. 그렇지만 김윤 씨 동생 분 아니신가요? 김윤 씨가 뭘 찾고 싶어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김윤 씨가 4년 전에 신청한 건 부모님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어요. 누나의 마지막 소원을 대신 들어주는 것도 동생으로서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바닥만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자로 잘 펴져있어야 할 정신이 이리저리 꼬아져 매듭지어진 것 같다. 누나가 살아있었다면 단박에 결정되었을 일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누나가 바라던 일. 누나의 소원.

 

단칸방을 공유하면서도 누나는 어린 내게 자신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 추억이든, 악몽이든, 그로부터 비롯된 감정이든 전부 홀로 가진 채, 내게는 다른 곳을 보라고 가르쳤다. 방구석에 쭈그린 누나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불가해한 표정으로 나를 등졌다. 마치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는 듯 다급히, 그러나 어린 내가 애정을 느낄만큼 다정하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을 찾으면 누나의 얼굴에 새겨져있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라는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감독의 사인과 함께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만 깜박거렸다. 지연은 바로 앉으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의 의미였다.

 

"그럼 시작해볼께요. 김찬 군, LIVE IN LOST TIME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무려 4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찾아온 기회인데요.”

 

“어, 저, 원래 누나가 신청했던 거라 저는 신청이 돼있는 지도 몰랐었는데 좀 얼떨떨해요.”

 

“그러시군요. 누나분인 김윤씨와는 생전에 어떤 사이였나요? 둘만 함께 살아오셨으니 각별하셨겠어요.”

 

"네, 아니, 글쎄요. 생각하시는 것 같은 각별함은 아니었을거예요."

 

우스울 정도로 쉽게 부정의 말이 나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그 말의 진위를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럴듯한 표현으로 들렸다. 같은 집 안에서 같이 대화를 나누지만 본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따라서 여느 남매들처럼 싸우지도 않았다.

 

"누나는 바쁜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저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바빴어요. 일부러 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그래,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분명 하나뿐인 혈육인데 말이예요."

 

"모르겠어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누나를 위해서, 가 아니었나요?"

 

"틀리진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미안함이 더 크고요. 누나가 바빴다면 전 무관심했으니까요. 너무 어렸지만, 이건 변명일뿐이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릴적 어떠했든 지금 찬군은 누나분을 여전히 추억하고 있잖아요."

 

"……."

 

"13년 전, ‘그 날’에 김찬 군은 4살 정도의 어린아이였을 텐데 부모님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요?”

 

“어, 음…….”

 

“기억하기 힘든 게 당연해요. 혹시 집에 부모님을 떠올릴 수 있을만한 물건이 있을까요?”

 

“부모님보다는 누나가 떠오르는 물건이긴 하지만, 누나가 가장 아꼈던 거니까 부모님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여기, 이거…….”

 

나는 책상 밑의 유리병을 꺼냈다. 출렁대는 동전의 무게를 두 손으로 받쳐 책상 위에 올렸다. 어제보다는 덜 했지만 표면은 여전히 먼지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카메라의 눈치를 보며 손으로 먼지를 훑어냈다.

 

“구동전, 그러니까 지하로 내려와서 화폐가 바뀌기 이전의 동전이에요. 지금은 돈으로써 가치는 없지만 누나가 열심히 모았던 거예요. 저도 이따금 주워 와서 보탰고요.”

 

"지금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물건인데 정말 많이 모으셨네요. 누나 분께서는 왜 이걸 모으셨을까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누나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뱉을 수 있는 건 추측 뿐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머리 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병 위에 손을 얹은 채 웅얼거렸다.

 

"…아마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요."

 

"무엇을요?"

 

누나의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옛날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듯, 정지된 순간들이 겹쳐 기억으로 흘렀다. 조그만 손거울을 뚫어져라 보던 누나. 한 번 나가면 며칠씩 집에 없다가도 동전 하나 꼭 쥐고 와서 자랑하던 누나. 그 눈 밑에 늘어진 그림자를 품은 채 이따금 보여줬던 웃음과 그보다 더 짙었던 슬픔.

 

"부모님? 집에는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랬던 것 같아요. 화장품 하나 없는데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봤거든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갈 수록 부모님의 얼굴이 배어나온다고. 그 거울 안에서 부모님을 찾았는지도 모르죠. 동전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요. 이걸 판다는 소문이 들리면 며칠 밤을 걸어서라도 사왔어요. 몇 밤 새고 몇 끼 굶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그게 없이는 하루도 더 못 살 사람처럼."

 

"왜 하필이면 동전이었을까요? 그 정도 열의셨다면 다른 물건들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텐데요."

 

"음, 태양이 동그래서?"

 

"태양이요?"

 

지연이 곧장 되물었다.

 

"네. 누나가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커다란 구동전이 태양과 닮았다고. 태양은 너무 밝아서 어두운 우리 눈으론 볼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정말 못 보게 되었으니 이 동전 하나밖에 안남았다고요."

 

"부모님도, 부모님과 함께했던 지상도 많이 그리워하셨나봐요. 찬군은 위쪽에 대한 이야기 많이 들었겠어요."

 

"아니요. 제가 아는 건 그게 다예요. 태양이 전등 대신 밝아왔다는 거. 전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그리워했어요, 누나는."

 

"그래서, 누나분을 원망하시나요?"

 

"예?"

 

"원망하세요?"

 

"……."

 

아니, 라고 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찬물을 끼얹은 듯 시야가 하얘졌다. 나는, 누나를 원망하나? 답을 구하듯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뿌연 유리 위로 얼굴이 비쳤다. 아무리 뜯어봐도 누나와 닮은 건 눈동자의 색뿐인 얼굴이 좌우로 늘어난 채 비틀려있었다.

 

불현듯, 나는 누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사라질 듯 멀어지는 왜소한 등과, 그 대문 앞에 홀로 선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일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누나의 죽음을.

 

나는 긍정도 부정도 못한 채, 누나를 원망하느냐고 물은 그 입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3. 여기]

 

낯선 카메라 앞에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말들을 뱉은 지 벌써 일주일이었다.

 

첫 촬영이 끝난 뒤, 그들은 일단 제보를 기다려보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재개하자며 떠났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지만, 이따금 전화를 흘깃대는 걸 제외하면 일상에 변화는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철을 모으고, 그에게 전달하고, 이따금 골목을 들여다보고. 거창하게 결심한 것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창고의 남자는 이제 쇠붙이만 좀 더 있으면 될 것 같다고, 거의 막바지라고 말했다.

 

나는 축하한다고, 이제 4년의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그러나 지어진 표정은 오히려 일그러졌다. 눈썹은 살짝 내려앉고 아랫입술은 추켜 올라갔다. 어쩌면 본인조차 모를 기류는 모호했고 나로서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온 것은 오래여도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얼굴에 벤 작은 습관들은 알아도 그 뜻은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모든 이야기는 교각으로 이어져있어 찾지 않아도 마주하고 찾으려 해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알게 될 일이라면, 교각이 이어져있다면, 어느 시점에서든 반드시 그 귀퉁이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며칠이 지난 후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바닥에 앉아 나사나 만지작거리던 중, 서두는 그저 흘리는 이야기처럼 던져졌다.

 

“해. 태양. 들어본 적 있냐.”

 

“글쎄요. 들어는 봤지만 역시 잘 모르죠? 본 적이 없으니까. 아저씨는 봤겠네요. 어땠어요, 그때는.”

 

“글쎄, 역시 나도 잘 모르겠다. 좋았나? 아니면 끔찍했나?”

 

“…….”

 

“아들이 하나 있었어. 그 당시에 딱 너만한 얘였지. 그 얘는 말야, 해를 좋아했어. 열 두어 살쯤인가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해를 보더니 눈 아픈 줄 모르고 계속 봐서 결국 내가 눈을 가려줘야 했어. 그리고 그 뒤로는 줄곧 천문학자가 되겠다며 산만 찾아다녔지. 살짝 베이기만 해도 눈물바다인 얘가 험한 산들을 전전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대견해서 시간이 없어도 꼭 그 입구까지는 태워다주곤 했어.”

 

“…….”

 

“그 날, 그리고 그 날에도, 그 얘는 혼자 산에 있었어. 산꼭대기에,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곳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었겠지. 그게 끔찍하게 타들어가는 걸. 그때, 그 얘가 그 아래에 있을 때, 나는 회사에 있었고 상황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알았지.”

 

스패너를 쥐고 있던 손이 어느 샌가 비어있었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조차 멈춘 가운데 남은 것은 무엇인가에 가로막힌 숨소리뿐이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갔을 때는, 이미 그 꼭대기에 불이 붙어서. 불이, 붙어, 다 새빨간 색으로, 검은 연기로, 그것 밖에.”

 

그는 더듬거리며 문장을 끝내려고 애썼지만, 입 안에서 맴도는 숨만 뱉어냈다.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침을 삼키고, 다시 단어를 뱉으려 입을 열고, 다시 침을 삼키고. 목 아래 그 깊숙한 곳에서 제지당한 듯한 말을 끄집어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들썩이고 두 손바닥을 바닥에 긁어내렸다.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니, 무엇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렇게 한참 억눌린 울음을 울다가 나를 불렀다.

 

“찬아.”

 

“네.”

 

“난 태양을 볼 거야. 이걸 저 위 지상으로 날려서, 그 얘가 말했던 것처럼 여전히 태양이 상냥한지 봐야만 해.”

 

그래야만 해. 삼키듯 속삭이는 말이 귓가에 스쳤다.

 

 

 

[4. 살아가고 있어]

 

묻는 것에 익숙해졌다. 가족이든, 과거든, 아니면 자기 자신이든 상관없이 깊숙이 파묻고 시멘트를 덮었다. 누나를 비롯한 모두는 그렇게 요구받았고, 그래야만 함을 알았다. 그럼에도 파묻은 것을 잊지 못해 시멘트 조각을 매일 손톱으로 긁어내야했다.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반쯤 덮은 가죽지갑이 보였다.

 

창고 속에 박혀있던 이야기를 꺼내들고, 집까지 지친 발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물건이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지연은 이것이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말했다. 지연이 가라앉은 얼굴로 대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을 때 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전개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했다.

 

누나라면, 분명 하늘이 무너진듯 울었을테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이것을 쥐어야할까.

 

나는 한 손에 그것을 쥐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호하게 일그러졌을 표정이 손바닥 안에 가리워졌다.

 

지연은 내게 몇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친구라는, 그 분은 이미 예전에 누나에게 이것을 전해주었었다는 것.

 

그리고 누나는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라고 물으려는 입술을 깨물고 지갑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항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비닐팩을 열고 다 닳은 가죽 표면에 손바닥을 얹었다. 부드럽고, 낡았다. 누나가 말하던 구동전처럼 이것도 아래까지 흘러들어와 내 앞에 와 있었다. 손 전체를 자극하는 시간은 제 몸을 펼쳐 내게 보였다.

 

어릴 적, 그 시간 속의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누나는 내게 자신을 '보지 마'라고 했다. 내가 그 말뜻조차 모를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누나 말을 잘 듣는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침묵으로 서로를 죽여가던 날들이 지나, 어느 밤 누나는 집에 일찍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마주 앉혔다. 누나의 꾹 다물린 입술과 흐트러진 머리칼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고, 나는 따라 울어재꼈다. 무엇이 그리 서러웠는지 눈이 탱탱 부어 감길 때까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말이든, 몸짓이든, 그 밖에 어떤 것이든, 무언가를 제대로 표현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을 알던 누나는 눈물 뿐이었고 나는 의미도 모른 채 같은 답을 꺼냈다.

 

그 밤이 누나가 이 지갑을 받았던 날인지 나는 모른다. 거절의 이유에 내가 있었는지도 확신 할 수 없다. 끝없이 앞으로 도는 테이프를 뒤로 힘껏 돌려보아도 들리는 것은 울음과 보지 말라는 한마디 뿐이다. 그렇지만 이제 그 안에서 누나의 아픔이 보인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신음과 너는 아프지 말라는 속삭임이 희미한 음영으로 옷자락을 붙잡는다.

 

"이제 제가 보관할께요."

 

지갑을 꼭 쥐고 말했다. 손바닥으로 누나의 시간을 끌어안은 듯 땀이 났다.

 

누나는, 아저씨는, 그리고 시멘트 바닥을 부수던 그 무수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커서, 무엇으로도 그 빈자리를 메꿀 수 없어서, 어딘가 부품 하나 빠진 기계처럼 절뚝이며 살아왔다.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그 파편을 주워보아도 그것을 모아붙일 무언가가 결핍된 상태에서는 소용 없다. 평생 파편을 긁어모은 누나는 그것을 내 손에 물려주는 대신 땅 아래 파묻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 손에는 누나의 조각이 쥐어졌다.

 

-보지 마.

 

누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제 제 조각이에요.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두 눈에 지갑과 구동전이 가득찬 유리병이 들어찼다. 누나와 내가 함께 쥐었던 조각들이다. 나는 유리병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어디가세요?"

 

"조각을 끼우러요!"

 

어안이 벙벙한 지연을 두고 집을 뛰쳐나왔다. 나는 동전으로 가득 찬 유리병을 안고 창고를 향해 달렸다. 화분 속 민들레와, 골목을 지나, 오르막길로 달음박질쳤다. 단숨에 도착한 창고에서는 그가 막 나서려하고 있었다. 나는 찰랑대는 유리병을 그의 두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녹여서 만들어주세요. 누나가 새로운 태양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돌아섰다. 동전의 무게가 덜어진 몸은 지칠 줄 몰랐다. 나는 달렸다. 계속, 기억하는 한의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길목을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나의 골목에 멈춰섰다. 어둠이 밀려온 공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에게만은 훤히 보였다.

 

항상 앉던 자리에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스팔트의 거친 감촉이 볼에 닿았다. 마치 바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뉘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있을, 무수한 골목의 사람들이 말해온 과거의 잔재들은 이 순간에도 분명히 존재해있다. 나는 가로막힌 바닥을,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가 없어도, 여기, 살아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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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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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사는 곳에는 벚꽃이 참 예쁘게 피었다. 지명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마 리을이나 니은 같은 울림이 가득한 곳. 수십개의 수식어구를 나열해야만 간신히 한 음절 어울려주는 콧대 높은 곳. 은이 살던 작은 빌라는 골목 구석에서 산소보다 많은 벚꽃향을 품고 있었다.

 

나는 봄이면 약속 없이도 은을 기다렸다. 같은 학교도 같은 나이도 아니었던 은이 역시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특별한 대화도, 서로를 잇는 매개도 없었지만 은은 나의 봄 안에 살고 있었다. 봄, 벚꽃이 여는 그 지독한 애향에서 태어난 하루살이였다.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단 한번도 내게 그 길이 고통이었던 적은 없다. 마음에서 먼 곳만이 멀다. 항상 내 머릿속 한칸에 세들어 살던 은은 한발만 내딛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사이에서 나는 스스로 만든 그 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늘. 그래, 늘 그랬다. 그 애는 내 사랑도, 내 비밀도, 내 무엇도 아닌데 어느새 내 안에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은이와 함께 꺾은 꽃 가지는 봄이 지나도 압화가 되어 내 책 한 구석에 살았다. 가지 하나는 일년 치 설램이었다. 더디게 오는 봄을 기다리며 설래고 조금은 더 컸을 은의 모습에 설랬다.

 

그리고 봄을 기다리던 어느 겨울, 나는 먼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걸어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였고 마음 속 은이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언제쯤인지 알 수도 없게, 그 애는 기약없는 약속처럼 한두어번 떠오르다 시간에 매달려 가라앉았다. 불어터져 솟아오르는 몇 조각만 남아 그런 애도 있었다고, 그런 시간도 있었다고 읇조릴 뿐.

 

나는 은이 없이도 나이를 먹었고, 기다림이 없어도 봄은 왔다. 버팀목이라고 생각했던 은은 정말 그러한 존재였는지를 의심 할 정도로 금세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 한켠의 은이를 잊고도 여전히, 잘 지냈다.

 

해가 가는 대로 따라 흐르는 새, 변치 않을 줄 알았던 것들이 변했다. 바닥에 깔린 보도블럭 하나부터, 어린 애들의 노는 모습이며 옷매무새까지. 기억 속 내가 아는 어느 지점의 것들과는 너무 달라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아직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에 안녕을 고하지도 못했는데,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변화해버렸다.

 

은.
은아.

 

나는 이따금 벚꽃나무를 보고 그 애의 이름을 부른다. 찾으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나는 그 애를 영영 찾지 않을테다. 여전히 네가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린다고 해도, 나는 나 없이 나이를 먹었을 널 볼 자신이 없다.

 

은아. 나는 내가 영원히 아이일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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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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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머리 안에는 잠든 기억이 더 많아

깨어있는 것은 너무 붉거나 너무 푸른 것들 뿐

그 중간은 여전히 꿈속을 헤엄치고 있어

 

눈물을 흘리면 푸른 기억이 새어나와

그건 퍼내도 퍼내고 여전한 것이라

언젠가부터 나는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어

안대를 채우고 커튼을 가린 채

끝도 없는 자장가를 불렀지

 

붉은 기억은 제멋대로 터져나와

누른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한데 모아 프레스기에 넣었어

납작해진 기억을 발로 밟고

그 위에 주먹질을 했지

 

이따금 나는 한밤중 그네에 몸을 맡기고

잠든 것들을 건드려보곤 했어

 

먼저 찾아가 두드려주지 않으면

잠꾸러기들은 영영 깨어나지 않으니까

 

그러다 앞뒤로 비틀거리던 그네가 결국 기절해버리면

온갖 푸르고 붉은 것들이 튀어나와 몸을 흔들었지

나는 막아서지도 부추기지도 않고 그저 휩쓸려 내렸지

 

수천 km나 떨어진 달에 속수무책 끌려가는 파도처럼

멀어졌다 생각했던 것들에 한바탕 덮쳐지고 나면

그제야 나는 깨달아

 

기억을 가지고 산다는 건

과거가 미래를 업고 가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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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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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아진의 방의 작은 먼지 덩어리에 불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장판 위를 끝없이 맴돌거나, 방충망에 찰싹 붙어 노린재의 산란을 지켜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내가 아진이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아진이가 추운 겨울 밤 얇은 내복만 입은 채 밖으로 쫓겨났을 때도, 나의 최선은 바람에 날려 분해되지 않게 몸을 사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출신조차 불분명한 먼지였다. 다른 먼지들이 바람을 타고 굴러들며 나는 중국에서 온 미세먼지라고, 아진엄마의 각질이라고, 이웃집 아저씨 옷의 담뱃재라고 자기소개를 할 적에도 나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오도카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체 언제, 어디서 태어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집에 처음 들어온 것은 찬바람이 매서운 어느 겨울밤이었다. 이리저리 밟히고 채이며 미끄러지다, 우연찮은 바람의 변덕으로 아진의 방에 몸을 들였다. 그 날 처음 본 아진은 책상 밑에 쭈그려 있었다. 아진의 작은 손이 무릎을 꼭 안은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이곳에서 왜 그렇게 동사하기 직전의 노숙자마냥 웅크리고 있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이유를 깨닫게 것은, 그로부터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별안간 현관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집안에 들어섰다.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현관에서부터 코를 마비시켰다. 비틀비틀 슬리퍼 두 짝이 아진의 방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슬리퍼는 쑥 허리를 굽히고 책상 밑에 손을 넣었다. 억센 손길이 책상 밑에 포진한 나를 스쳐 들어갔다. 굳은살이 가득하고 주먹 결을 따라 주름이 잡힌 손이었다. 바닥을 더듬던 손이 다가오자 아진이 더욱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슬리퍼는 다행히 아진을 찾지 못하고 코앞에서 손을 거두었다.

 

책상 앞에 나란히 서있던 슬리퍼가 스윽 사라졌다. 장판과 맞붙어내는 발소리가 거실로 멀어졌다. 나는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책상 밑에서 나올 생각도 안 드는지 망연히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진은 깜짝 놀라 움찔하며 거실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건 철썩, 뺨을 갈기는 소리와, 상스러운 욕설들뿐이었다. 나는 벽을 타고 전해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파동에 몸을 떨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냥 놔둬도 될걸, 왜 아진이 거실로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2]

 

아진의 집은 현관과 작은 방이 맞붙어 있어서 책상 밑에서 머리만 빼면 현관문을 편히 볼 수 있었다. 10시가 되어 현관문에서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힘껏 굴러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쭈그리고 앉아 운동화를 벗는 아진을 볼 수 있었다. 아진의 얼굴은 녹녹히 피부기름이 베어들어 축 늘어져있었다. 등에 빨간 가방을 멘 아진의 등은 너무나도 왜소했다. 어쩔 때는 열댓 살의 어린 아이처럼 약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곰팡이의 말에 따르면 아진은 열다섯이랬다.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작은 아이지만, 그래도 나의 5배는 더 산 아이랬다.

 

아진은 집에 들어오면, 매일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진이 컴퓨터에 열중할 때면, 타닥거리며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진이 무얼 하는 지 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 경쾌한 음들의 조화를 생각하면 뭔가 근사한 일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시침이 12를 넘어서면, 그 싱긋한 톡톡임은 어김없이 중단되었다. 아진은 발이 간신히 닿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책상 밑에 몸을 가뒀다. 그리고 나면 곧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슬리퍼가 들어와 끔찍한 울림으로 집안을 메웠다.

 

-그만 둬! 제발 좀 그만 둬!

 

나는 매일 밤 슬리퍼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모기의 윙윙임만도 못한 내 목소리가 아진 엄마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슬리퍼는 여전히 집을 뒤집어 놓았고, 아진은 똑같은 일상임에도 거실로 뛰쳐나갔다. 아진은 소리치며 화를 내야할 판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황은 어디서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

 

봄이 왔다.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내가 바깥에 꽃이 흐드러진다거나, 봄 향기가 코를 찌른다거나 하는 걸 느낄 방도는 없었지만 나 또한 계절을 짐작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어 봄에는 황사의 미립자들이 까무룩 등장하고, 가을에는 찢어진 낙옆 입자들이 코를 간질이는 식이었다.

 

나는 몸을 스치는 작은 바람들을 감지하다 적당한 흐름을 타고 책상 바깥으로 나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화사한 햇볕이 새들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햇빛의 각도로 봐선 1~2시쯤 된 것 같았다. 아직 아진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나는 겨울 내 한기로 말라붙은 몸을 녹이며 눈꺼풀을 살며시 덮었다.

 

-어이! 넌 아직도 여기 있네.

 

눈을 감고 햇빛을 즐기는 사이,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눈을 뜨고 허공을 치켜보니 먼지 한 뭉치가 붕붕 가볍게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먼지 뭉치를 자세히 보았다. 동글동글한 모양새와 까만 빛깔을 보니, 작년에 잠시 머물렀던 먼지 같았다.

 

-잘 지냈나보네? 때깔이 더 까매진 걸 보니.

 

사뿐히 내려와 내 옆에 안착한 먼지는 나를 툭툭 치며 웃었다. 먼지 덩이에서는 고약한 썩은 내가 풍겼다. 나는 숨을 최대한 옅게 쉬며 말했다.

 

-뭐, 집안에서 딱히 고생할 일이 뭐 있겠어. 그나저나 너는 어디 하수구라도 빠졌던 거냐? 벽장에서 100년을 썩어도 그런 냄새는 안 나겠다.

 

-그러냐? 지난달에 쓰레기차에 붙어있었더니 냄새가 뱄어. 내가 이 악취를 지우려고 한강까지 빠졌다 왔는데, 소용없더라.

 

먼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물때가 선명했다. 그뿐 아니라 몸 곳곳의 녹조 같은 자잘한 흠까지 눈에 박혀들어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나는 그를 방에서 내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더러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결국 그나 나나 같은 먼지의 신분이었으며, 오랜만에 만난 말동무와 그런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먼지 뭉치와 눈을 맞췄다. 그는 상큼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대체 무슨 노래냐? 들어본 것 같은데.

 

-아 이거. 어디더라……. 그래, 이 집에서 처음 들은 노래야. 여기 얘엄마가 자주 흥얼거리던 건데, 몇 년 전부턴가 노래를 안 하더라고. 집안 분위기도 뭔가 꿀꿀해진 것 같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먼지는 눈알을 몇 번 굴리더니 말했다.

 

슬리퍼가 노래를? 그것도 저런 밝은 노래를? 술에 절어 빨개진 슬리퍼=밝게 웃으며 노래하는 엄마라니, 평소 이미지와의 괴리감이 너무 컸다. 나는 이 등식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금 전의 선율을 떠올렸다. 2mm남짓의 작은 뇌를 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선율의 첫 등장지는 명확치 않았다. 아진엄마,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둔탁하고 끔찍한 소음들만이 머리를 메웠다.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으려니, 먼지가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으나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자 그도 무안한지 뚝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 나에게 말했다.

 

-야. 나 간다.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 만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먼지는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비틀비틀 허공에서 균형을 잡으며 창문으로 향하는 그가 보였다. 뒷모습을 보니 힘들게 찾아왔을 먼지를 너무 홀대한 것 같아 조금은 미안했다. 나는 그를 향해 빽 소리를 쳤다.

 

-잘 가라! 오늘 즐거웠어!

 

이미 창턱을 넘어버린 그에게 그 말이 들렸을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책상 밑으로 굴러들었다.

 

 

[4]

 

삑, 삑, 삑, 삐릭. 번호키 눌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뒹굴 거리던 나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신발을 벗고 있었다. 평소보다 한층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진을 주시했다. 신발을 신발장에 올린 아진은 가방을 현관에 던져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 곧 물소리가 쏟아졌다. 아마 손을 씻는 모양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온 아진이 곧장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전원에 붉은 빛이 들어오며 컴퓨터가 웅웅댔다.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자 아진은 의자 위에 걸터앉아 손끝으로 마구 톡톡거렸다. 평소 언제나 조금의 휴식을 취한 후, 여유롭게 컴퓨터를 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오늘 아진은 정말 귀신이라도 들린 듯 불안정해보였다.

 

나는 책상 밑에서 몸을 조금 더 굴려나왔다. 위를 올려보자 어두운 아진의 눈동자가 보였다. 귓가에서 난폭한 클릭음이 소용돌이 쳤다. 그 소리는 평소 아진의 경쾌한 톡톡임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슬리퍼의 상소리와 흡사하게 방 안을 울렸다. 나는 아진의 달라진 소리들이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얌전하고 착하던 아이가 컴퓨터 폐인이라도 된 듯 마우스질을 해대는 것이 당혹스럽기 까지 했다.

 

삐릭. 삐리릭. 아진의 클릭음으로 한층 예민해진 귓가에 번호키가 삐삑거리는 소리가 겹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12시까지는 1시간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결코, 아진 엄마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아진을 돌아보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진은 여전히 컴퓨터에 몰두해 있었다.

 

방문 밑으로 슬리퍼가 보였다. 아진 엄마는 방문을 벌컥 열고, 평소처럼 아진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아진은 그제야 슬리퍼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초조하게 아진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어서 숨어주길. 아니면 잠시라도 이 집을 벗어나주길. 애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아진은 몸을 움츠리며 방을 나서려는 듯 발을 떼었다. 하지만 아진 엄마의 걸음이 아진보다 훨씬 빨랐다. 슬리퍼의 손이 큰 궤도를 그리며 올랐다 떨어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아진의 고개가 왼편으로 힘없이 돌아갔다. 실핏줄이 터져나간 뺨이 바닥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아진 엄마가 한쪽 발에 무게를 지탱하며 삐딱하게 섰다. 아진 바로 뒤를 뒹굴던 내 눈에 슬리퍼의 밑바닥이 보였다. 미끄럼방지를 위해 다닥다닥 붙어있던 고무조각들이 전부 닳아 흐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들어 아진 엄마를 보았다. 그녀의 손이 다시 아진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진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몸을 단단히 오므렸다. 그리고는 핑그르르 슬리퍼 밑으로 굴러들어갔다. 밑창의 그림자에 가리워, 어두운 시야 사이로 또다시 철썩 마찰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아진 엄마의 발이 나를 꾹 밟았다.

 

굴러, 굴러! 미끄러지는 거야! 나는 구령하듯 외치며 몸을 날렸다. 슬리퍼가 온전히 내 몸을 짓누르며 뒤로 밀려났다. 쭉- 스케이트 날처럼 아진 엄마가 미끄러졌다. 나는 다시 재빨리 굴러 슬리퍼 밑창을 벗어났다.

 

옆으로 굴러 나와 숨을 고르자 아진 엄마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넘어지며 아진을 뒤로 밀쳤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그녀가 아진까지 끌고 들어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깨를 밀린 아진이 휘청거리며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마우스를 잘못 짚었는지 난데없이 클릭음이 들렸다. 그리고 뒤따라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귓가로 파고드는 음악을 들었다. 여린 피아노 음으로 시작을 끊은 곡조는 바이올린, 플루트, 오보에들의 화음으로 휘몰아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난해하게 울리던 악기들이 하나로 모여 같은 음을 연주했다. 나는 금세 그 곡조의 선율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음 한음이 정성스레 연결된 멜로디는 분명 낮의 먼지가 흥얼댔던 곡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곡이 아진의 컴퓨터에서 흐르는 걸까? 나는 아진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거나, 눈동자를 굴리는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이 노래가 그렇게도 놀랄만한 것이었던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슬리퍼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또다시 아진을 때리려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슬리퍼는 손을 올리는 대신 입을 열었다.

 

-이거, 너, 왜.

 

너무도 작은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아진 엄마의 목소리가 파르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진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 약한 목소리였다. 모녀관계를 증명하듯 지독히도 아진과 닮은 소리였다. 나는 아진을 올려다보았다. 아진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있었다.

 

아진 엄마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걸음 내딛다 균형을 잃고, 두세 걸음 아진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아래를 향한 아진 엄마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보다도 검은 그녀의 눈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 안에는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감정들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새어나오는 감정들이 튀어나와 모세혈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혀서 고개를 돌렸다. 타들어가는 갈증과 함께 가슴이 욱신거렸다.

 

낡은 슬리퍼가 움직였다. 아진 쪽이 아니라, 그 반대쪽으로. 질질 바닥을 끄는 슬리퍼의 발소리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두 짝의 슬리퍼는 지독히도 씁쓸했다.

 

습기로 가득 찬 눅눅한 밤.

나는 눈을 깜박이며 텅 빈 장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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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앞에 앉아있자면 온 몸이 근질거린다. 먼저 바닥에 닿을랑 말랑한 발의 흔들림이 줄어가기 시작한다. 푹 수그린 고개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린다. 꾸벅, 흐려졌다가 꾸벅,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며 흔들리는 시야가 눈꺼풀에 먹힌다. 차가운 책상 유리에는 이마의 기름기가 쫙 밴다.

  그런데도 아직 손에는 샤프가 들려있다.

 달력에 빼곡히 적힌 오늘의 일정들. 가위표된 글씨는 1/3이나 될까. 달력으로 눈이 돌아가면 어김없이 한숨만 나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90도도 겨우 벌어지는 통나무다리를 붙잡고 낑낑댄다. 양 허벅지의 셀룰라이트들이 터져나가며 찢어지는 아픔이 찾아온다. 이런식으로 몇 번 세포에 모닝콜을 울려주고 나면 잠이라는 이 끔찍한 유혹은 조금 가시곤 한다.

 다시 책상을 붙들고 앉아 쌓여있는 문제집들을 펴든다. 손으로는 문제를 풀고 머리로는 시간을 계산한다. 하나, 둘, 셋, 하루에 네시간만 잔다고 치고 학교 및 학원 시간을 제외하면….6시간이다. 휴식이라고는 쥐뿔도 없이 달렸을 때 6시간.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며 결심한다. -책상 위 타이머가 6시간을 가리키도록 해보자.

 굳게 마음먹고 문제를 풀어나간다. 화학식에서 시작한 기억이 한일강제병합에 이를 때까지 뇌 용량이 다하도록 우겨넣는다. 읽다 지쳐 목이 쉬면 A4지 가득 베껴적고, 손목의 인대가 나갈 지경이 되면 눈에 핏발이 설때까지 묵독한다. 그러다 그조차 괴로울 지경이 되면 인공눈물을 넣고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차를 끓여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다.

 고등학교. 대학교. 취직. 결혼.

 마법의 단어들이다. 누구의 얼굴에서든 여유를 빼앗을 수 있는.

 이것만 있으면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궁핍한 삶이라도 행복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꿈들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홀로  시골길을 달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를 쫓아내고 자리잡은 '미래'라는 막연한 기대가, 언젠가의 현재를 또다시 쫓아내지는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그러면서도 이미 고속도로 한복판을 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금 머리가 아래로 숙여지기 시작한다. 힘 없는 손으로 휘갈기던 숫자들이 영어와 섞여든다.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었다. 그러나 반짝 들었던 정신은 도로 거꾸러졌다. 무거운 눈꺼풀이 소리없는 꾀임을 속삭인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눈을 감으면 어떤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머릿속이 하얘진다. 본능이 눈 뜬 몸은 머리보다 빨랐다. 펜을 든 몸이 책상에 흘러내렸다. 아직 시야에 들어오는 손은 움직이고 있으나, 서서히 움직임을 늦추어간다. 그러다 지익, 세로로 긴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점. 점.

 그리고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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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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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관문을 열자 흰 진눈깨비들이 정면으로 부딪쳐왔다. 겨우내 곰마냥 집구석에 박혀있던 나에게 시위하듯 들이닥치는 바람들이 얇은 잠옷을 타고 혈관 속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움찔움찔 어깨를 떨며 잔뜩 웅크린 채 발을 디뎠다. 슬리퍼만 걸쳐진 발가락이 새파랗게 질렸다. 애써 시린 발을 무시하며 서넛 걸음 앞으로 나아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얼다 만 물방울 탓에 온 바닥이 진흙탕이 되어있었다. 비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쓸어내리고, 눈은 그것을 덮어 순결해지는 데, 눈과 비가 섞인 결합체는 뭣도 되질 않는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 시야를 넓혀 보았다. 생명이 약동하고 푸르름이 돌아와야 할 3월이건만, 아직도 날은 매섭기 짝이 없고 흔한 꽃송이 하나 눈에 띠지 않는다. 이래서야 뭐가 무언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눈이 내려버리면 겨울인줄 알테고 태양이 내리쬐면 여름인줄 알텐데, 어중간하게 내려오는 진눈깨비는 어떤 구실도 하지 못한다.

 

 오른팔의 옷자락을 내려다보자 얼룩덜룩 하얀 가루들이 아무렇게나 뭉쳐진 채 달라붙어있었다. 옹기종기 저들끼리 뭉쳐서, 반상회라도 하는가 들여다보았으나 바람이 몰고 온 냉기가 무색하게 까무룩 녹아버릴 따름이었다.

 

 먼저 내려선 이들이 최후를 맞는 사이에도 계속 떨어지는 진눈깨비들이 얼굴 위에서, 잠옷 위에서, 발 등 위에서 흘러내렸다. 잠잠히 모여들어 온기를 머금은 채 한줄기가 된 것들은 이내 바닥으로 뭉쳐들었다. 굽이굽이 자갈 낀 복도 길을 따라 내려간 그것들의 종착점은 부식되어 괴상할 뿐인 구멍.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하수구에 조르르 모여들고 만다. 녹슨 쇳조각을 붙잡고 애처로이 우는 진눈깨비들.

 

 저 뒤편으로 물러난 겨울이 마지막으로 남겼을 너의 이름은, 아마 미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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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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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가운데 언덕 위에 우뚝 선 사과나무에는 짧은 전설이 전해왔다.

 

아주 먼 옛날, 마을이 생겨난 지 십여 년도 채 안되었을 때 큰 흉년이 닥쳤고 어떤 이가 홀연히 나타나 과실이 마르지 않는 나무를 심고 갔다는 전설. 그리고 그 나무 덕에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고 그 나무가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지금의 사과나무가 되었다는, 흔하고 평범한 탄생비화였다.

 

마을의 노인들은 전설을 입에서 입으로 옮겼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손자로. 그렇게 대대손손 전해 내려왔다. 하지만 명확한 기록이 아닌 담화가 제대로 된 사실만을 전할 리가 만무했다. 전설은 세대를 거칠 때마다 살을 붙여 후에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가 소년의 세대에 이를 때쯤, 사과나무의 전설은 본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변모했다. 흉년은 끔찍한 전쟁으로 바뀌었고 나무를 심은 나그네는 전쟁을 이끈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사과나무는 마을을 살린 보물이 아니라 영웅의 뒤를 잇는, 마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는 소년들을 꿈꾸는 눈으로 나무를 보았다. 마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 되어 사과나무의 과실을 따드는 자신을 상상하며 그들은 경외의 시선으로 나무와 그 옆에 선 ‘영웅’을 추앙했다.

 

소년들은 그들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도 나중에 크면 꼭 영웅이 돼서 언덕 위에 설 거예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들은, ‘그래, 꼭 영웅이 되렴.’ 이라고 말하며 입 꼬리만 올린 채 오묘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했다. 어린 소년들은 그 미소의 뜻을 알지 못했고 그들의 어머니 또한 아이들이 이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들은 맹목적으로 영웅을 따랐으며 어머니들은 그들을 제지하지도, 부추기지도 않은 채 제자리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소년들을 자라갔다.

 

그들이 꼭 열다섯이 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해졌을 쯤, 마을에 큰 흉년이 왔다. 두어 달이 넘도록 물이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온 마을의 논밭이 쩍쩍 갈라져, 땅은 생명을 줘야할 작물들의 생기를 오히려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년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사과나무의 영웅이, 그들을 위해 유일하게 살아있는 나무의 과실을 나누어줄 것이라 믿었다.

 

소년들은 평생을 발치에서만 지켜보던 언덕을 올라 그들의 영웅을 만났다.

 

-마을에 가뭄이 들어 가족들이 배를 굶주리고 있어요, 영웅님. 끼니 할 열매를 좀 나눠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표하는 소년들에게 영웅이 말했다.

 

-어째서? 이건 나의 나무일 뿐, 그대들을 먹여 살릴 구휼제도가 아니야.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웅이 아니던가, 그는? 마을에서 가장 용감하여 마을을 지킬 수호자로 선택된 영광된 이가 아니던가?

 

소년들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안고 언덕을 내려와, 그들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언덕 위의 나무 옆 그는, 영웅이 아니었나요? 어째서 그는 마을을 돕지 않는 건가요?

 

어머니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은 듯 잠든 동생들을 끌어안은 채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들이 어릴 적,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외칠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영웅이란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돈과 힘을 가진 사람이란다. 단지……. 우리를 위한 영웅이 아닐 뿐.

 

소년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물 한 모금 들이키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영웅은 없어.

-영웅은 없어.

-영웅은 없어.

 

소년들은 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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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없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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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본 적 있지 않나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질문. 대부분 답을 찾으려는 노력도 않고 ‘내가 철학자도 아닌데 알바야’나 ‘아무도 모르는 거 나라고 알 턱이 있어’ 정도로 얼버무리고 마는 별것 아닌 그것이요.

 

글쎄요, 당신에게는 사춘기 시절 한두 번 떠올렸을 법한 문장일 뿐이겠지만 저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답니다.

 

저는 하루의 시작과 함께 저를 관찰해요. 나를 내가 아닌 타인으로 보는 거죠. 말이 조금 이상한가요?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원래 자기를 스스로 보지는 못해요. 그들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뿐이지요. 타인이 본 당신, 타인이 말하는 당신, 그리고 타인이 만든 당신. 처음부터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았어요. 저는 단지 그것을 좀 더 세세하게 볼 뿐이죠.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습관이나 특성이 있는 건데 그것도 타인이 만든 거냐고요?

 

음……. 조금 애매한데,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은 매우 더운 여름날이에요. 아우,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죠. 당신은 일과를 마치고 며칠 전 산 자동차를 조심히 몰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침에 나섰을 때와 다름없는 현관에 구두를 대충 벗어 놓았어요. 그리고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고 있던 모자도 책상 위에 던져두었죠.

 

그럼 이 짧은 예문에서 당신이 자의로 한 일은 무엇인가요? ‘전부 다’일수도,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어요. 당신은 스스로 차를 몰고, 운동화를 벗고, 모자를 던져두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처음부터 그것들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죠. 당신은 누군가가 운동화를 벗는 모습을, 모자를 던져놓는 모습을 보고 그 수많은 누군가의 습관을 종합해 따라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물론 사람이라는 게 혼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한자어에서만 봐도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인간은 사람 사이 라잖아요. 주변 사람들의 습관과, 생각과, 가치관 같은 것들이 스스로에게 스며드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일이죠. 태어날 때부터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남은 게 아니라면요.(이 경우에는 사람이라 하기엔 좀 뭣하게 되겠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로 중요한 건 당신이 당신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혹시 어차피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서 이루어진 거라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노력을 해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잠시 만요.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주위를 좀 둘러봐 주시겠어요? 설마 거기 성격, 습관, 재능, 생각까지 전부 똑같은 분계시나요? 아마 없으시겠죠.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로는 세상이 전부 다 닮음 꼴이어야 해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죠. 그런 까닭은 서로 같은 것을 가지면서도 다르게 꾸미고 배열해내기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은 서로 같으면서도 달라요. 같은 일, 같은 공부, 같은 취미를 즐기면서도 전부가 다르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관찰해요. 타인에게서 나를 보며 나의 소소한 습관들과 생각들을 오롯이 배치해둬요. 이 세상에는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의 것을 내 멋대로 조합만 해도 겹칠 확률은 제로에 가깝죠.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잘 배열해서 진짜 나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나를 이룬 조각들이 타인이면 어떤가요. 전부 합친 나는 ‘타인일 수 없는 나’인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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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흔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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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이 나갔다.

 

며칠 전부터 간헐적으로 깜박이던 전등이 빛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젠가 사두었던 손전등을 찾아 책상 위에 세웠다. 침침한 손전등의 불안정한 빛이 눈앞에 안개를 만들었다. 그래도 노트북 자체의 불빛보다는 나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뻑뻑한 눈을 두어 번 비비고는 다시 노트북에 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은 노트북의 작은 키보드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혹여나 터치패드를 건드릴까, 손목도 늘어뜨리지 못한 잔뜩 경직된 자세였다.

 

그녀의 작은 노트북 화면에는 자그마한 활자들이 가득했다. 눈 깜짝할 새 단어들이 추가되고, 추가된 만큼 또 다른 단어들이 사라졌다. 노트북 하단의 시계는 새벽 1시를 알렸고, 부족한 배터리가 깜박거렸다.

 

새벽녘까지 글을 쓰는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원서를 쓰는 고졸들이나, 밀린 레포트를 쓰는 대학생, 혹은 뒤늦게 적성을 찾은 작가 지망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고졸 같이 기대할 수 있는 미래는커녕 레포트를 쓴다한들 제출할 사람도 없거니와 재능을 쫓아 인생을 걸 패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녀는 서른이고, 이름 없는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온 졸업생이며, 받아줄 곳 없는 이력서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노트북 옆에 덩그러니 놓인 달력을 보았다. 거꾸러져 매달린 손전등이 덩그러니 달력을 비췄다. 길게 늘어져, 책상 끄트머리의 어둠과 맞닿은 그림자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일렁거렸다. 그녀는 허리를 쑥 굽혀 눈을 가까이 대었다. 달력의 숫자들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8월 말.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모른 채 하루, 한 달, 일 년이 넘어가버렸다. 언제나 시간은 그녀가 보내주기도 전에 저만치 흘러갔다. 그녀의 나이가 늘어갈수록 그 속력에 가속도를 붙이며 붙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가버렸다. 그녀는 ‘8월’이라 크게 붙박인 굵은 글씨 옆에, 가늘게 쓰인 연도를 보았다. 2014년이라 쓰여 있는 것이 무심하고 매정했다.

 

그녀는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연도를 어루만졌다. 그러다 손톱을 세워 그것들을 한자 한자 긁어내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드득. 언제 마지막으로 깎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손톱이 종이를 후볐다. 2014의 2가 깎여나가고, 0과 1이 동시에 찢겨졌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4을 손톱으로 문대고, 또 문댔다. 작은 4는 그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 나갔으나,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찢어내고, 지워내고, 긁어내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 달력은 없었다. 그녀 앞에 있는 것은 곧 버려질 무수한 종이 조각들 뿐이었다. 그것들은 그녀의 과거가 아니었고, 흔히들 시간을 돌리는 어떤 장치조차 아니었다.

 

문득 밝아진 시야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녹슨 창에 닥지닥지 붙은 먼지 막을 뚫고 새벽빛이 녹아들고 있었다. 이대로 두 시간이면 해가 완전히 떠올라 이곳을 비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쯤 자신은 집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번화가를 걸으며 알바자리를 구하고, 이력서를 냈던 회사들에 면접을 보러 다니며 또 쳇바퀴 하루를 굴리고 있을 테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달력 조각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조각의 모서리를 문질렀다. 뾰족했던 끄트머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뭉개졌다. 손끝에서 부드러워지는 종이를 매만지며 그녀는 생각했다. 며칠 전 거리에서 받은 달력을 어디에 뒀더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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